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보는 고대사 - 민족과 국가의 경계 너머 한반도 고대사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기 전에 독자들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우리는 박노자가 어떤 사람인지 부터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박노자가 피력하고 있는 우리 역사의 상고사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면  박노자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비정에 관한 문제는 우리 역사의 매우 중요하고도 민감한 부분임에 틀림이 없음을 잘 아실 것이다. 일제 식민사관과 그에 맞서는 비주류의 위치 비정에 대한 입장이 서로 상충하는 현 시점에서 우리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은 일제식민사관을 벗어나기 전에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박노자가 취하는 입장은 일제 식민사관의 입장과 다를 바가 전혀 없으며, 박노자가 참고했다는 문헌들은 대부분 일제 식민사관을 가진 학자들의 자료들 일색이다. 결과적으로 일제 식민사관을 가진 또 하나의 식민사관 학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한 박노자는 어떤 사람인가.. 

박노자, 그는 "이병도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역사학자"라고 칭한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이병도는 어떤 사람이기에 박노자는 그를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앙하고 있는 것일까... 그 전후 과정을 알고나면 박노자의 정체가 밝혀질 것이기 때문에 일독하기 전의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라면 이병도라는 인물을 아마도 잘 알 것이다.  이병도는 일제 강점기 "조선사 편수회" 의 한국사 왜곡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조선사 편수회는 일제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뭉쳐진 기관으로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조선 상고사를 부정"하여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이내로 축소시킴과 동시에 힌민족의 근본 정신을 흔들어 놓으려는 의도를 가진 철저한 한국사 왜곡 집단이었다. 

 이 때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라는 일제 역사학자의 보좌관으로 일하며 조선사 편수회에서 한반도 역사의 왜곡에 앞장섰던 인물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제 패망 후 이병도는 서울대학교의 사학자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문교부 장관에 이르기도 했다.  이병도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였을 뿐아니라 한국사의 왜곡에 적극적인 저서활동으로 그 제자들마저 식민사관으로 물들게 한 장본인이다.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이병도의 제자였던 이 O O 씨 이다. 이자는 "한국사 신론"이라는 책을 저술한 작자로 학국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파하면서 한반도 국가의 형성을 기원전 10C로 간주하는 견해를 가진 인물이다. ( 이 자의 책-한국사 신론-이 지인의 서가에  꽃혀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역시 서울대학교 사학자였던 그 사람이  "한국사 시민강좌"에서 기고한 글을 읽어 보신분들은 잘 아실 것이다. 애초부터 "단군"에 대한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글로서 단군 왕검 당시의 국가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글발로 매우 그럴 듯한 이론들을 들이대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1,000년이나 짤라먹은 사관이 되고 말았다. 이는 이병도의 후학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자가 누구인지 한국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분들이라면 이미 감지했을 것이다. 이병도의 후학들은 이렇게 한국 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비주류의 한국 사학자들의 입지는 씨도 안먹히는 상황이 연출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독자들이 자각해야 할 것이다. 

차치하고... 다시 박노자로 돌아가보자...박노자가 공부하고 저서에 활용한 참고한 도서들 대부분 어느 분이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병도의 저서와 그 관련 서적들이다. 이병도의 한사군 비정문제는 당시에 이병도 스스로의 연구가 전무한 상태였고, 일제 사학자의 후학으로서 일제 스승의 저술내용을 가감없이 그대로 베껴적은 것에 불과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처구니 없게도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에서 한사군의 위치 비정은 이병도의 식민사관을 정설로 받아들여  그대로 실려버렸다. 이는 우리들의 바로 잡아야 할 큰 숙제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이에 상고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소수의 사학자들이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 소수의 반발은 단순한 애국심의 발로에서 끓어오르는 일종의 떼쓰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임도 인지하야 할 것이다.  

