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의 간단 소개

소야곡, 세레나데: “남자가 밤에 연인의 창 밑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의 세레나데는 serenade() serenata() Serenade()이탈리아어로 '저녁'을 뜻하는 'sera' '옥외에서'란 뜻이라고 한다. 'al sereno'에 그 어원을 둔 세레나데는 기악과 성악 모두에 적용되는 포괄적인 음악양식으로 18세기에는 소규모 오페라를 뜻했다. 기악에서의 세레나데는 18세기 중엽에 발달한 양식으로, '카사치오네', '디베르티멘토', '노투르노'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고 하는데, 현악기나 관악기, 혹은 작은 앙상블(실내악 규모)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여러 개의 악장이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모짜르트의 '작은 소야곡'(Eine kleine Nachtmusik)이 이 장르에선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그 밖에 19세기에 들어와 드보르자크, 엘가, 차이코프스키 등이 같은 제목으로 작곡한 '현을 위한 세레나데'또한 널리 사랑받는 작품들이라고 한다.   

 

3) 그림 속 이야기

위의 두 주인공을 등장 인물로 하고 있는 신화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달의 여신인 셀레네는 문득 어느 날 밤, 천상의 거주 지역에서 아무도 모르게 땅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소유 중 하나인 Mount Latmus였다. 

그렇게 사뿐히 내려와 월광 아래 여유롭게 산책을 하다가 그만..... 한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전신이 얼어 붙은 듯 넋을 잃고 만다. 어느 나무 아래 쯤을 지나려는데... 글쎄 대리석 조각 하나가 아름다운 자신의 달빛을 반사시키며 감히 女神의 눈을 부시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달의 신 셀레네를 달빛으로 매혹시키다니... 겁 상실...)  

 

 처음에 셀레네는 “에이,  대리석 조각상 이겠구만...” 하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분명 숨을 들이쉬고 내 뱉는 모습에서 호흡이 느껴지고 있었다. 대리석상이 숨을 쉴리는 없고....
이는 분명 사람의 형상이 아니던가!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어느 양치기 녀석이 태만의 극치를 달리며 자신의 소유지에서 허락도 없이 잠들어 있던 것이다...  

그런데... 겁 상실한 이 양치기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양들은 방치한 상태로 돌보지 않아 이러저리 흩어져 있고, 언제 어디서 들짐승들에게 잡혀 먹힐지 모르는 상황이다... 
저런 저런.... 그렇게 걱정을 하며 좀 더 다가가 그녀는 엔디미온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본다. 

순간 그녀는 차가웠던 자신의 심장에서는 따듯한 온기가 돌시 시작했으며, 가슴 또한 점점 세차게 뛰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밤만 아니었어도 그녀의 양 볼은 붉은 홍조로 가득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분명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라는 것이었다. 인간적 감정에 면역되지 않아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그녀는 엔디미온의 눈부신 모습을 보고는 첫 눈에 반해버린다.

달의 여신이 다가와 자신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있는데도 이 녀석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이상스런 느낌에 양치기가 가만히 눈을 떠보니,

세상에나....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또 어디에 있을까.... 눈만 껌벅거리다가 그대는 누구시냐고 한 마디 말을 건네기도 전에 양치기는 사랑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녀도 양치기도 순식간에 서로를 알아보고는 깊은 사람에 빠져버렸던 것이었다.

양치기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늙지 않고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양치기는 달의 신에게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녀 역시 바라는 바 이므로 그 부탁대로 죽지 않는 영원의 잠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소년은 그 날부터 내내 잠만 잤다. 그리고 밤이 되면 여신은 내려와 엔디미온의 옆에서 누워 또한 잠을 잤다고 하는 그런 전설이다.

물론 그녀는 사냥, 동물 등의 神이기도 했기 때문에 소년의 양들을 잘 보살폈다고도 한다. 
 

 

4) 그림의 미스터리

(이 대목은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것 뿐이니 그림과 관련한 다른 진실을 알고 계시거나 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널리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이야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보고 있노라면 트리오종의 이 그림은 납득하기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신화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분명 그린 그림인데...이야기와 일치하지 않는 요인을가진 그림이라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그림과 신화의 이야기가 일치하지 않는 점이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인데, 그 어디에도 그림의 주인공인 女神 셀레네는 정작 그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 그것이다. 널부러져 잠든 양치기의 오른 편에서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양치기의 몸을 가리고 있어야 할 나뭇잎들을 옆으로 걷어 치우고 있는 이는 날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큐피드’일 것이다.

