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도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조선의 유학자였다. 성리학을 통해 배운 학문이 곧 여유당의 학문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을 지배 해온 성리학자적 면모들과는 또 다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관과 할 수 없는 분이 여유당이기도 하다. 이는 여유당의 생애가 주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흔히 경세치용 학파를 유형원, 이익과 더불어 정약용을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학자이면서도 그들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이 여유당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대중을 지배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고, 국시로서 매우 성공적인 역사를 가진 학문이라 하겠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계층을 뚜렷하게 구분하고자 했고 그에 수반하는 노비라는 특수한 계층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의 서양에서도 노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 국가의 노비가 대중의 40%에 육박하는 비율의 나라는 거의 없었다. 특히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노비인구가 자치하는 비율은 50%를 웃도는 지경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농업의 나라 조선, 그리고 노비
국가의 재정을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다시피 한 조선은 노비라는 특수한 계층을 필연적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와 고려가 회회인(아라비아인)들과 무역을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간단하게 조선의 노비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노비는 남종을 뜻하는 노와 여종을 뜻하는 비를 일컫는 말이다. 노비의 형태도 무착 다양했는데 '관노비'와 '사노비'가 있었다. 관노비는 대궐이나 관아에서 일하는 노비이고, 사노비는 양반집에서 일하는 노비을 일컫는다. 사노비는 ‘솔거노비'라 부르는 신역 노비와 의거노비, 납공노비가 있었다. 신역노비는 상전의 집에서 거주하며 노동을 제공하는 노비로 청지기, 상노, 안잠자기, 상지기, 식모, 찬모등을 뜻한다. 의거노비는 상전과 따로 살면서 토지를 경작해주는 노비이고, 납공노비는 상전의 집에서 살거나 일을 해주지는 않지만 매년 정해진 액수의 물품을 바치는 노비의 형태이다.
1398년 태조 때 노비의 가격은 무명 150필 정도였고, 말(馬)로 교환하자면 노비 셋을 주어야 말 한 마리를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노비의 가격이 폭락하여 노비 10명을 주어야 말 한 마리와 바꾸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군사가 두 달의 월급을 저축하면 조선의 노비 1명을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러하던 노비의 가격이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던 조선 말기에는 노비 5명과 미모의 여성 노비 한사람을 주면 소 한 마리와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사람'이라하고 말은 짐승이기에 '마리, 혹은 필'라고 하는 것인데.... 시대가 그랬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노비가 18세기에는 전 인구의 40%에 육박했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노비의 비율이 50%에 달했다고도 주장하기도 라는데, 조선 실록에 서얼 차별의 강력한 주장에 앞장선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 퇴계 이황의 가문이 가지고 있던 노예의 수는 367명이었고 전답을 합치면 요즘의 기준으로 34만 평이었다. 노비와 전답의 규모를 생각하면 대단한 부호였음을 알 수 있는 수치라 하겠다. 요즘으로 치면 트랙터가 여러대 필요할만한 규모의 부농가였던 셈이다. '안빈'이라는 말이 왜 허공의 메아리로 들리는 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사농공상이라는 뚜렷한 계층구조와 엄청난 인구비율의 노비는 주로 농산물에 의해 국가의 재정을 조달했던 조선의 경제시스템에서는 불가피한 구조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지배계층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무역과 상공업을 장려할 수 없었던 성리학의 이념은 조선을 주로 토지에서 산출되는 잉여가치를 국가 재정에 편입시킬 수밖에 없는 철저한 농업 국가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성리학은 상공업을 군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가르쳤고 이를 천시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오죽했으면 엽전을 ‘좌전’이라고 했을까... ‘좌전’이란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취급하는 돈' 이라는 뜻으로 왼손은 우리 조선에서 홀대를 받았던 손이다.
흔히 선비라 일컫는 조선의 지배세력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해 대신 노동을 해줄 인구(노비와 소작농)가 필요했고 국가의 재정을 조달 하는데 다수의 대중들을 지배하여 동원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여 조선은 엄격한 신분구조를 필요로 했고, 그렇게 조선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뚜렷하게 구별된 사회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구조의 국가에서 대중에 대한 사랑(애민)을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중에게 복지정책을 펼쳐야 대중들의 삶이 더 편안하겠지만, 조선의 계급구조와 경제구조는 조선에 그럴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를 살아온 대중들의 애환과 고달픔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제도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유당은 이러한 조선 성리학의 이념 하에서 여타의 기득권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성리학의 이단아'라 할 수 있다. 그런 여유당은 목민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라는 책을 저술하게 된다. 성리학의 이단아라 할 만한 여유당에게 목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목민에 관하여...
