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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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태조 왕건이 통일을 이루지 약 350년이 지난 즘인 25대 충렬왕(1236 -31) 때부터 공민왕(1330~74)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년간 몽골의 속국으로 존재했었다. 그 100여년간 고려가 몽골에게 당한 고통은 이루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미 고려사를 읽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고려를 속국으로 삼아 고려의 정부뿐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했던 몽골인들은 바로 찡기즈칸의 후예들어있다.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이다.

몽골은 알렉산더가 지배했던 땅의 8배를, 영국이 세계를 식민지로삼아 약탈을 일삼던 땅의 2배 이상을 지배했던 통이 무척 큰 나라였다. 우리는 흔히 알렉산더를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여 부르곤한다. 알렉산더에게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이 적합한 일이라면 찡기즈칸에 비할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찡기즈칸이야말로 87개국을 속국으로삼아 그보다 8배의 드넓은 땅에서 각국의 정부를 무릎 꿇이고 지배하며 조공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땅을 넓게 지배했던 인물에게 위대하다는 말을 붙이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면 알렉산더는 찡기즈칸 앞에서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초라해보인다. 

러시아라는 국가는 찡기즈칸의 작품이었다. 몽골의 군대가 동유럽과 슬라브족을 하나로 묶어둔 결과가 바로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몽골은 그렇게 러시아도 지배했다. 현재는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에는 몽골의 후예들이 최근까지 통치했었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에는 몽골의 후예들이 치근까지 지배하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 몽골을 유럽은 두려워했다. 러시아는 그 치욕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싶어한다. 

유럽은 몽골의 군대에 치를 떨었다. 몽골의 군대라는 이름만 들어도 싸움을 스스로 포기할정도였다. 찡기즈칸이 이끄는 군대은 패배를 알지 못했다. 87개국의 아시아와 유럽국가들은 찡기즈칸이 이끄는 군대의 말발굽아래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이 그 얼마나 몽골인들을 저주하며 인생을 살아갔을까...  유럽인들이 몽골의 역사를 세계사에서 삭제해버린 이유는 바로 그 것이다. 몽골에게 수치스럽게 당했던 과거 자신들의 역사를 숨기고 싶은 마음...그 쪽팔리는 자신들의 과거사를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바로 그것이었다.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여겼던 황색인종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들의 국가가 초토화되는 장면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그들....그러나 역사는 완전히 지울 수가 없는 일이다. 오히려 서구의 사관으로 바라본다면 찡기즈칸은 유럽국가들에게는 은인과도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치 신대륙을 그들이 발견했던 것 처럼 몽골의 군대는 신대륙으로 진군했고 온갖 혜택을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여 없애고 빼앗으며 잔인하게 약탈을 했지만 말이다...몽골에게 유럽은 신대륙과도 같았고 몽골인들이 유럽에 끼친 영향은 그 온갖 피해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후예들은 몽골의 잔인했던 군대를 기리는 집회 축제라도 매년 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여 축제를 벌이듯이.... 그러나....과연 이러한 서구의 사관은 아메리카에는 적용이 되면서 왜 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참으로 이상한 서구의 사관을 이 책을 통하여 새로이 생각해볼 수 있다. 

고려는 몽골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몽골은 공주를 고려의 왕들과 혼인시켰고 그렇게 사돈간의 관계를 유지해가고 싶어했다. 덕분에 충자로 시작하는 고려의 왕들은 대부분 고려어를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을 몽고의 왕궁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왕노릇 그만두고 몽골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고려의 왕이 있었을까...그 덕분에 한편으로 고려는 온전할 수 있었다. 

