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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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고뇌하도록 권고하며 성숙하게하는 좋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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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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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 했다. '도'는 '자연'을  본받음에 어긋남이 없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도를 본 받는가. 바로 하늘이다. 하늘은 도를 본 받는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하늘의 뜻이다...라고. 이는 곧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 순리라는 말인 듯 하다.  

인간의 지상 낙원은 무엇인가.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완벽한 인간 만을 위한 조직과 체계를 만들어 안간의 완벽함을 위해 통제를 해야 하는 것인가. 

인간사는 사실 통제되지 않은 연유, 실로 통제할 수 도 없으므로 '통제'는 상상할 수 조차없는 일들이 벌어지게 할 것이다. 그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란 결코 긍정적인 측면들이 아니다. 흔히 사회를 혼란스럽게하고 인간 조직을 파괴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인류를 늘 위협한다. 따라서 인간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고뇌의  결과 중 하나가 바로 멋진 신계계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최상의 인간생활에 적합한 멋진 신세계라는 이데아를 완성했다고 하자.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완벽한 시스템을 갗주어 놓았다. 이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것은 완성된 이데아를 파괴하는 일이므로 제재를 가하게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자율성이다. 완전한 이데아를 총족시키기 위해 인간의 자율성을 반납해야 한다. 완전한 이데아를 위한 자율성의 희생, 그것은 또다른 불완전한 인간간적 구조를 가진 변형된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데아의 신세계는 과연 완전한 인간적 시스템으로 적합한 구조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된다. 

인간적 완전함을 위한 인간적 불완전함의 강제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에 빠지게된다. 이제 딜레마는 더더욱 깊은 수렁속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완전한 이데아 속에서의 고뇌는 끝없는 의문과 회의의 반성이 고개를 쳐든다. 

인간은 언제나 고뇌하는 주체이다. 그것이 에데아를 위한 것이든 사사로운 이기심에서이든 말이다. 이것은 개개인에게 주어진 고유함이며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자께서 마저 자연을 따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멋진 이데아의 세계는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부자연스러움 속에서 과연 인간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인간 존재의 목적이 바로 행복의 추구라고 했다. 이 명제가 진리이든 아니든 간에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갈망한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회의 인간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행복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자율성의 희생이 강제된 이데아속에서 과연 안간은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끊임없는 인간적 고뇌와 사유를 권하는 책이 바로 멋진 신계이다. 아직 가치간을 성숙시키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많은 고뇌라는 명제를 던져준다. 고뇌는 자신의 성상을 뜻한다. 고뇌의 연속속에서 인간은 갈등하고 성장한다. 이러한 촉매제를 던져주는 책이 바로 멋진 신셰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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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사 안광복의 키워드 인문학
안광복 지음 / 한겨레에듀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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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의 저술이라면 살펴 볼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저자들이 있다면 내게는 바로 안광복 선생님이다. 특히 청년들에게 더없이 유익한 글을 써주시는 분이라 생각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가치관 일 것이다. 가치관에 따라 모든 자신의 행위와 판단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각 개인들의 저 깊숙한 곳에 있어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이드가 고개를 들어 한 개인에게 속삭일 때 초자아가 그 이드의 욕망을 억제하는 방어기제로 작용한다고 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드가 승리할 때 그 인간은 가치를 상실하게된다는 것이다. 모든 행위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을 어떻게 욕망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반대로 초자아가 너무 강력하여 이드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방어기제로 작용할 때 그 개인은 너무나도 고독하고 융통성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욕망에 의거한 삶 보다는 낫겠지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상호 소통을 필요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초자아의 승리는 그러한 사회적 소통마저도 단절시킬 수 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이드와 초자아를 중재하는 EGO이다.  

독서는 바로 그 중재자인 EGO의 작용력을 기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빼어난 에고의 역할은 개인들에게 그 어떤 결정과 행동을 할지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그 에고가 바르게 형성되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바르지 않은 에고는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그 어떤 쪽의 손을 들어줄지 적절한 기준과 가치관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독서가 왜 중요한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광복 선생님의 도서들은 비로 이러한 측면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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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부지 大學을 논하다 왕부지 논하다
왕부지 지음, 왕부지사상연구회 옮김 / 소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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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잘 아시다시피 근대까지 거의 필독 항목이었다. 과거 시험이라는 점은 제쳐두고라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학문과 지혜의 근간을 이루는 필독서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치고 대학을 읽지 않는 선조들은 없다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대학의 가치는 그 어느 학문보다 더 소중할 것이다.  

