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의 철학 - 미루는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 필요한 일만 룰루랄라 제때 해내기 위한 조언
카트린 파시히.사샤 로보 지음, 배명자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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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력은 전기톱을 닮았다. 전기톱은 나무를 쉽게 베어내지만 자칫 잘못하면 벌목꾼의 다리까지 날려버릴 수 있다. 자제력이라는 말에 넘어가 자기 본성이나 라이프스타일에 맞지 않는 인생설계를 세웠다가는 크게 불행해질 수도 있다. 물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첫째 꼭 그래야 하는지 아직 증명된 바가 없고, 둘째 이런 경우가 적을수록 더 행복해진다. 요컨대, 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계획하고자 한다. - '서문' 중에서

 

 

오늘 꼭 해야만 하나?

 

모든 시작에는 망설임이 있다. 지금 서울 강남의 가로수길을 활보하면서 이곳저곳 쇼윈도우를 기웃거리는 젊은 여성들, 거실 소파에 앉아 인기 TV 드라마를 뚫어져라 시청하고 있는 중년 여성들, 그리고 서울 근교의 산행을 마치고 등산 동호회 회원들과 산 입구 음식점에서 부어라 마셔라 여흥을 즐기는 남성들은 아직 쓰레기 봉투를 내놓지 않았거나, 빨래를 마치지 못했거나, 우편함의 쌓인 우편물을 수거하지 않은 등 눈앞에 놓인 과제나 프로젝트를 미루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이들을 비난까지 할 필요는 없으며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이들이 무조건 게으르고 나쁜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들은 그 일을 잠시 지연시키고 있을 뿐이다. 사실 '미룬다'와 '지연'이라는 말은 같은 뜻임에도 불구하고 '지연'시킨다는 말이 왠지 듣기엔 편하다.

 

이 책의 공저자인 카르린 파시히사샤 로보는 당장 할 일을 '내일을 위해 남겨두는' 생활방식에 대해 'LOBO(Lifestyle Of Bad Organization)'이라고 명명했다. 즉 조직화에 형편없는 생활방식이라는 뜻이다. 지연행동은 특정 업무나 과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일상의 모든 일이 미뤄지고, 도저히 미룰 수 없어 보이는 일도 쉽게 지연된다.

 

여자든 남자든 똑같이 미룬다. 기혼자든 미혼자든 똑같이 미룬다. 일반인도 학자도 똑같이 미룬다. 특히, 직장인들은 자영업자보다 더 많이 미룬다. 미루는 성향은 일단 생기면 콧물감기처럼 지나가지 않고 견고하게 남아 성격적 특성이 되는 것 같다. 어느 연구에서 같은 피험자에게 지연행동에 대한 똑같은 설문조사를 몇 년 간격으로 두 번 실시했는데, 그 결과가 거의 똑같았다.

 

2003년 발표된 쌍둥이 연구에 따르면, 유전자 구성이 지연행동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연행동의 유형을 봤을 때 일란성 쌍둥이가 이란성 쌍둥이보다 확실히 더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안 좋은 조건에서(이를테면 대학에 다니며 시험을 치르고 과제를 내야 할 때) 더 많이 미루게 되지만, 세월이 흘러도 미루는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다른 보상거리로 지연행동을 상쇄하는 능력이 발달할 뿐이다.

 

책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미루고 딴짓을 하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작품을 탄생시킨 사례들은 미루기, 게으름, 무계획과 같은 부정적인 행동이 인간에게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게 해 창의성의 원동력을 만들어 준다고 알려준다. 독일의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카트린 파시히와 광고, 상품 기획자인 사샤 로보는 이같은 인간의 미루는 습성을 부정하거나 쓸데없이 자책하거나 강박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의 의지와 선호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만 제때 해내라고 충고한다.

 

 

환경이 만들어내는 부담

 

사무직과 연구직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직업군에서 업무와 요구사항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이는 경제 및 산업의 전문화와 기술화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부담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인위적 압박을 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꼭 기술 발전 때문만은 아니다. 이보다 더 피하기 어려운 사회적 '노동열의'라는 문제가 있다.

 

노동열의 때문에 힘든 것은 자영업자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들은 너무 많이 일한다. 여러 프로젝트가 무질서하게 쌓이고, 재정 압박이 과도한 업무로 이어진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변호사나 건축가 같은 대표적인 자영업자들의 업무 시간이 가장 긴 편이다. 변호사협회와 건축가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주 70시간 근무도 흔하다고 한다. 자영업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 안배라고 해봐야, 딱 하루 어느 요일에 야근을 하지 않을지 정할 수 있는 게 전부다.

 

전문지식과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적응력에 대한 요구 역시 커지고 있다. 점점 더 다양한 과제, 요구 조건,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적응력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자칫 자책에 빠질 수도 있다.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 해내고 있잖아!" 이렇게 자신을 남과 비교하게 되는데, 이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적인 감정 상태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도 저녁에 이불 속에서 남몰래 괴로워하며 뒤척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LOBO들은 어떤 과제에 부담을 느끼고 뒤로 미루는 것이 모두 자기 탓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쉽게 좌절한다. 그들의 능력에 비해 요구 사항이 너무 과한 경우에도 말이다. 널리 만연돼 있는 이런 자책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LOBO들이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일은 하나뿐이다. LOBO들에게는 자기 능력에 맞는 환경을 찾거나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노련한 미루기를 위한 조언

 

더 늦기 전에 지연행동 연습하기

늦잠 자기

너무 적게 계획하지 않기

모든 걸 동시에 시작하기

그냥 놔두기

생산성 향상 방법을 조언하는 블로그 멀리하기

 

합리적 이성의 소유자라고 자부하는 자기계발서 저자들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특정한 한 가지 일에 들어가는 '비용', 즉 그 일을 준비하고 착수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정해져 있고, 일에 따라 그 비용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이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고 식사 때 먼저 밥을 다 먹고, 그 다음에 채소 반찬을 다 먹고, 그다음 고기 반찬을 다 먹어야 할까? 수영장에서 한 시간 동안 다이빙만 하고 그다음 한 시간 동안 아이스크림만 먹어야 할까?