고조선사의 단군사를 언급하면서 한반도사를 주장하기라도 하면 '국수주의'라고 매도당하고 있는 사학자들의 노력은 언젠가는 빛을 발할 때가 오리리 믿늗다. 그동안 매도당해왔던 한반도사를 바로잡자는 것으로 관련 사료에 대한 매우 심도있는 연구와 매우 좋은 결과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잊혀지고 왜곡된 한반도의 고대사를 언급하면 시대 착오적인 '국수주의'이 '파시즘'이니 하는 얼토당토 않는 공격을 퍼부어대는 이들이 있다. 단군의 고대사와 국수주의가 도대체 그 어떤 관계라도 있다는 말인가...국수주의와 파시즘을 들이대면 깜짝 놀라기를 기대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다만 현재 국가의 영토문제와 남북 분단의 현실 앞에서 실증 연구를 진척해나갈 수 없다는 것이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럴 때 일수록 한국의 사학계가 서로 협조하고 문헌들을 연구하여 깊이 있는 결과물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본다.

이제 박노자가 그토록 추앙하는 이병도의 양심 선언을 살펴불 시점인 듯 하다. 이병도는 죽을 때가 되어서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지 지인의 설득으로 비로소 양심선언을 하기에 이르른다. 그는 죽기 직전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반성문을 발표한 것이다. 그동안 저술하고 가르쳤던 자신의 역사관을 180도 선회하는 사관이 아닐 수 없었다. 사망 한 해 전 1986년 조선일보에 자신의 잘못을 만 천하에 인정하는 반성문을 게재한 것이 그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미 친일 세력들이 거의 모든 영역을 장악한 상황이었고 사학계는 실증사학을 주장하며 단군을 가상의 인물로 보기 시작했다"는 내용의 글을 최태영 박사의 글을 함께 게재하고 있는데 최태영 박사는 이병도를 양심선언하도록 설득한 장본인이라고 한다. (이 O O 씨의 한사군 비정 역시 이병도와 일제 식민사관, 그리고 실증사학에 근거한 주장들이다) 최태영 박사의 말에 따르면 이병도는 병실의 침대위에서 죽어가며 단군을 실존 인물로 인정했으며 마지막 고백을 하고싶어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이병도의 양심 선언이 신문에실려 만천하에 공개된 경위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왜 이병도는 양심선언을 하게되었을까...역사학자로서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하는 강력한 파장을 몰고 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학자로서의 생명의 앗아가버리는, 자신의 가치에 반하는 이러한 중차대한 내용을 이병도는 왜 인정하고 죽었을까...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분명...

그러나 한국 사학계의 거두라는 이병도의 가르침을 받은 후학들은 이병도의 이러한 양심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사 왜곡의 최전선에 서있는 것이다. 박노자라는 사람은 이병도의 식민사관으로 일관한 저서들에 특히 경도되었고 제대로 두루 공부도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되려 홍익인간의 정신마저도 매도하고 있는 사람이다.(이 박노자라는 사람이 우리의 홍익인간 정신을 어떻게 매도하고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박노자, 한겨레 “민족 ‘신화’ 넘어 국경없는 ‘계급연대’로 가자"라는 논평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 대목은 읽고도 용서를 하고 싶은 분들이 과연....한술 더 떠서 박노자는  "단군신화는 거짓"이라고 신문에 기고했다. 박노자의 마각이 들어나는 사관이라 하겠다. 

과연 이 박노자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매우 민감한 우리의 역사를 식민사관에 입각한 저술들만 참고자료로 들이파고는 그것이 참인냥 떠들어대고 있는 이 박노자라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과연 이자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학자인가 하는 의심이 들 뿐이다. 박노자가 한국사를 공부하고 있는 저의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단군의 고조선을 우리의 역사라는 주장에대해서 국수주의라고 몰아붙이는 한국인들이 있는 이마당에 고조선사를 부정하는 외국인 사학자라니... 그러나 분명 고조선의 역사 그 아래로 한반도의 역사가 흐르고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아가 더욱 박노자가 심각하게 위험한 인물인 이유는 따로있다. 그는 유럽의 대학 강단에서 우리 한국사를 일제 식민사관 그대로 전파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면 매국노라 칭하면 되겠지만 박노자 이작자는 유태계 러시아인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이런자가 한국 역사의 왜곡행위를  무차별 저지르고 있는데 도대체 무어라 칭해야 한단 말인가... 박노자의 글들을 읽으면 마치 중도적인 입장에서 한국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사에서는 절대로 그러하지 못하다. 매우 편협한 식민사관을 그대로 빼다박았다. 그동안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하여 많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박노자는 자신은 마치 중도적 객관성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해왔다. 박노자를 읽어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중도적이며 한국인보다 다 한국을 잘 알고있고 그러므로 한국인을 위해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해주리라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노자의 상고사에 대한 견해와 기타 여러가지 본격적인 한국사를 언급하고 있는 견해들을 읽어보면 이자가 과연 무엇을 하자는 자인가하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앞에서 미소지으며 한국사를 가지고 한국 국민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는자가 바로 박노자인 것이다.

