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누군가가 끼어들어 제지하려 했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술을 마시면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 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랬지? 넌 우리 회사 오면 안 되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빈정대는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거 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

(186)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 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할 일 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다.

나는 여기서 나를 포함해 이런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해서 만성적인 좌절감에 빠지는지 밝히고, 그런 좌절감이 누구의 탓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원인에서 기인한 근본적인 문제임을 증명해보겠다. 또 타고난 능력과 근면, 성실함으로 개인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굴욕에 대한 답이 아니며, 그런 성공은 본질적으로 시시한 것임을 논해보겠다.

(191-192)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196)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200-203)

표백 세대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은 순응, 타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의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순응은 완성된 사회의 시스템과 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중략

타협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품으면서도 대체로 그에 따라가는 삶의 형태다. 이런 삶의 유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만족을 얻으며 그런 의심을 억누른다. …중략

소극적 저항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나 적어도 그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삶의 형태다. … 중략이들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따르는 일을 경멸하지만, 자신들이 완성된 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중략소극적 저항자들은 대체로 연대를 하지 않으며 사회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는 한 완성된 사회의 관점에서 대체로 무해하다.

적극적 저항은 사회에 대한 폭력적인 타도를 시도하는 것이다. 정의에 따라, 완성된 사회에서 적극적 저항은 이념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적극적 저항자들은 처참할 정도로 논리가 없거나 아니면 일반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적인 원리주의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채택한다. …중략

완성된 사회는 이들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으며 이념적으로 물리적으로든 적극적 저항자들이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기껏해야 기억에 남는 테러를 몇 건 저지를 수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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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대 그리스에서 추첨을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로 인정한 이유는 민주주의(democracy)를 어원이 말하는 그대로 데모스(demos, 전체 인민)가 자기 스스로 통치(kratos)하는 체제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를 특별한 엘리트의 지배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지배로, 그리고 누구나 지배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동일한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을 지향하는 정치 체제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추첨은 데모스의 모든 시민들에게 관리가 될 수 있는 동일한 확률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내일 내가 앉아 있을 수도 있는 자리에 오늘 앉아 있는 이의 지배를 수용하는민주주의의 공평한 원칙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11~12)

누가 선발될지 사전에 알 수 없고, 재선의 동기가 없으며, 자신의 이익 표출이 곧 전체 국민의 이익을 표출하게 된다는 추첨 민주주의의 특징 때문에 강력한 이익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동해줄 의원들을 찾아내기 어렵게 된다. 제선의 동기가 없는 의원들은 선거로 선출되는 지금의 의원들처럼 국회 업무를 팽개치고 지역구에서 재선 활동에 전념하지도 않을 것이고, 서민들이 하루빨리 처리되기를 바라는 민생 법안을 계속 미루지도 않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법률 조항이나 지나치게 복잡한 세제 관련 법안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개정될 것이며, 연말에 도매금으로 수백 건씩 처리되는 법안들은 진지한 심의를 위해 처리 건수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의회는 전문가 집단의 특권적 공간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진정한 민주적 권력체가 되는 것이다.

(23)

지금의 입법 기관은 국민을 전혀 대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 사회를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볼 수 없다. 우선 심각한 불균형이 존재한다. 성인 인구의 51퍼센트인 여성은 하원의 4.8퍼센트만을 차지한다. 인구의 12퍼센트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하원의 4.5퍼센트만을 구성한다. 인구의 6퍼센트를 차지하는 히스패닉도 하원의 2.5퍼센트만을 차지해 저대표되고 있다 .투표를 하지 않는 유권자의 절반 정도는 전혀 대표되지 않으며, 이 중에는 (전체 인구의 6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가난과 실업 등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대신 하원은 거의 모두 백인과 부유한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불균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계층이 바로 변호사다. 변호사는 1983년 현재 전체 인구의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하는데도 하원의 46퍼센트를 차지하고 잇다. 따라서 우리는 대의 없는 과제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복지뿐만 아니라 엄청난 전쟁 무기와 대규모의 국내외 경찰과 정보기관을 지탱하는 데 충분할 정도로 많은 세금은,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승인한다.