 

로버트 레빈<시간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가>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모노태스킹은 과제의 마무리를 중시하는 대부분의 서구문화권, 즉 '시각 문화time culture'에서 생긴 특별한 습관이다. 반면 과제의 시작을 중시하는 '사건시 문화event-time culture'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다중시간형 계획을 선호한다.

 

"다중시간형 계획을 세우면, 우선 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가 다른 일에 관심이나 호감이 생기면 그 일을 하고 다시 다른 일에 흥미가 생기면 그 일을 한다. 중간에 갑자기 쉬게 될 수도 있고 계획에 없던 새로운 일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처음에 집중했던 일에 다시 흥미가 생길 수도 있다. 다중시간형 계획에서는 모든 일이 각 각 조금씩만 진행된다"

 

심리학자 로버트 레빈은 다중시간형 계획과 단일시간형 계획을 유연하게 변환하라고 조언했다.

 

 

일에서의 문제

 

스위스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핑글리는 긴 시간의 고단한 노동을 신에 대한 공경이라 여겼고, 프랑스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한 술 더 떠 이 신앙의 전제조건으로 자본주의가 막강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저자는 이렇게 출발한 이념들이 현대인의 노동 업무뿐만 아니라, 가사노동, 개인의 사생활까지로 확장돼 많은 압박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현대인은 회사나 집에서 일을 덜 해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불안한 심리와 자괴감, 자책감까지 느끼게 된다는 설명이다.

이에 저자는 끊임없는 노동 압박감의 실체를 냉정하게 분석해야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불필요한 양심의 가책과 업무를 걸러내 꼭 필요한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의무라는 명칭으로 교묘히 포장된 것을 잘 가려내어 꼭 필요한 것 외에는 과감히 거부하고, 꼭 해야 하지만 능력이나 시간이 부족하다면 업무나 일상과 관계없이 남에게 위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가사家事 문제

 

옛날엔 참 살기 좋았다. 식탁보에 코만 안 풀어도 청결한 사람으로 통했다. 빨래는 1년에 한 번만 했다. 셔츠 한 장, 접시 하나, 나무상자 하나가 살림살이 전부인데 얼마나 많이 어질러놓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아름답고 정돈된 집을 소개하는 잡지가 많아지면서, 비를 막고 온기를 주는 것이 본연의 임무였고 한때 동굴이면 족했던 집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졌다. 오늘날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서 무질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는 한결같이 관리, 청소, 그리고 독일 가정들이 보유하고 있는 평균 1만 5000개나 되는 물건들의 상세한 정돈 방법을 소개한다.

 

LOBO라고 해서 모두가 난장판인 집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아니다. 어떤 LOBO는 혼자 감당할 수 없음을 미리 깨닫고 청소부를 미리 고용한다. 또 어떤 LOBO는 업무만 미룰 뿐 집안 청소는 쉽게 끝낸다. 학술적으로 연구한 바에 따르면, LOBO의 90퍼센트가 정리정돈과 청소를 미룬다. 정리정돈과 청소는 딱히 급한 일도 아니고 재미도 없기 때문에 미루기에 좋다.

 

 

데드라인의 위대한 힘

 

영리한 프리랜서나 프로젝트 리더는 필요한 비용, 인원, 기간을 예상할 때 '2배수에 약간 더 추가하기' 방식을 취하는데, 현실적인 예상 수치에 2를 곱하고 여기에 다시 만약을 대비하여 약간을 더 추가한다. 그러면 관리자나 의뢰자는 후자의 방식을 취해 제시된 수치를 다시 반으로 줄인다. 이제 양측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협상안이 결정된다.

 

자신의 예상을 두 배로 늘려 제안할 생각을 하지 못한 왕초보의 경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직장이나 일상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런 협상 게임이 벌어진다. 의뢰하는 사람과 의뢰받는 사람이 데드라인을 결정할 때도 같은 원리로 합의에 이른다. 의뢰하는 사람은 아무리 늦어도 3월 1일까지 끝내야 한다고, 그게 지켜지지 않으면 회사가 망할 거라고 과장한다. 사실은 12월까지 끝내도 넉넉한데 말이다. 의뢰받는 사람은 알겠노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2월 말쯤 콜라를 쏟는 바람에 컴퓨터가 고장났다고 거짓말을 한다. 사실 왜곡은 어느 정도 민주주의와 비슷하게 기능한다. 즉, 특별히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것보단 낫다.

 

 

벼락치기가 집중력을 높여준다

 

화가이자 건축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기하학을 하느라 궁정 화가로서 맡은 <모나리자> 제작 업무를 주어진 시간 내 끝내지 못했다.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는 <도둑까치> 서곡을 최종 리허설 날 스칼라극장 계단에서 썼다고 고백하며 자신이 쓴 명곡들이 사실은 미루기와 벼락치기로 완성됐다고 토로한다. 세계적인 온라인 이미지 공유 사이트 '플리커'의 개발자는 당시 맡았던 게임 개발 업무가 너무 싫어 딴짓하다가 세계 어느 곳, 어떤 장치로도 사진을 업로드, 편집, 공유할 수 있는 플리커를 개발하게 됐다.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미루고 딴짓을 하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작품을 탄생시킨 사례들은 미루기, 게으름, 무계획과 같은 부정적인 행동이 인간에게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게 해 창의성의 원동력을 만들어 준다고 알려준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라는 금언에 지나치게 함몰되지 말자. 벼락치기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미루는 습성을 부정하거나 자책하는 대신에 자신의 의지와 선호에 따라 할 수 있는 일만 제때 해내라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자신의 본성과 흥미'를 제대로 파악해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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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소멸 - 인구감소로 연쇄붕괴하는 도시와 지방의 생존전략
마스다 히로야 지음, 김정환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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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2008년을 정점으로 인구 감소세로 돌아섰으며, 앞으로 본격적인 인구 감소 시대에 돌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대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2010년 1억 2,806만 명이던 일본의 총인구는 2050년에 9,708만 명, 금세기 말인 2100년에는 4,959만 명이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는 국립 사회보장, 인구문제 연구소(사인연)의 <일본의 장래 추계 인구(2012년 1월)>의 중위 추계를 바탕으로 한 결과다. - '서장' 중에서 

