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년 내력의 중국 황실 건강법 - 어의에게 듣는 생로병사의 비밀
자오양 지음, 이설영 외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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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명이 발달하고 시대가 복잡해짐에 따라 질병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이에 못지 않게 치료가 어려운 난치병과 옛날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질병들이 발생하고 있다. 의식주 생활이 윤택해지는 반면, 각종 공해와 스트레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건강하게 일생을 보낼 수 있다면 큰 행복이라 할 것이다.

" 재산을 잃으면 인생의 1/3 을 잃은 것이요, 가족을 잃으면 인생의 1/2 을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인생의 전부를 잃은 것이다. " 란 말처럼 건강은 생을 영위함에 있어 기둥이 되고 대들보가 되는 원천이기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서구에선 해부학을 토대로 한 실험위주의 서양의학이 발전해 왔다. 이에 비해 동양에선 동양철학을 근간으로 동양의학이 발전해 왔다. 동양의학인 합방의 치료방식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인체와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는 치료법으로 서양의학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최근엔 서양의학에서도 침술에 의한 치료 등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책은 중국의학의 발전을 지탱해온 황실 어의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춘추시대에 세상 사람들이 神醫라고 칭송한 편작의 일화로 시작하여 서태후의 보양, 미용법에 이르기 까지 책장을 넘기는 내내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저자 자오양은 중국농업대학과 중국인민대학의 겸임교수인데, 그는 책머리에서 황실 어의들의 삶과 그들의 신묘한 처방을 소개하려 한다고 취지를 밝히고 있다. 책은 모두 9 개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 후미에 첨부된 특별한 내용은 더욱 흥미롭다.

 

 

# 御醫의 태동

 

고대 중국 夏, 殷, 周 시대는 의학과 관련된 기록이 매우 적다. 殷墟에서 출토된 甲骨文을 살피면 여기에 " 疾小臣 " 이란 단어가 자주 나온다.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 疾小臣 " 은 당시 궁중 의약관리를 담당한 의관으로서 중국역사 최초로 출현한 御醫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당시엔 무당이 국가의 命運을 좌지우지하였기에 그 지위는 미약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중국의 名醫들

 

병이 골수에 미쳤기 때문에 齊나라왕 桓侯의 병을 고치기 힘들다는 진단을 내린 扁鵲은 불행하게도 그의 능력을 시샘한 秦나라 武王의 어의에 의해 살해 당하고 만다.

 

우울증에 걸린 제나라왕을 치료하기 위해 오히려 환자의 화를 돋우는 소위 " 격노법 " 을 이용한 文摯도 왕의 증세를 완치했지만 그가 행한 무례때문에 솥에서 산 채로 삶겨 죽는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다.

 

그 밖에 피부절개술이란 파격적인 치료법을 도입한 楚나라 武왕의 어의 兪부, 왕에게 올바른 성생활을 충고한 秦나라 景公의 어의 和, " 병입고황 " 이란 고사의 주인공인 秦나라 어의 緩, 齊나라 宣왕의 여드름과 齊나라 惠왕의 치질을 치료한 구 등도 당대에 명성을 떨친 명의들이다.

 

또한, 얼굴 빛만 보고도 병을 맞친 五色診法의 창시자 淳于意는 후한시대의 명의였으며, 漢 武帝 시절 진맥과 의약에 통달한 역사상 최초의 女侍醫 淳于衍은 정치적 유혹에 빠져 임신한 허황후에게 附子를 사용해 죽게 만들어 불명예스런 참수형을 당한다.

 

한편, 전한 和帝 때 유명한 의학자 곽옥은 貴人들을 치료하는데 어려운 이유 네 가지를 열거하기도 했다. 즉, 의사를 믿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몸보양하길 경시하고, 몸이 허약해 약기운을 이기지 못하며, 그리고 편안함만 추구해서 노동이라곤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황실 인사의 치료가 매우 어려움을 토로했다.

 

조조의 專擔侍醫 왕숙화는 寸口診脈法을 처음으로 고안하여 맥학연구의 최초 서적인 [脈經]을 저술했다.

 

특이한 家門도 있었다. 徐氏 집안은 7 대에 걸쳐 서도도, 서문백, 서지재, 서지범 등 열 두명의 명의를 배출한 家門이다.

