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구출 소동 행복한 책꽂이 28
변준희 지음, 정경아 그림 / 키다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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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생각하는 세상에서 '너'를 떠올리는 삶을 꿈꿉니다. 그리하여 '나'와 '너'가 '우리'가 되는 광경을요. 약하고 어리숙하고 숨기고 싶은 것이 많은 '나'입니다. 나의 부족함에 집중하면 나에게 갇힙니다. '나'를 뛰어넘어야만 '너'가 보입니다. 그제야 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먼저 잠들고 싶을 때가 많은 요즘입니다. 갑자기 여러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하니 몸에 과부하가 옵니다. 진통제를 몇 알 먹고서야 진정이 됩니다. 하지만 혼자 잠들 수는 없습니다. 아이를 재워주는 시간이 참 좋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로 '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입니다.



몇 분 안되는 그 순간, 조용히 속삭이는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함께 밥 먹을 때도, 공부를 할 때도 말하지 못했던 마음속 싶은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깜짝 놀랄만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던질 때도 있습니다. 그 공간, 그 시간이 참 좋습니다. 진짜 '너'를 만나는 시간이라서요.



변준희 작가의 글을 통해 '나'와 '너', '우리'를 만납니다. 이 책 『엄마 아빠 구출 소동』은 무려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닮은 듯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에서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약함과 부족함이 있지만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혼자라면 힘들었겠지만, 함께라서 가능한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첫 번째 이야기 <엄마 아빠 구출 소동>은 비 오는 밤에 우산 없이 산책을 나간 엄마 아빠를 찾으러 가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잠이 옵니다. 시간은 늦었습니다. 늦은 시간 비 오는 거리로 나가기에는 참으로 어리기만 한 아이들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과 조건들에 매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엄마와 아빠니까요.



'나'만 생각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에 대한 걱정으로 잠은 깊게 못 잘 수 있었겠죠. 엄마 아빠는 비를 몽땅 맞고 왔거나, 비가 그치기까지 기다렸다가 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상황은 마무리되었겠지만 '나'는 '나'이고 '너'는 '너'로 존재할 뿐입니다.



아이들은 '나'의 상황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너'를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압니다. 지금 현재 '너'의 상황이 어떠할지를 곰곰하게 생각해 봅니다. 엄마 아빠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이들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두렵고 헷갈리고 어렵지만 '너'를 생각하여 길을 떠납니다.



두 번째 이야기 <감추고 싶은 왼손>에서는 왼손 흉터가 콤플렉스인 주인공 보리가 나옵니다. 아기일 때 생긴 화상 흉터가 부끄러운 아이. 그것을 감추고 싶은 아이입니다. 우리는 모두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이 드러나게 된다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콤플렉스는 삶의 전반을 지배합니다. 작은 흉터임에도 모든 삶을 아우를 정도로 큰 힘을 지니게 됩니다. 내 마음에서 그 흉터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우리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콤플렉스에 대한) 사실만을 듣게 되더라도 나의 마음은 요동칩니다.



상처를 뛰어넘은 존재를 보게 되면 우리의 삶을 달라집니다. 상처만 바라보고 상처를 끌어안고 지내는 '나'에게 그 어려움을 넘어선 '너'가 필요합니다.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겉치레로 보입니다. 하지만 고통을 온전히 감내하고 그것을 이겨낸 사람은 내 마음 가운데 울림과 통찰을 건네줍니다.



세 번째 이야기 <'김장 전투'에서 승리하는 법>은 엄마의 몫이라고만 생각했던 김장이 얼마나 혼자 감당하기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가족 모두가 저마다 할 수 있는 작은 몫을 했을 때, 그 일은 '너'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되고, '우리'의 이야기가 됨을 잘 보여줍니다.



평소에 살림이나 요리를 잘 하지 않았던 아빠나 아이들이기에 '이들이 뭘 도울 수 있겠어'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능숙한 내가 할 때보다 비효율적일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함은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줍니다. '나'만의 일로 끝났을 이야기가 '우리'의 서사가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독특하게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드러납니다. 작가의 전공과 관심사가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전투는 싸우는 것도 있지만, 목적한 것을 이루기 위해 마음을 합친다는 뜻도 있음을 강조합니다. '나'와 '너'가 서로를 향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힘을 합칠 때 '우리'가 됩니다.