 지로데 트리오종은 청소년 쯤 되어 보이는 에로스를 그려 넣지만 주인공을 넣지 않은 그림으로 완성하고 만다. 물론 미완의 그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림의 완성도로 볼 때 미완일리가 없다는 해석을 더 강하게 만드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지로데 트리오종은 청소년 쯤 되어 보이는 에로스를 그려 넣지만 주인공을 넣지 않은 그림으로 완성하고 만다. 물론 미완의 그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림의 완성도로 볼 때 미완일리가 없다는 해석을 더 강하게 만드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던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궁금증 한 가지는 큐피드를 그려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다. 신화에 따른 등장 인물일수 있다는 것이고, 더불어 큐피드에게 한 가지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 인데, 셀레네가 양치기의 잠든 모습을 처음 바라보게 되는 순간,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황홀했던 장면을 우리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이 그 임무인 것이다. 그 감동의 순간을 느껴야 하는 것은 셀레네가 아니라 관객인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감동의 전달 매개체로 큐피드는 완벽한 캐릭터였을 것이다.

큐피드의 캐릭터는 짖궂을 뿐아니라, 장난 꾸러기에 호기심 덩어리이다. 마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할 나이인 청소년으로 자란 큐피드야 말로 이 그림에서 해야 할 역할로는 제격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큐피드의 등장은 그림의 주제가 ‘사랑’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꾸러기 큐피드로 하여금 나뭇잎을 걷어 내도록 그린 것은 양치기의 눈부신 몸매가 그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우리(감상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 일 것이다. 큐피드의 짖궂은 행동이 없었다면 나뭇잎에 가려진 양치기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감상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눈부신 누드를 과감하게 보여줄 마땅한 당사자가 바로 큐피드이니 어느 누가 트리오종을 탓 할 수 있겠는가..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정작 주인 공 중의 하나인 달의 여신 셀레네를 그려 넣지 않은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이 그림은 셀레네가 양치기에게 흠뻑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아니던가. 그런데 정작 그 주인공인 셀레네가 등장하지 않다니... 

 오해할 수 있는 여지는 그 옆의 인물이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인데, 그럴리는 없다. 분명 그 옆의 등장 인물은 큐피드이며, 큐피드가 평생 사랑한 대상은 프시케였다. 그 둘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는 것이 신화의 스토리이다.

그렇다면 큐피드를 등장시켜 엔디미온의 아름다움을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데는 성공 했지만 정작 아름다운 달의 여신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 것인가....

트리오종이 그 정도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림을 그렸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토록 아름다운 달의 여신을 왜 그려 넣지 않아 마치 김빠지는 그림으로 전락시키고 만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같은 주제의 다른 그림들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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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1년도 더 된 어느 날, 어느 곳의 홈페이지에 음악과 관련하여 제가 섰던 글을 이곳의 페이퍼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사진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바흐선생님의 막내아들께서 작곡한 'Endimone'이라는 음반의 겉 표지가되는 원작입니다. 

 

 

 

 

 

 

 

 

 지로데 트리오종 作   The Sleep of Endymion 

 

몇 년 전 어느 날....
0 0 0 의 “새음반 소식”란의 입고 예정 음반을 살펴보던 나는 내내 시선을 이끄는 매력적인 이미지와 마주하게 된다. 그림이 시선을 끌었던 이유는 오래 전 읽은 적이 있는 어느 책에서 묘사 해 놓은 것과 똑같은 장면이지 않은가!

처음에는 “이것 참 신기하구나” 생각하며 자세히 들여다 보게되는 데, 그 그림은 다름 아닌 그리스 신화의 어느 내용을 한 장면의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었다. 그림에 대해 잘 아는 바도 아니고, 그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내 자신이 다만 뻘쭘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아...내가 그림에 너무 무지하구나” 하고 한탄을 하고 말았다.   


 음반 정보 

J. C. Bach -Endimione
Vasilijka Jezovsek (soprano) Diana
Ann Monoyios (soprano) Nike
Jorg Waschinski (male soprano) Amore
Jorg Hering (tenor) Endimione; Vokal Ensemble Köln
Cappella Coloniensis/ Bruno Weil
Deutsche Harmonia Mundi 05472 88525-2 (two discs, full price, 1 hour 46 minutes) 1999  


cf) 위 음반이 워낙 인기가 없는 음반인지라 검색이 되다가 안되다가 그럽니다. 분명히 처음에는 검색이 되었는데,  다시 알라딘 상품 넣기를 하려고하니 검색이 안되어 이미지로 대신합니다.

