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풍속사 2 - 조선 사람들, 풍속으로 남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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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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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풍속사 2 - 조선 사람들, 풍속으로 남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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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풍족한 시대가 절대로 아니었다. 민초들의 삶은 언제나 고단했고 많은 전쟁으로 더욱 황폐했다. 조선 풍속사는 '취병'과 '산수유람'등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조선 백성들의 일상을 그려내는 소재들로 구성되어있다. 삶의 모습들을 고스란히 전해주고있는 생업편의 어부, 옹기장이, 짚신, 엿장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가슴이 저미어 온다. 젊은 현대인들에게는 더없이 요긴한 학습의 장이 마련되어 있다.  

불과 1980년대 만해도 버스안에서 어린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아이 어머니들이 있었다. 당시만해도 그것이 흉이되지 않았고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젓병있었다면 대신 물리면되었겠지만 젖병이 없다. 있었다해도 분유를 사서먹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분유가 있아해도 버스안에서 그걸 알맞은 온도의 물로 분유를 희석시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도 않았다. 버스안에서 여하튼 젖병을 물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젖을 물려야했고 어린 아이는 엄마의 젖을 마음껏 먹고는 젖꼭지를 문채 엄마의 품에서 그렇게 잠이든다. 

요즘 이런 말을 하면 이거 변태가 되는 거이 아닌가? '젖 먹이기, 아들 낳은 여인의 특권' 이라는 내용이 많이 와닿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여하튼 조선의 여인들은 젖가슴을 드러내고 외출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음이 고스란히 화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요즘 어디 상상이나 되는 소린가?? 미틴~ 짖이다. 시대의 변화는 사고의 변화를 낳고 사고의 변화는 한때 자연스럽던 일을 미틴짖으로 변모시킨다. 그러나 젖을 물리던 가슴이 삶의 현장에서 사라져가듯이 한국인들의 따듯한 정서도 덩달아 자취를 감추고 있는 현실이 매정하다.

한 때 매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국인들의 식품 하나가 있었다. 바로 견공. 견공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에대해 외국에서는 물론 국내의 일부 인사들도 매우 마뜩해하지 않는다. 책에 의하면 견공을 식품으로 사용하던 역사는 중국의 진나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복날 개를 잡아 충재를 막는 행사의 하나로 견공을 식품으로 사용했다는 실록이 '사기'에 실려있다고 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조선의 정조대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올랐다고한다. 견공의 요리는 시시한 요리가 아니라 조선의 왕실에서도 중요한 행사에 사용하던 중요 식품이었다. 옛날에는 地羊湯(지양탕)이라하여 우리 고유의 요리법으로 전해온다. 옛날에는 dog를 땅의 양(地羊지양)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더더욱 흥미로운 기록은 지양탕은 성균관 유생들의 별미로도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유생들에게 특식으로 매달 1일과 6일이 드는 날에 아침 식사에 대별미로 지양탕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외국의 어느 배우가 한국의 지양탕을 두고 너무 거친 표현을 사용하며 지탄하던 일이 생각난다.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이자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타국의 음식 문화를 평가절하시키는 일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한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일은 조선의 성풍속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의 성문화는 지극히 폐쇠적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리면서 변화하게되는 가족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이전까지만해도 조선의 혼인 제도는 처가살이혼이었다. 남편이 처가에가서 살고 아이들도 외가에서 탄생하고 양육되던 문화였다. 살질적인 가부장적 권력이 아직은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 17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시집살이혼으로 변모한다. 자연스럽게 여성이 남성의 지배하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여성들이 집안에 폐쇠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자신의 표현에 절대적인 제약을 받게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여성 주도적 성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오로지 남성의 전유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조선의 여성과 춘화도의 관계는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여성 주도적 성의 표현이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어보인다. 

신중치 못했거나 신중할 생각이 없거나.. 

이 책에서 한가지 못내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는 한 점의 춘화도를 소개한다. 여성이, 그것도 상복을 입은 여성이 늦은 밤 촛불에 의지하며 은밀하게 춘화도를 감상하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한국의 미술사학자 였던 오주석과의 일화도 함께 소개한다. 