 

당태종의 어의 견권은 낡은 공기를 뱉어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시면 폐사 깨끗해지고 건강하게 수명을 연장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양생술을 제창했다.

 

陳나라 시절( 557 - 589 년 ) 허윤종은 당시 진나라 유태후의 중풍을 치료하여 이름을 날렸다. 오늘날의 霧化吸入療法의 전신격인 훈증요법을 이용했던 것이다.

 

隋나라 文帝시절 장안일대에 몰아 닥친 瘟疫의 비참한 상황을 목도한 손사막은 의학에 뜻을 세우고 정진하여 의술의 경지가 상당했지만 주로 민간의술 활동을 하다가 자주  궁중에 초대되어 질병 치료를 하기도 했다. 그는 [懸絲診脈]( 팔을 실로 묶어서 진맥하는 방법 ) 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 인물이다.

 

# 산해진미로 망가진 몸

 

唐나라 의종의 딸 同昌公主가 위보형과 결혼한다. 그런데, 공주는 산해진미를 포식하는 정도가 보는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매일 먹고 운동은 하지 않아 시집간 이래 사흘이 멀다하고 병에 걸리면서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한편, 공주의 주치어의 십 여명은 병상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치료했지만 결국 사망한다. 그러나, 위씨집안은 가문에 떨어질지도 모를 화를 면하고자 모함하여 어의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모두 죽게 만든다. 어의들의 불안한 운명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 武則天의 젊음 유지 비결

 

81 세까지 장수를 누린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여황제인 무측천은 보양을 매우 중시한 여성이다. 익모초로 얼굴이 윤기나게 하는 미용법을 처방했는데, 외용으로 얼굴에 바르면 피부가 검은 것을 치료하고 얼굴의 반점과 주름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 한다.

또한, 面首 ( 귀부인의 南色 상대인 美男子 ) 를 길러 고대 방중술에 의한 장수를 추구했다 한다.

 

# 먹거리의 올바른 도리

 

宋대의 저서 [성제총록]에 의하면 음식은 응당 五穀이 먼저이고, 五肉으로 더하고, 五果로 보조하고, 五菜로 채운다고 했다. 五穀은 기장, 마, 콩, 밀, 쌀 등 곡물, 오과는 대추, 오얏, 은행, 밤, 호두 등 열매와 견과류, 五肉은 소, 개, 양, 돼지, 닭 등 가축, 五菜는 아욱, 부추, 염교, 콩잎, 파 등 채소를 말하는데 실용적인 먹거리의 올바른 도리라고 하겠다. 이 견해는 음식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는 당뇨병, 고지혈증, 고혈압 등의 질병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다. 먼저 먹거리를 다스리고, 그 다음에 다시 약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 심리 치료법

 

明나라 嘉靖시대의 어의 고정방은 조정에 나가 있으면서 서로 속고 속이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이들 관리와 귀인들의 심리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연구하여 심리질병에 대한 관찰법을 제기했다. 이러한 심리적 스트레스 하에선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기 쉽다고 생각했다. 官界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주 " 熱中 " 이라는 증상을 앓았다. 이런 종류의 열중병은 화기가 복부에 쌓여 중풍을 일으키고 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는 증세로 각종 낭종과 종양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500 여 년 전에 고정방이 이런 분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라 하겠다. 그는 이런 심리적 이론의 제기와 함께 심리치료를 강조했다.

" 상급치료는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고, 중급치료는 형태(몸)를 치료하는 것이며, 그 아래로는 이치를 따지지 않는다. " 라고 하면서 병을 치료하는 것은 심리부터 치료하는 것이 최고의 경지라고 말했다.

 

# 건륭제의 장수비결

 

건륭제( 1711 - 1799 년 ) 는 60 년 동안 황위에 있었으며 89 세까지 장수했다. 그는 활쏘기, 사냥, 기마 등 스포츠를 매우 좋아해서 건강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구령주와 송령태평춘주 등 다양한 종류의 養生酒를 즐겨 마셨고 시를 읊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내면의 마음을 다스렸다 한다. 음식에도 매우 조심하면서 林産物을 즐겨 먹었다 한다.

