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명통회
박일우 엮음 / 명문당 / 1978년 12월
평점 :
품절



사적으로 난이도가 높은 책인지라 서평을 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책이 삼명통회(三命通會)였다. 그러나 알라딘 동지 여러분들의 견해에 힘입어 그만 일을 저르게 되었다.


먼저, 고전 중의 고전인 삼명통회 서평을 '태클을 중심으로' 쓰게된 점을 심히 유감으로 여기며, 삼명통회 지지자분들께는 삼가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 
일천한 자가 서평을 쓴답시고 삼명통회에 생채기를 내려하다니, 이런 상황에 딱 들어 맞는 명언이 떠오른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구나!!!!


삼명통회는 명리 3대 고전으로 평가 받고 있는 자평진전, 적천수, 궁통보감과 더불어 업계에서 확실한 권위를 가지는 책으로 알고 있다. 그 명성과 권위로 보아 계속 출간이 되어야 마땅한 도서인데 품절 상태가 계속되는 점은 왠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 덕분에 나는 중고를 구입해야 했는데 중고가가 후덜덜 했다. 10만 원을 가뿐이 넘겼다. 보이는 대로 몇 권을 구입했는데 모두 때를 못만났지 싶다.)


어째거나
품절 도서이기는 하지만 그 명성이 절대적인 지위를 가지는데도 리뷰가 전혀 없는 도서라는 점도 특이하다 하겠다. 박일우 삼명통회는 100자평 차트랑이 유일하다. 그동안 간이 부은 자가 없었다는 뜻일까.... 어쩔 수 없이, 고수들은 '알라딘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어째거나
간명(看命)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간명을 업으로 하는 분들께서 하나하나 캐물으면 나로서는 답할 능력이 없다. 그저 명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一人으로서, 읽고 후기를 남기는 것일 뿐이니 나의 무지를 너무 나무라지 않기 바란다. 본디 고수들은 강호에 들더라도 조용히 자신을 숨기는 법이고, 하수들이 이처럼 자신을 드러내 날 뛰는 법이다. 이치가 그러하니 명리 하수의 깊지 못하면서도 좁은 안목에 너른 양해를 더불어 부탁드린다.




편저자 박일우 선생이 서론(緖論)에서 말하길, "인간의 운명에는 별(星)과도 같이 정(定)한 궤도가 있다. 별이 저녘이면 나타나 새벽이면 사라지는 것은 궤도를 걷고 있다는 증거이다. 운명(運命)도 행(行)함에 있어 그와 같은데 자연의 섭리가 행(行)하는 것을 운명이라 한다." 라고 썼다.


명리에서 쓰는 만세력은 태양의 운동 궤도와 일치하는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은 태양의 이 궤도를 황도(黃道)라 이름하고 12궁으로 나누었다. 이를 황도 12궁, 즉 Zodiac 이라고 칭하고 그 별자리들은 Zodiac Sign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의 원조라 할수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들은 이 황도와 12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만세력은 알고보면 고대의 수메르인들에게도 관련이 깊은 력(歷)인 것이다. 박일우 선생이 뜻하는 그 궤도란, 황도 12궁의 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궤도는 1년 12개월이라는 주기, 명리의 12지지, 하루 24 시간을 2시간 단위로 나눈 것과 일치한다. 또한 이 궤도는 다름아닌 인간에게도 적용된다고 박일우 선생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진실 여부는 각자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삼명통회의 저술 시기는 명대(明代) 1578년 이라고 한다. 저자 만민영은 제 1장 '원조화론(原造化論)'에서 삼명통회가 성리학적 관점을 배경으로 한 저술임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원조화론 1~2절(節)은 '주자(朱子) 가로되~ ' 로 시작하는 문단의 연속이다. 본서의 바탕은 주자학으로 변태한 성리학의 관점임을 밝힌 저술이라는 것을 명시했다.



[[ 서평이 무척 지루한 스토리인듯 하여 노래 한곡 들으시기를... ]] 


강의 좀 한다는 분들은 입버릇처럼 '삼명통회에서 말하기를... 혹은 삼명통회는...' 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이는 삼명통회의 권위를 빌어보겠다는 의도가 담긴 3인칭 화법이다. 1인칭 복수형이나 3인칭 화법은 권위를 내세워 '쓸데없이 태클 걸고 들어오지마!!'라는 강한 의도적 화법이니 말이다. 삼명통회가 명리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대략 이러하다. 삼명통회를 인용하는데 과연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우기, 입문자나 초심자들이 삼명통회를 읽어 봤을리 만무하니 말이다.