저자가 쓴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를 보고 오주석이 전화를 햇다고한다. 오주석은 저나가 책에서 소개한 신윤복의 그림은 신윤복이 직접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위작이라는 뜻이었던 게다. 오주석이 신윤복의 기법과 어긋나는데가 있다고 주장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오주석을 만나 위작설을 직접 듣고싶었으나 오주석이 작고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쓰면서 신윤복이나 김홍도 같은 조선의 위대한 화가들이 춘화도를 그렸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고 적고있다.  

그러나 미술사학자 오주석이 정녕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하는 의문이든다. 오주석이 누구던가. 오주석은 특히 김홍도의 미술연구에 관한한 한국의 지존급이다. 당연히 신윤복의 그림에 대해서도 상당한 연구 성과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지금껏 학계가 그림의 주인을 오인하고 있었던 작품의 정확한 주인을 찾아냈는가 하면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예술을 완벽하게 학문적으로 연구해낸 유일한 미술사학자였다. 조선의 미술사에 과연 오주석을 능가할 수 있는 학자가 과연 누구던가... 

그런 학자가 마뜩지않다고해서 혜원의 그림을 혜원이 그린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을리가 없다. 철저한 필법과 자료를 바탕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구 성과를 거둔 인물이 오주석이다. 자신의 노력과 명성에 먹칠 할 수도 있는 주장을 할 인사가 아닌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오직 하나. 한국의 미술사를 완벽하게 연구하여 세상에 내놓는 것이 그의 염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 오주석이 직접 전화를하여 위작여부를 언급했다면 같은 학자로서 바로 달려가 오주석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토론을 거쳤어야한다. 이것이 학자로서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던가. 학자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에 앞서 한점의 의구심을 남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학자가 단서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했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정신이 결여된 태도이다.  

젆화를 받은 시점이 2001년이라고 했다. 오주석님이 타계한 것은 2005년이다. 그렇다면 뜻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찾아가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시간적 여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를 무시한 것이다. 오주석이 어느 글에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했을 것으로 본다. 저자는 그 글을 찾아볼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오주석은 말로만 미술사학자가 아니다. 전녕 미술사학자가 바로 오주석인 것이다. 저자는 그것이 누구였든 간에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없없었다는 질타를 들어도 싸다.           

이점을 제외하면 전문가도 아닌 한문학자께서 글을 쓰느라고 애 많이썼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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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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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형 골수분자, 고미숙, 나는 그 몰입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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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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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에서 애초에 느낀 것이지만  고미숙은 골수분자라는 느낌이다. '열하일기---' 에서도 고미숙은 온전한 연암이 되어있었다.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이다'라는 우정론과 맞아떨어지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러한 고미숙의 열정과 몰입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에서 그녀는 온전한 연암이되어 있었고, 그러므로 열하일기를 마치 연암과 마주하는 느낌으로 접할 수가 있었다. 연암과 독자간의 간격을 최대한으로 좁혀준 매체, 아니 독자를 다이렉트로 연암을 만나고 있다는 착각을 일이킬 정도로 그 역할은 대단히 컸다. 이 점은 고작가가 아니었더라면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부분일 것이라 느낀다. 고작가는 정말 몰입형이며, 완벽한 골수분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골수분자가 마음에 든다. 비록 몰입한 나머지 그 옆을 바라보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해도 나는 그 몰입이 좋다. 그리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 골수분자가...

 골수분자의 원심적 시각이 남기는 한계...그러나...그 가능성...  

고작가는 임꺽정에서도 몰아일체의 형식을 보여준다. 이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미 출판 협회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임꺽정]의 안내서이니 말이다. 이처럼 몰입의 골수분자가 되다보니 안에서 원심력만을 발휘하게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보인다. 그 예로는 고작가는 청석골을 추방된 아니 이탈한 마이너들, 결국 도망자들의 막다른 거점이자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이 말은 지극히 반박의 여지가 없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느끼는 막다른 골목에는 고작가가 말하는 거점이 없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대학을 가기위해 죽어라 공부하고, 대학에서는 학점에 목숨을 걸며, 그리고는 백수가된다. 이게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이다'  --13쪽--   

'고로 우리시대의 마이너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마이너라는 낡은 습속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형식을 창안 할 수 있어야 한다.' --56쪽-- 