유럽에서 한국사를 공부하고 있는 이들에게 한국 국적을 획득한 박노자라는 사람이 발언하는 내용들은 추호의 의심도없이 고스란히 사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박노자는 일제 식민사관의 저서들을 바탕으로 알게된 지식으로 한국사의 권위자 행세를 할 것이 뻔하다. 유럽에서 한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한국사의 권위자로 둔갑한 박노자의 발언이 그 얼마나 강렬하게 유럽인들의 뇌리에 각인될지를 상상해보시라...박노자의 발언은 여과없이...거침없이 유럽인들의 사관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우리 독자들은 박노자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동안 박노자의 저서들은 매우 객관적인 중도자적 입장을 고수하려 애쓴 흔적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가식적인 노력은 이제 중단된 상태이다.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가감없이 그대로 베껴쓰고 있는 현실에서 그의 사관을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박노자는 그의 저서로 한국사의 왜곡을 바로 우리의 이땅에서 시작했다. 한국사를 그얼마나 제대로 공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식민사관을 베껴쓰는 짖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박노자가 그토록 추앙하는 이병도의 식민사관을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며 세계의 사학계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 박노자를 지극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우리의 네트즌들은 털지 않아도 될 사람들의 신상을 잘도 털면서 왜 이러한 작자의 신상을 털지않는가...마음 같아서는 이작자의 한국사 왜곡행위를 낱낱이 털어 그 정체를 벗겨 만 천하에 밝혀서는 한국땅에 발도 못붙이게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작자가 세계의 어느 사학자들의 인정을 받을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아...단 어느 한 나라에서는 인정을 받고 환영받을 것이다...바로 일본이 아니겠는가...네티즌들이여...박노자의 정체를 제대로 밝혀 부디 일본으로 추방시켜주시길....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램브란트 2010-11-24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전까지 박노자에 대해 호감이 많았는데,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부분에서는 정말 내가 사람을 잘못보았나 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시고, 필력의 내공도 상당하시군요~

참고로, 박노자가 유태인인 것은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물론 그게 아주 큰 문제인 것은 아니나, 전 박노자에게 묻고 싶습니다. 유태인인 당신이 혹시 믿는 유태교도 단군조선처럼 '어불성설'이며 '역사에 대한 배반이요 폭력' 인지 말입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3권 세트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그리스 로마신화에 관한 서적들은 매우 다양하다. 초등학생들이 읽기에 좋은 형태의 도서에서 청소년, 어른들이 읽을 수 있는 도서에 이르기까지...신화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들의 차이점은 없으나 이윤기가 남긴 신화관련 도서들은 독특한 면들이 많다. 같은 신화의 내용이라도 그의 해석이 주는 차이가 많은 신화를 들려준다. 이는 평생을 두고 신화에 바친 그의 연구와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이윤기의 애정이 그 얼마나 깊었는지 그의 저서들을 읽어본다면 알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가 신화를 이해하는 방식은 글의 필체가 주는  느낌 만큼이나 색다른 풍요의 뿔을 읽어낸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에서 흔히들 놓치기 쉬운 점들을 매우 예리한 관찰력으로 통찰해내고 있다.   

