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보는 사주 이야기 - 이정호 선생의 사주 이야기
이정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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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명리학을 접한다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생활 주변의 환경이 명리학과 무관하다면 특히나 그러하다. 간명학에 대한 대중들의 견해차이가 크고 미신으로 치부하기 일쑤인 사회적 풍토가 큰 몫을 하기 때문이다. 

명리학의 근원을 찾아가다보면 성리학과 마주하게된다. 성리학에서 발원한 명리는 생활의 발견을 연구하고 참고하는 명리와 순수학문적인 성리학으로 갈라졌고 근간은 같으나 성리학은 성리학은 양지에서 빛을 보았고 명리학은 터부시되는 음지로 숨어버렸다. 

 심지어는 명리학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자신의 노력과 소신으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저해되는 요인으로 터부시되기에 이르른다. 그러나 근원이 같은 두가지 중 명리학은 터부시되고 성리학은 떳떳한 학문이 되었다는 것은 시대의 산물이자 이이러니이다.  

새롭게 보는 사주이야기는 초보자들이 이해하기 매우 쉽도록 했다는 점에서 그 이점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명리에 대해서 상당한 연구와 진척이 있어보이지만 책의 내용에서는 상당부분 명리의 학문적 성과를 애써 깍아내리는 느낌이든다. 

형충파해의 작용을 애써 부인하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더우기 육효의 괘가 주는 의미를 애써 깍아내리고 있다. 이는 두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저자가 육효에 대해서 자신이 없거나 알고는 있지만 독자에게 괘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으려는 의도이거나... 독자로서 느낀 점은 저자의 육효에 관한 풀이가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다는 쪽이다. 육효의 정확성을 무시하는 저자의 태도로 보아 추측할 뿐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형충파해의 작용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의도적으로 그 영향력을 애써 감추려한다는 느낌이 짖다. 그러나 연구가 깊이를 더해갈 수록 형충파해의 작용이 그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를 경험한 분들이라면 저자와 견해를 분명히 달리할 것이다. 

좋은 점이라면 오행이 명리에서 작용하는 이치를 매우 쉽게 서술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초보입문자들에게 장점과 단점을 모두 던져주는 책이라하겠다. 그러므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지혜를 발휘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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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쟁 5 - 시파와 벽파 - 사도세자의 눈물
신봉승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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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노론을 등에 업고 임금이 된 영조에게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것이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모친이 궁녀의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신분인 무수리 출신으로 당시 비천한 신분이었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종의 독살 사건이었다. 

이 두 가지 아킬레스건은 영조가 죽는 그날까지 영조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사실상 택군되어 경종이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제로 책봉되도록 경종에게 압박을 가한 것이 노론이었던 것이다. 경종은 노론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역모로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경종 곁에는 이렇다할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소수의 남인들이 이를 경계했으나 사실상 남인들은 권력의 밖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결국 경종은 의문을 남긴채 죽음을 맞이한다. 연잉군이 임금이 되다. 영조는 임금도 갈아치울 수 있는 노론의 힘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고심끝에 탕평책을 들고 나선 것이다. 비천한 무수리 출신의 자신을 임금의 자리에 앉힌 노론과 경종 독살설은 영조로하여금 군주로서의 힘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중 사도세자가 태어났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극진히 사랑했다. 자신의 뒤를 이을 군주감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사도세자는 명석했다. 그러나 세자가 자라면서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이는 영조와 노론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아킬레스건은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던 영조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사도세자는 경종의 독살설을 믿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노론의 택군에 의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임금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그리하여 가증스럽고 위험한 노론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소론쪽으로 기울게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한편 영조는 소론 편을 들며 자신의 약점을 꿰뚫고있는 사도세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노론에서도 사도세자를 죽이고 싶어했다. 결국 영조와 노론에 의하여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사망하게 이르른다. 이른바 임오화변이 그것이다. 