 

# 서태후의 건강비법

 

서태후( 1835 - 1908 년  ) 는 淸代 역사상 가장 장수한 태후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평생 장수를 위한 섭생법을 추구하여 74 세의 고령까지 장수했다. 서태후의 양생 비방은 네 종류가 있었다. 즉, 건강음료를 마시고, 특이한 보건 고약을 배꼽에 붙이며, 장수선단을 복용하고, 그리고 자양강장식품을 복용했다. 그녀는 1 년 내내 사람의 젖을 마시고 진주 가루를 먹어 청춘의 아름다움을 유지했으며, 어의가 만든 八珍고라는 간식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서태후는 화장하는 것을 몹시 좋아했지만, 반면 머리카락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고지방 식품을 즐겨 먹었기에 두발에 기름기가 비교적 많으면서 머리카락도 잘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어의들은 머리카락을 보호하는 세발제를 제조하여 두발에 영양을 공급했다고 한다. 국화, 박하, 약초 등을 이용하여 만든 탕약에 머리를 감게 했다니 놀랍기도 하다.

 

누가 세월을 이길 수 있겠는가 ?

1908 년 10월 중순부터 노쇠 현상이 시작되면서 온 몸의 관절이 힘이 없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열이 오르며, 잦은 기침을 동반한 오한과 발열 증상이 나타났다. 수면 상태도 좋지 않아 자주 잠들다 깨다를 반복하였다. 매일 먹는 것이 적어 지면서 아침에 죽 반 그릇밖에 먹지 못했다. 자주 기침하여 옆구리 밑이 아팠다. 이런 진료 기록으로 판단해 볼 때 서태후의 사망 원인은 만성 기관지성 폐렴인 것이다.

 

 

어의들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그들의 에피소드와 그들의 업적 등 중국의학의 발전에 미친 영향등을 이 책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황실의 양생 비결과 처방법 등도 수록하고 있어 중국의학사의 길라잡이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책장을 덮는 순간, 우리나라 한의학사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두 사람의 醫聖이 떠올랐다.

龜岩 허준은 방대한 의학 자료를 정리하고 편찬하여 민족의학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민초들을 질고에서 구해준 임상대가이다.

東武 이제마는 기존의 방대한 의학토양을 뒤흔든 반란자이며, 사상의학이라는 제 3의 의학을 개발한 창안자로 새로운 의학의 지평을 연 개척자이다. 동양의학의 역사가 비록 중국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선조가 이룩한 업적은 부족함이 없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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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밀레니엄 북스 99
한비자 지음, 김동휘 옮김 / 신원문화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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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한번 읽고서 다시는 쳐다 보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면 내 옆에 가까이 두고서 반복해서 읽고 싶은 것도 있다. 이 책이 바로 후자에 속한다 하겠다. 읽을수록 책에 담긴 敎訓들이 현재 또는 장래에 닥칠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는 通察力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중국 戰國時代의 7 雄 중 제일 쇠약한 나라가 韓나라였다. 韓非는 한나라왕 安의 庶公子인데, 부국강병책은 오직 法術의 채용에 달렸다고 왕에게 건의하지만 끝내 채택되지 않았고 이후 韓나라는 秦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기원전 4 세기 秦나라는 상앙의 法治주의를 도입하여 變革의 힘으로 국력이 크게 강화되어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진나라왕 政( 이후 진시황이 됨 )은 측근이 전해준 한비의 저작물을 읽은 뒤 크게 감명받아 한비를 만나길 원하고, 중간에 연결하는 사람이 바로 李斯이다. 한비와 이사는 荀子밑에서 동문수학한 동창이었다. 그러나, 한번만 볼 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던 진시황과 이사는 한비를 초빙해 놓고는 감옥에 가둔 뒤 독약을 마시게 해 죽이고 만다. 아이로니하게도 한비의 思想만은 고스란히 이들이 접수하여 나날이 커져가는 진나라의 통치 철학에 한껏 활용한다.