(29)

이스터브룩은 매우 신중한 비평가지만, 의회의 현실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정치에 입문한 후보자는 이제 체계적으로 이익집단을 찾아 헤매야 한다. 이익집단이 찾는 입법 목표에 맞는 매우 특별한 조건에 자신이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인정받고 돈을 얻는다. 그래서 의회에 입성하기도 전에 이익 집단에 구속돼버린다. 언젠가 그 의원은 계속 그 이익 집단을 지원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후원자를 찾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익 집단의 금전적 보복을 당할 수 있는 법안에 투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에게 닥칠 재정적 결과를 계산해봐야 한다. 이런 모습과 부패의 차이는 분명하지 않다.”

(43)

간단히 말해 추첨을 통한 의회 구성의 방식은 미국 건국자들이 꿈꾸던 국민의 정확한 축소판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원들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뛰어넘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의원들이 선택되는 통계적인 선거구민, 즉 표본이 추출되는 단위는 자신들과 같은 국민으로 구성돼 있다. 의원들의 대표성은 자동적이며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논쟁과 의사 결정은 민주적 대의 방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 찾고 있던 것을 제공해줄 수 있다. 전체 국민이 모두 모이기에는 너무 많다면, 추천으로 선택된 전체 국민의 복제품이 참여하면 되는 것이다.

(65)

시민들이 부패를 싫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민주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패는 특정한 이익집단이 자신들이 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몫을 넘어서서 권력을 행사하게 만든다. 쉽게 말해서 이런 상황은 미국 자동차 회사의 몇 백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경영자들이 안전하지 못한 자동차를 만들어 수만 명을 불필요한 죽음으로 몰아넣고 도시의 공기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시 2억 명이 넘는 미국인들에게 죽음, 질병, 장애, 재산 손실을 안겨주는 원인이 된다. 부패는 권력을 가진 소수가 다수의 희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게 만든다.

(103)

그런데도 우리는 추첨 민주주의가 비현실적인 공상이 아니라고 믿는다. 일단 추첨 민주주의가 널리 이해되고 나면, 선거권 확대를 자극한 공정성과 정의에 똑같이 압도적 호소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선거 운동을 좌지우지하는 돈의 영향력에 재갈을 물리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면 추첨이라는 방식은 좀 덜 이상한 것으로, 그리고 조금은 더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국민들이나 최소한 지독히도 민주적인 식민 개척자들의 후손들 중에 현행 제도 아래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가짜 대의제(pseudo-representation) 같은 형태가 지속적인 열정을 보여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때가 되면 추첨 민주주의는 공화국의 의회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부활시킬 수 있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방법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117)

이렇듯 선출된 대표는 선출하는 사람하고는 사회적으로 다른 탁월한 시민이어야 한다는 탁월성의 원칙(principle of distinction)’이 대의제 정부에서 제도화됐다. 선거는 유권자보다 뛰어나다고 간주되는 후보들의 자기 선택(출마), 유권자들의 후보 선택(선거)이다. ‘선거(election)’엘리트(elite)’가 같은 어원을 갖고 있으며, 몇몇 언어에서 똑 같은 형용사가 탁월한 사람과 선택된 사람을 뜻하는 것은 선거가 평범한 국민의 모습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뭔가 특별하고 탁월한 사람을 뽑는 제도라는 의미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후보자의 탁월함은 유권자들이 놓인 선택 상황에서 만들어진다. 후보자들은 유권자가 선거 시점에 가지고 있는 가치를 파악하고, 이것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여기에 끼워 맞춰 출마자를 결정하고 선거 운동을 펼친다. 후보의 탁월함은 강령이나 정책, 곧 공약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단지 사람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뿐 당선 이후 정치 활동을 제약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150)