세 편의 이야기는 성장과 성숙의 이야기입니다. 과거의 우리에 멈추어 있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다룹니다. 완벽하게 시작하지 않더라도, 서툰 몸짓이지만 '너'를 위해 '나'를 열어줄 때,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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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윤주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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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장례식에 갈 일이 많습니다. 개인적 친분으로 갈 때도 있지만, 교회에 장례 예식을 부탁하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장례 예식을 부탁하시면, 고인과 유족, 죽음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고인의 삶에서 따라야 할 본을 새겨보고, 유족들의 슬픔에 함께 동참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죽음 자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생명 없음이 죽음의 전부인가 하고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는 죽음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 세상에서 말하는 죽음과 기독교의 죽음에서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의 말처럼 죽음은 신비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여러 지점이 교차하는 역설입니다. 끝이자 시작이요, 단절이자 이어짐입니다. 신학적 미학으로 유명한 발타사르는 이러한 죽음의 신비로움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냅니다.



저자는 죽음 이전에 우리의 현 존재가 모순임을 밝힙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처음으로 만날 때의 신비는 '나와 너'의 만남, 존재와 존재의 만남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랑으로 품어주는 너라는 존재를 통해, 아이는 중립적인 상태를 벗어나 진정한 나로서 의미 있는 상대에게 나를 개방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할수록 인생의 유한함과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술가들의 여러 작품은 인간의 그러한 갈망을 잘 보여줍니다.



철저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약함을 그대로 안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온전하게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사명에는 회복과 생명, 치유가 있지만, 죽음까지도 포함됩니다.



주님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역은 죽음이라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사명을 통해 완전하게 완성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감당하지 않아도 될 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죽음의 짐을 감당했습니다. 그 죽음은 모든 인류의 죄를 포함하는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사랑의 걸작을 이루십니다. 더불어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자신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해석에 맡깁니다. 저자는 이를 '궁극적인 포기'라 명명합니다. 죽음에 대한 해석은 성령님께 맡겨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맛보게 됩니다. 죽음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포용하고 그 죽음을 충만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함으로, 하나님의 영원함 안에서 펼쳐지는 사랑을 실현하며,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사랑을 교회 공동체를 통해 성찬을 통해 누립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영원한 희망, 충만한 평안을 맛봅니다. 교회와 우리의 사명은 어둡고 희망 없는 이 땅에 따뜻함과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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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다시 묻다 - 원점에서 생각과 믿음을 정리하는 한알의 밀알 44
도이 겐지 지음, 가미야마 미나코.홍이표 옮김 / 신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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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독교에 대한 불신을 가까이에서 체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듯 보입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참 정신대로 살아가기보다 기독교의 탈만 쓴 채 우리의 욕구를 쫓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독교의 참 정신이라는 것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추상적이고 명제적인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살아있고 대면할 수 있는 기독교의 정신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구체화된 언어가 없을 때 우리를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기독교 신학자인 '도이 겐지'는 근원으로 돌아가 기독교를 성찰합니다. 그리하여 이 책 『기독교를 다시 묻다』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아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질문하는 것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근원과 핵심에 다가가고자 노력합니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한 의문과 비판을 학생들에게 직접 들으면서 이 책을 구상합니다. 그러한 소통의 과정 속에서 네 가지의 주제로 기독교를 설명합니다. 이는 '전쟁', '사랑', '신', '신앙'입니다. 이와 같은 주제는 기독교의 교리에서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밀접합니다.



도이 겐지는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또한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의 어두운 면을 새롭게 조명함으로 기독교를 새롭게 파악합니다. 스리슬쩍 교리로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질문과 의문에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큰 의문은 '왜 기독교는 전쟁을 일으키는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여러 가지 오해와 실제적 사실이 교차하여 생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십자군 전쟁이나 제국주의의 선교는 기독교를 등에 없고 폭력을 자행한 행위였음이 분명합니다.



저자는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기독교 자체와 전쟁을 일으킨 주체를 분리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는 한 시대의 한 사회와 결합하여 그 사회를 결집하는 원리로서의 기독교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합니다. 그 시대의 농축된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폭력이나 전쟁이 기독교의 정신일까요?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전한 가르침은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사회를 뛰어넘습니다. 예수님은 화목과 평화를 끊임없이 강조했습니다. 자신의 삶조차 철저히 비폭력적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규정이나 지침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만남 가운데 '당신'이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서로 대화하고 만나고 감동하며 경계선을 뛰어넘는 행위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게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자의 강조점이 다른 주제에 스며듭니다. 나와 너와의 관계, 실제적이며 구체화된 노력이 모든 관계로 확장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그러합니다. 다른 신과의 절대적 차별성은 인격성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과 신의 관계지만,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계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이 지점은 매우 소중합니다. 우리가 모든 담을 헐고 화평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이웃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다른 편을 나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더불어의 삶을 위해 변화됩니다.



결국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기독교의 기본이 이 만남과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편협함을 극복합니다. 지위, 입장, 민족 등의 경계를 뛰어넘습니다. 그리하여 너를 만나고, 대화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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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기쁨
아베 피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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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잠기어 있다 보니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보다 근원적인 기쁨, 존재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쁨,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을 맛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상황에 매몰되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버텨낼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 책을 고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저에게 가장 필요한 책이 무엇인지 둘러보는 중에 이 책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보통은 신간 한 권, 독서모임 책 세 권을 번갈아 읽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다른 책을 읽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시 책장을 봅니다. 지금 읽을 수 있는 책이 뭐가 있을까 하고요.