우리는 여유당의 저서인 ‘목민심서’라는 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이 이 목민심서를 직접 읽지는 않지만 그 존재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써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 48권 16책. 필사본. 부임(赴任)·율기(律己 : 자기 자신을 다스림)·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진황(賑荒)·해관(解官 : 관원을 면직함)의 12편으로 나누었다. 각 편은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편제되어 있다. 부패의 극에 달한 조선 후기 지방의 사회 상태와 정치의 실제를 민생 문제 및 수령의 본무(本務)와 결부시켜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 명저이다.
목민(牧民)라는 말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가...
제나라의 학술과 사상의 보고라도 일컫는 管子(관자)라는 책에는 牧民篇(목민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牧民篇에는 “곳간이 가득 차 있어야 백성들이 예절을 안다(倉廩實則知禮節 창름실즉지예절).”이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관자 역시 목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자는 공자보다 140년 먼저 세상에 태어난 인물로 제나라를 최초의 패국으로 이끈 명재상이었으며 그 이름이 드높다. 사실상 공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관자는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우상이었다고 한다. 목민이라는 말은 그렇게 관자에서 출발하여 조선이 개국하면서 목민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한다. 조선은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을 목민관이라 했고 최초 임기를 30개월로 정한다는 규정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이 모자라 고려시대에도 목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여부는 찾아낼 수가 없었음) 이렇게 하여 목민(牧民)이라는 말은 여유당의 저술한 책의 이름에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여유당의 목민(牧民)은 관중의 그것과 같지 않다...
여유당과 관중이 민(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특히 民에 대한 복지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더더욱 일치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민의 경제력을 매우 중시했다는 점은 2500년 전의 관중이나 200여 년 전의 여유당이나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는 실학파인 여유당을 ‘경세치용학파’라고 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중이 민을 중시하고 경제 복지정책을 중요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여유당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관중 역시 시대적 상황을 피해 갈 수 없는 사상가였다. 춘추전국 시대라는 불확실성의 정세는 대륙의 모든 민을 물론이고 지배세력들을 늘 불안에 떨게 했다. 전쟁은 일상이 되었고 약자는 강자에게 철저하게 빼앗기고 도륙 당하던 시대였다. 오직 승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지적 힘을 중심으로 산재하던 군주들의 바람은 오직 하나, 바로 패자가 되겠다는 염원 뿐이 었다. 공자가 그토록 신봉하던 테제, ‘극기복례’가 전혀 먹혀들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강력한 힘을 필요로 했던 군주들에게 공자의 복례는 패국을 이루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하여 공자는 14년이라는 세월을 떠돌았지만 아깝게 세월만 죽인 채 허무하게도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관중이 재상으로 있던 제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관중은 여타의 군주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민(民)을 패국으로 가는 키워드라고 생각했다. 즉, 경제력과 군사력의 사실상 근거가 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연한 생각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민을 패국의 원동력으로 바라본 것은 매우 획기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하여 관중은 민의 힘을 이용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관중은 민을 조직적으로 움직임으로서 경제적, 군사적으로 그 힘을 극대화하여 패국을 이루는데 활용하기 위해 민이 필요로하는 것(need)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중의 삶이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줌으로서 자발적인 복종과 충성을 얻어내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민에게 복지정책을 펼쳐야 민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개념이 바로 관중의 목민(牧民)이었다.
이렇게 패국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민을 활용하는 방법론적 정책으로서의 목민의 개념이 관중의 것이라면 여유당의 그것은 백성을 이용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여유당은 근본적으로 애민의 정신에 입각한 순수한 사유의 사상가였던 것이다. 여유당은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백성들의 처절한 아픔을 목도했다. 그들의 애환을 몸소 체험했으며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민과 고락을 함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던 인물이었다. 암행어사로 나갔다고 다 여유당과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유당은 애초에 가엾은 한 사람의 민을 연민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여유당의 경세치용은 백성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던 안타까운 마음이 배어있었다. 여유당의 저술 ‘경세유표’는 당시 빈부 격차의 심화 정도가 심각하다는 점, 백성들의 삶이 너무나 굶주리고 고단하다는 점, 관료들의 학정이 극에 달했다는 점, 제도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토지의 개혁은 물론 사회, 정치, 경제의 전반적인 문제들 개혁하자고 주장했다. 이를 저술로 남겼는데 관중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유를 하고 있었음을 방증해준다 하겠다.
