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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과 퇴계사이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ㅣ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학교양총서 12
정우락 지음 / 경인문화사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조선의 선비를 일컬을 때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홈모하는 마음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신교(神交)라 칭하면서도 자신들의 생각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주저없이 진솔한 마음을 전했고, 이는 때로 의견의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흔히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라는 양대 산맥의 학문을 일궈낸 두 인물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는 대립각을 형성했던 학문과 사상의 두 거두로 각인되어 있는 듯 하다.
퇴계는 남명을 일컬어 노장에 병든 사람이라며 성리학적 비순수성에대한 질타를 했고, 남명는 퇴계를 향해 성리고담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빠져버린 비현실적 학문이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남명은 나라에 도가 시행되면 마땅히 나아가 자신의 학문으로 경륜을 펴고, 도가 시행되지 않을 때 초야에 물러나 스스로를 연마하고 닦는 것이 선비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이는 남명의 관점에서 보아 과거에 올라 청요직을 지냈던 퇴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이 된다. 한 편 퇴계의 입장에서 남명이 임금에게 올린 무진봉사는 너무 직선적이며 격하다는 점을 들어 남명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남명의 무진봉사는 당대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따뜸하게 지적함은 물론 방납제에대한 비판을 상당한 날카로움을 가진 글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이에 "뜻은 곧으며 말은 부드러워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충분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남명과 퇴계의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남명에게 학문은 현실적으로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반영이 되어야 하는 수단이었던 반면 퇴계의 학문은 순수한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측면이 강했던 것이다. 물론 성리학이 가르치는 정치의 덕목을 관리들이 잘 따라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기반으로 사용했더라면 문제가 될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은 초절 기개를 가진 선비만이 목숨을 걸고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관리들은 부패했고 특히 방납제도의 가혹함은 백성이 스스로 고을을 떠나 화적떼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르곤 했던 것이다.
남명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한계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군왕에게 날카로운 일침을 놓게되고 이는 퇴계에게는 신하로서의 무례함을 지적할 수 있는 여지를 준 것이었다. 학자이며 한 시대를 풍미한 조선 최고의 두 선비가 이처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그 배경을 이 책은 아주 잘 논술해주고 있다.
16세기는 성리학이 고도록 발전해가던 시기였다. 남명은 사물을 보면서 세상을 살피고자했고, 퇴계는 사물을 보면서 이념을 살피고자했다. 즉, 남명의 학문은 세상과 관계해야하는 반면, 퇴계의 학문은 그 순수성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를 원심력과 구심력의 차이라고 말한다. 학문을 널리 활용하고자 했던 남명과 학문을 안으로 향하게하여 이치를 궁구하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는 정신적 완성의 단계로 생각했던 학문에대한 견해의 차점을 말하는 것이다.
남명은 학문의 실천을 중시했고 퇴계는 부단한 토론이 학문의 생명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본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남명은 못마땅했을 것이다. 남명은 가장 중요한 것은 유교적 이념의 현실적 적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점에 관해서 남명은 퇴계를 비판하게된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해주는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수없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두 선비가 학문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전혀 다른 것은 아니었다. 두 선비 모두 '존천리 거인욕'이라는 선비로서 지향하는 바는 같았으며 본연지성으로 돌아가려했다는 점에서 일맥 상통하는 사상적 공통 분모를 가진다. 그 점에 관한한 서로에 대한 신뢰가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서로의 학문적 깊이나 군자로서의 높은 기개와 이상에 대한 존경심을 서로는 잃지 않았던 것이다. 퇴계가 남명에게 그토록 간곡하게 출사하도록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던 사실은 이를 방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남명의 인품과 학문의 깊이라면 조선의 관리로서 국왕의 정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실제로 남명이 출사하여 관직을 받았더라면 그 어느 관료보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를 피력했으리라. 이러한 남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언제나 퇴계는 물러나 처사로 자칭하며 은거해있는 남명의 재능을 안타까워했다. 국익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당대의 최고 선비가 썩고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두사람의 서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남명은 퇴계를 일러 백년신우百年神交라 했고 퇴계는 남명을 친리신우千里神交라 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고 서로를 비록 만난 적은 없었지만 벗으로서 인정했다는 뜻이다. 두사람의 생각은 비록 달랐지만 서로 정신적 사귐을 소중히했던 것이다. 퇴계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남명은 '이제 나도 가야할 때가 되었구나'하며 백년신우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의 말처럼 남명도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를 무작정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따라 따끔한 지적을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인품과 학문을 고스란히 존경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요즘의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친구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를 느끼게한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은 비록 생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어떤 벗보다도 서로를 흠모했을 일이다. 생각이 다르다하여 무조건 상대를 이기려하고 억누르려하며 인격을 모독하는 일을 서슴치 않는 근래 정치인들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는 고상함이 전해진다.
한가지 첨언하지만 두 선비가 모두 사망한 후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는 정인홍이라는 남명의 제자로인하여 서로 대립각을 무섭게 세우기 시작한다. 전후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난 후라면 그럴 이유는 없어보이지만 당시의 각 제자들은 국정의 권력과 맞물려있는 상황에서 서로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정인홍에 대한 오해가 풀려 그 후계들이 서로 화합하고 연구를 함께하는 건전한 활동을 해나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선조들의 깊은 학파적 갈등을 극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현실로 인식되곤 한다.
두 거두의 학맥을 공동연구한다거나 저술활동을 함께하는 분위기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겠다. 국민 화합의 장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계보를 이른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다보면 정말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아 읽으면서 소리내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남명과 퇴계라는 조선 최고의 선비들에 관련한 설화들이 정말로 흥미롭다. 이는 민중들의 의식속에 자리잡고 있는 두 인물들에대한 투영일 것이다. 과연 민중들은 두 인물을 어떻게 의식속에 투영시키고 있는지 직접 읽어본다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훨씬 더 경쾌하고 마음을 훈훈하게 할 것이다. 우리의 정녕 아름다웠던 선비들에대한 연구가 더룩 활발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을담아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