막상 삼명통회를 읽어보니, 과연 '삼명통회에서 말하기를...' 로 시작할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명통회는  결코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책이 아니기때문에 누군가가 태클을 걸어올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진다는 뜻이다. 삼명통회는 수차례 읽고 또 읽어 그 뜻의 허실을 과연 파악할 수 있어야할 것이라는 사적인 견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신뢰와 의심을 동시에 던져주는 삼명통회는 전문서의 오묘한 느낌을 동반한다.


이 느낌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아마도 삼명통회가 전달하는 명리의 이론 자체가 아니라 쉽게 공감하기 여려운 몇몇 예시 명조들의 난해함이 연유로구나 싶다. 명쾌한 명조들을 예시하고 있는 적천수(適天髓)에 비하면 삼명통회가 제시해주는 명조들의 자체 난이도는 까다롭다는 것이 사적인 견해이다. 고로 이 자리를 빌어 삼명통회는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점도 명리의 하수로서 언급할 수 밖에 없다.


만민영께서 사례로 제시하는 다수의 명조들은 쉽게 말해 난이도가 높다. 흔히 말하는 용신(用神)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경지를 요하고 있다는 것이 사적인 견해이다. 더구나 현대의 실전 명리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納音五行(납음오행)으로의 접근은 낯설기만하다. 고로 삼명통회가 제시하는 명조들의 허실을 파악하기 위해 어느 수준의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會殺印化(회살인화), 時殺歸庫(시살귀고), 棄命從殺(기명종살)등, 대략적인 이론들은 여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들이지만 사적으로 설명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리가 아픈 사례를 만나기도 하는데 제 3장 육친론의 122쪽이 그러하다.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명조는 아래와 같다.



[[ 핸드폰으로 보니, 명조를 읽을 수가 없어 사진으로 수정합니다 ]]


설명하기를 "財官(재관)이 雙美(쌍미)하고 二丙으로 身이 旺(왕)하니,"(p. 122) 라고 써있다.

申月 丙申時에 태어난 丙子를 "身이 旺하다"라고 한 부분에서는 사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다. 제 아무리 丙火가 둘이라 하더라도  깔고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다. 丙火가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봐도 내게는 身弱(신약)으로만 보이니 딜레마에 빠지는 순간이다.


또한,
130쪽에 제시한 명조는 아래와 같다.



설명하기를, '水火旣濟格(수화기제격)인 故(고)로 貴命이라고 한다" 라고 썼다. 이 명조는 종(從)하지 못하는 신약(身弱)으로 좋은 운(運)을 만나지 못한다면 결코 貴命이라 할 수 없어 보인다. 이 예시 또한 납득할 수 없다.
물론 나는 초학이므로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처지인 것은 틀림이 없다. 고로 비슷한 초학자들이 살피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이 또한 명리를 업으로 삼지 않는 아마추어의 사적인 견해가 그렇다는 것이니 이 또한 너른 양해를 구한다.


240 쪽에서 제시한 다음의 명조는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책에는 "고요상서(高燿尙書)"의 명조 이며, "官界 一品의 命이다" 라고 설명했다.



갑무경(甲戊庚) 삼기(三奇)를 이루었다 하나, 위는 분명 군주를 산산히 부서트리는 명조라 하겠다.
과연 어느 주군이 이 신하를 가까이 두려할 것인가. 설사 벼슬을 했다 한들(관료의 사주로 보이지 않지만) 변방에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삼명통회의  一品, 즉 장관급 사주라는 설명을 마주하니 일천한 者로서 이유를 되 물을 수도 없어 무척 당황스럽다. 그래서 이렇게 나와 같이 일천한 者를 두고 뭇 사람들이 말하기를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했을 것이다.


삼명통회 (2) 는 언제 쓸지 기약이 없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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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2-24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리학 책은 일반인도 알기쉽게 풀이한 몇권을 제외하고는 접하기도 쉅지 않거니와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지요.요즘 사람들은 한자가 많은 명리학 책보다는 그림이 많고 직관적으로 이해가 쉬운 타로관련 책을 더 많이 볼겁니다.

