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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남명 조식 1 - 남명 전기 자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ㅣ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학교양총서 13
최석기 엮음 / 경인문화사 / 2009년 6월
평점 :
남명에 관한 글을 읽다보니 점점 그의 학문과 사상에 빠져들게된다. 이는 요사로운 기운에 의하여 맹목적으로 홀리는 그런 심취가아니다. 건중(健仲)을 알면알수록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 스스로 그의 고매함과 기절지최(氣節之最)의 의미를 더더욱 가슴깊이 느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재목그대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남명에 관련한 내용을 중심으로 엮은 책이다. 남명을 관직에 천거했던 인물들의 평과 사직소를 통하여 투영되는 남명의 사상 다시한 번 직시할 수 있다. 또한 사관의 매우 통찰력있으면서도 냉정한 평가들을 통하여 그의 인물됨과 학문 그리고 사상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남명이 출사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우리 백성들의 복이 적은 탓이라는 성호 이익의 평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남명이 출사하기를 바랬던 사람들은 군왕을 비롯하여 퇴계 황 그리고 이몽량과 기대승등이다. 그러나 남명이 관직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남명의 출처관과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살펴보면 쉽게 납득이 간다.
남명은 19에 이미 관직에 나서지 않기로 결심한다. 출처관을 가지기에는 다소 어린 나이인 듯 보인다. 그만큼 남명은 어린 아니에도 불구하고 학문은 물론 국내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남명이 19세가 되던 해는 기묘년으로 정암 조광조의 부고를 접하게된다. 조광조가 누구던가. 사림 최고의 선비로 오직 백성을 위한 왕도를 펼치기를 일생의 숙원으로 삼았던 분이셨다. 그런 정암선생이 역모로 몰려 사사되는 불운을 격게된 것이다. 바로 기묘사화가 그것이다. 중종은 조광조를 신하로 거느리기에는 부족한 임금이었다. 신하의 그릇이 너무 큰 탓이련가... 더불어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세력의 후예들은 이를 몹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중종 사후 중중의 맏아들이었던 인종이 등극하여 기묘사화에 희생된 선비들을 신원하고 현량과를 복원하는 등 선정을 펼치려 했으나 병약한 탓에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8개월만에 붕어한다. 조선은 여러가지 면에서 불운했다. 제대로 된 임금을 만날라치면 그만 일어 터지곤한다. 인종에 이어 윤원형일파와 문정왕후는 나이어린 명종을 등에 업고 학정을 일삼게된다. 바로 대윤 일파를 모조리 숙청하며 선비 200여명에게 죽음을 내리거나 먼 귀향을 보내게된다. 조선의 정부는 어린 명종을 앞세워 썩을대로 썩어가고 있었다.
일이 이지경이면 임금이라도 좀 현명해야 하겠지만 명종 또한 어리숙하여 정치의 정자로 잘 모르거니와 문정왕후의 치마바람에 힘을써보지 못한다. 그러나 내직의 관료들은 바짝 엎드려 비위 맞추어주기에 급급하며 외직의 관료들은 부정 축재에 혈안이되어 매관 매직은 말할 것도 없고 업자들과 짜고 방납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대는데 급급했으니...나라의 꼴은 말할나위 없이 부패하고 있었다.
남명은 이러한 국내 정세에서는 제 아무리 관직에 나가도 소용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의 눈과 귀는 멀어있고, 신하들은 사리을 밝히기만하며 세월을 축내고있고 죽어가는 것은 백성이요 방납의 폐단으로 하루 아침에 없어지는 마을은 전국적으로 셀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과연 이러한 국내 정세에 제대로된 그 어떤 선비가 출사하여 선정을 펼수있을 것인가...백성을 그토록 사랑했던 퇴계 이황마저도 신하된 도리로 예만 갖추어 관직을 제수받기가 무섭게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남명은 비록 은거하여 참봉과 주부2회의 관직을 받았지만 고사했고 단성 현감직을 받지 않았다고해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놓았던 것은 결코아니었다. 단성현감 사직소를 보면 그가 얼마나 군왕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 것을 주장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도 다른 선비가 같은 소를 올렸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명이 순수하고도 사심이 없으며 고매한 유일의 조선 선비라는 점을 온 세상은 물론 군왕도 잘 알고 있기에 4년이라는 치열한 공방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명이 이처럼 70평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직을 고사하고 은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의 불운이요 백성의 불운이라...거대한 고목이 100여년 동안 벌레가 좀먹어 그 진액이 다 빠져버렸으므로 언제 어느 바람에 쓰러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조선의 위기 의식을 끊임없어 일깨우는 상소를 올려봤지만 군왕들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군왕의 불행인가, 백성의 불행인가, 신하의 불행인가...조선은 그렇게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조식은 끊임없이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제자들을 길러냈다. 차후에 있을 국란을 대비한 조식은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 죽유 오운, 이로, 이정, 조종도등의 빛나는 의병장들을 길러냈다. 약포 정탁은 일제와의 결전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거부되고 화친하자는 중론에 다다르자 그만 활복으로써 항의했다. 그들의 활약이 없었던 들 조선의 백성들의 안위는 훨씬 더 위태로웠을 것이다. 임진왜란의 승부는 바로 의병장들의 활약과 수군 이순신장군의 선전에 힘입은 바이다. 이순신 장군이 모진 고문으로 병이들어 죽음이 이르르기 직전 그를 구명하여 다시금 수군 통제사로 활약하도록 한 사람은 바로 정탁이었다. 그결과 이순신은 12척의 군선으로 왜적 250척을 맞아 물리치고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처럼 남명의 제자들은 임진란 승리의 주역들이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학문을 하는 것이 남명의 철학이었다. 그의 학문은 실천에 있었던 것이다. 고담준론이 아니라 백성과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그는 이상향으로 삼고 학문에 정진했던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남명의 사상은 현대에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바이다. 당대의 조선이나 현대의 우리가 지향해야할 덕목은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