이윤기의 통찰력이 가장 빛을 발하는 대목은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사이에 있었던 긴장감을 해석하는 이윤기의 생각이다. 기존의 신화에 대한 해석으로 다시 한 번 더 명료하게 독자를 설득시키는 이유들이다.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주는 그의 통찰력은 그렇게 빛이 난다. 그것도 정 반대의 시각에서... 결과적으로 판도라의 상자에 대해 이윤기의 글을 읽지 않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알고있는 지식을 뛰어넘어 전혀 새로운 각도의 해석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이윤기의 산화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여타의 신화와 이윤기의 신화를 차별화가는 요인들이다.    


 이는 이윤기가 신화에 쏟아 부은 애정의 결실일 것이다. 같은 범주의 신화에 이토록 많은 시간과 정열을 기울인 작가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윤기의 신화론은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신화를 역한 후로 뮈토스 3권을 내놓는데 아마도 이 시점이 이윤기의 신화에 대한 통찰력을 발휘하시 시작하는 때인 듯하다.  그는 평생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고 본다. 이는 이윤기의 신화를 읽어도 좋은 이유들이다.

물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는 이윤기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기여한 최대의 산물이겠지만 이는 일생을 연구하고 공부하며 노력한 결과의 것일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감동해본 분들은 아실 것이다. 이윤기의 노력과 그 힘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생상 : 바이올린 협주곡 1 & 3 외
Decca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생상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과연 우리의 여제 정경화의 진가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음반이다. 왜 그녀가 여제인지, 왜 그녀가 바이올린의 화신인지 다시 한 번 더 명징해주는 음반이 아닐 수 없다.  

생상을 연주하는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는 활력, 명료하고도 또렷한 그녀의 보잉이 주는 프레이징은  비록 이 음반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하더라도 단번에 그 비범함을 느낄 수 있는 음반이다. 한마디로 생상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과연 누가 우리의 여제앞으로 바이올린을 들고 나설 것인가...생상이 자신의 곡에서 원하던 바로 그 표현을 여제가 해내고 있을 것이다... (아...레오니드 코간과 메뉴힌 그리고 하이페츠의 음반을 과소평가하려는 의도가 역시 아님을... )

생상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당대 바이올린의 거장 사라사테에게 헌정한 곡이려니 애호가라면 과연 그 기교적인 측면을 추측할 수 있으리라... 여제로인하여 생상의 구상에 있던 기교는 화려하게 살아나고 오케스트라와의 밀고당기는 조화로움은 곡을 살아 움직이게한다. 이렇게 우리의 여제만을 추켜세운다고 그뤼미오 선생께서 질투를 할지도 모르겠다. 필립스에서 출시한 그뤼미오의 연주는 우리의 여제와는 또다른 맛을 전해준다. 관현악은 선이 굵고 그뤼미오의 연주는 애닲으며 간절하다. 그러니 여제의 연주와는 또다른 매력을 가진 음반임에 틀림이 없다. 그뤼미오의 연주는 분명 차선책으로 단연 으뜸이다. 

그러나 협주곡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서로 다투어서도 안될것이요 관현의 육중함에 눌려서도 안될것이다. 또한 빼어난 독주가 파괴력을 지녀서는 안될 것이다. 홀로 빼어남은 오히려 관현에 상처를 입힐 수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상처받은 관현은 독주를 살려내지 못할 것이 뻔하다. 애호가의 귀에 독주만이 걸러져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할 것이다. 협주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없어야한다.  이는 협주곡이 애호가들에게 주는 인생의 매우 유익한 가르침일 수도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를 도우며 더욱 발전해가는 인생의 중요한 덕목을 가르치는 협주곡... 조화로운 관현의 조화로운 도움으로 여제는 홀로의 몸으로도 당당하며 때로는 곡이 전해주는 애수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아...유일한 한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있다. 바로 음반의 자켓이다. 정경화의 그 다부지고 믿음직한 얼굴의 윤곽을 카메라가 측면에서 잡아내는 바람에 전혀 그 느낌을 전해주고 있지 못하다. 음반에 근접 이미지를 주었다는 점은 좋았으나 또렷한 이목구비에 환한 그녀의 미소는 정녕 백만불짜리 커버가 될수 있는데...정말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다.. 