차트랑 2025-12-24 17:04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카스피님.
게다가 삼명통회는 한자도 한자지만 글 쓰기가 아래로 되어있어
읽기가 친숙치 않았습니다.
명문당에서 출간한 고전 대부분이 아래로 내려 쓰기입니다 ㅠ

타로는 동양의 육효나 육임등과 비슷한 분야인듯 싶습니다만
저는 아직 접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이해가 쉽다니 관심이 가네요^^




 


요즘 뜻밖에도 관심을 사로잡는 일이 생겨 정신줄을 그쪽에 놓고있다. 바로 업무보고이다. 리허설 없는 대한민국의 업무보고 현장을 전국민이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무협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는, 마치 넷플릭스 무협 영화 일일 연속극을 보는 듯 흥미롭다. 특히, 해병대 사령관은 해병대 1, 2사단의 작전 지휘권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카타르시스를 일으켰다. 
그나저나 감기가 올까 말까 주저 주저하는듯 한 이 느낌, 태도가 불분명한 이 느낌, 정말 별로다 ㅠ 



이른 나이에, 아주 어린 나이에 특정 분야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다. 예체능, 과학, 수학 등 분야가 제한된 것 같지는 않다. 날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는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영재 혹은 천재라고 부른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가, 아니면 누가 말 했던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쯤에서 떠오르는 문구가 하나 있다.그것은 '이승에서 배우기 시작하면 이미 늦은 것이다' 이다. 그런데 어느 분의 글을 통해 다름아닌 소동파가 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아니, 그럼 나는 어쩌란 말인가? 저승에가서 배워오기라도 하란 말인가?



헝가리의 저명한 음악가, 철학자, 교육자인 '코다이' 선생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예술가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제부터 준비해야 할까요? 코다이 선생이 답했다,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부터 준비해야 하오!'라고. 이 역시 소동파와 견해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어쩐지 나는 안되더라니.....



어째거나,
어린 영재나 천재가 아니면서도 니체가 말한 '위대한 일은 놀이처럼, 또는 자신을 위해서 하루 2/3를 쓰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그는 하루 온 종일을 자신을 위해서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자신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생계를 위해 고군 분투하던 중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곧바로, 주저없이 그 길로 들어섰다. 그 이름은 '현마에!' 바로 김현철이라는 이름의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존중을 받을 만 한, 어쩌면 니체가 언급한 위대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니체가 말하는 그 '위대한 일'을 해냈고 그 일을 계속 하고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는 개그맨이었고 여전히 개그맨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개그의 일환으로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순전히 개그로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일이 그에게 겁나게 재미져버렸다. '재미로 시작했으니 재밋었것지~ !!  숙제였어봐라, 개뿔 재미졌겠나?'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 치환은 지양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하다. 왜냐면 지휘봉을 잡는 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 없어도 될것만 같은 사람 지휘자이다. 나 스스로도 지휘자가 왜 필요한건데? 라고 생각한 적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단코 사실이 아니다.





지휘자는 음악, 아니 악보를 연구하고 해석하여, 악보가 주는 메시지를 확보해야한다. 이를 위해 역사 및 음악가를 알아야한다. 음악가가 처한 시대적 상황 그리고 음악가가 처했던 사적인 상황등을 알아야 한다. 음악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연구하고 찾아내어 분석 및 해석을 마쳐야 한다. 심지어 음악가의 애정사는 물론 가족사 마저도 알아야 한다. 이런 요소들이 전제되어야 일차적인 지휘의 조건에 부합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지휘자는 모든 악기를 알아야 하며, 수많은 페이지의 악보를 모조리 암기해야 할 때도 있고, 모든 단원들의 연주는 물론 몸짓 하나까지도 지휘(conduct) 하여 청중들에게 그 결과물을 고스란히 전도(conduct) 해야 한다. 지휘자를 conductor 라 칭하는 이유이다. 포디움 위에 올라 한 번의 지휘를 하기까지 거쳐야할 과정들은 객관의 눈에 포착되지 않지만 인고의 과정을 요한다.