 

 

인구 감소로 인해 지방 도시가 몰락한다

 

우리들은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었던 '인구 감소'라는 문제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어제오늘 사이에 갑자기 발생한 현상이 아니다. 단지 우리들이 이를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게 그리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인 탓이다. 책의 저자 마스다 히로야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총무장관을 역임했고, 2009년부터 노무라 종합연구소 고문과 도쿄대학 공공정책대학원 객원 교수를 맡고 있는데, 100년도 지나지 않아 현재 인구의 약 40퍼센트 수준, 즉 메이지 시대 수준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제1차 베이비붐이 일었던 1947~1949년 간의 출산율이 4.32였던 이후 꾸준히 하락세를 보이다가 2005년엔 최저치 1.26을 기록하더니 2013년까지 1.43으로 약간 회복세를 보이지만 여전히 바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출산율은 저조하고 고령화가 꾸준히 지속됨에 따라 저성장 국면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도 곧 닥쳐올 '고령화'에 대한 대책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저출산 현상에 대해선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또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특히,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권에는 젊은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인구 감소'에 대한 문제가 그닥 실감나지도 않는 것이다.    

 

인구 문제의 열쇠를 쥔 '20~39세 여성 인구'를 분석해보면, 이 대상층의 '자연적 감소'는 일본 전역에서 나타나는 데 비해 '사회적 증감'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컸다. 도쿄 도 23구 지역은 약 30퍼센트, 오사카 시와 나고야 시는 약 10퍼센트, 후쿠오카 시는 약 20퍼센트 등 대도시권에서는 대체로 '사회적 증가'를 보였지만 그 밖의 지방권에서는 대부분 최대 80퍼센트 이상이라는 큰 폭의 '사회적 감소'를 보였다.

 

"일본 절반이 소멸한다"


마스다 보고서는 이대로 가면 896개의 자치 단체가 소멸한다고 이야기해서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다. 일자리가 사라진 지방에서 젊은 사람들이 도쿄권으로 계속 이주하면서 지방은 인구가 감소하고 도쿄의 생활은 열악해졌다. 일자리도 안정된 주거도 육아를 도와줄 친척도 없는 상황에서 가구당 출산율은 낮아지고 아이들이 사라지 게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적색 지역은 소멸 가능성이 더 높은 곳이다. 일본 열도의 북부에 많고 전국에 걸쳐 산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사라질 위험에 처한 523개 도시

 

전국의 경향을 살펴보면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의 80퍼센트 정도, 산음산음지방의 약 75퍼센트, 시코쿠의 약 65퍼센트에 이르는 자치단체가 소멸 가능성 도시에 해당한다. 한편 도쿄권의 경우는 28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896개 소멸 가능성 도시 중 2040년 시점에 인구가 1만 명 미만으로 떨어지는 시정촌市町村은 523개로 전체의 29.1퍼센트에 달한다.

 

 

 

그렇다면 지방이 소멸하고 3대 도시권, 특히 도쿄권만이 살아남는 '극점 사회'에 지속 가능성은 있는 것일까? 물론 대도시권이 강대해짐으로써 일본 전체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미래는 밝다. 그러나 인구 감소가 현실화됨에 따라 그런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해졌다.

 

젊은층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온 지방이 소멸하는 한편, 인구 조밀 지역인 대도시권은 일관되게 낮은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도쿄 도都는 일본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다. 지방은 쇠락하고 대도시권이라는 한정된 지역에 사람들이 밀집해 고밀도의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회를 우리는 '극점 사회'라고 이름 붙였다. 일본 전체의 인구가 마치 블랙홀처럼 도쿄권을 비롯한 대도시권에 빨려들어가는 동시에 출산율이 극도로 낮은 대도시권에서는 초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적극적 정책과 조정적 정책

 

지금 당장 인구의 유지 및 반전 노력을 시작해 출산율을 2.1 이상으로 회복하더라도 그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까지는 30~60년의 시간이 걸리며 그 사이의 인구 감소는 피할 수 없다. 이에 국가 전략의 수립에는 이런 '시간축'의 관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즉 현재의 인구 감소 흐름을 막고 인구의 유지 및 반전을 지향하는 동시에 지방이 지속 가능한 인구, 국토 구조를 구축하는 '적극적 정책'과 인구 감소에 따른 경제, 고용 규모의 축소나 사회보장 부담 증대 등의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조정적 정책'을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

 

 

 

'적극적 정책'의 경우는 '사람'을 중심에 두는 정책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지역 정책은 굳이 따지자면 공공시설 같은 하드웨어적인 측면을 중시해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사람 자체가 정책의 기본축이 되어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구의 유지 및 반전'을 지향하는 것이다

둘째, '인구의 재배치'

셋째, '인재의 육성'을 달성하는 것이다

 

 

도쿄 집중 현상을 막아라

 

앞으로 지향해야 할 기본 방향은 '젊은이에게 매력적인 지방 중핵 도시'를 축으로 새로운 집적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당장은 지방의 인구 감소를 막을 수 없다. 이 조건 속에서 한정된 지역 자원을 재배치하고 지역 간의 기능 분담이나 연계를 진행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인구 감소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철저히 '선택과 집중'의 개념에 입각해 가장 효과적인 대상에 투자와 시책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먼저 지방 중핵 도시 중심의 광역 지역 블록별로 인구 감소를 막으면서 각 지역이 자신들의 다양한 힘을 최대한 쥐어짜내 독자적인 재생산 구조를 만들기 위한 '방어防禦, 반전선反轉線'을 구축할 수 있는 인구, 국토 구조를 저자는 제안하고자 한다. 즉 극점 사회가 초래되는 것을 막기위해 어딘가에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광역 블록 단위의 '지방 중핵 도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 한국에서도 지방의 성장 거점이 되는 지방 혁신 도시를 구축하는 데 많은 공을 들여왔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인 듯하다.