한국 민주주의가 민주화를 성취했다고는 하지만 하위 계층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들이 여전히 정치적으로 대변되지 못하는 대표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계층들이 투표 참여에 무관심해지고, 정치적 의사가 의회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결국 위기의 본질은 대표의 문제로 정리된다. 대표의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피선거권의 평등이 보장돼 있다고 하지만 정치적 영역으로 진입하는 과정은 조직화된 정당을 매개로 하는 거의 배타적인 과정일 뿐 아니라 공천을 포함한 선거 과정에서 여전히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거 과정에서도 인기와 인지도 등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일반 시민에게 출마할 기회의 평등은 허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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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다시 종후 팔을 잡았습니다. 이번에는 양손을 날처럼 세워 틈으로 끼워 넣었습니다. 그 순간 종후의 몸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왼팔이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종후의 왼 팔목을 붙든 손이 딸려 나왔습니다. 떠오르던 종후가 멈췄습니다. 쓰러진 침대 뒤쪽에 실종자가 더 있는 겁니다. 저는 틈 사이로 팔을 더 깊숙이 집어넣었습니다. 손으로 더듬으며 그곳 상황을 머리로 그렸습니다. 침대 뒤 그 좁은 공간에 남학생 세 명이 원을 그리듯 어깨동무를 하고 뭉쳐 있는 겁니다. 종후까지 네 아이가 서로 부둥켜안고 마지막 순간을 맞았을 겁니다. 엇갈려 붙든 어깨와 손을 더듬는데 다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108)

누가 뭐라 해도 난 알아. 민간 잠수사들은 그때 정말 용맹했어. 여기서 죽어도 좋다고, 훗말을 대비하지 않고 돌진했지. 나는 그들의 몸이 하루하루 축나는 것을 알면서도, 실질적인 도움을 거의 못 줬어. 도움이 뭐야. 오히려 그들을 악순환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진통제처럼 굴었던 게 아닐까. 근육을 풀어 주는 건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조금 더 오래, 그들을 계속 심해로 내모는 방편이었으니까. 선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그 역할이 늘 좋은 법은 아냐. 내가 아니라면 누군가 다른 물리치료사가 바지선에 올라갔을 거라고? 그 생각도 물론 했지. 하지만 그딴 건 내 맘 편하자고 나중에 지어 내는 핑계일 뿐이야. 묵살당하더라도, 그때 나랑 한의사들이 함께 잠수사들 몸과 마음이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리고, 하루라도 빨리 잠수병 치료 전문의를 바지선으로 데려오라고 요구했어야 한다고 생각해. 후회는 왜 이리 항상 늦는걸까. 돌이킬 수 없을 즈음이 되어야 최선책과 차선책과 차차선책이 떠올라, 일은 벌써 최악으로 벌어졌는데 말이야.

(113)

상상은 전부 달랐습니다. 저는 실종자들이 침몰한 배에 승선하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구체적으론 몰랐고 지금도 모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품에 안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제각각 다른 존재인지 압니다. 키나 몸무게는 물론이고, 똑 같은 자세로 최후를 맞은 이는 한 사람도 없으니까요. 극심한 공포와 목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마지막 순간일수록, 그 사람은 오롯이 그 사람인 겁니다. 그 차이를, 그 유일무이한 특별함을, 잠수사는 만지고 안고 함께 헤엄쳐 나오며 아는 겁니다. 인간은 결코 숫자로 바뀔 수 없습니다. 바지선에서 철구한 뒤 제가 가장 듣기 싫었던 질문은, 너는 몇 명이나 수습했느냐는 겁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수습한 숫자가 아니라 선내에 남아 있는 숫자였습니다.

