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은 태보공을 죽일 작정이었고
태보공은 여기서 죽을 작심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온갖 고문,
불에 달군 인두로 전신을 남김없이 지지는 낙형,
무릎을 모두 으스러트린 압슬형,
그리고 살이 터지고 찢어지는 혹독한 장형,
태보공의 육신은 이미 너덜거렸다.
(조선의 낙형과 압슬은 13번을 지지고, 무릎을 13번 짓 이기는 것을 한 차례라고한다.
숙종은 밤이새도록 태보의 몸을 26차례 지지고 26차례의 압슬을 가했다.
너무나도 가혹했는데 그것은 숙종의 성정이 그러했기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은 올바르고 굽힘이 없었으며 영혼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태보여......
그렇게 지난 밤부터 밤이 새도록,
그리고 날밝은 시간까지 수도 없고문과
셀수도 없이 내리치는 장을 견디지 못하고
태보공의 정강이 뼈가 결국 몸 밖으로 튀어나오니,
태보공의 정신과는 달리 몸은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나장이 급히 소리질렀다,
응교나리의 다리를 싸매려하는데 누가 옷을 벗으려는가?
김몽신과 조대수가 다투어 옷소매를 칼로 베어주었다.
이때 태보공이 말했다.
'내 도포를 베라'
하여 나장은 태보의 도포로 뼈가 튀어나온 다리를 감쌌다.
귄대운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다시피 숙종의 앞으로나가
부디 태보의 목숨만은 살려달라 읍소했다.
이지경이 되자 비로소 숙종은 못이기는 척 태보의 귀양을 명했다.
온전한 것은 오직 태보의 정신 뿐, 나머지는 모두 망가진 채로 말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태보는 지금의 명동에 있는 집에들러 책을 꾸리고
귀양길에 올랐다.
태보공이 한강을 건너 노량에 이르는 것은 황혼이 지난 뒤였다.
태보는 더이상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 세당이 아들 태보의 마지막을 보러왔다.
세당은, '조용히 죽어 너의 마지막을 빛내라', 고 했다.
'아버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나이다', 태보공이 답했다.
서계선생께서 '한 글자만 써다오.
너의 글을 보면 너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지않겠느냐.' 했다.
세당이 다시 태보에게 물었다.
'네 죽으면 어디로 가고 싶으냐.'
태보공은, '김포 산소로 정했습니다 지관 김명하가 알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서러워 마십시요' 라고 답했다.
(박공의 태보의 묘는 의정부 장암동에 있다고 한다. 실기와 다름없는 박태보전에는 '김포 산소'라고 써있다.
여기서 말하는 김포가 장암동인지는 알수 없다)
서계공이 문을 닫고 나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염없이 통곡했다.
지친 태보공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목숨 끊어지기가 어찌 이리도 더디단 말인가......'
그리고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유배를 떠나다 멈추어 선 곳,
노량진 사육신의 묘지가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이들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박태보전에는, 온 천하가 모두 울었다, 라고 써있다.
오두인은 의주로 유배를 가던 중 파주역에서 사망한다.
태보공이 죽은 이틀 후의 일이다.
오래지 않아 숙종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하교했다.
'오두인과 박태보의 관작을 회복하라!'
오두인은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박태보는 정경대부로 추증하라.
그의 가문은 충신의 가문이다.
그 가묘에 제사를 올리도록하라!'
그리고 임금 스스로 제문을 내려주었다.
'고 목사 박태보 신령에 제사하노라.
갈고 꺽어도 부러지지 않는도다
슬프다 경의 아름다운 기질은 밖은 온화하고
안은 씩씩하도다
착한 아비의 가르침을 받아
아름다운 이름이 일찌기 들리도다
의리는 인륜을 밝히고
충성은 내 그른 마음을 두루잡더라
일편단심은 해와 같고
귀신곁에 있어도 부끄럽지 않을 터라
슬프다 내가 살피지 못하여
경으로하여금 화를 입게했도다
열번 죽기에이르러도
본 마음을 잃지않았고
목숨버리기를 달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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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정성으로 향을 피우는도다
착한 신령이 아시겠거든
이 술 한잔을 흠향하라
아름다운 이름은 백세에 비추이리다'
그 후 영조도 태보공에게 제문을 내려주었다.
'곧으시도다 문열공이여 굳은 절개 하늘을 깨웠고
의리를 위해 죽기를 결심했도다.
모든 신령은 아시겠거든 이 잔을 굽어 흠향하시라!'
1896년, 황해도에서는 쓰치다 조스케라는 일본인을 그야말로 두들겨 패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살인을 주도한 이는 당시 나이 겨우 스물 한 살의 젊은 청년,
의기와 기백이 넘치는 김창수라는 인물이었다.
김창수는 체포되었다.
살인의 이유는 하나, 사망자가 을미사변의 가담자이고 민비를 시해한 者였다는 것이다.
김창수는 다름아닌 백범 김구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구선생은 21세의 나이에 사형을 선고받는다.
감옥에서 김구선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박태보공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백범일지), 라고.
반남 박, 태보공은 죽음을 초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태보공이여, 정녕 그 이름 백세에 비추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