 

한편, 정부가 말하는 '지방 중추 거점 도시'는 지정 도시와 중핵시(인구 20만 명 이상) 가운데 주, 야간의 인구비율이 1 이상인 도시를 말한다. 전국에 모두 61개 도시가 있으며, 평균 인구는 약 45만 명이다. 참고로 주, 야간 비율이란 낮에 그곳에 사는 사람과 밤에 그곳에 사는 사람의 수를 비교한 것이다. 따라서 출퇴근이나 통학으로 대량의 인구가 유입되는 대도시에서는 높아지며 베드타운에서는 낮아진다.

 

 

희망 출산율 1.8을 실현하자

 

결혼해서 자녀를 갖고 싶어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회 경제적인 이유로 이를 이루지 못해 만혼화晩婚化나 미혼화未婚化가 진행되고 있다. 또 결혼한 부부라고 해서 자신들의 희망을 성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의 부부가 희망하는 자녀수는 평균 2.42명이지만, 현재 1.78명에 머물고 있다.

 

둘째 아이의 출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경제적 요인 외에 육아와 취업의 양립이 어려운 점이나 남편의 육아 참여가 부족한 점 등 육아 지원 서비스 부족과 근무 방식에 관련된 문제가 있다. 셋째 이후의 출산율은 육아와 교육에 동반되는 비용에 크게 좌우되고 있는 셈이다.

 

 

홋카이도의 지역 전략

 

홋카이도 전역에서 삿포로권으로 인구가 유입되는 한편, 삿포로권에서 도쿄가 위치한 간토권으로 많은 인구가 유출되고 있다. 특히 남녀에 따라 인구 유출입 상황이 크게 다르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성은 20~24세에 홋카이도 각 지역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많으며 유출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남성의 경우는 특히 20~24세에 홋카이도 밖으로 전출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삿포로 시는 여성 비율이 유독 높으며 특히 젊은층의 불균형이 현저하다. 삿포로 시의 25~29세 남녀 성비는 최근 0.9 전후까지 떨어졌다. 삿포로 시의 2011년 출산율은 1.09로, 도쿄 도(1.06)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낮다. 그 원인으로는 결혼, 출산 환경이 나쁘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젊은 여성이 남성보다 10% 정도 많은 성비 불균형도 출산율 저하의 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출산율이 낮은 삿포로 시에 홋카이도 내의 젊은 여성들이 계속 유입된 것이 홋카이도 전체의 인구 감소를 가속화했다.

 

 

 

 

지방을 살리는 해법은 없을까?

 

일반적으로 출산율은 수도권 보다 지방이 높다. 그리고 인구는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유입된다. 하지만 수도권의 인구를 공급하는 지방의 인구가 줄면 함께 소멸할 수 밖에 없다. 너도나도 수도권으로 간다면 결국 도쿄는 인구 블랙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같은 '극점 사회'는 경제 위기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에도 치명적임을 강조한다.

어떤 해법이 필요할까? 저자는 젊은 여성들이 늘어난 곳을 분석해 산업 개발형, 상업유치형, 베드타운형, 공공재 주도형, 학원 도시형, 콤팩트 시티형 등 6가지 모델로 분류했다. 이런 모델을 바탕으로 지방인구 유출을 멈출 댐기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로 '젊은이에게 매력적인 지방 중핵도시'를 축으로 한 새로운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지방 거점 도시를 정비함으로써 최소한 부모 집에서 최소한 한 시간 거리에 젊은 이들을 잡아놓을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한국도 수도권 집중을 막기 위해 일본의 사례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인류 최대의 혁명은 산업혁명, IT혁명도 아닌 인구가 줄어드는 인구혁명이다"

- 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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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품명품 수집 이야기 - 쓰레기? 나에겐 추억
전갑주 지음 / 한국교과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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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을 즐기는 사람들을 두고 '수집광'이라고도 이른다. 수집, 그것은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열광하며 스스로 그것을 자신의 관념과 생활 속에 넣어 두길 원한다. 마치 아름다운 새가 럭셔리한 새장 속에서 아침마다 자기를 깨우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즐기는 새의 주인과도 같이, 이 같은 공유에는 낯선 이가 방해할 수 없는 깊은 골이 있다. 

 

 

어느 수집가의 32년 수집 여행 이야기

 

책의 저자 전갑주교과서 출판인이다. 예전 문교부 산하 기관 국정교과서(주)에서 19년, 자신이 창업한 한국교과서(주)에서 16년 지금까지 총 35년을 교과서 출판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는 IMF 외환 위기 시절, 알거지 신세로 전락한 후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실업계 고등학교를 살리겠다는 포부로 실업계 전문 교과서 회사인 한국교과서(주)를 창업했다.

 

한편, 그는 23살 때부터 지금까지 32년째 수집광狂으로서 옛 교과서와 교육자료, 6.25 전쟁 흔적 자료, 역사사료, 근현대 생활 사료 총 20만여점을 수집했다. 이제 그는 영인본 출판, 전시회, 추억을 파는 문화 장사꾼이다. 추억장사 마수걸이 상품으로 자신의 32년 수집이야기를 담은 이 책을 출간했다. 책에는 '쓰레기? 나에겐 추억'이라는 부제副題가 달려 있다.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 유한준, <석농화원> 중에서

 

자신에게 유용한 것, 기쁨을 주는 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따라 삶을 영위해 나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수집가의 자질을 지닌 사람이다. 수많은 사람이 수집가가 되려고 한다. 담배를 수집하는 사람에 대해 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즉 담배 수집가들은 진귀한 담배를 금쪽같이 여기지만, 흡연을 경멸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저자는 문교부(현, 교육부) 산하 국영기업체인 국정교과서(주)에 근무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어 매년 발행되는 교과서와 교육 자료들을 남들보다 쉽게 수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돈 걱정 없이 한두 권씩 모은 지 30년이 훌쩍 넘어 다른 수집품들과 함께 이제 많은 양이 되었다. 오죽하면 수집품 창고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그의 아내는 머리가 아프다고 할 정도란다.  