물론 두 인물의 시대적 상황이 같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차이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역사는 그야말로 역사이다. 시대적 정치적 상황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역사이면서도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또한 역사인 것이다. 더구나 이토록 순수한 의미의 민을 위한 사유는 조선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조선 중기 대미수공법을 창안했던 율곡 이이와 목숨을 걸고 대동법을 강력하게 펼친 잠곡 김육, 그리고 골수 유학에서 벗어나 진정한 위민을 주장했던 백호 윤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여유당은 성호 이익과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하겠다. 결국 조선의 진정한 위민 정신은 후기에 이르러서야 입으로만이 아닌 실질적 주장을 했던 것이다. 이는 시기적으로 조선이 성리학을 국시로 선포하며 개국한 후 400년 이상 흐른 뒤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단아, 공산당 여유당
이렇게 쓰고 보니 공산당과 여유당이 무슨 당처럼 들리지만 영어의 당(party)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유당의 생각을 살펴보면 그는 분명 공산주의자인 셈이다. 여유당은 특히 토지제도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백성을 굶주리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전제와 정전제라는 새로운 방식의 토지제도를 생각해냈다. 여전제는 한 마을에서 공동으로 농사를 지어 똑같이 배분하는 방식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판단하여 보완 장치로 정전제를 통하여 땅을 똑같이 정확하게 나누어 경작하고 공동 관리하는 부분을 두어 세금으로 내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당시의 성리학적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의 주장이었다. 지배 체제를 뒤흔드는, 사회 전반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여전제는 특히 공동농장의 형태가 아니던가... 여전제에 대한 생각은 이미 여유당께서 공산당에서나 가능한 제도를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쩌면 세계 최초의 공산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과연 이러한 여유당의 위험한 발상과 주장을 집권 세력들은 가만히 두고만 볼 것인가??
이상적인 사회로 노자는 소국과민을 주장했고, 그 이름도 아름다운 존 스튜어트 밀과 성스러운 토머스 모어도 여유당과 같은 이단아였다. 또한 플라톤은 현대에 고전으로 일컫는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공동생활의 견해를 피력했지만 이는 단지 국가를 통치하는 철인들에 제한된 생각이었으므로 보편적인 사회적 제도로 적용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현대적 개념으로 볼 때, 여유당은 독창적인 공산의 개념을 제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스승인 벤담의 공리주의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 노력했고 그에 걸맞는 성과를 내 놓았다. 밀은 단순한 행복에 집착했던 스승 벤담의 사유마저 움직였다. 말년에 벤담은 밀의 민주주의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밀은 인간다운 품위를 가진 질적 행복을 사유했다. 밀을 ‘질적 공리주의자’라고 칭하는 이유이다. 밀은 또한 당시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남녀평등을 강력하게 부르짖었고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제안을 하여 영국을 경악케 했다. 또한 노동자 계층의 권리와 평등을 당당하게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저서 ‘자유론’이 민주주의의 입문서라고 평가받는 이유이다. 그의 주장은 영국의 지배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발언이었다. '밀' 역시 여유당처럼 이단아였던 것이다.