(181)

수색과 수습의 문제점을 논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 나는 여전히 침몰 직후 구조 방기부터 실종자 수습까지, 정부의 무능함과 안일함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 하지만 바지선에서 만난 잠수사들은 아냐. 나는 수학여행을 떠난 아들을 맹골수도에서 잃은 국민이고, 내 앞에 앉은 사내들은 억울하게 숨진 내 아들을 찾고자 매일 잠수하는 국민이라고. 국민과 국민이 만난 거야. 유가족과 잠수사가 서로 사과를 주고받아선 안 돼. 오히려 우린 함께 국민을 우롱하고 상처를 입힌 자들을 찾고 그들에게 공개 사과를 받아야 해. 정말 머리 숙여 사과할 사람을 찾으려고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

(203)

완전히 미쳐 돌아간 겁니다. 실종자 수습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민간 잠수사들은 뼈가 썩고 근육이 찢어지고 신경이 눌려 휠체어 신세로 지내도 괜찮단 겁니까? 유가족이야 생때 같은 자식과 형제자매를 잃었으니 더 자주 더 빨리 실종자를 찾아 달라 요구했다 칩시다. 잠수사들도 흥분한 채 만용을 부려 잠수를 더 하겠다며 나섰다고 치자고요. 그렇더라도, 해경이든 범대본이든 이 참사 수습을 총괄하는 수뇌부는 냉정하게 판단해서 말렸어야죠. 하루에 두세 번씩 매일 심해로 냉정하게 판단해서 말렸어야죠. 하루에 두세 번씩 매일 심해로 들어가면 열에 아홉은 치명적인 잠수병에 걸립니다. 잠수를 다시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거나 목숨이 끊길 수도 있어요. 지구상에서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잠수를 시키는 나라는 없습니다.

잠수사도 인간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에요.

(205)

병원에 도착한 잠수사들은 모두 피곤한 표정을 띠었지만 밝은 웃음도 지었습니다. 잠수병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면, 그들 짐작으론 실어야 서너 달 안에 완치되어, 내년엔 다시 작업 현장인 심해로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겁니다. 난 이들이 적어도 2년은 잠수하지 않고 절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맹골수도에서 입은 트라우마는 단시간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제법 시간이 흐른 뒤 다양하게 증상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맹골수도의 심해와 흡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증상이 발현될 가능성이 무척 큽니다. 그것까지 정신과 전문의가 충분히 진단하고 치료한 다음에 현장으로의 복귀를 의논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복귀 시점도 잠수사 개인의 판단에 맡기지 말고 국가에서 관리해야지요. 말로만 맹골수도의 영웅이라 하지 말고, 그 영웅들이 트라우마로 고통받지 않도록 국가에서 챙겨야 합니다.

(308)

새빨간 거짓말이지. 우선 보상금을 받는 건 유가족이 가진 최소한의 권리야. 이번 참사의 보상금은 일반 교통사고 수준을 책정되었어. 희생 학생들의 경우는 도시 일용직 노동자 기준으로 금액이 산청되었다고. 아이들의 재능과 꿈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가장 늦은 수준으로 일괄 정리한 거야. 그러니 다른 참사와 비교해 봐도 보상금이 많을 수가 없어. 유가족이 받은 돈은 이 보상금에 희생자들이 개인적으로 가입한 보험금과 국민들이 낸 성금을 합친 거야. 다른 참사 때도 보험금과 국민 성금은 있었고, 잊을까 싶어 다시 지적해 두자면, 이 보험금과 성금에도 한 푼 나간 게 없겠지?

(378)

형님, 그런데 소설 제목을 왜 거짓말이다라고 지었어요?”

내가 민간 잠수사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했을 때, 관홍이 네가 대답하며 가장 자주 썼던 말이잖아? ‘416의 목소리에 출연한 유가족들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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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2-24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신 수습하던 민간잠수사들의 바닷속 광경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가슴이 아팠던 책이었어요.
그간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심정적으로만
유가족분들을 가엾게 여긴 저의 소홀함에
잔잔한 파문을 던져 준 소중한 이야기였습니다.