 

이 책에는 우리들이 쉽게 만날 수 없는 개화기 최초 3종 국어 교과서, 1948년~1951년 사이에 간행된 '바둑이와 철수(국어1-1)'4종 교과서, 한석봉 천자문, 조선어독본, 최남선 소년잡지, 6·25 한국 전쟁 당시 전시 교육 체제 교과서 9종 등 다양한 희귀 국내 교과서들을 소개한다.

 

 

 

 

교과서를 수집하다

 

교과서는 교육의 도구이다. 저자는 처음에 '교과서는 중요하다'고 판단해 무작정 교과서 위주로 수집 활동을 했다. 교과서 한 권 한 권은 그 시대의 상황을 나타내는 조각이다. 각 시대에 발행된 교과서의 과목, 편찬자(저자), 내용과 문투, 편집, 제책 형태 등을 종합해 공통점을 추리면 그 시대의 통치 교육 이념, 교육 행정 방향 등을 알 수 있다.

 

올해는 근대 교과서 탄생 120주년이다. 1895년 당시 학부(교육부) 편집국의 <국민소학독본>을 기준으로 해서다. 통합형 국어 교과서인 셈이다. 이듬해 <신정新訂 심상소학尋常小學>엔 '김지학'과 '박정복'이란 어린이가 등장한다. 그런데 1922년 조선총독부 발간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의 첫 페이지에 소牛가 나온다. 이는 조선인을 마치 순종하는 소처럼 일본의 식민지 노예로 세뇌하려는 의도로 느껴져 분개가 치밀어 오른다.


 

조선총독부의 <보통학교 조선어독본>(1922년) 

 

'너는 소다. 너는 소다. 소는 주인에게 순종한다. 소는 주인에게 순종해야 여물도 많이 받아먹고 귀염을 받는다. 너는 소다. 너는 소다'


문교부는 1948~1951년 사이에 <바둑이와 철수(국어1-1)> 4종을 발행했다. 저자는 이중 2종을 수집했지만 나머지는 수집못한 상태였다. 그는 전국을 찾아 헤맨지 30여 년 만에 건축가이자 수집가인 사람으로부터 나머지 2종을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수집은 기다림과 인내심의 결정체이다. 일제가 교과서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김지학과 박정복이 철수와 영이로 새롭게 탄생한 셈이다.

 

조선 시대에도 <명심보감>, <동몽선습>, <삼륜행실도>,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그리고 <천자문> 등이 교육용 교재로 있었다. 물론 당시엔 신분제도가 철저했기에 누구나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1583년, 선조는 당대 명필 석봉 한호를 궁 안으로 불러 천자문을 쓰게 하고, 어제御製 초간初刊 천자문을 1601년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이것이 바로 '석봉 한호 어제 천자문'이다. 아직까지 초간본은 국내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기타 사료들

 

일제의 암흑기를 지나 해방을 맞았지만 이후 한국전쟁이란 불행한 사건을 겪으며 한국 사회에는 글을 미처 깨우치지 못한 문맹자들이 많았다. 특히,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기 때문에 당시의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배움의 기회가 훨씬 적었다. 1954~1958년, 정부는 전국 문맹 완전퇴치 계획을 결의했다. 교육부, 내무부, 국방부, 공보실, 농림부, 보사부 등이 교육을 주관했고, 기독교계도 이에 동참했다. 1961~1962년에는 국가재건운동본부가 이를 주관했다.

 

개화기開化期 이래 각종 잡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읽을 수 있는 각종 교육자료, 생활사 물품도 모았다.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과 학도병들에게 지급된 목총, 전쟁통에 사용된 이동용 책상 등 정말 다양하다. 새마을운동과 혼분식 장려 관련 포스터, 쥐잡기 운동에 동원된 쥐덫도 있다.

 

가족계획 관련 포스터는 시대별로 다르다. '알맞게 낳아 잘 기르자',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벗는다(1960년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신혼 부부 첫 약속은 웃으면서 가족계획'(1970년대),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1980년대), '사랑으로 낳은 자식 아들 딸로 판단말자'(1990년대) 등의 표어가 그 때를 대변하는 듯하다.

 

수집품 중에는 한국전쟁 때 발간한 '전시戰時 똥지 교과서'도 있다. 거무튀튀한 재질에 제본도 안 된 책이다. 국민학교 1~2학년용 교과서의 제목도 <탕크>, <비행기>, <군함>이다. 전쟁통에 질이 나쁜 인쇄용지를 부르는 속어인 '똥지'를 사용했다. 문교부는 제본도 못한 상태로 학생들에게 보급하며, 학부모에게 직접 제본하여 사용하라고 안내했다. 그는 문교부가 1951년에 임시 발행한 전시교과서 12종을 30년에 걸쳐 수집했다.

 

 

 

문맹퇴치운동 포스터(위)

1950년 6월 국어교과서 (아래 왼쪽)

 

 

향후계획과 꿈

 

이제까지 여러 종류의 수집품을 사들이는데 들어간 돈이 빌딩 한 채 값이란다. 수집품이 넘쳐나 시골 폐교를 사들여 10개 교실을 꽉 채워도 모자라 회사 창고 세 곳과 사무실에도 수집품을 갖다 놓았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수집품은 생명'이라며 하나도 팔지 않은 그는 한국의 성공신화를 보여주는 60~70년대 마을을 만들고, 비무장지대에 분단과 6·25 전쟁을 기억할 수 있는 평화통일 문화 공간을 짓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모두 20만여점 됩니다. 수집은 무수히 흩어진 기억의 편린을 모으는 재미입니다. 수집품들은 삶의 곡절마다 나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고, 깊고 마르지 않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저자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수집가에겐 돈과 열정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 세가지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인내심이 아닐까. 최소한 10년은 인내해야 수집가라고 불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미래학자 롤프 옌센은 "21세기는 꿈과 감성과 이야기를 사고파는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저자의 꿈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수집은 역사를 모으는 놀이다"