임꺽정의 시대적 배경은 사실상 요즘이나 크게 다를 바는 없다. 빈부의 격차가 매우 크며, 지배자(기득권)와 피지배자(농공상), 즉 요즘으로 말하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역사적 판박이나 다름이 없던 시대였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막다른 골목이 문제가 된다. 임꺽정의 시대는 막다른 골목에서도 꼬뮌을 형성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다시말하면 고작가의 말대로 타자를 수용하는데 거부감이 없던 시대였다. 그들은 타자를 몸으로 부딪히며 서로를 이해한다. 그들의 방식은 생각과 행동의 급간차이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현대는 사고와 행동간의 시간차가 너무크며 그러므로 온갖 생각이 들어차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이질적 문화의 변화속에서 현대의 마이너들이 만나는 막다른 골목은 당시의 골목과는 거리가 너무나 요원하기만 하다. 

우선 꼬뮌을 형성할 수 없다. 우선 자본의 시대적 성질이다. 당시의 시대는 자본을 따로이 필요로하지 않았다. 꼬뮌을 형성하는데 웬만한 기술을 보유한 마이너의 인물들을 청석골로 데려오기만하면 된다. 시대적 조건으로는 전혀 무리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마이너들은 철저한 단독이다. 그러므로 꼬뮌을 형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은 88만원 세대이거나 아니면 백수들로 꼬뮌을 형성할 수 있는 여력도 없다. 가장 요긴한 자본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로는 마이너들의 미래이다. 이 책의 등장 인물들은 본디 가진 것이 없었다. 게다가 희망도 없다. 어찌어찌해서 한밑천 확 잡아서 신분 상승도하고 권세가들 부럽지 않게 잘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야심을 가질 수 있는 시대적, 사회적 여건이 애초에 되어주질 못했다. 신분 자체의 제약이 그것이다. 그러니 사고와 행동 사이에 시간차가 없어도 되는 좋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현대와의 차이점이라면 큰 차이점이 될 수 있다. 현대는 쿵푸를 하면 그것이 곧 부를, 지위를 약속하는 사회이다. 그에 대한 제약적 신분사회도 아니니, 그 가능성은 두령들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이러한 신분의 변화에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이 오히려 꼬뮌을 형성하는데 장애물이 되어주고 있는 사회가 현대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은 조선의 마이너들과는 다르다. 조선의 마이너들에게는 미래가 없으며, 필요에따라 3일 잔치를 벌이고 먹어줘도 되는 마이너들이지만 현대의 마이너들은 이루기 힘든 희망의 불씨가 그나마 남아있기에 꼬뮌을 형성하기 어렵다. 온전한 포기, 즉 가장 밑바닦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골수분자 고미숙의 희망을 찾으시라...

그렇다고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비록 외형적으로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고는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밀폐되어있는 막다른 골복이 아니냐고 말한다면 너무나 자괴적인 생각이다. 고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싶은 부분도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고 있다. 너무 골수분자라 잘 안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작가의 핵심을 마음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한사람의 독자인 나는 고미숙이라는 골수분자의 한계속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가능성을 말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이 사고를 좀 바꾸어주기만 하면된다. 자본도, 단독적 추진형태도 모두 바꾸어주면 가능한 일이 된다. 그리고 쿵푸를 하는 것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이 쿵푸를 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작가처럼 말이다. 사실 고작가도 알고보면 마이너였다. 그런 마이너가 이제는 메이저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이너로서 꼬뮌을 형성하고, 몸으로 부딪히면서 앞길을 헤쳐간 대표적인 마이너가 고작가이다. 사고의 전환이란 무형에서 유형의 본질속으로 탐구해가는 것이다. 무엇을 탐구하는가? 바로 자신이다. 자신의 쿵푸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저기저...두령들이 그러했듯이...그리고 마이너들끼리 뭉치고 뭉치는 사회적 성향을 가꾸어가야 한다. 현대의 사상적 배경을 고려할 때 대단히 엄청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반드시 결실은 오고야 말것이다. 고작가가 마이너였지만 메이저가 된 것 처럼...마음먹고 이제 찾아 나서면 된다.  내가 뛰게될 마이너 리그의 거점을 행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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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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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웃음은 덤이다. 고미숙과 연암이 잘 버무린 지혜를 우리의 도가니에 담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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