같은 노론 중에서도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쪽이 벽파, 임오화변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쪽이 시파, 이렇게 또 양분된다. 사도세자의 빈은 골수까지 노론  출신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사위를 죽이는데 침묵으로 동조한다.  흔히 사도세자의 정신 병력이 도가 지나쳐 세자가 죽음에 이르를 수 밖에 없었다는 혜경궁의 주장은 대부분 날조된 것이다. 한중록은 자신의 가문인 풍산홍씨의 멸문을 막기위한 일종의 체스쳐였다.  

장헌세자가 자신의 정신병 때문에 죽었다면 정조는 왜 임오의리를 내세워 관련자들을 숙청했을까. 이는 아버지 장헌세자의 죽음을 억울하며 모략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사위를 죽은 홍인한은 정조에게는 외할아버지이다. 그런 외할아버지및 관련 홍씨 집안을 거의 씨가 마르도록 처단한 것이 정조의 조치였다. 임오의리는 바로 시파의 힘이 커졌다는 뜻이기도하다. 

노론 벽파는 정조를 죽이기위해 살수를 보내기도했다. 세상에나 임금을 죽이기 위해 신하들의 무리가 살수를 보냈다는 이야기는 동서고금 그 어느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아니던가. 그만큼 노론의 힘이 강성했고 임금의 힘이 약했던 군약신강의 대표적인 나라가 조선이었던 것이다. 드라마에 등장했던 전흥문이라는 힘잘쓰는 인물은 노론의 홍계희가 그의 아들들을 포함시켜 계획한 정조 암살단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정조는 고독했다. 주변에는 온통 노론세력 뿐, 자신을 위해 일할 인물들이 부족했다. 그러나 채제공과 같은 명 재상이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정조는 노론 벽파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으며 정치를 펴 나갔다. 조선에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 개혁의 단행을 앞두고 정조는 또다시 의문사한다. 

그리하여 정조가 일생을 통해 일궈놓은 조선의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꺼져버렸다. 노론의 골수 대표 정순왕후는 정조의 모든 개혁을 뒤집어 놓는다. 영조 최대의 실수가 바로 정순왕후를 비로 들인 것이거나 골수 노론인 정순왕후를 정조가 처단하지 않은 것이거나.... 

진정 백성을 위해 변화를 단행했던 조선의 임금 중에는 대왕 세종과 영정조가 고작이다. 그러한 영정조의 개혁은 조선의 마지막 불씨나 다름없는 성과였지만 그 모든 불씨들 노론들은 짖밟아 꺼버렸다.  

시파와 벽파는 고독했던 장헌세자에 대한 의견의 차지가 가져온 결과였다. 결국 정권을 잡아 권력을 장악하려는 노론들의 입장 차이었던 것이다. 백성을 위해 군신이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것이 조선이었고 백성들만 새우등 터지던 시대가 조선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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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쟁 3 - 남인과 북인 - 아버지와 아들
신봉승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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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희대의 반항아 정여립이 반란을 주도했다는 보고가 접수됐다. 이는 물론 치밀하게 조작된 정치적 음모였다. 서인이 동인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는 음모였던 것이다. 서인 정철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역모와 관련되었다고 여겨지는 조선의 백성 1000여명을 죽음으로 다스린다. 

정철의 가사는 교과서에서도 배우는 문학작품을 남긴 장본인이지만 그 성정은 불과 같은 인물이었다. 기축옥사를 담당하면서 너무나도 죄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동인들은 그러한 정철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게된다. 이른바 세자 건저문제로 정철을 앞세워 그를 함정으로 몰아 넣은 것이다.  

이상해는 동인었다. 그런 이산해는 정철에게 접근하여 정철의 경계심을 흔들어 놓은다음 선조에게 세자 건저 문제를 올리자는 의견을 내놓고는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는다. 정철이 누구던가. 한 성질하는 인물인 그는 이산해의 함정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저문제를 선조에게 고하게된다. 