- 야나기 무네요시, <수집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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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훈의 그랜드투어 : 지중해 편 - 사람, 역사, 문명을 거닐고 사유하고 통찰하는 세계사 여행 송동훈의 그랜드투어
송동훈 지음 / 김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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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시원을 찾아 그리스 터키 스페인을 가다

 

쪽빛 바다 지중해는 유럽의 문명과 깊은 연관성을 가졌다. 지중해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그리스, 터키, 그리고 스페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매우 의미있다.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발상지다. 터키는 수많은 문명을 잉태하고 길러낸 보고寶庫다. 스페인은 번영과 쇠락이 반복되면서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창조해낸 땅이다.

 

최근 그리스스페인은 TV 미디어의 단골 손님이다. 재정 위기로 유럽발 세계 경제 위기의 주범들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국민들은 게으르고 분수넘는 과소비를 일삼는다고 낙인 찍혔다. 그러나, 바람은 언젠가 지나가기 마련이다. 늘 그래왔다.

 

이 책의 저자 송동훈은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10년 넘게 기자생활 하다가 문화 콘텐츠 사업체 풍월당風月堂을 창업하여 여행과 역사에 관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5년에 걸쳐 유럽 3부작을 완성했는데, 이 책은 세계사 여행 그랜드 투어 - 서유럽편, 동유럽편에 이어 마지막 3부 지중해편이다.

 

 

  

 

 

그리스는 태양의 나라다. 찬란한 빛 때문에 대지는 밝고 활기차다. 특히, 봄은 더욱 그러하다. 어딜 가나 꽃들이 가득하고 향기가 진동한다. 그리스에서의 여행은 눈부시고 취한다. 이중에서도 절정은 아테네다. 이 위대한 도시는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창조한 곳이다.

 

터키는 풍요로운 땅이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평원은 옥토 그 자체다. 이 풍요로움이 문명을 낳았고, 고대의 히타이트 제국과 리디아 왕국이 대표격이다. 이 풍요로움은 이웃 나라들을 자극해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로마 제국이 이 땅을 정복했던 것이다. 터키이스탄불이 있다.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 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이 도시는 언제나 활력 넘치고 시끌벅적하다. 수백 개의 모스크와 현대적 건물이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펼친다.

 

스페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투우, 플라멩코, 오렌지와 올리브, 스페인 전통 햄 하몽, 스페인 식 볶음밥 파에야, 그리고 축구 등을 얘기한다. 어떤 이는 예술가의 나라로 기억한다.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 천재 건축가 가우디,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 달리, 미로 등을 떠올릴 것이다. 스페인마드리드바르셀로나로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나라다. 난공불락의 도시 톨레도, 기독교 왕국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 8백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던 남부지역 안달루시아 등 우리나라보다 다섯 배나 큰 땅이다. '대항해시대'의 문을 연 세비야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었고 스페인은 제국이 되었다. 

 

 

아테네에 가면, 먼저 프닉스PNYX를 찾으라

 

아테네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아크로폴리스다. 관광객은 대개 아클로폴리스만 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닉스를 건너뛴 아테네 여행은 의미가 없다. 먼 예옛날 아테네의 시민들은 언제나 프닉스에 모여 민회를 열고, 국가의 대소사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결정했다. 그렇다. 여기가 바로 민주주의의 탄생지다!

 

2,600년 전 민주주의 방향을 제시한 사람은 현인 솔론(BC 640~560)이다. 그는 아테네 왕족의 후손이다. 고대 아테네는 오래전 왕정이 끝나면서 부와 권력이 귀족들에게 넘어갔기에 대다수의 왕손은 여전히 귀족으로서 떵떵거리며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솔론의 집안은 예외였다. 그의 아버지가 대부분의 재산을 자선사업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를 수치로 여겼기에 젊어서부터 외국과 장사를 했다. 그가 해외무역을 업으로 선택한 것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라 여러 세상의 지식과 경험을 쌓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부와 함께 지혜를 얻었다. 그리스의 현인 7인에 꼽힐 정도였다.

 

그가 한창 상인으로 활동하던 시대에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너무도 지나쳐 공동체의 안정적인 번영을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었다. 기득층의 반대에 부딪혀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만 세력과 체제 유지 세력들 간에 혁명과 반혁명이 되풀이되었다. 이 시절에 질서와 안정을 구실로 뛰어난 독재자가 정권을 장악하는 참주정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생계 유지에 실패한 소농들이 처음엔 부유한 귀족에게 땅을 잡히고 돈을 차용했다. 빚이 쌓이면 땅은 몰수되었다. 그 다음엔 자신의 몸을 저당잡혔다. 끝내 빚을 갚지 못한 농민들은 귀족의 노예가 되거나 해외로 팔려나갔다. 심지어 해외로 도주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기원전 594년 아테네는 솔론을 당시 최고 행정직인 '아르콘'에 선출했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개혁을 단행했다. 첫째,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아테네 시민을 모두 해방시켰다. 둘째, 빚을 탕감하고 잃어버린 토지도 회복시켜주었다. 또한, 정치적 혁명도 이끌어냈다. 귀족과 더불어 상인계급에서도 최고 권력자를 배출할 수 있도록 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곡물 재배를 포기하고, 올리브와 포도 등 특화작물의 생산에 주력했다. 그의 농업 정책은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왔다.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생산하는 제조업, 운반 용기인 도자기를 제조하는 산업, 조선업, 해운업 등이 덩달아 성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아테네를 죽음 직전에서 구원했다. 아울러 이테네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아테네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초석을 깔고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불의와 탐욕을 미워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정의를 굳게 믿었다. 그의 개혁 이후로 민회의 개최를 알리는 연기가 프닉스 언덕에 피어오르면, 아테네 시민들은 이곳으로 모였다. 민주주의 성지, 프닉스를 결코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매듭의 비밀을 풀어라, 폐허에서 만난 진정한 정복자 