" 重臣이란 자는 이 네 겹의 성벽 속에 그 정체를 감추고 있다. 또 임금은 네 겹의 성벽에 가로막혀 있어 중신의 정체를 알아낼 수가 없다. 이리하여 임금은 눈이 가려지고 중신의 實權은 점점 커져만 간다. " ( 고분편, 78 쪽 )
" 머리를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 법의 권위는 없어지고, 힘을 다하는 사람이 적어지면 나라는 가난하게 된다. 이것도 또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원인이다. " ( 오두편, 320 쪽 )

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노자,한비자 列傳]에서 食餘桃와 逆鱗를 인용하면서 한비는 君臣관계의 비정함을 밝히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이 우화가 미묘한 인간관계를 묘사하는 데 자주 인용된다.

미자하란 美少年이 위나라 임금 영공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다. 소위 동성애자다.
어느날 밤,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접하고 미자하는 임금의 命이라 속이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가 어머니를 간호하고 돌아 온다. 당시 국법에 의하면 임금의 수레를 몰래 타면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지만, 왕은 오히려 미자하의 극진한 효성을 칭찬한다. 또 한번은 임금과 함께 과수원을 거닐다 복숭아 하나를 따서 맛을 보니 너무도 단 맛이라 한 입 베어 물고 남은 복숭아를 임금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매우 불경한 행동임에도 왕은 미자하가 입맛까지 포기하면서 자신을 사랑해준다고 치하합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을 붙잡지 못하기에 나이가 든 미자하의 美色은 사라졌습니다. 이에 왕의 사랑도 식으면서 임금은 앞서 한 일들을 괘씸죄로 다스린다.

미자하가 한 행동은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앞에서는 칭찬을 받고 뒤에서는 죄를 쓰게 되었다. 단지 영공의 사랑이 미움으로 바뀐 때문이다. ( 세난편, 110 쪽에서 )

한비는 인간의 이기심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간파한 다음 이를 제왕학의 권술이론으로 발전시켰는데, 그의 이론은 깨어있는 시대의식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적용한 결과물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비극적인 최후를 면키 어려웠던 것이다.

사마천도 열전에서 한비자의 비극에 대하여 깊은 동정심을 표한다. 또한, 동문수학한 친구를 모함하여 친구를 죽이는 이사의 삿된 행동을 통해 비열한 인간관계에 대해 감회도 표출하고 있다.
" 한비가 [說難]을 썼으면서도 그 자신의 화를 면하지 못한 것을 나는 슬프게 생각한다. " ( 112 쪽 )

한비는 인간관계의 내면을 족집게처럼 속속들이 지적하고 비정한 인간관계로 부터 받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아플 정도로 그 내면을 헤집었다. 이 불세출의 학자는 법가학파의 종합판이었는데, 그의 중심사상은 " 군주는 막강한 권력을 지녀야 하며 인민의 원망에도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상벌이 엄격하고 분명하면 나라를 만능으로 만들 수 있다. " 는 것으로 임금의 신하통솔법을 " 術 " 이라 하고, 술의 바탕이 되는 것이 法에 의한 " 賞과 罰 " 의 실시라는 刑名參同인 것이다.

이 책엔 모두 14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병편]에선 신하를 통솔하는 법을, [십과편]에선 열 가지의 교훈을,[고분편]에선 법술 채택의 필요성을, [세난편]에선 신하의 입장에서 행하는 설득술을, [화씨편]에선 군권강화를 주창, [망징편]에선 망하는 징조를 열거하고, [비내편]에선 왕의 여자를 경계할 것을, [설림편]에선 옛날의 일화나 사화를 소개하고, [내저설편]에선 칠술과 육미를, [외저설편]에선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설화를, [난편]에선 기성 도덕에 대한 논쟁을, [오두편]에선 나라를 좀먹는 다섯 부류인 학자, 유세가, 협객, 측근, 상인과 직공을 비판하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또한 食餘桃, 역린지화, 守株待兎, 화씨벽, 망국의 음악, 脣亡齒寒, 관포지교, 矛盾 등의 이야기도 소개되고 있어 재미를 더해준다.  

저주받은 秘記를 남긴 悲運의 思想家 말더듬이 한비자는 약소국 한나라의 비애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산화한 諸子百家의 마지막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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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희, 파스타에 빠져 이탈리아를 누비다
이민희 지음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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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이유는 먹는 즐거움에 대한 유혹이었고, 파스타에 관한 유익한 지식도 접하면서 이탈리아 여행길에 나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비록 내 발로 직접 찾아간 여정은 아니었지만, 친절한 민희씨의 인솔탓에 기억에 남는 여행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파스타의 종류는 무려 300 여종이 넘을 정도로 다양하며, 본 고장인 이태리는 물론이고 세계인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우리가 가끔씩 먹는 스파케티도 사실 파스타의 한 종류이다.