 글을 쓰고보니 여제가 한국인이라고 너무 편애했나 싶다. 물론 편애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우리 여제의 연주를 들을 때는 언제나 가슴으로 먼저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동이 조화를 이루며 다가와야 할 일이지만 유독 여제의 연주는 그 이성을 흔들어 놓는다. 여제의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 어느 음반을 구입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비이올린 연주자가 있다면 여제 정경화와 레오니드 코간, 오이스트라흐, 메뉴힌등이 떠오른다. 하이페츠도 단연 같은 대열에 들어서겠지만 그의 독특함은 마치 굴드의 피아즘을 떠올리게 한다. 굴드의 피아니즘에 언제나 신뢰를 보낼 수 있는 애호가라면 단연 하이페츠 또한 언제나 믿음직한 연주가가 될 것이다. (잡설이 좀...) 

마지막으로 우리의 여제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브루흐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스코틀랜드 환상곡
Decca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어떤이들은 그녀를 '바이올린의 여제'라 부르기도 한다. 정말 잘 어울리는 닉네임이 아닐 수 없다. 연주할 때의 맑은 미소와 고뇌에 찬 미간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그녀가 맨발로 연주하는 모습을 볼때면 정녕 나는 바이올린의 화신을 만난 기분이다. 

그렇다. 그녀는 '바이올린의 화신'이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스크틑랜드 환상곡은 각각의 연주 시간대로 보나 그 느낌으로 볼 때 환상적인 합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그토록 많은 연주가들이 같은 타이틀로 줄줄이 연주하여 출시하는 가장 주된 이유일 것이다. 물론 멘델스존과 스코틀랜드 환상곡으로 합을 이룬 음반도 이에 못지 않은 애청반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의 또다른 연주가인 장영주도 브루흐를 연주하여 음반으로 출시했다. 물론 언제나 나에겐 '신뢰지수 100'을 자랑하는 '코간'과 메뉴힌도 빼놓을 수 없으며 오이스트라흐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면 서운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곡을 연주한 전설적인 인물로는 단연 야사 하이페츠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하이페츠의 연주에 토를 달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우리의 여제보다는 약간의 빠른 템포로 그 정밀성을 따진다면 가히 나노급의 연주이다. 아마도 이성을 강조하는 철학에 찌든 서구인의 귀에는 이 하이페츠의 연주야말로 단연 으뜸이요 최강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하이페츠의 연주는 정밀하고 냉정하면서도 그에 뒤질세라 연주의 아름다움을 흠뻑 가미하고있으니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차가움과 정밀함, 그리고 그의 힘있는 보잉에 아름다움마저 가미하는 연주를 해내다니...과연 하이페츠이다. 한마디로 마치 백금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의 연주는 완벽한 '이성적' 연주로 기억된다.. 

이와 대비되는 연주가 있으니 바로 우리의 여제께서 연주한 바로 이 음반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멘델스존의 곡과 커플링하여 연주한 음반도 말할 나위없거니와 우리의 여제께서 출시한 이 음반은 켐페님과의 협연으로 하이페츠의 연주와는 상대적으로 유려한 보잉을 바탕으로한다. 하이페츠의 깐깐함과는 대조적인 서정성을 더 담은 음반이랄 수 있다. 여제의 보잉은 부드러움과 힘을 동시에 느낄 수있어 음양의 조화를 완벽하게 갖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연주는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활화산 같이 뜨겁다. 또한 한없는 부드러움과 온화함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녀의 연주는 비가 내리는 날 한없는 고독과 슬픔을 느끼고 싶은 그 어느 누구에게든지 결코 실망시키는 일이 없다. 그만큼 그녀의 연주는 사람의 가슴을 깊이 파고드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서양인 사상의 바탕이되는 '이성'과 동양인 사상의 바탕이되는 '자연과의 조화로움'의 차이가 바로 하이페츠와 우리 여제의 연주가 주는 차이점이라 말한다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연주가 더 좋다 나쁘다를 평하기보다는 어느 연주를 더 선호하느냐의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대한민국이 낳은 바이올린의 여제, 정경화 그녀는 바이올린의 화신이며 '영원한 나의 여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1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윤식의 글씨는 이미 궁월의 웬만한 관료들도 알고있다. 김윤식의 필체로 명자를 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다.  소설속의 왕도 김윤식의 글씨를 보며 탄복할 정도일 뿐 아니라 당상관 이상의 관료들은 그렇게 김윤식의 글씨를 원하고 있다.  

