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퇴계와 기고봉은 스승과 제자로서 보다는 학문을 나누는 벗으로 서로를 대했다. 물론 서로 깍듯한 예를 잃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 자료들을 보면 이퇴계와 기고봉의 관계를 언급할 때, 기고봉을 ‘이황의 문인(門人)’, 혹은 ‘32세에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는 마치 기고봉이 이퇴계의 문하생(門下生)인 듯 한 느낌을 준다. 문인(門人)이라는 말은 스승의 집안을 들고나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문하생을 말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의 내용 중에는 두 사람이 각자 어떻게 학문을 닦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퇴계는 자신의 학문에 대해 말하기를, 저는 젊어서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선생이나 동료가 이끌어주지 못했기에 얻은 것은 조금도 없이 몸에 병만 깊어졌습니다. (1559년 3월) 라고 쓰고 있고,
기고봉은 편지에서,
다만 어릴 적 얕은 재능으로 고금의 책들을 두루 읽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중략... 성현의 글을 구해보게 되었는데, 그것도 다만 스스로 즐겼을 뿐, ...(1559년 3월) 이라고 쓰고 있다.
이퇴계는 12세에 작은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2년 후부터는 혼자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한참 젊은 시절 주역에 깊이 빠지는 바람에 몸에 병이 들어 나이가 들어서까지 고생을 했다고 전해진다. 몸에 병만 깊어졌습니다, 라는 위의 표현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으로 추측된다.
기고봉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1519년 중종 당시 훈구의 강력한 반발로 발생한 기묘사화 당시 막내 작은 아버지였던 기준(奇遵)이 유배되고, 신사무옥으로 또다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교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역사에 기록된 화를 당한 집안이었으니 공부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여 부친과 막내 작은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아 학문에 들었고 독학으로 갈고 닦았다고 볼 수 있다: 기준(奇遵)은 조정암의 문하였다고 한다. 기고봉은 그의 나이 31세(이퇴계를 만나 기 전)에 이미 주자대전을 완파하고 이퇴계로부터 통유(通儒)라는 별칭을 얻었을 정도였다. 이퇴계도 이미 기고봉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글을 읽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처럼 독학으로 학문을 닦은 독학 파들이었다. 물론 기고봉께서 이퇴계를 깍듯이 선생님으로 존중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두 사람의 관계를 사제 혹은 기대승을 이황의 문인 이라 칭하는 관계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기고봉은 나이 32세가 되어서야 처음 이퇴계의 얼굴을 마주했다. 기고봉은 당시 과거를 보기위해 한양으로 올라오면서(1558년) 김인후(金麟厚)와 이항(李恒)등을 만나 학문(태극太極)을 논하던 중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얻어보게되었다고 한다. 기고봉, 김인후, 노수신등은 서로 서신을 교환하며 학문을 논하던 사이였다. (이항은 조남명과 비견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던 대학자였다). 당시 학문을 논하는 분위기가 대략 그러했던 것이다. 요즘과는 달리 편지로 학문을 논하던 그 시절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세상이 많이도 달랐다.
문제의 발단은 이퇴계가 그 천명도설(天命圖說)의 내용을 수정한데서 비롯한다고 한다. 학자 정지운은 주희와 여러 학설들을 종합해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관계를 표로 만들어 설명했다고 한다. 참고서를 찾아보니, 이퇴계는 정지운의 천명도설에 있는 사단발어리(四端發於理), 칠정발어기(七情發於氣)를 사단이지발(四端理之發), 칠정기지발(七情氣之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즉, 「사단은 이로부터 발하고, 칠정은 기로부터 발한다」, 라는 천명도설의 내용을 이퇴계는 리와 기가 능동적이지 못하다는 판단,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라고 고쳐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여 원본의 천명구도(舊圖)가 천명신도(新圖)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 상황과 편지의 전후 상황으로 보아 첫 대면에서 바로 사단칠정은 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고봉은 이기(理氣)를 서로 합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 이퇴계를 만나 논쟁을 펼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기고봉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氣)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 후 이퇴계가 먼저 편지를 전하며 조선의 철학이 주체성을 가지는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다음해인 1559년, 정월이 되자 이퇴계는 기정자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낸다. 기고봉은 급제 후 바로 임관, 승문원부 정자(正字)의 자리를 제수 받는다. 9급 공무원이 된 것이다.
....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의 설을 전해 들었습니다. ....중략...,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는 더욱 잘못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 보았습니다.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理)인 까닭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철정의 발현은 기(氣와)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처럼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편지의 내용과 날짜로 미루어보아, 기선달은 하늘같은 선배의 편지를 받자마자 답을 써서 박순(朴淳)을 인편삼아 보냈던 모양이다. 당시 기고봉께서 신속한 답을 올렸고, 이퇴계 또한 답을 받자마자 다시 붓을 들었던 모양이다. 설을 지낸 직후인 정월 5일자로 미루어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퇴계의 마음을 급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노장 이퇴계가 새로이 학문의 불을 당기게하는 벗을 만났기 때문이던가. 학문으로 맺은 벗은 대개가 이러하다.
위 편지에서 보듯이 이퇴계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정한 대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일면식도 없는, 게다가 족보에 먹도 채 마르지 않은 젊은이가 초면에 다짜고짜 강력한 태클을 걸어온 것이 아니던가.