 

페이퍼 글의 구성과 순서    

1) 화가  

2) 그림 속 주인공   

3) 그림 속 이야기  

4) 그림의 미스터리

1) 화가, 트리오종

그림의 이름은 ‘ The Sleep of Endymion’ 이고, 프랑스의 지로데(Anne-Louis Girodet, 또는, 지로데 트리오종 Anne-Louis Girodet-Trioson, 1767~1824 )가 그렸으며,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지로데의 1791년 작품인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화가 지로데 트리오종은 낭만적 반항아(romantic Rebel)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붓 끝에서 시작한 달빛은 정말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어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는 많은 그림에서 저렇게 눈부신 달 빛과 햇 빛을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 매우 아름답다). 트리오종은 자신만의 기법을 이 그림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림을 그린 후에 광택제를 칠 하는 방식이 아니라 혼합재의 질을 바꾸어 표면의 빛 반사에 대한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효과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는 ‘지로데 트리오종’만의 독특한 기법이라고 한다. 그런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2) 그림 속 주인공
① 셀레네(Selene):
티탄족(거인족)인 하이페리온(Hyperion)과 테이아(Theia)의 딸이자 태양의 神 ‘헬리오스(Helios)’와 새벽의 神 에오스(Eos)의 자매로, 달의 女神’일 뿐만 아니라 사냥, 야생 동물, 처녀성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 Artemis)와 동일시 된다.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 Diana)와 동일시되는 神인데, 그렇게 되면 제우스와 레토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아폴론과 남매지간이며 올림포스 12신의 두 번째 세대가 된다.
예로부터 달은 동식물의 번식이나 마술과 관계 있는 것으로 여겨져 헬레니즘시대에는 영혼의 거처로 생각되었다.

② 엔디미온(Emdymion):
엔디미온에 대한 주장들은 서로 상반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그는 양을 치는 목동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떤 이는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Elis 의 첫 번째 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불멸의 생명을 준 자는 셀레네가 아니라 제우스라는 상반되는 설도 있는 실정이다. 또한 그가 양을 치던 ‘Mount Latmus’는 흔히 그리스의 해안 부근인 Caria 로 알려져 있는 반면 어떤 이는 Troy의 어느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들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이야기 꾼들이 각기 이야기를 보태고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난 혼란스러움이라 할 수 있다.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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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바티칸의 금서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4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500년간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화두를 던진 책, 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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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바티칸의 금서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4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마키 아벨리즘이라는 표현이 있다. 국가의 유지 발전을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좋다는 정치적 이념을 뜻하는 말이다. 냉정하고 차가운 정치의 현실을 그 어떤 고전보다 잘 전달해주는 책이 바로 군주론이다. 군주가 더 이상의 전쟁과 폭력을 예방하기위해서 차라리 가혹한 한 번의 폭력으로 모든 가능한 폭력과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 그 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즘인 것이다.  

마키 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을 음미하기 전에 한가지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마키 아벨리는 이 군주론이라는 책을 과연 왜, 그리고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저술하였는가이다. 이 책을 저술하게된 동기는 지극히 간단하다. 마키 아벨리가 권력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 책을 저술하게된 이유이다.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자신의 유용함을 알리기 위한 저술인 것이다. 물론 그는 군주의 마음을 얻는데는 실패했다. 마키아벨리의 이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면 마키 아벨리는 어떤 것들을 근거로하여 이 책을 저술하게되었는가?  이 또한 매우 간단한 문제이다. 마키 아벨리는 피렌체의 군주를 위해, 아니 자신의 권력 확보를 위해 역사를 활용한다. 군주론의 대부분은 마키아벨리보다 앞섰던 시대의 역사를 분석한 결과물들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마키 아벨리는 자신보다 앞선 역사들을 반추하고 그 결과를 철저하게 분석했던 것이다.

마키 아벨리는 알렉산더가 다리우스 왕국을 정복한 직후 사망에 이르게되지만 결코 반란에 봉착하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실을 일 예로 설명한다. 마키아벨리는 그 이유를 투르크와 프랑스의 통치 유형에 따른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분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역사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방증이며 군주론에서 다루고있는 주장들은 조목조목 이러한 역사의 인식에서 온것 들이다. 