 















(9)

기본적인 것들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보람만 강요하는 행위는 문제를 외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람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일을 미화함으로써 당연한 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은 비참한 현실을 눈속임하고 있다.

(20)

야근이란 계약으로 정해진 시간을 넘겨서 일한다는 의미다. ,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으로 규정해야 한다.

이 예외적인 것이 가끔일어난다면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야근은 예외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매일같이야근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나는 입사하고서 야근하지 않고 돌아간 날이 단 하루도 없어. 칼퇴근은 도시 전설이야라며 자신의 비참한 근무 환경이 마치 어엿한 훈장이라도 되는 듯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서 참 안쓰러웠던 적이 있다.

(51)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지 않아도 좋다. 회사를 옮겨다니는 것 또한 하나의 생활 방식이다. 딴 길로 새지 않고 대학을 졸업하는 시점에 곧바로 회사에 취직해 그대로 정년까지 성실하게 일하는 삶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인생의 레일이 딱 하나뿐이고, 그 레일을 벗어났다고 해서 갑자기 삶이 어려워진다면 이 사회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제도상 설계 실수다.

(73)

만약 회사없이 자기 인생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회사에 지나치게 의견하고 있는 것이다.애사심을 갖는 것이야 괜찮지만, 기댈 속이 사라졌을 때 자신이 무너져내리지는 않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86)

어떤 중대한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놓고 다툰다.”월급을 받는 이상, 책임을 지고 일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정말 누군가가 책임져야 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 책임을 남에게 덮어씌우느라 분주하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책임이란 단어를 아주 어중간하고 모호하게 써먹고 있다.

책임의 범위를 정확히 설정하면 누구 책임인지를 두고 다툴 일도 줄어들고 무한한 책임을 짊어질 일도 사라진다. 각자의 책임 범위를 넘어선 일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분명히 선을 그을 수도 있다. , 자신의 책임 범위에 속한 일은 프로로서 완벽하게 수행할 것이 요구된다. 이처럼 책임의 범위를 정확히 정하는 것은 일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88)

아무리 경영자 마인드로 일해도 종업원은 어디까지나 종업원, 어차피 고용된 처지다. 경영자 마인드를 갖춰 경영자에 버금갈 정도로 일한다 하더라도 월급은 당연히 고용된 처지에 맞는 수준으로 받는다. 월급은 고용자 수순인데 일은 경영자와 똑 같은 마음가짐으로 하라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을 하라는 소리와 무엇이 다른가?

종업원이 경영자 시선을 갖고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애당초 경영자는 왜 있는가? 설마 고용한 종업원에게 할 일을 전부 떠맡기고 경영자는 놀러 다니려는 속셈일까? 그렇다면 어디 일할 마음이 들겠는가.

(98)

일이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닌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이다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나 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사회와의 연관을 통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초등학교 직업교육에서 자주 듣는 말이야. 직업교육의 핵심인 현장 방문, 직업 체험 때도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나 사회공헌같은 측면만 강조한다. ‘일에 보람을 느끼며 노력하는 어른들의 모습이나 이 사회에 공헌함으로써 돈 이외의 기쁨을 얻는 어른들의 모습을 잔뜩 보여주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일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느끼게 한다.

(137)

만약 좋아하는 일을 내 직업으로 삼았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좋아하는 일을 취미로 하는 것과 업무로 하는 것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다. 회사의 방침이나 고객의 사정에 맞춰 자기 의사와 반대되는 방식을 억지로 고수해야만 하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오히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탓에 적절하게 맺고 끊지 못해 괴로워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141)

일을 하다보면 너무 괴로워서 전부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궁지에 몰릴 때가 있다. “그럴 때야말로 성장할 기회야. 절대 도망쳐서는 안 돼.” 이렇게 설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매우 위험하다. 괴롭다못해 이제 한계다 싶을 때는 무리하지 말고 도망쳐야 한다. 이것은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리는 것과는 다르다.