광해군을 곱지않게 생각하던 선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정철을 현장에서 파직시킨다. 때를 놓칠세라 동인들은 정철을 죽음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서인은 정철을 정법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쪽이 이산해를 중심으로 뭉친 일당과 죽일 필요까지야 있느냐며 온건한 노선을 택한 서애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일파인로 갈라진다.  이렇게 갈라진 서인들의 분열세포가 바로 인산해를 중심으로 한 북인이고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인 것이다. 

때는 선조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왜는 조선을 넘보기위해 철저한 준비를 해오고 있었으나 조선은 정치적인 밥그릇 싸움을 하느라고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당쟁은 조선을 전쟁이라는 비극의 상황으로 몰아가게 된 것이다. 

성호 이익이 언급하고 있듯이 조선의 당쟁은 밥그릇 싸움이었다. 자신들의 밥그릇만 채운다면 상대방을 죽이는 짓도 서슴치 않았던 조선의 위정자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옥사이며 환국인 것이다. 

서로 권력과 밥그릇 싸움을 하며 새우등 터지는 것은 백성이다.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나라에 세금을 내며 잘좀 돌봐달라는 입장에 있는 쪽이 백성아니던가. 그러나 백성들의 그런 바램은 중요치 않았다.  국왕도 위정자들도 그 어느 누구도 마음쓰지 않았던 것이 조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율곡이이가 있고 유성룡이 있었으며 남명 김육과 남명 조식 그리고 윤휴등이 있었다. 온 마음을 다해 백성을 위해 살다간 이들이 있으니 그나마 조선 백성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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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쟁 4 - 노론과 소론 - 예학의 분쟁
신봉승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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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은 같은 서인이라는 모체에서 분열한 세포이다. 노소론의 분열 시기는 숙종대의 일로 부지불식간에 사문 난적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동서인의 쟁투가 주자학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진 무리들간의 쟁투 였다면 노소론의 분열은 주자학을 신봉하던 노장 세력과 주자학에 도전장을 내민 소장 세력간의 쟁투였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다. 

결정적인 사건은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하게 대처하자는 쪽이 노론이요 어느 정도 온정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느냐의 입장이 소론인 것이다. 숙종대의 시대는 당쟁으로 인하여 국정이 매우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권력을 중심으로 선회하는 당파간의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고 상대방에 대한 살육을  서슴없이 자행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예송에 관한 치열한 투쟁은 서인과 남인들이 서로를 살륙하는 정치적 양상을 띈다. 서인은 2차 예송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들을 대상으로 복수극을 벌여 결국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을 죽임으로서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를 경신환국이라 한다. 서인 김석주는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꾀했다고 사주하여 고변케함으로서 일대의 파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참에 남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남인의 씨를 말리자는 쪽이 노론이요 죄없는 사람까지 죽여서야 되겠느냐는 쪽이 바로 소론인 것이다.  

이 때 억울하게도 윤휴마저 사사되는 불상사가 발생하게된다. 윤휴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게 사문 난적으로 찍혀 결국 죽음에 이르르게되는데 윤휴는 끊임없이 북벌을 주장하며 군사력을 양성하고 백성들의 안전된 생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의 상소를 끊임없이 올려 송시열의 마음을 매우 불쾌하게 했다. 더구나 송시열과 노론들이 고집하는 주자의 편집광적인 태도를 비난했다. 이러한 태도의 윤휴가 자신에게 사상적인 도전을 하는 것으로 간주한 송시열은 결국 윤휴를 이참에 죽여버리는 것이다.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갈등은 경종의 독살 의혹과 더불어 더욱 악화되는데 영조를 등업고 정국을 장악한 노론이 소론을 지지하는 사도세자를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른다. 정조는 그러한 노론과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한 장본인들을 숙청하게된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자 노론이었던 정순왕후는 영정조가 그토록 애써 일궈낸 조선의 바른정치 형태를 되돌려 조선의 미래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히게된다. 

후기 조선은 노소론의 권력 다툼으로 점철된 피의 역사이다. 오로지 권력과 이익을 위해 타자를 용서하지 않고 죽음으로 처단하는 조선을 비극으로 몰아갔다. 이것이 바로 노소론의 정체인 것이다.  