군주론을 읽으면서 우리가 군주론에 대한 비평을 가하기 전에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의 역사 인식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의 토대를 둔 것이 역사의 분석이었던 것 처럼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도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군주론이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지난 500년간 세계 역사 리더들의 지침서였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독자에게 역사인식이 그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역사의 올바른 인식은 우리의 현재를 형성하고 있는 근간이며 그 현재는 우리의 미래와 직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역사의 철저한 분석과 인식으로부터 군주론이라는 고전을 남겼듯이 우리 또한 우리의 역사 혹은 세계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인식을 형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한다.  

나아가 마키아벨리즘을 낳은 군주론의 저자는 우리에게 커다란 정치적 화두를 던진다. 결과가 좋다면 과연 존재하는 모든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한 번의 단호한 폭력과 처절하고도 완벽한 전쟁으로 더 많은 전쟁과 폭력, 그리고 사회적 혼란을 종식 시킬 수 있다면 군주는 당연하게도 그 한 번의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무차별 사용해도 좋은가?   

물론 군주론이 말해주고있는 군주로서의 중요한 덕목들 중 배울 점이 있다. 현대의 정치가와 과거의 군주가 가져야할 자질과 조건들은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분명히 현대의 정치가들에게 요긴한 내용들일 것이다. 시대는 변했으나 정치라는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부의 정치가들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이용할 수도 있고, 이 책임을 마키아벨리에게 떠널길 수 있는 요인들도 상당히 많다고 본다. 부디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악행을 마키아벨리에게 떠넘기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더불어 정치인이든 정치인이 아니든간에 군주론이 던져주는 화두가 있다.

군주론은 말하고 있다. 군주는 시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도덕적 방법을 던져버리고 냉정하고도 치열한 승리의 공식을 택해도 좋다고...우리에게 던져주는 마키아벨리의 화두에 정답은 존재하는 것일까...우리가 군주론을 마치고 생각에 잠겨야할 부분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근거로 사고를 해야하는 것일까...다양한 정의론이 있을 것이고, 도덕과 왕도정치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또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우리의, 아니면 타자들의 역사이다. 마키아벨리가 역사적 실증을 통하여 군주론을 저술하였듯이 우리도 역사를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여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도다 훨씬 좋은 사고의 도구들이 존재하고있다. 사고가 누적되어왔고 정의론도, 도덕론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던 복지론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나아가 새로운 국가론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지만 마키아벨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숙제의 답을 내리기란 요원하기만하다. 이는 군주론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야하고 정치의 일선에 있는 정치가들이 스스로 찾아야할 과제인 셈이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마키아벨리의 의견에 적극 동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의 군주론은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숙제를 던져주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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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의 저서들을 읽다보면 우선 그의 깊은 노력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전개시키는 정말로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되기 때문이다. 다수의 독자들은 도킨스의 이러한 노력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또한 일부의 독자들은 도킨스가 심오한 연구와 과학적 논거들을 내놓는 만큼, 상대적으로 그를 저주할지도 모른다.  

흔히 그를 진화 생물학자라고 칭한다. 물론 저술활동을 왕성하게하는 그를 작가라고도 한다. 그 중 이기적 유전자는 1976년 저술된 책이다. 우리나라의 학생들과 성인들에게 그토록 회자되던 바로 그 책이다.

 

 

 

 

 

 

 

이상의 책들을 보면 과연 도킨스가 우리 한국의 서점가를 그 얼마나 장악했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당시 이 책을 읽지 않은 학생들이 있다면 정말 독서를 싫어하는 학생들 뿐이었을 것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그야말로 서점가를 강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전자에대한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점도 그러하겠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도킨스라는 사람의 철저한 연구정신에 있을 것이다.   

도킨스의 저서에서 공통적으로 느끼게되는 점이 바로 그의 성실성이다. 자신의 주장에 완벽함을 기하기 위한 그의 부단한 노력, 아마도 이러한 도킨스의 장점이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한가지 주제에대한 도킨스의 완벽주의, 아니 지신의 주장을 위해서 그 누구도 쉽게하기 힘든 연구와 자료의 수집을 총제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물론 독자는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인간및 생명체의 다윈주의에 흠뻑 빠져들었을 것이다. 