성즉리(性卽理), 즉 성리학은 기(氣)의 활동 근거를 우주만물의 이치인 이(理)라 보았고, 기를 만물을 구성하는 재료이므로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도구라고 보았다. 이퇴계는 리는 원리적 개념이므로 절대적으로 선하고, 기는 현상적이므로 선악이 혼재한다고 보았다. 하여 이는 존귀하고 기는 비천하다고 여겼던 것이다(理尊氣卑).
하여 위 편지는 이퇴계가 자신의 견해를 수정해가면서 좀 더 깊이 있는 초식을 선보이라고 기정자에게 채근하는 듯하다. 이에 기고봉은 올커니, 했을 것이다. 이퇴계가 몸소 한 판 놀아보세, 하고 멍석을 깔았으니 마다할 기고봉이 아니다. 망설일게 무엔가. 이 편지를 받자마자 기고봉은 이퇴계를 다시 직접 찾아 나선 다. 이미 서로 얼굴도 익혔겠다, 신이 난 기고봉은 이퇴계와의 한판 거침없는 설전을 벼르면서 대문을 나섰을 것이다. 막 벼슬을 받는 말단 9급 공무원이 하늘 같은 산전 수전 다겪은 고위직 2급 공무원을 직접 찾아나섰던 것이다. 현대에서 어떤 9급이 곧 1급을 앞둔 2급을 다이렉트로 만나기를 청할 수 있단 말인가. 겁도 없다 기정자여...
당시 이퇴계는 공조참판으로 있었지만, 역시나 병약한 상태였던 듯하다. 하여 안타깝게도 이퇴계는 기정자에게 멍석을 깔아 주고는 휴가를 얻어 낙향한 후였다고 한다. 이에 기정자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설레기도 하고 심각하기도 한 이퇴계와의 두 번째 만남에 설레어 가슴이 부풀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이 덕분에 당시 기정자가 이퇴계에게 보낸 사단칠정의 내용을 우리가 읽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정자가 이퇴계와 얼굴을 마주하고 직접 논하고 싶었던 자신의 주장을 글로 써서 보낸 편지가 지금껏 전해오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나던 1558년은 그 미래의 조선 역사에 사실상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시발점인 해였다. 그러나 현재 이퇴계에 비해 기고봉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가 특별히 당파를 형성하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거니와 그 학맥이 계승되지 못한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기고봉은 율곡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율곡은 싫든 좋든 서인들이 그들의 종장으로 삼아 칼과 방패로 삼았으니 기고봉의 영향력을 인정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두 사람의 논쟁은 지극히 아름답다. 다양한 이유들이 있으나, 무엇보다도 널리 공인된 대유(大儒) 이퇴계가 자신의 학문의 절정에 달해있던 즈음에 까마득한 후학이며 새파란 젊은이의 날카로운 도전을 지극히 온유하면서도 즐거이 교류하는 장으로 변화시겼다는데 있다. 예나 지금이나 종장격의 인물에 대한 철학적 도전은 그야말로 어쩌면 한 거물의 생애는 물론 그 학파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사안이다. 하여 그 충격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에 조선에 거대 운석의 충돌과 다름없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대 사건어었던 것이다.
천만 다행한 일은 그때만 해도 당파가 아직 자리 잡기 그 이전이었기에 새파란 기고봉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본다. 사림이 동서로 분열된 해는 명종 사후 선조가 집권하던 1575년으로 노장 심의겸과 소장 김효원이 이조정랑의 후임를 놓고 갑을 박론하던 해였다. 소장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림은 유성룡, 이산해, 이발, 김우옹 등이었는데 주로 퇴계학파로 동인이었고, 노장 심의겸을 지지하던 인물들은 박순, 정철, 윤두수 등으로 주로 율곡학파로 서인이었다. 이조판서와는 별도의 인사권을 쥐고 있었던 이조정랑, 비록 5급 공무원이었지만 그 힘은 막강했던 요직, 그 이조정랑의 후임을 놓고 서로 다투던 해가 1575년 이었던 것이다. 당시 전랑(정랑과 좌랑)은 요직으로 승진하면서 후임을 자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역사는 을해당론이라 기록하고 있다.
을해당론 후 동서의 갈등은 점점 깊어져 기축옥사를 계기로 조선 전역에 메가톤급 비극을 볼러 온다. 이후 끈임 없는 예송 논쟁과 고변, 역고변, 환국 등으로 조선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론은 사림의 목숨 줄인 권력으로 변해버렸고 이론이 나오는 순간, 바로 처단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이 순수한 학문이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림은 주희를 신성한 존재인 교주로 추앙했고, 주희의 견해에 토를 다는 자, 죽음으로 다스렸다. 그러한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 대표적 실례가 백호 윤휴와 서계 박세당이었다.
다행히 이공판과 기정자가 편지를 주고 받던 당시만 해도 학문의 장이 그만큼 자유로웠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시기가 조금 만 늦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도전장을 내밀었다면 기고봉의 목숨이 열 개였더라도 무사치는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당론이 뿌리를 내리기 이전의 논쟁인지라 현대에까지 그들의 논쟁이 아름답고도 고밀도의 학문적 가치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며 조선의 진일보한 독자적 철학을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
* 박순(호-사암): 서경덕, 이퇴계를 사사하고 이이및 기고봉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척신 윤원형 일당을 제거하는데 그 공이 컸고, 대사헌을 거처 이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거치던 중 율곡의 탄핵 사건 때 율곡을 옹호하다가 되려 탄핵을 받고 은거한 군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박사암이 이퇴계에게 전해주었다는 기고봉의 첫 답신은 이 책에 소개되지 않아 내용은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