 

스물 여섯의 나이에 파리 재래시장에서 만난 치즈에 반해, 4 년이나 준비한 끝에 다니던 직장를 과감히 사직하고 프랑스와 스위스 등 장장 1 만 킬로미터를 60 일 간 여행길에 나선 적이 있다는 민희씨, 이번엔 렌트한 봉고형 차량에 몸을 의지하고 무려 75 일간 전통 파스타를 찾아 이탈리아 여행길에 나섰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 - 都市의 뒷골목에서 만난 파스타, 작은 마을 작은 廚房의 오직 하나뿐인 파스타 - 로 단락지어 이 속에 8 편의 파스타 여행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파스타 요리법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 파란 만장 민희씨 " 가 파스타를 찾아 좌충우돌하는 여행기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도 다녀간 적이 있다는 스페인 광장 근처 골목길에 위치한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즉석 파스타 가게 [파스티피초]를 찾아가면서 이 여행은 시작되어,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州의 토리노 외곽 노바라 마을에서 끝이 난다.

 

이탈리아 여러 지역의 크고 작은 레스토랑, 가정집, 농장 그리고 천년 역사의 볼로냐 재래시장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파스타 등 전통음식을 만드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전통의 소중함도 경험한다.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내가 친절한 민희씨의 인솔을 받으며 로마에서 토리노까지  구석 구석을 다니며 캄파니아의 푸실리, 시칠리의 마카로니, 토스카니의 피치, 볼로냐의 토르텔리니, 리구리아의 스파케티 등 이색 파스타 맛여행을 한껏 즐긴 기분이 들었다.

또한, 파스타와 치즈 그리고 발사믹 식초 등에 관한 유익한 지식도 습득할 수 있어서 더 없이 좋았다.

 

남들의 눈에는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은 하루 하루 자신만의 노하우를 연마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同價紅裳 " 이란 말처럼, 같은 음식이라도 좀 더 맛있고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기에 그들의 음식 전통은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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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잠자는 미녀
아드리앵 고에츠 지음, 조수연 옮김 / 열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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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세기 프랑스 新古典主義를 대표하는 화가 [앵그르]의 작품 [나폴리의 잠자는 미녀]의 행방을 추적하는 미스테리 소설이다. 이 책의 이해를 위해 먼저 19 세기 미술사를 살펴본 것이 매우 유익했다.

 

프랑스혁명( 1789년 ) 과 함께 관능적이고 향락적인 로코코 미술이 퇴조하고, 영웅적이며 애국적인 소재를 강조한 신고전주의가 대신 이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이 畵風은 균형잡힌 구도, 명확한 윤곽, 그리고 형태와 선을 중시하는 특징을 지녔다.

당시 [다비드] ( 1748 - 1825 년 ) 가 중심이 되어 화풍의 방향을 잡았고, 그는 나폴레옹에게 등용되어 예술적, 정치적 권력자로서 [앵그르] 등 고전파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뒤를 이어 신고전주의를 완성한 [앵그르] ( 1780 - 1867 년 )는 19 세기 초 중반에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노령기인 19 세기 중엽 이후의 작품은 욕실광경, 여성의 누드화가 주종을 이루었다.

 

19 세기 산업혁명의 여파로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자 일상이 너무도 인공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에 미술가들은 무기력한 현실을 경멸하며 자신들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는 낭만주의가 태동했다.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는 스페인의 [고야]이며, [그로]( 1771 - 1835 년 ), [테오도르 제리코]( 1791 - 1824 년 ) 그리고 [카미유 코로]( 1796 - 1875 년 ) 등 프랑스 화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후 [들라크루아]( 1798 - 1863 년 )가 낭만주의 미술의 완성자로 평가받았다.

 

이 책의 저자 아드리앵 고에츠는 미술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다. 현존하고 있는 [앵그르]의 작품 " 그랑 오달리스크 " 와 동일한 형식이지만 그림엔 나신의 금발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고 전해지는 한 그림의 행방을 추적하는 이 책은 3 부로 구성되어 있다.