그때 피에르 신부의 『단순한 기쁨』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저자이지만, 알고 보니 정말 훌륭하고 매력적인 분입니다. 프랑스인들이 매년 설문조사를 통해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인'을 뽑는데, 피에르 신부는 8년 동안 일곱 차례나 1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는 상류층 가정에 태어났지만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카푸친회 수도회에 들어갔습니다. 전문가나 학자가 될 수 있는 도미티크회나 예수회가 아니라, 학문보다는 경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민중적 수도회인 카푸친 수련원에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피에르 신부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에르 신부는 전쟁 동안에 항독 레지스탕스에 가담했고,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에 엠마우스 빈민구호 공동체를 만들어 50년이 넘도록 빈민들과 노숙자들, 부랑자들과 함께 생활한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세상의 악함과 그릇된 구조악으로부터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었고 치열하게 활동했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는 철저한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모색한 해결책은 결국 '사랑'하는 것밖에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피에르 신부는 모든 종교를 아우르며, 사랑할 때만 진정한 희망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복음을 믿으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고 함께 하며, 섬깁니다. 그러한 진심 어린 사랑이 복음서에서 계속 볼 수 있는 사랑임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합니다.



자유는 매우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사랑을 위해 쓰일 때만 위대합니다. 삶은 어두울 때도 있고, 사람들이 악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사랑의 힘을 믿고, 단순한 기쁨을 추구하는 삶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상적인 삶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만들어가면서 말이죠.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입니다. 우리 안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의 빛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꾸준하게, 신실하게 우리를 비추고 계십니다. 그 사랑을 경험한 누군가가 그 사랑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빛을 알 수 있습니다. 공허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애통 가운데 희망을 엿보는 요즘입니다. 거창한 무엇인가를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작은 손길들에 감사합니다. 단순한 기쁨을 찾아봅니다. 찬양과 감사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길 기대합니다. 사랑을 경험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평안을 누립니다. 저 또한 누군가에게 사랑과 화목, 기쁨과 빛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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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신앙 - “내 상처를 보고 만져라.”
토마시 할리크 지음, 오민환 옮김 / 분도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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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이상적이고 낙관적이라 어려운 순간에도 희망을 보려 애써 왔습니다. 고통과 고난을 고스란히 견딜 수 있는 힘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슬픔과 불신 가운데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전심으로 동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의 깊은 상처를 애써 부정하며 긍정적 기억을 삶의 연료로 삼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작 예수님의 깊은 상흔을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죄의 무게를 홀로 오롯이 감당하셨던 그 고통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보다 부활을 삶의 동력으로 삼았습니다.



아직도 철이 없지만, 인생을 굽이굽이 지나다 보니 우리네 삶이 참으로 복잡다단함을 느끼게 됩니다. 영광과 승리, 성취와 기쁨만이 있지도 않고, 한없는 절망과 고통만 계속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며, 절망 중에 희망이 엿보였고, 고난은 또 다른 연대와 환대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추고 싶었던 상처와 고통이 나누어졌을 때, 저마다의 기억과 경험들은 우리를 하나 되게 했습니다. 미처 알 수 없었던 그 사람의 존재를 마주하게 됩니다. 나의 상처가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아픔이 되어, '함께'라는 소중한 힘을 얻게 됩니다.



체코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시 할리크(Tomas Halik)는 『상처 입은 신앙』을 통해, 상처 없는 신앙은 환상이며, 신앙의 위기와 의심이 우리가 살아 있는 증거라고 강조합니다. 그저 즐겁고 행복한 승리의 신앙은 우리의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토마스(도마) 사도의 의심은 불신의 모습이 아니라, 참 신앙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라고 주장합니다. 어두운 밤을 통과하며 우리는 부단히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한 고통의 순간들은 우리의 상처가 됩니다. 그러한 고통의 증거를 만지는 사람이 참된 부활의 예수를 알아볼 수 있음을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그분을 따라가다 보면 위기가 도래하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시작하여, 참 신앙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찌 어두움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빛을 알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확신으로 가득 찬 신앙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철저히 고통당하셨고, 상처 입으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낮은 자, 소외된 자, 고통받는 자에게 해주는 것이 나에게 해주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며, 상처 입은 자들의 주님이 되어주십니다.



쓰라린 가슴을 부둥켜안고 이제 조금씩 주위를 둘러봅니다. 그동안 존재했지만, 보지 못했던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아픔과 상처로 인해 절규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며 사명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상처로 인해 우리는 주님과 이웃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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