보통 도망친다는 행위를 꼴불견에 형편없는 짓이라고 여기는데, 도망치는 행위는 사실 일종의 안정장치. 괴로워서 더는 무리라고 느끼는 상황이 오래 이어지면 사람은 쉽게 무너진다. “괴로워도 도망치지 않고 노력한 덕분에 성장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들 뒤에는 괴로운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매년 일 때문에 수많은 직장인의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사람이란 궁지에 몰리면 너무도 연약해지는 존재다.

(166~167)

중요한 것은 세상의 평가기준이 아니라 나의 평가기준이다. 세상의 평가가 아무리 높더라도 나의 평가기준에 비췄을 때 높이 평가할 수 없는 대상이라면 괜히 거기에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세상에서 낮은 평가를 받더라도 나의 평가기준에 비췄을 때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내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다. 내 인생은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살아줄 수 없다. 내 행복은 나의 주관으로 판단하면 된다. 블랙 기업이나 좀비형 사축은 우리에게 가치관을 억지로 강요하려 할 거시다. 그런 타인의 가치관 따위는 무시하고 나 자신의 가치관에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괴롭다고 생각하면 그건 괴로운 것이다.

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무의미한 것이다.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하면 그건 재미없는 것이다.

내게 가치관을 강요하는 회사도 상사도 동료도 어차피 타인다. 타인의 삶을 사는 행위는 인생의 최대 낭비다. 자신의 가치관에 솔직해지자. 좀더 나 자신을 위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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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창세기 28 10~15절에 나오는 야곱의 돌베개이야기는 내가 결혼 일주일 만에 남기고 떠난 내 아내에게 일군(日軍)탈출의 경우 그 암호로 약속하였던 말이다. 마침내 나는 그 암호를 사용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고 하였다. “어느 지점에 내가 베어야 할 그 돌베개가 나를 기다리겠는가?”라고 썼다. 그 후 나는 돌베개를 베고 중원 6천 리를 걸으며 잠을 잤고 지새웠고 꿈을 꾸기도 하였다. 나의 중원 땅 2년은 바로 나의 돌베개였다. 아니, 그것이 나의 축복받는 돌베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77)

, 불로하, 말 없는 강, 안으로 안으로 모든 것을 가라앉혀 비록 그 바닥에서는 물결이 거세어도 수면은 언제나 잔잔히 흐르기만 하는 강, …… 너 마르지 않고 너 나타나지 않는 그 강심을 나는 여기서 배우리라.”

어느새 이국의 태양은 머리 위에 올랐고 강물 위엔 쏟아진 햇볕이 물결을 덮으며 웅장한 음악이 강 밑으로 흐르는 것이었다. 우리의 소망과 새로운 각오를 위해 강은 흘렀다.

우리는 목욕을 마치고 군복을 입었다. 서로서로를 돌아보며 새 결의를 다짐했다. 모두 새사람이 되었다. 진정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조국 광복, 이 깊고 긴 강처럼, 크고 깊은 긴 일을 마침내 나는 찾아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떳떳한 조국의 아들이 다시 되었다. 기쁨과 감격은 이 아침을 신비롭게 하였다.

우리는 동북쪽의 조국을 향하여 경건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글대는 태양을 마주하고 가로로 한 줄을 만들어 서서 이 가슴의 감격을 조국에 고하고자 했다. 김준엽 동지, 윤경빈 동지, 김영록 동지, 홍석훈 동지 그리고 나, 이렇게 차례로 서서 조국을 향한 배례를 한 것이다.

(188)

밤이슬에 젖고 땀에 젖으며 또 새벽서리에 젖는, 청색 무명 군복 한 벌은 충칭을 찾아가는 긴긴 수천 리 길 바람에 마르곤 하였다.