과정이 이러하다보니 누가 지휘봉을 잡느냐에 따라 결과물의 색채가 다양하게 표현 된다. 일이 이러하므로 음악 애호가들은 지휘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반응 지수가 큰 편이다. 곡과 지휘자 그리고 연주 단체 중 애호가들이 우선하는 사항은 단연 곡과 지휘자이다. 연주 단체는 그 다음이다. 내가 좋아하는 곡을 누가 지휘했느냐가 가장 먼저이고 어느 단체가 연주했느냐는 후순위인 것이다. 그만큼 음악을 연주한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휘자인 것이다.


처음에 개그로 시작한 현마에는 점점 그 안으로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즐거움이 함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이 전부는 단연코 아니다. 이제 시작인 것이다. 현마에는 공부하고 익히며 연구했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말이다. 그가 인내한 것들이 어느정도인지 나는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바이올린을 들고 세상에 나선 어떤 사람이 인고의 과정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으로 대신해본다.


[[ 김빛날윤미의 이 손을 보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눈물이 핑 돌아서 말이다.... ]]






현마에는 그렇게 10 수년을 수련했고 자신을 갈고 닦았다. 그리고 드디어 한 연주 단체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놀랍지 아니한가! 음악 전공의 연주자로 일생을 살아가던 정명훈 선생도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 따로 수업을 받아야했다. 대한민국 음악 애호가라면 모를 수 없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선생이 바로 정마에의 스승이니 말이다. 이 사실을 또한 모르는 애호가도 거의 없을 것이다. 지휘란 하고싶다고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댓가를, 아니 그에 알맞는 댓가를 내놓아야 비로소 지휘봉을 들 수 있는 것이다.


인고와 즐거움은 늘 함께하는 동반자이다. 즐거움이 앞서가면 인고가 뒤를 따르고, 인고가 앞질러가면 즐거움이 그 뒤를 따르니 말이다. 그리하여 니체는 결국 Amor Fati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하는 바이다. 이는 물론 지극히 사적인 견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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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2-1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발레리나의 발 사진만큼이나 가슴 찡한 사진이네요.

차트랑 2025-12-19 00:15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ㅠ

영어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한다는 어느 분도 떠오르는군요.

호시우행 2025-12-19 0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도전에 나선 김현철 씨 앞 날을 응원하게 됩니다.

차트랑 2025-12-19 10:10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님의 고마운 마음을 김현철씨는 모르실테니
대신하여 제가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나의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목사님과 신부님을 구별하지 못하셨다.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께서는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학교도 다니셨다.  휴전이 되기 몇 달 전에 군입대를 하여 하사관으로 제대하기까지 진주, 포항, 서울등을 오가며 6년을 근무를 했다. 또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분도 아니었다. 더우기 일생을 통해 감여(輿)를 공부하셨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늘 책을 가까이 하셨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때 정비석의 삼국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런 분께서 유독 목사님과 신부님을 구별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아주 상세하고도 자세한 설명을 여러 차례 드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는 늘 목사님과 신부님을 구별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 그렇게 찾아왔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품에 금강경을 넣어드리고 이런 저런 아버지에 관한 상념에 젖어 있을 때, 한 가지 생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어쩌면 아버지께 목사님과 신부님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 수도 있겠구나. 같은 성직자시니 애써 구별할 필요가 없는 그런 분들 말이다!' 나의 합리화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아니 가능성이 높은 발상이다.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방법 중 하나를 생각해낸 것일 수도 있다. 


조상님들께서는 대대로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 사셨다. 과거에는 다들 그랬다. 반면 나의 가족들은 모두 성당에 나가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세례명을 받았다. 아버지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나의 식구들은 모두 절에 가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가까운 봉은사에 가서 행사를 구경하기도 하고, 고향을 오가는 길에 수덕사에도 곧잘 들렀다. 아이듵은 아빠가 가는 곳은 당연히 가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절과 성당은 같은 곳이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일까...


아버지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신 것이다. 평소 아버지께서는 개신교이든 천주교이든 모두 하나라고 생각하셨다. 구별지을 필요가 없으며 불교도 다를 것이 없다고 평소 생각하셨다는 것을 그만 그 아들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목사님과 신부님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기독교와 천주교는 아주 많이 다르며 어쩌면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실 것이라 믿는다. 이 또한 존중하는 바이다.    