 

발굴과 복원 작업이 한창인 '고르디온의 유적'을 찾아간다. 프리지아 왕국의 수도, 전설적인 거부 미다스 왕의 도시 고르디온. 한때 풍요로움과 부유함의 상징이었던 이 도시는 폐허 속에 뒹굴고있다. 이곳으로의 여행 목적은 역사 속의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함이다.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것"

 

그는 겨울 한 때를 이 도시에서 지냈다. 그 때 그의 머릿속은 온통 동방 정복으로 가득했다. 그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세상 끝까지 가보고자 했다. 그리고 누구도 세우지 못한 거대한 제국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앞에 거대한 매듭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칼을 섬광처럼 내리쳤다. 매듭이 풀렸다. 어느 누구도 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시아의 지배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로스다.

 

그는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최고의 선생들에 의해 철저하게 왕으로 키워졌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는 가장 훌륭한 교육이야말로 아들에게 물려줄 가장 값진 유산임을 알고 있었다. 대표적인 선생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기원전 336년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그는 스무 살에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보다 더 큰 꿈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 꿈은 '페르시아 정복'이었다. 알렉산드로스를 얕보고 테베아테네를 중심으로 반 마케도니아 연합이 결정되자, 그는 신속하게 진격하여 테베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344년 봄, 그리스를 평정한 그는 3만 명의 보병과 5천 명 이상의 기병을 이끌고 동방으로 향했다. 그의 원정대에는 수많은 학자, 연구원, 기술자, 건축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원정은 단순한 군사적 목적을 뛰어넘어 꿈과 희망을 찾는 과업이었던 셈이다. 

 

터키 땅에 들어선 알렉산드로스와 군대는 동쪽으로 향했다. 기원전 334년 초여름, 그라니코스 강변에서 첫 충돌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를 앞세운 마케도니아는 압승하며 아나톨리아를 정복했다. 그해 겨울 그는 아나톨리아의 중앙에 위치한 프리지아 왕국의 수도 고르디온에서 지냈다. 이 때 '고르디온의 매듭'일화가 탄생했던 것이다.

 

 

아름다움에 한숨짓고 숨겨진 역사에 탄식하다

 

일몰 후의 알람브라 궁전이 너무 멋있다는 글귀들을 여러 책에서 읽은 터라 이곳은 꼭 가보기로 작정했다. 워낙 석양을 좋아하는 아내이기에 결혼 20주년 기념 여행을 스페인으로 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알람브라 궁전 때문이기도 했다. 이 궁전의 전망에 제일 좋다는 장소가 바로 성 니콜라스 광장이다. 석양에 물든 알람브라는 형형색색이다. 자석처럼 끌리는 입맞춤.

 

 

 

 

그라나다 왕국은 나시르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시조 무하마드 1세는 작은 도시 아르호나의 토호였다. 1232년 4월, 그는 스스로 술탄이라 칭하고 권력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당시 스페인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안달루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던 알모하드 제국이 1212년 기독교 국가 연합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해 붕괴되고 있었다. 안달루시아에 권력 공백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수많은 야심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칼을 뽑았다. 나시르 가문무하마드 1세도 그런 사람이었다.

 

무하마드 1세는 탁월한 정치가였다. 수많은 지방 귀족과 손을 잡아 세력을 확장했고, 안달루시아의 중심 도시인 그라나다를 정복해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안달루시아를 위협하는 카스티야 왕국과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왕국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왕국의 기초를 다졌다. 카스티야 왕국페르난도 3세를 그라나다 왕국의 상왕으로 인정하면서 안정을 도모했다. 나아가 1248년 페르난도 3세를 도와 무슬림의 도시인 세비야를 함락시켰다. 그 대가로 그라나다 왕국은 안정과 번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무하마드 2세 치하에서 더욱 발전했으며, 5세 치세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문화, 학문, 예술, 경제가 찬란한 꽃을 피었고, '알람브라'는 바로 그 열매였다.

 

 

15세기에 들러 고작 여섯 살인 무하마드 8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당파간 권력다툼이 치열했다. 1419년 삼촌뻘인 무하마드 9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내분의 수준이 피를 동반할 정도였다. 무하마드 9세는 일생 동안 왕위에 오르내리기를 무려 4번이나 반복했다. 이 혼란으로 나라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카스티야에 강력한 군주 이사벨 1세가 출현,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한 후 스페인 남부에 자리 잡은 무슬림의 마지막 근거지 그라나다 왕국을 공격했다.

 

당시 그라나다의 지배자는 물라이 하산이었다. 1482년 7월, 왕의 장남 보압딜이 아버지의 원정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스스로 왕에 오른 그는 무모한 군사원정에 나섰다가 아라곤페르난도 2세에게 체포되고 만다. 자신의 안위를 보장 받는 대가로 왕국 대부분을 스페인에 넘기기로 협정을 맺었다. 이후 풀려난 보압딜은 아버지를 상대로 싸웠고, 아버지 사후에는 삼촌 엘-사갈과 싸웠다. 그라나다 동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용맹한 자' 엘-사갈카스티야 - 아라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영토를 모두 넘기고 북아프리카로 자진 망명했다. 이리하여 그라나다 왕국은 수도 그라나다 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카스티야-아라곤 왕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마침내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 시의 성문도 열리며 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이슬람 세력의 최후 보루가 무너지고 말았다.

 

 

알람브라, 빛과 공간 그리고 물과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면서 나그네들을 맞이한다. 사방에서 흩날리는 꽃향기는 후각을 자극하고 분수에서 뿜어져나오는 물소리는 청각을 때린다. 시원한 바람은 피부를 간질이며 촉각을 일으켜 세운다. 헤네랄리페의 분수는 오늘도 지친 여행객들에게 청량한 기운을 제공해준다.