그러나 늘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주자라는 인물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대학과 중용에 대한 주자의 해설은 그 어떤 인물의 주석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했고 조선의 학문은 결국 주자의 학문으로 통했다. 특히 조선 중 후기로 오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더욱 뚜렷해진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는 마치 막시즘의 마르크스와 같은 존재였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는 마치 한 종교 일파의 교주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주자에 죽고 주자에 살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상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문난적의 출현이다. 

사문난적은 주자의 해석과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기타의 모든 이론들은 사문난적이되어 처결해야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된다. 대표적인 예가 퇴계 이황과 경대승의 관계 그리고 송시열과 윤휴의 경우이다.  

송시열은 주자 맹신자라고 해도 과언아 아니었다. 윤휴는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라고 설파했다고 한다. 그러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치부했고 결국 서인들은 윤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단초가 되고만다. 

주자이론의 교조적 현상이 왜 위험한 것이었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생각이 다르다하여 생각이 다른 타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대적 비극은 주자라는 인물에 대한 교조적 맹신에서 오는 편협함이다.  

학문의 절정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언아 아닌 조선의 신비들이 생각이 다른 타자를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 넣어야만 자신들의 강건한 사상적 배경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은 그 사상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들어내는 역사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현대의 정치적 형태로 본다면 일당 독재의 공산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주자의 사상이 지배계급이 하위계급을 통제하고 다스리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볼수 있다. 하여 조선 중 후기로 접어들면서 중국에서는 이미 그 힘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여전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회적 현상이 지속된다. 이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 백성을 통치하고 다스리며 기득권을 더욱 튼튼히 해가는데 결정적인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도 그 학문은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그 힘의 방향을 어떻게 지향하느냐는 사회적 비극이 될수도 있고 복지가 될 수도 있다. 대학을 읽으며 주의할 점은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 생각한다. 

왕부지의 대학이 주자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아쉬움을 많이 남긴다. 그러나 기타의 견해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견해란 사회의 활력이다. 제 아무리 좋은 기르침이라해도 편견에 사로잡힌 사상이라면 그 사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주자의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으나 왕부지는 독자들에게 대학의 또다른 이해를 돕는데 일조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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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우리가 모르는 미국 그리고 세계 - 《뉴욕타임스》신디케이트 기고 최신 칼럼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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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촘스키, 미국을 우방이라고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미국을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한 책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 같다. 다양한 경로로 세계가 움직이는 동력을 이해하는 일은 때로 흥미로운 일이지만 때로는 절망에 가까운 낙담을 주기도한다. 

미국을 읽는다는 것 또한 독자들에게 낙담을 줄 수도 있다. 거대한 힘의 작용이 왠지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담의 가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진실에 가까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세계는 늘 변화하고 그 뒤에는 미국이 있다. 변화의 이유와 변화해야 할 당위성이 독자를 무리없이 납득시킨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대부분 독자들이 그 당위성을 상실한 변화를 목도하기가 더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 변화의 원동력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일은 앞으로 개인 혹은 사화 나아가 국가가 향해야할 미래 지향적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체에 의하여 전달되는 수많은 정보와 넘쳐나는 견해들이 개인의 가치관을 흔들 때 개인은 혼란스러운 가치관을 형성해갈 수 있으며 자신도 의식하기 전에 매체의 사고에 수긍해가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타자의 왜곡된 사고가 개인의 사고를 지배할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타자는 의도된 매체의 목적에 순응하도록 개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되므로 그 개인들의 통찰력을 교란시킬 수 있다. 교란된 개인의 가치관은 자발적인 사고를 불가능한다. 흔히 매체에 의하여 개인은 착시현상을 일으켜 타자의 요구를 순응하게 된다.  

타자에 의하여 왜곡되고 의도된 방향으로 개인의 사고가 흘러가도록 방관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타자의 의도가 개인의 사고가 좌우한다면 직시해야할 일들을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문제는 타자에 의하여 의도된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 얼마나 타자에 의도에 따라 사고하고 판단을 내렸으며 움직여왔는지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자각 현상을 스스로 얻은 개인들 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다. 아직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면 비로소 시작해야 할 일이다. 촘스키는 개인들에게 자각 할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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