최근 성심당을 소개하는 글을 읽게 되었다. 갑자기, 없던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성심은, 大學에서 따온 이름인가?

大學에는 8조목 이라는 것이 있다. 아주 잘 알려져 있어 성심당 못지 않은 인지도를 가진 8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濟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이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는 내용은 아니다. 성심당이 만든 빵은 맛있다고 소문이라도 났지만 8조목은 수신(修身)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을 차별하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일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와 야합한 8조목이 아닌, 순수한 대학 본연의,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8조목 본연의 함의를 존중한다.


어째거나,

8조목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 중, 격물과 치지만 얻으면 인성에 문제를 일으킨다. 성의와 정심이 뒤 따르는 이유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아가며 수신을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불교의 가르침으로 접근하면 인간의 삶은 돈수(頓修)가 아니라 점수(漸修)인 것이다. 성심당은 이 8조목 중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두 글자를 취해 성심(誠心)이라고 이름했나 보구나 싶었고 '이름 참 잘 지었군. 글을 읽은 냥반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정말 그런지 인터넷을 검색했다. 속으로 내 생각이 맞겠지...했는데!!  허걱~!! 나의 추측은 완전 틀린 것이었다. 전혀 전혀 다른 이름이었다. 알고 보니, 성심당의 창업주는 카돌릭 신자였다. 성심당은 誠心堂이 아니라 聖心堂이었던 것이다. 聖心堂의 聖心은 '성스럽고 거룩한 마음 을 뜻한다' 고 써있다. 심지어 이 이름은 창업주가 노점상으로 일을 시작할 때부터 사용했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성심당이 유명해진 이유를 제대로 알게된 듯했다. 빵 하나를 구울 때도 성심(聖心)으로 굽겠다는 뜻이며, 그 빵을 나눌 때도 성심으로 나누겠다는 거룩한 뜻을 가진 이름이었던 것이다.


물론
聖心堂을 誠心堂이라고 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모든 행함에 자신의 마음을 극진히 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기독교의 가르침도 불교의 가르침도 유가의 가르침도 모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정말 그런지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어느 목사님이나 신부님께서 내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요!!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이 모두의 가르침이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라면 애써 목사님과 신부님을 구별할 필요가 과연 있겠는가?




[[ 성심당의 고향이 대전이라고 하니, 대전이 낳은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음악가의 연주를 소개한다. 플룻을 잡은이가 바로 대전이 낳은 최나경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플릇을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전에는 플룻을 듣지 않았는데, 이제는 듣는다 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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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글의 단초가 되어주신 글쓴이 1께 심심한 고마움을 전해드린다.


어느 글을 읽다가는, "위대한 일은 놀이처럼 되어야한다" (p140), 라고 쓴 인용문을 마주했다. 순간, 나의 시선은 마치 어둠의 정적을 만난듯 움직이지 못하고 한동안 그 문장에 머물렀다. 나의 시야에 그 문장 이외의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 앞서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다”(p77) 라는 인용문에 1차 충격을 받은 탓일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글쓴이 1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 당시 자신의 놀란 심경을 밝혔는데, 그 제목을 본 내 가슴인들 무사했겠는가. 1차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연타로 2차 충격을 받은 셈이었던 것이다.



[[[ <<<<----- 글쓴이 1께서 읽은 책  ]]]


순간의 충격을 그나마 진정시켜준 것은 글쓴이 1의 생각이었다. 그 아래에, 글쓴이 1은 "좋아하는 일이거나 잘 할 수 있는 일이거나 그 일을 사랑하고 몰입하며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 '위대한 일'이 아닐까" 라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사실 이 정도의 견해도 내게는 충격이나 다름이 없지만 완곡한 어법이라 인식되어 비교 우위에서 오는 위로가 되었다는 뜻이다.


충격과 동시에 좋은점을 발견했다. 글쓴이 1의 글을 읽고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 이다. 글쓴이 2 께서 '소년 동주'의 리뷰를 통해 윤동주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니체와 윤동주가 서로 같은 사유를 했구나 싶었던 것이다. 다만 윤동주는 '잘 사는 삶' 이라 표현했고, 니체는 '위대한 삶'이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이 둘을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 점은 아주 좋은 발견이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내게는 영원 불변과도 같은 뜨거운 사랑 윤동주와 그 이름도 찬란한 니체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발견에 어찌 기쁨을 숨길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좋은 발견을 주신 글쓴이 2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린다.