 

 

저자 송동훈이 안내하는 '21세기 그랜드투어'는 여행을 통해 세계사를 배우고, 세계사를 통해 여행을 즐기는 프로그램이다. 역사가 시작되고 문명을 꽃피우며 아름다운 예술이 탄생한 그 역사적인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그 현장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나아가 미래를 생각하도록 질문을 던진다. '100년, 20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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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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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향기가 나는 물고기가 있다. 바로 은어銀魚다. 조선시대 임금의 진상품으로 올려지기도 했던 이 물고기는 민물에서 부화하여 바다로 나갔다가 산란을 위해 다시 민물로 찾아오는 회귀성 어류이다. 몸길이가 약 15cm로 강바닥에 자갈이 많은 맑은 하천에서 서식한다.

 

경북 안동은 예로부터 산과 물이 좋아 은어 서식지로 유명한 고장이다. 이 지방의 은어는 진한 수박향과 담백한 맛 때문에 조선시대에 임금에게 진상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안동 석빙고 바로 왕실 진상용 은어를 보관하기 위해 축조된 건축물이다. 안동의 전통 음식으로 은어구이와 은어를 삶아 육수를 낸 건진국수가 유명하다.

 

도서 제목 때문에 진한 수박향이 나는 안동은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여름철의 별미음식인 건진국수를 많이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또한, 수박 때문에 원두막도 생각났다. 먹거리가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여름 밤엔 동네 아이들과 함께 수박서리를 다녔다. 달빛이 환한 어느 날, 원두막 보초에게 들켜 도망치다 넘어져 얼굴을 다쳤다. 외할머니가 왠 상처냐고 물었지만, 수박서리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이 책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다. 수박향기, 후키코 씨, 물의 고리, 바닷가 마을, 남동생, 호랑나비, 소각로, 재미빵, 장미 아치, 하루카, 그림자 등 11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1편의 이야기 모두 어린 시절의 기억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도 여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먼저 에쿠니 가오리의 단편 '수박향기'를 만나보자. 아홉살 소녀의 여름은 끔찍했다. 그녀는 엄마가 출산을 앞두자 숙모 집에서 방학을 보냈다. 숙모 부부는 젊고 친절했지만 슬하에 아이가 없어 집안 분위기가 차분하고 무미건조했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매일 울었다.

 

서랍장에서 지갑을 훔쳐 집을 뛰쳐나갔다. 첫 도둑질이라 정신없이 달렸다. 강 건너 자그마한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오라는 듯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두 무릎으로 마루를 기어서 방문 안을 들여다 보았다. 세 평 정도 되는 방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보인다. 등 뒤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엄마였다.

 

아줌마의 고함 소리와 함께 남자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이 둘은 윗몸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도 그녀를 보자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소름 끼쳤다. 일단 방으로 들어오라는 아줌마의 목소리는 불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온 집안의 덧문을 꼭꼭 닫았다. 앉은뱅이 밥상에 양파가 든 된장국, 계란 후라이, 그리고 두부와 밥이 차려져 있었다. 그녀는 먹을 수가 없었다. 아줌마는 징그러울 정도로 상냥하게 웃으며 이것 저것 물어왔다. 내일 숙모집에 안전하게 데려다 준다며 안심을 시켰지만 그녀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식사후 아줌마는 수박을 내왔다. 쟁반에 수북하게 잘린 수박이 쌓여있다. 한 아이가 수박을 집으려고 손을 뻗는데 새까만 개미가 꼬여 있었다. 쟁반에 고인 수박 물에도 개미들이 꼬물거렸다. 그래도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수박을 베어 물었다. 개미가 툭 터지면 시큼한 맛이란다.

 

세 평짜리 방에 이부자리 두 채를 깔고 넷이서 잤다. 겁이 날 정도로 조용하고 후덥지근했지만, 신기하게도 푹 잤다. 덧문 두드리는 소리와 이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줌마도 아이 둘도 없었다. 덧문을 여니 경찰관과 숙모 부부가 서 있었다. 숙모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침 일찍 한 여자가 이 집에서 여자아이 소리가 난다며 경찰서에 신고했단다. 이 집은 오래 전부터 비어 있던 집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동생을 낳았다. 그날 밤의 일은 숙모에게도 부모에게도 비밀로 했다.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은 언제나 에쿠니의 비밀로 가득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에쿠니의 비밀'을 읽고난 후에 독자들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질 것 같다.

비밀을 들은 후에는 역시 자신의 비밀도 털어놓고 싶어진다.

친밀한 비밀의 주고받음.

에쿠니의 비밀은 어쩌면 그렇게 긴밀하고 예쁘고 애처로울 수 있을까

 

 - 가와카미 히로미(작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하숙생 후키코 씨의 이야기를 하는 소녀, 달팽이를 밟아 죽이고 죄책감을 느끼는 소녀, 한여름에 치르는 남동생 장례식 얘기를 하는 소녀, 신칸센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 도망치려는 소녀, 이혼한 엄마와 옆집 삼촌을 이상하게 여기는 소녀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이 소녀이지만 내용은 오히려 괴이하고 섬뜩하다.

 

여름의 과일은 수박이다. 무더운 여름의 친구는 더위를 잠재워 줄 괴기, 공포, 스릴 등일 것이다. 그래서, 수박향기는 여름에 잘 어울리는 단편소설이다. 아울러, 에쿠니의 화려한 글솜씨는 11명의 소녀들이 갖고 있는 기괴한 비밀이나  끔찍한 기억들을 오히려 예쁘게 표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치 나의 비밀을 공개하라고 압박하는 듯 하다.

 

 

무더운 한 여름 밤, 마당 한가운데 놓인 평상에 누워 반짝이는 별과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는게 심심할 즈음 외할머니는 팔뚝에 닭살이 돋는 얘기 보따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캄캄한 공동묘지, 살쾡이 소리, 음산한 바람, 하얀 소복, 길다란 머리카락 등을 하나씩 끄집어 낼 때마다 나는 비명을 질러댔다. 더위가 싹 가셨다. 에쿠니의 이야기 보따리는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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