1. 나폴리의 잠자는 미녀

2. 파르세네 정원 풍경

3. 기수없는 말들의 경주

 

이 책의 주제인 사라진 그림찾기의 퍼즐 맞추기에 빠져 보자.

 

# 첫 번째 퍼즐 - [앵그르]의 회고 ( 1861 년 )

 

1814 년, [앵그르]는 나폴리王 의 공식초청을 받아 카세르타 왕궁에서 카롤린 왕후의 초상을 그리게 된다. 이 때 왕비의 초상을 그리면서 잠자는 자세를 취하는 두 여인의 그림을 함께 그려 나갔다. 한 명은 1819 년 파리 살롱에 출품한 " 그랑 오달리스크 " 이며, 또 다른 한 여인은 바로 " 나폴리의 잠자는 미녀 " 이다. 당시 나폴리王은 뮈라였는데, 그는 나폴레옹의 軍에서 뛰어난 처세술을 발휘하여 나폴레옹의 누이 카롤린과 결혼한 인물이었다.

 

[앵그르]가 카세르타 왕궁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그녀는 카롤린과 어렴풋이 닮았지만, 갸름한 얼굴선과 단아한 옆얼굴이 나폴레옹의 또 다른 누이인 폴린 보르게제 공주와 더 닮았다. [앵그르]는 1813 년 12 월 마들렌과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마들렌은 나폴리가 맘에 들지 않아 로마에서 체류했기 때문에 [앵그르]의 은밀한 연애가 가능했다. [앵그르]는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알고 있었다. 기억만으로 그녀의 오른 쪽 종아리에 있는 반점과 입 왼쪽 아래에 있는 점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있었다. 그녀의 길고 가는 팔과 날씬한 등, 잘록한 허리, 부드러운 갈색 빛의 허리 살결 등 몸에 관해서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앵그르]는 부인이 있는 로마로 돌아가야 했다. 아직 그림이 미완성 상태라 몇 번 더 자세를 취해야 하므로 로마로 함께 갈 것을 제안했고 그녀는 이를 받아 들였다. 마들렌의 시선을 의식해서 비싸지 않은 로마의 하숙집을 숙소로 마련해 주었다.

어느 날 저녁, 로마에서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 다음 날 점심 무렵 화가 [프랑수아 마리우스 그라네]가 [앵그르]를 불러 내어 " 난 어제 저녁에 자네의 멋진 모델을 만났네. 그녀를 유혹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 나는 그녀가 모델 수입만 받아가지고는 살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하네. 생각해보게. 누가 그녀에게 돈을 주는지. " 등 한 동안 말을 했다.

 

[앵그르]에겐 무척 성실한 제자 아모리 뒤발이 혹시 " 나폴리의 잠자는 미녀 " 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 왔다.

그는 그림의 행방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혁명의 와중에 파괴된 거대한 카포 디 몬테 왕궁의 어느 다락방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베네치아에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녀가 갑자기 죽었다. 그녀는 누추한 술집에 살았고, 어느 날 그곳에서 함께 지내던 여인 중 한명이 찾아와 장례비용을 지불해 달라고 말해서 알게 되었다. 그녀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관을 열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고는 한번도 껴안지 못한 육신을 담고 있는 그 관에 입을 맞추었다.

 

# 두 번째 퍼즐 - [카미유 코로 ]의 회상 ( 1866 년 )

 

[코로]는 29 살에 로마 사교단체 중에서 가장 박물관 냄새가 나는 " 안토니누스 클럽 "에 가입했다. 한번은 한밤중에 古代의 동굴이 있는 곳에 안내되어 갔다. 그 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조제프란 인물로 부터 그림 한 점을 구경하게 되었다. 액자없이 주홍색 다마스에 걸린 그림이었다. 작품엔 작고 푸른 색 글씨로 [ J. A. D. 앵그르 제작 ]이 쓰여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가장 누드다운 누드였다. 그 여인은 종아리에 갈색 점이 있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솔직하고 약간 우수에 젖어 있으면서 권태로운 기색은 전혀 없는 그 시선은 아무 것도 숨기고 있지 않았다. 무어인 조제프는 그녀가 로마에서 죽었다고 말해 주었다.