[[[ <<<<------- 글쓴이 2 께서 읽은 책 ]]] 



사실 평소 대로라면, 글쓴이 1 의 견해를 읽으며 나로서는 '음, 전적으로 동감이야!'  라고 생각하며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짧지만 강렬한 인용문과 글쓴이 1 의 사유가 만나 형성된 견해를 접하는 그 순간, 내 자신의 삶을 관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해갈 수 없는 자백의 시간을 만난 듯 말이다. 마치 죄를 지은 자가 자신의 죄를 실토를 해야하는 순간을 맞이한 상황 말이다.


글쓴이 2의 견해대로 아주 많은 사람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을 통해 해야할 일을 하면서 삶을 살았을 것이고 또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반대 급부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대척점도 분명 존재하게 되어있는데, 그 대척점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서 일생을 살아간다는 뜻으로 균형을 잡고 있다.


'숙제'는 '해야하는 것'이다. '해야하는 일'은 흔히 즐거움을 수반하기 어렵다. 다행히 자신이 좋아하는 숙제를 만났을 때라면 그 숙제를 이행하며 즐길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행함을 인내해야 하고 숙명처럼 혹은 운명처럼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대부분의 삶은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의 연속이면서 숙제의 연속으로 점철된 삶이다. 나의 삶처럼 말이다.


마치 무언가에 쫒기듯 살아온 내 삶의 시간과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흔히 이런걸 파노라마 라고 하던가. 그 인용문은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가 않은 나의 시간들에 더욱 선명한 생채기를 내는듯 했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아온 나의 인생을 잠시 반추하는 순간, 마치 나의 지난 시간들이 움직일 수 없는 정적 속에 모두 갖혀버린듯 했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을 멈춰 세울 수는 없는 법이다. 내 지난 그리고 현재의 시간이 멈추는 찰나 공간이 동시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나의 존재는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존재는 그 존재의 존재 기반을 상실해 버릴테니 말이다. 그러나 살아있기에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삶을 할퀴듯 지나가는 모든 해야할 일들은 설사 그가 '프리드리히 니체'라 하더라도 피해 갈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반발성 되뇌임을 떠올려본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삶이 해야할 일들로 점철된 것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위안이 되어줄 수 있는 또 다른 여지를 니체는 남겨주었다. 채찍과 당근을 또는 병과 약을 남기듯, 니체는 질식해 죽을 처지에 놓인 자를 위해 숨구멍 하나를 만들어 놓았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니체 본인이 말 하기를,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나 자신의 공식은 '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이다' 라고 말했다. 천만 다행하게도 니체는 'Amor'에 특별한 단서를 붙이지 않았다.



'니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니체의 'Amor'에 단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 라고 누가 내게 큰 소리로 외친다해도 소용은 없다. 나는 이미 마음을 단단히 굳혔으니까.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그렇다면 나에게도 니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Amor'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도 'Fati' 좀 하겠다 이거다.


'Amor Fati'는 니체 철학의 어느 파편에 불과한 일련의 한 고리가 결코 아니다. 'Amor Fati'는 니체 철학의 결정체이자 최종 결론이나 다름이 없는, 지극히 구체적인 사상체이니 말이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니체의 철학이던가!!  그 속뜻이야 어찌되었든 표면적인 그의 발언을 빌어온다면 우리 모두는, 아니 나는 '프리드리히 니체'와 함께 아모르 파티로 가면 될 것 아니겠는가.


위대한 일이 때로 놀이처럼 되지 않더라도 면책의 틈을 내어준 니체에게 감사하고 이 글을 쓰도록 단초를 주신 분께 또한 다시 한 번 더 깊은 고마움을 전해드린다. 글쓴이가 덧붙인 자신의 견해가 또한 나의 '해야하는 삶'에 완곡한 위로가 되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 나의 이런 나이브한 생각과는 달리!!!  정녕 니체가 해준 말(위대한 일은 놀이처럼 되어야한다)과 정확하게 맞닿아있는 한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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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5-12-09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트랑님, 글쓴이 1은 저를 가리키는 것 맞죠? 며칠 전 말씀 처럼 페이퍼를 쓰셨군요.
너무나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도 몇 달 전 이 책을 읽고 반성도 했고 정신도 번쩍 뜨였거든요.
글쓰기로 함께 성장하는 훈훈한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새 한주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차트랑님.^^

차트랑 2025-12-09 17:22   좋아요 1 | URL
모나리자님께서 친정(親政)하시다니요!!
고맙습니다 모나리자님!