고려의 왕에게 시집온 몽골의 공주는 고려의 왕을 발꿈치의 때로 알기도 했다. 왕을 두들겨 패기도하고 고려 왕의 싸대기도 갈겨댔다. 몽골의 지배를 벗아나기로 결심한 고려의 왕은 공민왕이었다. 친 몽골 세력인 고려의 권문세족인 귀족들을 한꺼번에 불러들여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그렇게 공민왕은 고려가 이성계의 쿠데타로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현재 중국의 속국이 될뻔한 나라를 독립시켰다. 물론 이성계는 중국에게 확실하게 굽히면서 사대하기로 국정의 방향을 바꾸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권문세족에 포함된 한 사람이 바로 김부식과 그 가문이다) 

고려와의 관계속에서 몽골을 바라본다면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지구 역사상 세계를 가장 많이 지배했던 찡기즈칸과 그들의 후예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안에 가득하다. 몽골은 서구 세계의 법체계를 완성해준 인물이지만 철저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최초의 국제법을 만든 이는 바로 찡기즈칸이었던 것이다. 유럽은 로마법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찡기즈칸은 새로이 국제법을 만들어 드넓은 땅을 지배했다.  

몽골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저자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드넓은 땅을 지배한 인물에게 대왕이라는 호칭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회의를 느낀다. 진정 위대한 대왕이라는 호칭은 자신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왕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국을 지배하고 고통을 주는데 전력을 기울이며 인생을 살다간 한 나라의 군주에게 대왕이라는 호칭은 어림도 없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세종대왕은 정녕 대왕이라는 호칭에 가장 알맞은 유일한 왕일 것이다. 

여하튼, 이 책은 잊혀져가는 몽골의 거칠고도 왕성했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잠들었던 유럽을 그렇게 몽골의 군대가 쳐들어가 칼과 말발굽으로 깨워놓았다고 저자는 말하고있다. 일독은 나름대로 유익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비록 제국주의 시대는 아니었으나 유럽의 대부분이 몽골의 식민지였다. 유럽은 그 억울했던 역사를 지우고 싶은 일념뿐이다. 몽골의 역사가 세계사에 등장하는 순간 그들은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일 것이고 그것이 그들은 무척 싫은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은 세계사를 유럽의 입장에서 재조작하기에 이르른다.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그 중 가장 좋은 예에 불과한 것이다.  

 정말로 아메리카는 컬럼버스에의하여 발견된 역사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곳에는 이미 원주민들의 역사가 최소한 2-4만년 전부터 이어져온 그들만의 역사와 대륙을 가진 주인이었던 것이다. 발견이라니....주인없는 물건을 주웠다는 뜻으로 들리는 그 발견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처참한 역사 왜곡의 대표적인 예에 불과한 것이다. 왜 우리가 세계사를 제대로 알아야하고 유럽 중심사를 탈피해야 하는지 느낄 수 있는 좋은 계기다 되어주기에 충분한 책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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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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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감정이 많이 실려 아쉬움을 남기는 책이지만 일독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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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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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무게감에 비하여 내용은 의외로 읽기 쉬운 편이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신이 있다고 믿어도 좋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만들어졌다고 애써 반박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왜냐면 각자에게는 나름대로의 인생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보고 기독교의 허상을 밝힌다느니 하는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책 한권 읽었다고 바르르 떨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도킨스의 이 저서가 그렇게 훌륭한 저서도 아닐 뿐 아니라 이 저서를 통하여 저자인 도킨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참작하시기 바란다. 종교의 문제는 매우 이성적이면서도 냉철한 접근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편협된 마인드가 장착된 상태에서는 스스로의 감정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저자 도킨스는 이 책에서 뜻밖에도 상당히 흔들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성적이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상당히 싣고 있다보니 쓸데없이 책이 두꺼워져버렸다. 책의 두꺼움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다. 두꺼운 만큼 알찬 내용이 많아야하지만 도킨스의 이 책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자의 감정 실린 내용들을 전달하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낭비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종교를 다루어 책을 쓰는 저자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특히 이 책을 기독교인들이 읽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감정이 실린 이 책에서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감정 자극으로 비화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게 될 뿐이다. 이것은 싸우자는 것이지 소통을 하자는 태도는 아닌 것이다.   

저자가 본문에서 인용하는 미국의 대통령 제퍼슨의 일화와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 성경을 읽는 적이 없다는 식의 서술 방식은 저자의 감정이 실린 예가 되겠다. 특히 벤저민 프랭클린은 "등대가 교회보다 더 유용하다." 혹은 불가지론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서술한 방식, "신이 있을 가능성은 이빨 요정이 있을 가능성과 같다."와 같은 표현은 너무나 자극적인 표현들이다. 자제 햇어야 하는 문구들인 것이다.