토머스 모어
그야말로 새하얀 눈보다 더 순결한 인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토머스 모어'이다. 에라스무스는 그를 지상 최고의 인문주의자라 했다. 시대는 1500년, 당시 플랑드르의 모직공업이 잘 되어가자 양모의 가격이 폭등했다. 영국의 귀족들은 밀밭을 초지로 바꾸어 양 떼를 키우기 시작했다. 대대로 그 땅에서 생계를 유지해오던 농민들을 몰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말해 영주에게 노동과 생산물을 바치며 살아오던 공동체를 양모를 생산하기 위하여 추방했던 것이다. 흔히 ‘엔클로저 운동’이라는 바로 그것이다.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부랑자기 되었다. 헨리 8세의 통치하에 사형당한 부랑자는 7만 2000명이라고 한다. 그 이름도 유명한 엘리자베스는 해마다 300여명의 절도범을 교수대위에 올렸다. 토머스 모어는 이렇게 외쳤다, “절도범을 죽일 것이 아니라 절도범을 양산하는 원인 제공자들을 사형에 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어는 절도범이 영국의 경제 시스템의 결과물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게 하는 요인이 따로 있다. 바로 ‘양’이다. 예전에는 얌전하고 유순하며 조금씩 먹던 양들이 이제는 사람까지 먹어치우고 있다.” 모어는 농민들을 추방하는 것은 바로 영국의 귀족임을 지적했다. 교회도 왕도 모두 공범이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문제로 떠넘기지 않고 사회적 문제에서 찾으려 했다. 결국 모어는 이단아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아...아름답고 지극히 아름다운 토머스 모어여.... 여유당은 토지, 경제, 시회 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모어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플라톤의 철인
플라톤은 사회의 구성원을 타고난 능력에 따라 철저하게 분류했다. 플라톤은 각자 직분에 맞는 일에 충실히 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자의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夫夫子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인간이 수신을 통하여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반면 플라톤은 인간의 자질이 태어나면서 이미 결정되므로 그들의 삶도 그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점에서 차이는 있다. 한마디로 선천적 신분의 분류를 철저하게 했던 사람이다. 또한 그는 국가를 철인이 통치해야 하는데 그 철인들은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되고 가족을 가져서도 안된다. 다만 우생학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많이 양산하기 위해서 심지어 부인들을 철인들이 서로 공유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더욱 충격적인 플라톤의 생각은 장애를 가진 사람과 허약한 사람은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게조차 했다는 사실이다. 정말 이성의 이데아야 말로 자비란 없는 것이던가... 화이트 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플라톤이 서구의 사상에 끼친 영향력을 감지할만한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여유당은 사실상 조선을 지배해온 유학자들에게는 지극히 위험한 인물이자 사상범이었다. 여유당에게는 대 선배인 백호 윤휴가 사사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득권의 이익에 반하는 주장은 모두 사문난적이었고 처단의 대상이었다. 윤휴 역시 기득권에 감히 도전장을 내민 반항아였던 것이다. 윤휴는 민을 보살피는 다양한 제도의 개혁을 죽는 그 순간까지, 사약을 마시는 그 순간까지 부르짖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머스 모어처럼 말이다.
이렇게 조선의 언론은 확실하게 통제되고 있었는데 마치 현대의 강력한 검열제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걸려들면 목숨을 앗아버리던 조선에서 여유당은 자신의 저술 ‘논어고금주’를 통하여 주희의 집주와 달리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강력한 태클을 걸었다. ‘중용강의보’라는 저술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성격을 지닌 저술이라고 하는데 번역이 아직 되지 않은 이유는 짐작이 간다(하지 않는 것이다). 주희보다 훨씬 더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으며 교주 주희와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장구에 대해서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당시 집권세력이던 노론 측에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여유당은 그렇게 사유의 방식에 있어서나 애민의 방식에 있어서 철저한 유학의 이단아 였던 셈이다.
그런 만큼 그의 고초는 컸다. 목숨이 위태로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토머스 모어의 목숨을 기어이 뻬앗았아야 했던 영국의 귀족들 처럼, 조선에서도 여유당의 강력한 스폰서나 다름없던 정조가 급서하자 그의 형제와 동료들은 가차없이 제거되었다. 여유당을 비롯한 그 일당들은 조선의 귀족들에게는 용서할 수 업는 일망 타진의 대상이자, 이단아였던 것이다.
공자의 드높은 학문을 계승하고 유학을 국시로 했던 조선의 선비들은 공자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행합일의 양명학이 그리운 이유도 그것이다. 이덕일의 최근 저술인 '내인생의 논어 그사람 공자'라는 책을 읽어보면 공자를 그토록 높이 떠받들며 신의 경지에까지 지극히 모시던 공자님의 말씀을 조선의 선비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고 저자는 개탄하고 있다. 물론 저자가 공자를 너무 아름답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절반밖에 읽지 못해 단정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여하튼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여유당은 그나마 운이 좋았던지 유배를 반복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덕분에 여유당의 수많은 저술들을 통해서 여유당이 그 얼마나 순수한 정신으로 애민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유당도 노비제의 폐지를 적극 반대한 인물 중 하나였다. 사회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이것을 여유당의 허물이라고 한다면 허물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나라의 시대상황을 감안할 때 여유당보다 지극히 애민을 가슴속에 간직한 인물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