그렇습니다 글쓴이 1은 바로 모나리자님이십니다.
당황하실까 염려되어 미리 말씀을 드린것인데
이렇게 친정하시니 감사와 더불어
그렇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인용해주신 문장은 모나리자님 못지않게 제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나리자님의 글을 읽어보기를 아주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덕분에 다양한 분들의 글을 더욱 신중하게 읽게될듯 합니다.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편안하고 좋은 연말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모나리자님!!






모나리자 2025-12-09 17:27   좋아요 0 | URL
저도 감사합니다.

음악, 철학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으신 차트랑님께서 제 글을 읽어 주시고
좋은 공감을 해 주셔서 너무나 영광이지요.

1년이 정말 눈깜짝할 새에 지나간 듯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차트랑님.^^

차트랑 2025-12-09 17:54   좋아요 1 | URL
과찬을 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모나리자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저의 얼굴도 붉어졌답니다ㅠ

그럼 이만,
후다닥~~~


모나리자 2025-12-09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쓰는 중에 에러가 떠서 글이 등록되지 않았는데 두 개나 달렸네요.
그래서 하나는 삭제했습니다.^^

차트랑 2025-12-09 17:24   좋아요 1 | URL
알라딘 서재가 잠시 불안정한 상태였던듯 합니다.
반가움에 달려갔는데
열리지 않더라구요^^

편안하십시요~
 


과거 몇 권의 불교 경전을 사경한 적이 있다. (물론 옆에 해설서를 함께 놓고 그 뜻은 새기며 진행했다). 낳아주신 어머니를 위해 지장보살 본원경과 금강경을, 아버지를 위해 지장보살 본원경을,  서울로 유학 온 촌 놈이 입대하기 전까지, 2년 내내 기꺼이 보살펴주신 참으로 고마운 분을 위하여 금강경을, 마지막으로 친애하는 仲秋의 庚金에게 금강경을 각각 사경했던 것이다.


어머니 그리고 나를 자식처럼 돌봐주신 분께는 그 분들이 돌아가신 후 그 품 안에 전해드릴 것이고, 仲秋의 庚金에게는 아직 전달하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고, 그의 아들은 누워 계신 아버지의 가슴에 정성드려 사경한 지장보살 본원경을 안겨드렸다.


최는 나는 지장보살 본원경을 다시 사경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경을 한 후 지장경을 꼭 전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는 친구 복이 너무나도 없었다. 친교를 다양하게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 아버지의 가르침도 큰 작용을 했다.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진정한 친구 한 둘만 못하느니라...


몇 안되는 절친 중 한 사람은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할 일들을 상상하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 때 내가 참으로 박복한 놈이로구나 생각했다. 또 한 친구는 젊은 나이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참담했다. 그의 미소는 세상에서 가장 싱그러웠다.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리운 그 친구들에게 직접 쓴 불경을 미처 전하지 못했다. 나이를 봐도 그럴 상대방이 아니었을 뿐더러 모두 내가 사경을 알기 전에 불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 마저 잃는 다면 나의 세상에 친구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그 친구는 건강하며, 흥미롭게도 불경을 수년에 걸쳐 사경을 해 온 사람이기도 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 친구 덕분에 나도 사경을 했던 것이다. 내게 이 친구는 죽어 환생을 해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친구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남은 그 친구에게 나의 사경을 전해주려는 것이다. 늦기 전에 말이다.