다음의 대표작은 '만들어진 신' 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그의 노력이 그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된다. 만들어진 신의 서론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다. 창조론에 반박하는 주장들을 일일이 기록하며 설명하다보니 길어졌던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단지 도입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입부만으로도 왼만한 독자들을 반쯤은 설득하고도 남음이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도킨스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서 있는 힘껏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모두 쏟아내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정렬과 의지의 에너지가 독자인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아...도킨스라는 저자의 용솟음치며 뜨거운 혈기가 전해온다. 물론 절대적인 다수가 읽어줄 책은 아니다. 다만...도킨스의 연구와 집념이 그 얼마나 가상하며 노력의 결실인지를 느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접근이 어려운 일일 것이다. 또한 도킨스는 다수의 독자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도한다. 왜냐면, 그는 신성한 창조론을 철처히 파헤쳐버린 독종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도킨스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정말 끈질진 사람이다.  눈먼 시계공이라는 저서는 또한 번 도킨스의 독자들을 놀라게한다. 도킨스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시종일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렇게도 같은 내용을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전개시킬 수가 있는 것일까...이점은 정녕 도킨스를 읽어본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의문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저서만으로 부족했다고 느낀 것일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저서 중 위에서 언급한 어느 한권만이라도 읽어본다면 도킨스의 주장에 설득되기에 충분하다. 그만큰 그의 저서들은 자체로 완성도가 매우 높으며 질적으로 우수한 저술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이라는 저술을 새롭게 내놓는다. 그렇다고 우려먹기식이냐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논제의 핵심은 같을지라도 방법론적 접근이 전혀다른 저술들이다. 눈먼시계공은 이기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철저란 과학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연구의 깊이는 우리들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어 깊이 깊이 파고들어간다. 적지 않은 분량의 저술을 이토록 깊숙히 파고든 다위니즘을 새로운 형식으로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도킨스는 여기에서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끈임없이 새로운 저술들을 내놓는다. 이런 사람 참 지독한 사람이다. 자신의 의지를 절대로 꺽을 줄을 모른다. 일생동안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분명한 것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도킨스와 같은 학자, 혹은 저자를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 신념은 일생을 두고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생물학적 진화의 이론 뿐만이 아니다. 설계되지 않는 누적된 진화와 우주론 뿐만이 아닌 것이다.  

오죽했으면 왼쪽과 같는 책들이 등장하게된다. 책에 의하면 도킨스는 도전자이다. 신에 대해 도전장을 들이 민 망상에 사로잡힌 인간이라는 것이다. 감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도전장을 내밀다니...도킨스는 있을 수 없는 불경죄를 저지르고 진리를 외면한 망상자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갈등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고 본다.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 무신론자이거나 범신론자일 것이다. 아니면 도킨스의 죄가 적잖은 관계로 이를 반박하기 위해서 읽어주는 신학자 혹은 신자이거나...이다. 

신의 존재를 단순히 종교적인 갈등으로 이해하기에는 시대 정신으로보아 부족함이 있다고 여기는 바는 다음과 같은 논거를 갖는다. 과거부터 신 중심의 기독교적 사상이 서구를 지배해왔다. 신 중심의 성스러운 종교가 겪어온 역사는 대부분 피로 얼룩져있는 것을 또 누가 부인 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도 종교적 갈등은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엄중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때가 이미 지나버렸다. 기독교 중심의 서구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인간을 지배하게된다. 대 항해 시대라 불리는 식민지 약탈의 시대가 그것이었다. 과연 지구상의 그 어떤 대륙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가. 아프리카의 빈곤은 수탈과 잔인함으로 얼룩져 그 흔적들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어떠했던가. 신의 이름으로 서구인들이 빼앗은 목숨이 식민시 시대 원주민들의 90%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약탈의 선봉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었고 신의 이름이 함께하고 있었다. 과연 이것이 신이 원하는 바였던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이 믿고있는 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공포스러운 존재이며 절대로 인간과 함께해서는 안될 존재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신의 존재가 오히려 지옥처럼 느껴졌던 사람들을 생각해보라...누구에게 천당이고 누구에게 지옥이겠는가..

그리고 그 후예들의 삶은 또 얼마나 고단하던가....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우리가 신을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이유들이다. 역사는 현대를 낳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현대는 그렇게 미래를 생산할 것이다. 제대로 반성되지 않은 과거, 은폐된 과거는 불행한 미래를 낳을 뿐이다. 우리가 역사를 재인식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는 도킨스가 일생을 두고 하나의 주제에 그토록 연연해하는지 이해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또한 그를 진정한 인류애를 가진 진화 생물학자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충분한 것아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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