 

몇 년 후, 그림의 행방을 찾으려 했을 때 누군가 두번 째 판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착각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 작품을 제리코 화실에서 보았고, 그 후엔 발자크 씨의 집에서 봤다고 했다. 그러나, 제리코는 앵그르를 싫어했고, 발자크는 그림을 살 만큼 부유한 적이 없었다.

 

1865 년, 친밀한 살롱에서 속칭 " 오래된 그림 " 이라고 불리는 한 부인을 만났다. 이름은 C.-M.ㅇㅇㅇ 이라 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탈리아인이고, 나르본 플레가 프랑스 대사로 부임했을 무렵 나폴리에 있었다고 말했다. " 난 그 그림이 나르본 부인의 집에 있었을 때 자주 보았어요. 그 잠자는 미녀는 내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미워한 라이벌이라구요. "

그녀는 자신이 어느 젊은 화가와 애인 사이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화가를 나폴리에서 만났고, 그 후 파리에서 다시 그를 만났더니 사랑의 증거를 보여 달라고 졸라서 그 그림을 파리로 가져 왔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그림이 어떻게 된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녀는 " 나폴리의 잠자는 미녀 " 와 똑같이 생긴 눈을 가졌다고 확신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 세 번째 퍼즐 - [테오도리코]의 추억들 ( 1861 년 )

 

1817 년 봄, 로마에서 [테오도르 제리코]를 알게 되었다. 그의 모델이자 문하생이었다.

[테오도르 제리코] 씨는 진짜 [앵그르] 작품을 한 점 가지고 있었다. 바로 " 나폴리의 잠자는 미녀 " 였다. 사람들은 뮈라의 몰락과 함께 격변기에 이 작품이 파손되었다고 추측하지만, 망가진 그림은 다른 오달리스크였다. 그 작품은 나폴리에서 살아 남았고, 파리로 왔던 것이다.

1817 년 4 월 초, 우리는 로마에서 나폴리로 향했다. 로마로 오기 전인 지난 해 피렌체의 한 극장에서 나폴리의 프랑스 대사인 나르본 플레 씨의 부인을 알게 되었다. 당시 파리에서 막 도착한 화가라고 알려져 귀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적이 있었다. 나폴리에 도착하자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는 두 명의 귀부인을 재빨리 알 수 있었다. 바로 나르본 부인과 자칭 그 녀의 절친한 친구라는 또 다른 부인이었다. 그녀는 매우 뛰어난 성악가였다. 그녀는 코르시카 출신이며, 남편은 스위스 은행가 뫼리코프르였다. 그녀는 곧잘 자신이 카롤리나 여왕을 닮았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남편이 사업상 두 달간 제네바에 가 있자, 테오도르 씨와 목가적인 사랑을 했으리라 추측된다. 그해 11월 우리는 파리에 있었고, 뫼리코프르 부인은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에 오페라 하우스에서 노래를 불렀다. 갈색 머리의 그녀는 늘씬했으며, 무어인 조제프는 극장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 나폴리의 잠자는 미녀 " 가 화실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몇 달 뒤 노르망디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작품 속의 여인은 약간 볕에 그을린 코르시카 미인으로, 뫼르코프르 부인과 약간 닮았다. 그 녀가 처음 나폴리에 왔을 땐 뮈라가 집권하던 시기였고, 앵그르도 그 때 그곳에 있었다.

테오도르 씨는 뫼르코프르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을 착수했다. 그 여인은 어느 날 앵그르가 그린 누드의 여인을 비웃었다.

" 그 바보 같은 앵그르에게 이 그림의 모델이 죽었다고 믿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지, 지금도 흥분돼요. 그라네가 그런 장난을 쳤지요. 정말 웃기는 일이었어요. 대단한 이탈리아 희극이었죠. "

 

제리코 씨는 검은 모델 조제프에게 애정이 있었다. 당시엔 흑인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유행이었다. 조제프는 테오도르 씨가 죽기 며칠 전에 그 그림을 말아 가지고 사라졌고 그것으로 그는 이탈리아나 영국에서 돈벌이를 하고 싶어 했다. 