조선의 역사는 그렇다 치자. 문제는 노론의 후예들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치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노론의 후예들은 일제 강점기에 대대적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일제의 역사관을 가져왔다. 일제사관이 중고등부의 국사책에 기록되고 그 일제사관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주입되어 왔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노소론은 조선의 역사와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다. 현재까지 노론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암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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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쟁 2 - 동인과 서인 - 대비의 수렴청정
신봉승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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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는 당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쟁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당쟁이 조선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의미이다. 조선 초기의 조선은 당쟁과 거리감이 있었지만 중기로 오면서 당쟁은 조선의 산하를 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현대의 정치제도는 다당제를 인정하는 정치제도의 성격을 띈다. 일당 독재의 위험성을 견제하며 다양한 여론을 수렴하자는 민주주의적 성격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인과 서인인 어쩌면 양당제와 흡사한 모양새를 갖는다. 일당 독재보다 더 진일보한 형태의 정치 체제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당 체제의 형태를 보인다는 점에서 그 유익함은 종결되고 만다. 조선의 동서인은 그 출발점이 불순했다. 전랑을 추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구세력과 신진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시작된 동서인은 한마디로 정권의 장악을 위한 도구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동서인은 다양한 여론의 수렴과 일당 독재를 견제한다는 양당제의 순기능적 장치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무리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선조대에 일본의 동태를 파악해오라는 명을 받았던 통신사로 다녀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경우이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황윤길은 왜의 침입을 강력히 경고한 반면 김성일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김성일이 왜에 갔을 때 왜가 조선을 침입할 것이라는 정도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윤길과 당파가 다르다하여 반대를 위한 반대를 주장했던 것이다. 김성일의 한 개인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7년간의 참혹하고도 비극적인 왜란에 대비하지 못하게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 사람의 사사로운 당파적 주장이 그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사실 동인의 출발점을 이루는 퇴계 이황이나 서인의 태두로 지목되는 이이 율곡은 동서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들이다. 그 제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신구세력으로 분열하여 다툰 탓이다. 실제로 율곡 이이는 동인들로부터 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장적 본인은 그럴 마음도 생각도 없었으며 일생을 두고 동서인들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이렇게 시작된 당파는 조선의 중기로 넘어오면서 조선의 정부를 서로를 죽이는 살육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 차례의 살육은 환국이라는 형태를 빌어 복수를 낳고 그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았다.  

그렇게 기득권이 권력 다툼을 하는 동안 조선의 백성을은 더더욱 비침한 생활고에 시달리고만다. 정부가 안정되지 못하니 지방의 서리들의 백성 수탈은 극에 이르게된다. 백성을 위한 정부는 부재했고 정부는 자신들의 이익권 권력을 위해 피터지는 싸움에만 열중했다. 당파를 넘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던 윤휴는 사문난적으로 몰리고 결국에는 사사된다.  

진정한 충신에게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죽음을 내리는 것이 조선의 정부였다. 이것이 조선의 당파가 가져온 폐악이었다. 관료들이 당파에 목매고 매달리는 동안 백성의 고통은 더욱 커져갔다. 임진 왜란을 거치고도 당파의 싸움을 지속되었다. 그러다 대비도 하지 못하고 호란을 겪게되니 조선의 백성과 강하는 초토화되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비극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당파의 왜곡된 형태가 조선에 자리잡은 결과는 비극 그 자체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당파의 순기능적 측면을 강조하려는 사학자들이 있다. 분명 당파에 목숨건 선조의 후손들일 것이다. 당파가 축을 이룬 조선의 정부는 바른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백성들만이 고통스러웠을 뿐이다. 

조선의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편히 잠자리에 누워본 서절이 과연 존재했던가? 절대로 그런 적은 없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그 불명예의 탓을 돌려도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양당제의 순가능보다 역기능에 더욱 열을 올렸던 조선 정부는 양당제의 순기능을 어떻게 이끌어아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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