[[헐, 이제 되는군. 내 컴퓨터에 문제가 있어 안되는 줄~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음 ㅠ]]




물론 나는 지은 죄가 많아, 인간으로 환생할 확률이 아주 낮다. (생각 컨대, 윤회가 정말 있는 것이라면, 그 친구는 가뿐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나는 장담할 수있다. 죄가 많은 나는 그 친구와 어긋 날 가능성이 높다. 한 번 어긋나면 또 억겁의 시간이라도 기다려야겠지만 말이다)


듣자니 송만공 스님의 전생은 소(丑) 였다고 만공스님 스스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스님도 까딱하면 소로 태어나는 마당에 내 자신이야 말할게 어딧겠나.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이미 틀렸지 싶다. 이럴줄 알았으면 내가 좀 더 일찍 철이 들었어야 했는데...후회가 막급이다.


만공스님의 전생 얘기나 나왔으니 말인데, 만공스님의 3전생은 기생이었다고 만공스님께서 직접 김일엽 스님께 말씀하셨다. 그 기생은 돈을 벌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식량을 보시하고, 절에 계신 스님들께 또 보시를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갸륵한 일이던가. 기생으로 살면서 생전에 좋은 일을 아주 많이 하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다. 직업에 귀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직업의 귀천을 가르는 것은 직업 자체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만공스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잠깐 당황했던 것은 환생에 남녀의 구별이 따로 없다는 점이었다. 만공스님의 말씀으로 추정컨데,  男이 女로 태어나기도 하고 女가 男으로 태어나기도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환생시 고유의 성별은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 나를 미궁에 빠뜨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인간으로 태어나 살다가 소로 환생하기도 하는 마당에 그깟 성별이 대수겠는가!
                                                                 


그러나 내가 미궁에 빠진 것은 만에 하나 내가 환생이라도 하는 날에는 이 친구를 지금 그대로 만나고 싶은데 성별이 달라지면 어쩌나 싶은 것이다. 내가 환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이미 지은 죄가 많아 그 결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겠지만 행여라도, 혹여라도 아주 작은 희망을 가지고 바래본다면 바로 이 친구와의 인연을 기대하는 것 뿐이다.
내가 사경을 하는 마음은 이러한 심정이다.


사실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제 아무리 수백, 수천, 아니 수만 번의 사경을 한다 한들 나의 환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불경은 기복을 가르치는 경전이 결코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고(苦)를 멸하고 열반에 드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흔히 네 글자로 압축한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이 네 글자 안에 어찌 사적인 기복이 들어설 자리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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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06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나도 사경집을 꺼냅니다. 성불하세요.

차트랑 2025-12-06 06:53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호시우행님,
나무관세음보살......

잉크냄새 2025-12-07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도에서는 갠지스 강가에서 화장을 해야 윤회의 고리가 끊어진다는 힌두교적 믿음이 있어 가난하건 부자건 갠지스 강가로 몰려든다고 합니다. 불교에서의 윤회는 무한 반복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요 아니면 결국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야 하는 건가요. 궁금하여 여쭈어 봅니다.

차트랑 2025-12-07 13:24   좋아요 1 | URL
잉크냄새님께서 ‘열반‘의 뜻을 모르지는 않으실듯 하지만
모르시는 듯 글을 남기시니 말씀드립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궁극은 ‘열반‘입니다.
니르바나를 음역한 말이라고 하는데,
니르바나는 ‘불어서 불을 끈다‘ 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열반은 꺼진 불의 상태가 되겠네요.

나의 모든 것이 꺼져 사라지면 윤회를 하지 않는 다고 하네요.
반야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공‘의 단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적인 견해라 장담은 못드립니다)

붓다의 궁국의 가르침은 내가 가진 그 무엇하나도 세상에 남기지 않는 것이라고 하니,
걱정이 되기는 하네요.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썰렁하잖아요^^

어째든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환생을 하시지 않겠지요.
혹여 부처를 빙자하는 분이 계시다면
경계를 하셔야 합니다. 틀림없이 진짜는 아닐거에요~

그러나 저와 같이 열반에 들지 못한 사람은 인과를 끊어내지 못하고
환생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소로 다시 태어나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만
잉크냄새님께서는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시길 빌어봅니다.

아미타불......




잉크냄새 2025-12-07 14:48   좋아요 0 | URL
수박 겉핥기 정도의 수준이라 다시 한번 여쭈어 보았습니다. 설명 감사드립니다.

사람으로의 환생은 저도 이번 생은 글렀다 싶습니다.

차트랑 2025-12-07 18:05   좋아요 0 | URL
어찌 그런 말씀을....

건강하십시요 잉크냄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