            

     
19 세기의 미술계 거장들의 삶을 조명해 보면서, 미스테리한 그림의 행방을 좇는 재미를 함께 즐길 수 있었다. 또한, 루브르박물관 여행시 감상한 적이 있었던 그림도 다수 등장해서 당시 여행 사진첩을 펼쳐 놓고 회상의 시간을 갖는 또 다른 즐거움도 있었다. 반면, 턱없이 부족한 나의 미술지식에 대해선 진한 아쉬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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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로 역사를 읽는다 1
타케미쓰 마코토 지음, 이정환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역사를 배우고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지도와 친해진 경험들을 우리 모두 갖고 있을 것이다.

지도를 매개로 하여 세계사를 살펴보면 지금까지 지구상에 무수히 많은 民族들의 興亡이 있고, 또한 얼마나 많은 국가가 建國되었다가 滅亡했는지도 알수가 있다.

 

古代 歷史와 철학을 전공한 저자 타케미츠 마코토는 [민족의 성쇠] 부터 [민족이란 무엇인가] 에 이르기 까지, 모두 마흔 가지의 소재를 지도와 함께 우리에게 쉽고 재미나게 요약해 주고 있다.

 

이 책은 모두 5 部로 구성되어 있다.

1. 약소민족이 넓은 영토를 재패할 수 있었던 비밀

2. 강대국의 위협에서 문화와 긍지를 사수한 소국의 孤鬪

3. 종교대립으로 국경선이 그어진 민족 마찰의 흔적

4. 열강이 만든 비극의 역사

5. 지금도 계속되는 민족분쟁의 불씨

 

이 책을 보고 있으면 민족의 興亡盛衰에 따라 형성되어진 역사와 그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성장은 세계 최초의 대규모 민족통합이며, 이 통합에 의해 문화가 크게 발전한 사실도 알 수 있다.

한편, 19 세기 말부터 민족문제에 근거한 수 많은 분쟁이 발생하여 현재도 진행형인 다툼들도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 <民族> 이란 무엇인가 ? 하는 화두를 던진다.

사실 이 개념은 쉬운 듯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언어, 종교, 문화 등을 공유하는 것이 민족이라고 정의하지만, 이런 식의 분류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민족의 수는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세계역사의 투쟁사를 보면 민족의 발전과  정복/ 피정복이 있었으며 몽고, 이슬람, 오스만투르크 등의 대제국이 탄생하고 멸망해 갔다. 지도에 그려진 세력권이나 국경선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정도가 눈에 어지럽게 비춰진다. 他 문화, 종교, 언어를 가진 집단으로 부터 위협을 느끼게 되면 비로소 자신과 공통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민족> 이라고 정의하여 함께 이에 대항해 왔다.

반면, 다른 집단의 외압을 받지 않는 한 사람들은 <민족>에 대하여 깊이 생각치 않고 주위 사람들도 모두 자신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일 뿐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하나의 국가라는 울타리에 다양한 민족의 융합이 이루어진 미국의 例에서 보듯, 향후 세월이 흐르면서 민족분쟁의 모습은 자리를 감추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이를 존중하는 자세를 견지한다면 공존의 길을 충분히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대립에 의한 분쟁의 대표격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화해를 위해 협상 테이블에 앉듯이, 더욱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국경의 의미는 쇠퇴할 것이고 나아가 국경자체가 무의미해질 때 세계인은 " 진정한 하나 " 로 거듭 태어날 수 있지 않을 까?

 

2007 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표했다.

" 한국 사회는 多民族적 성격을 인정해야 한다. " 면서 " 실제와 다른 [단일 민족 국가이미지]를 벗겨내야 한다. " 고 지적했다.

또한, 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 [순수혈통] 과 [혼혈]  같은 용어와 이에 담겨 있을 수 있는 인종적 우월성의 관념이 한국 사회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는 데 유의한다. " 고도 밝혔다.

1985 년 기준 한국의 성씨 275 개 중 136 개는 귀화한 성씨이다. 신라시대엔 40 여개, 고려시대엔 60 여개, 그리고 조선시대엔 30 여개의 성씨가 귀화했음을 알 수 있다.

 

단일민족인 한민족이라고 주장했던 한국도 애초에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는 급속도로 여러 인종과 여러 민족이 함께 살고 있는 나라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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