이전 점에서 저자의 '만들어진 신'에서 몇 몇 장은 출간전에 삭제했어도 좋다는 생각마저 든다. 저자 도킨스의 이름은 국내의 많은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등은 도킨스라는 이름을 한국인독자들에게 각인시킨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그가 '만들어진 신'에서는 약간 이성적인 중심을 잃고 감정에 치우친 느낌이다. 이성적인 접근 보다는 감성적인 접근으로 마무리한 장들이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결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독자를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끌어주기 보다는 함께 감정적인 접근을 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차라리 성서적인 접근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저자의 욕심이 지나쳐 좋은 책의 질을 떨어트렸다.  

물론 이 책이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저자가 스스로 책의 질을 저하시킨 요인들에대한 아쉬움에서 하는 말이다. 이 책은 신에 대한 접근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데 충분히 도움이 된다. 종교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종교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읽게되었는데 나름대로 유익한 점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새롭고 신선한 내용들로 책을 구성해간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이론들을 자신의 견해를 뒷바침하는데 적절하게 사용했고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 정도의 책이다.  

독자들은 그러나 이 책 하나로 성급한 결론에 도달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좀더 많은 관련 서적들을 통하여 독자들 스스로의 마인드를 구성해가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사실상 끝이나지 않는 성격을 가진 분야이다. 종교가 가지는 특성은 거의 맹목적이며 맹신적인 측면이 강하다. 애초에 의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태의 종교인들에게 이성을 호소해봐야 소용이 없다. 도킨스는 물론 종교인들에게 이 책을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종교인들과 싸우자는 것일 뿐...도킨스 자신이 경험하고 관찰하며 연구해온 모든 것들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성이 많이 들어간 책임을 반박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정성이 많이 들어간 만큼 일독의 가치는 매우 높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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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왜곡의 역사 - 성서비평학자 바트 어만이 추적한
바트 D. 에르만 지음, 강주헌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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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는 그리스어 신약 성경에대한 학문적 열정을 가지고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신학도이다. 나아가 저자가 인생을 거의 성경의 영향아래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단순히 반 기독교도라거나 무신론자의 입장이 아닌 그 어느 기독교인 보다 더 성경을 많이 읽었고 연구했다는 점 말이다. 한마디로 저자는 철저한 기독교도이며 동시에 그리스어 성경 전문가이다.  

그런 저자가 성경의 문제점, 아니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경을 교리로 살아가면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기독교의 리더들과 성경의 말씀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성경의 독자들에 대한 깨달음을 주고자 의도한 글이다.  저자는 성경을 연구한 고증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는 점도 기억해두어야 할 일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성서무오설이라는 믿음과는 달리 성경의 이곳 저곳에서 좌충 우돌하는 내용들이 발견되고 있음을 일목 요연하게 제시하고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아가 성경을 어떻게 읽는 것이 성경을 올바로 읽는 방식인지도 잘 알려준다. 흔히 수직적인 독서보다는 수평적인 성경 읽기를 권하고 있다. 저자의 이 주장은 당장에 성경의 문제점들을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을 명료하게 전달해준다. 수평적인 성경 읽기란 서로 다른 책에 쓰여 있으면서 같은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들을 상호 비교하여 읽어보라는 권유이다. 즉, 한 복음서의 어느 부분을 읽고 다른 복음서에서 같은 이야기를 찾아 읽고 대조해보는 것이다. 이런 면밀한 비교하여 읽기는 성경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전혀 이질적인 내용을 감지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기독교도이든 기독교도가 아니든 누구나 쉽게 해낼 수 있는 방법이다. 

이렇게 수평적인 독서를 하게되면 성경의 모순을 아주 쉽게 찾아내는데 성공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성경의 권위를 떨어트리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성경도 인간이 쓴 책이며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데이타 축적 방식이 당시에는 전무했고 성경을 쓴 저자는 다른 성경의 저자를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게다가 신약은 예수가 죽은 후 몇십년 뒤에 씌여지기 시작했고, 저자들마저도 불분명한 책이 더 많은 실정이다. 구전되고 구전되다가 어느 누군가가 기록물로 남긴 것이 신약성경의 성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설사 오류좀 있기로서니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성경의 진정한 모습을 왜곡하는 일이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맹목적인 셩경의 경외심은 이해의 경외심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무지의 경외심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그 위험함을 상상해보시라... 