요즘은 워드프로세서의 기능이 탁원해서 대학교 지원서도 인터넷으로 입력하여 제출하는 정도이다. 과거 같았으면 손으로 일일이 생년월일과 주소등을 빼곡하게 기입해야 했었는데 말이다. 컴퓨터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자필을 요구하는 업무등이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보니 자필의 중요성이 점점 떨어지는 듯 하다. 

최근 대학에서 논술 시험을 치룰려면 자필을 써야하는 정도랄까...아...대학교의 시험지도 자필로 써야 할 것이다. 

좋은 필적의 중요성은 논술에서도 대학교의 시험에서도 매우 중요할 듯하다. 내용이 비록 좋다고는 하나 글씨가 나쁘면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욱 신경을 써서 읽어야 할 것이고 읽어야할 분량이 많아진다면 정갈하고도 깔끔하며 보기 좋게 쓴 글씨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만 같다.. 

주관식 답안 제출지와 논술은 자필로 써내야 할 텐데 이처럼 깨긋하고 보기에 좋은 글씨가 채점자로하여금 약간이라도 호의적인 점수를 부여하게 하지는 않을까... 반대로 내용은 좋을 지 모르나 성의가 없어보인다든지 악필인지라 글의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정도라면 좋은 점수를 따내는 것이 쉽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준의 그 엄격하고 간깐하기로 소문난 아버지의 마음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결국 자신의 편으로 이끌어 준 결정적인 계기도 김윤식의 필체였다. 왕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글씨체를 가진 김윤식...그러므로 고얀지고~..김윤식... 

글씨가 그 사람의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면 과장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그사람의 성격을 분명히 일부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어느 책은 조선의 글씨들을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출간 되었다고 한다. 올곧고 정의로웠던 선조들의 글씨...나라를 팔아 넘긴자들이 남긴 글씨...등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글씨의 주인들을 상대로 성격과 심리등을 분석했다는 것이다. 

김윤식의 글씨는 아마도 글씨를 보는 사람을 감동시켰나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토록 완고하며 체통과 가문을 중시하던 노론의 수장격이던 가랑의 아버지가 정적이었던 남인의 여식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을 보면 말이다. '성균관 각신들의 나날'에서는 주인공인 4인방들의 각신으로서의 파란 만장한 생활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김윤식의 필체는 매우 중요한 소설의 진행 라인이자 소설의 갈등을 서서히 반전시켜 나가는 핵심적인 소재이다.   

이 책을 읽는 대다수의 독자들 중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있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드라마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중학생이 거의 없다는 아이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소설을 읽는 중학생들에게 김윤식이 선준 아버지의 마음을 들려놓는 결정적인 모티브라는 점을 강조해주고 싶다. 글씨를 잘 쓰라는 말은 아니다. 비록 잘쓰는 글씨는 아닐지라도 스스로 쓸 수있는 자신의 글씨에 정성을 담고 마음을 담는다면 그 마음은 나의 글을 읽는 독자에게 분명히 전달 될 것이라는 점을 조언하고 싶을 뿐이다.  

드라마에서도 김윤식의 글씨를 자주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아직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김윤식의 글씨를 부각시키는 장면이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램은 드라마를 보는 학생들에게 글씨를 잘 쓰라고 백마디 하는 것 보다 휄씬 더 효과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제발 그래주기를...

마음은 말로전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진지하고도 정성이 담긴 글씨야 말로 말보다 백배는 더 진지하게 다가가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