조국이 무엇이기에 이 길을 가는 것이냐.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우리의 그 줄기찬 의지에 몇 번이고 우리는 스스로 감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막을 가는 낙타처럼 무의식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아닐진대, 발걸음이 무거워질수록 우리의 신념은 더욱더 굳어져야 했다. 낮이면 폴싹폴싹 일어나는 황토의 흙먼지, 밤이면 마치 흔들리는 등불처럼 우리의 발걸음은 줄기찬 하나의 신앙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만의 의사가 아닌, 보다 큰 어떤 의사의 발현만 같았다.

 

(223)

, 조국 없는 설움이여.

우리의 조상이 못난 때문에 우리가 이 설원의 심야를 떨며 지새워야 하는가. 아니, 조금도 조상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돌린다는 것은 나의 비겁이다.

나의 조상은 또 조상을 가졌고, 그 조상은 또 못난 조상을 가졌다. 앞으로도 우리는 못난 조상이 되어야 하겠는가?

무수한 밤별이 울어주는 듯, 나의 눈에 들어오는 별빛이 어른거렸다.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입술을 깨물고 나는 폭발하려는 나의 가습을 막아야만 했다.

치미는 분노와 막아야 하는 입술의 의지가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나는 혁명적인 나로 나 스스로를 지향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파촉령의 설원에서 내 스스로에게 맹세한 이 결의를 위해 나는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나의 신념, 차디찬 결의는 이때부터 나를 지배했다.

 

(226)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아픔이 정강이에서 허벅지로 기어올랐다.

육중한 대지가 기울어, 우리가 그 속에 깔린 듯이 이 밤을 머리에 이고, 초침을 마음속으로 세고 있다.

, 이 은세계의 시련은 나에게 신념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야. 나의 신념이, 나의 생활의 철학이 이제야 생성되기 위해 나는 이 죽음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냐?

나는 밤하늘의 원망을 짓씹으며 어서 날이 새어 그 밝은 태양이 내 가습에 떨어지길 빌었다.

이 밤에 우리가 동사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저 떠오르는 정열의 햇덩이를 가슴에 삼키고 이 설원을 가로 달려가리라.

가리라. 가서 또다시 우리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이 몸에 불을 붙이리라. 그것이 혁명이면 이 붉은 정열을 혁명에 태우리라.

아름다운 희망이 동녘을 트면서 우리에게 기어왔다.

, 죽지 않고 살았구나!

 

(263)

길지 아니한 단 10여 일 동안, 그동안 우리의 눈에 비친 임정은 결코 우리가 사모하던 그 임정과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잘못 본 것이라면 용서하십시오. 진정으로 여러 선배 선생님께서 이곳 이 땅에서 임정을 사랑하고 있다고 저희에게 생각되지 아니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한다는 것과 탐욕을 내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탈출해서 기나긴 행군으로 오면서 그리던 임정은 모두 일치단결되어 있는 완전한 애국투쟁의 근본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곳에 오기만 하면 그 단결된 힘으로 오직 잃은 나라 찾는 데만 목숨 바쳐 일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 그 기대는 지나친 하나의 환상이 아니었나 하는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누가 준 것입니까?

조국을 잃고 망명한 입장에서 임정을 세웠기에 임정이 하는 일에는 파쟁이 개재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것은 저희가 잘못 본 것입니까? 아니면 사실입니까?

 

(341)

나는 차례로 이들의 표정을 눈여겨보았으나, 한평생 생애를 다 바쳐 투사가 되신 그 위엄 앞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수송기의 소음이 나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굳어지는 안면근육의 움직임으로 무쇠 같은 의지와 신념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더 무슨 말을 나누리오. 오직 조국의 앞날과 조국의 땅이 한 치씩 한 치씩 다가오는 그 시공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요란한 심장의 고동을 좀 더 강하게 느끼면서 그 어떤 희열을 체감하는 것, 이것이 보람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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