성경은 무오하며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귀한 말씀을 생활의 규범으로 삼아 고통받는 사람을 돕고, 이웃을 도우며 스스로 신에게 떳떳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신자이든 아니든간에 과연 나는 예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가 이 책의 핵심이이라고 느껴진다. 이 책을 읽었다고, 성경이 그동안 알고지내던 그런 성경이 아니었다며 실망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의 진짜 모습을 보았다고 믿음이 흔들릴 이유는 전혀 없다. 이 책의 목적도 그런 것이 전혀 아니다. 저자는 유신론자이면서 이 책을 연구하여 섰고, 전혀 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는 성경에 죽고 성경에 사는 그런 신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셩경의 좋은 말씀을 따르며 살이가는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전에 죽고 경전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좋은 말씀을 진실된 마음으로 따르며 생활해 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참된 삶이란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 써있는 귀중한 말씀을 존중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고 살아가는 것이 더더욱 중요한 핵심이라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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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뿌리 - 오리엔트 문명과 구약성서
민희식 지음 / 블루리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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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뿌리'에 대한 리뷰를 적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리뷰를 쓰는 순간 종교에 와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종교에 관련한 도서는 읽어도 좋다고 본다. 꼭 종교에 대한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종교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단 한 번도 평화로웠던 적은 없었다. 평화를 외치는 이슬람교의 역사가 1400년이나 되었지만 이슬람의 역사가 실제로 평화로웠던 기간은 겨우 13년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구약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의 '사랑'과 등식을 성립하고 있는 '신약' 의 역사이래로 종교의 이름으로 평화가 곧잘 깨어졌다. 그 깨어진 역사적 비극으로 사망한 인간의 숫자는 냉전의 역사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건 숫자 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종교적인 이유로 한 쪽이 평화로우면 다른 한 쪽에서는 평화가 깨어지고 있었던 것이 지구의 역사였다.  

종교는 때로 평화를 깨트리는 역할을 하기도했고 평화를 지키는 역할을 하기도했다. 물론 평화가 깨어진 경우가 절대적으로 우세하지만 말이다. 지구를 대표하는 종교들은 다양하여 개신교, 카톨릭, 불교, 유대교, 힌두교, 이슬람교등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종교를 지구인들은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종교란 인간이 살아가는 중요한 삶의 기준이 되기도한다. 신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가 가르치는 교리와 절대자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갈 것이다.  물론 무신자들은 스스로의 좌우명이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다양항 종교가 있고 각기 다른 교리가 있지만 공통된 한 가지는 사랑, 평화일 것이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서로 돕고 친지나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된 이슈일 것이라 믿는다.  

성서의 뿌리는 구약성경에 대한 고증과 같은 책이다. 구약의 말씀들에 오류가 있는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물론 구약 성경의 말씀을 모두 진리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는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내용이기도하다. 종교의 뿌리가되는 경서에 대한 도전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학자들도 구약에 근거한 유적들의 발견과 출토된 유물들의 해석을 통하여 구약의 일부분에 대한 고증을 계속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때로는 구약의 내용이 다른 신화나 전설 혹은 설화등을 차용한 흔적들을 발견하기도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저자에 의하면 구약의 내용들은 새로운 것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주변 국가나 민족의 신화와 전설들을 각색하여 이름만 바꾼채 구약으로 재 탄생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종교인이든 아니든간에 종교학자의 연구에 따른 내용이 비록 민감하기는 하지만 충분히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바이다. 종교와 관련한 민김한 부분이므로 리뷰를 쓴다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책의 내용으로보아 일독의 가치가 높다고 여기는 바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막론하고 읽어보셔도 좋다는 생각이다. 미국의 성서 전문가들조차도 쉽게 인정하는 구약 성경의 내용을 유독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만 모르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듯 하다. 어쩌면 한국의 교회묵사들만 모르고 있거나 가르치지 않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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