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가 빠졌다면 과연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자고로 오케스트라라는 명칭을 얻으려면 지금, 단어의 정의에 입각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 베이스가 갖춰져 있어야만이 가능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1바이올린이 없거나, 관악기가 없거나, 북이 없거나, 트럼펫이 없거나, 그 밖에 다른 악기가 갖춰져 있지 않은 오케스트라는 있습니다. 하지만 베이스가 없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결국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콘트라베이스가 오케스트라 악기 가운데 다른 악기들보다 월등하게 중요한 악기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서슴없이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지만 말입니다.

(18)

이 악기는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이렇게 많은 속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음을 끄집어내어 들을 수가 없을 뿐이지요. 음악의 속성상 그렇다는 겁니다. 현악기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우는 더구나 더 그렇지요.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보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마음속에 온 우주를 품고 있는 듯이 자로 잴 수 없을 만큼 넓은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런 속성을 다 밖으로 표출해낼 수는 없지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건 그 정도로 해두고.

현이 네 개면 이렇게 됩니다. - - - .

(26)

콘트라베이스는 인간이 악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이한 악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속성 때문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악기이기도 합니다. 여기 좀 보세요. 저는 여기 우리 집에 사방 벽과 천장과 바닥에 방음판을 다 붙여 놓았습니다. 문은 이중으로 만들었고, 이중문 사이는 비어 있지 않도록 속을 꽉 채워 놓았습니다. 창틀의 틈을 완전히 밀봉시킨 창문에는 특수 이중 유리로 된 유리창을 끼워 놓았습니다.

(51~52)

그럴 때면 저는 이 녀석을 저쪽에 있는 등받이 의자 위에 올려 놓고, 활은 그 옆에다 놓고, 저는 여기 이렇게 안락의자에 앉습니다. 그렇게 해놓은 다음 저는 이것이 아주 볼품이 없는 악기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이것을 한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한번 자세히 봐주십시오. 꼭 살이 피둥피둥한 아줌마 같지 않습니까. 엉덩이는 축 처졌고, 허리 부분은 잘록하지도 못한 것이 위쪽으로 지나치게 길게 뽑아 올라져서 도대체가 못마땅합니다. 게다가 가늘고 축 늘어져 곱사등이 같은 어깨 부분 좀 보십시오. 정말 못 말립니다. 이렇게 외모가 엉망으로 보이게 된 원인은 콘트라베이스가 음악 역사상으로 보면 일종의 잡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랫부분은 큰 바이올린과 같고, 윗부분은 커다란 저음 4현금 겜브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콘트라베이스는 이제까지 발명된 악기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거칠고, 우아하지 못한 악기입니다. 악기의 돌연변이지요. 종종 저는 이것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톱으로 토막을 내고 싶기도 하고, 잘게 부숴 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잘게 가루를 내거나, 톱밥처럼 만들어 목재를 가스로 바꾸는 기계에 집어 넣거나….. 아무튼 결판을 내고 싶기도 합니다. 제가 이 악기를 사랑한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녀석은 연주하기도 무척이나 까다롭습니다. 반음을 세 개만 내려고 해도 손가락을 쫙 펴야만 하거든요. 겨우 반음 세 개를 가지고 말입니다.

(67~68)

음악은 사실 어떤 의미로 해석해 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했을 겁니다. 정치나 역사와는 반대되는 성격을 띠는 것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음악을 아주 평범하고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적인 영혼과 정신에 따라 본질적으로 구성된 결정체 말입니다. 그러므로 동양이든 서양이든, 남아프리카이든 스칸디나비아 반도이든, 브라질이든 수용 군도이든지 간에 한결같이 어느 곳에서든 음악은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음악은 형이상학이니까요. 형이상학이라는 말 아시지요. 실제적인 존재 이상 혹은 그 이면, 다시 말하면 시간과 역사와 정치와 빈곤과 부귀와 삶과 죽음 그 이면의 것들을 말하는 겁니다. 일찍이 괴테는 음악은 영원하다라는 말한 바 있습니다. <음악은 지극히 지고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이해력도 그것과 같은 수준에 있을 수가 없고, 그것은 모든 것을 통치하며, 어느 누구도 감히 그것을 말로 설명하려는 용기를 갖기 못할 만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 말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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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불에 익힌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동물성 단백질 섭취가 훨씬 용이해졌고 이 또한 뇌 발달에 크게 기여합니다. 그런데 더 의미 심장한 변화는 인가니 불을 사용하면서 뇌가 더 커질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42}

덕의 원래 의미는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된 가장 순수하게 정제된 마음의 상태라고 했지요. 그래서 덕은 지식의 대상이 아닐 삶의 향기와 힘을 발산하는 동력으로 회복돼야 합니다. '이 있어야 인간은 지식의 저장고가 아니라 지혜의 발휘자로, 도덕을 연구하는 자가 아니라 도덕을 실천하는 자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에서 일상적으로 민주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겁니다.

(71)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그 길을 바로()’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만의 능력이란 믿음의 힘이 아니라생각하는 힘'을 말해요. 인간은 이제 천명을 따르지 않고 도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도의 출현은 바로 중국 문명에서 최초로 터져 나온 인간의 독립선언이에요. 도의 출현 이전에 중국인이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개의 중심축은 이었습니다. 도가 출현하고 나자 이제 중국인들은 세계와 관계하고 세계를 해석하며 또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두 개의 중심축을 새롭게 갖게 됐으니 그것이 바로 도와 덕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道德)’은 바로 이 도와 덕을 붙인 말이지요.

(77)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

<중략>

노자는 여기서 특정한 기준을 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집중하고 통일돼야 한다고 보는 공자 식의 문명을 반대할 뿐이에요. 여기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안다(美之爲美)”는 것은 정해진 미, 정의된 미,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미에 동조한다는 것입니다.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안다(善之爲善)”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정해진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공통의 본질적 특성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들이 합의한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특성에 기반한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합의해야 할 것 혹은 동의해야 할 것으로 강요됩니다.

(86)

노자는 이런 연유로 공자와 다른 방식으로 객관성, 투명성, 보편성이 확보된 질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공자는 천명론을 극복하고자 자신만의 도를 건립하면서 인간 세계, 인간의 내면성으로부터 인사이트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주관성이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노자는 인간을 완전히 벗어납니다. 우리 밖에 펼쳐진 자연에서 인사이트를 구하지요. 자연에는 주관성이나 가치가 개입되어 있지 않은데, 노자는 이를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자연의 질서에는 더 친하게 여기고 덜 친하게 여기는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어떤 주관적 가치도 개입시키지 않고 아주 평등하게 대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의미에서 자연 질서는 매우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103~104)

無名 天地之始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有名 萬物之母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본질주의적 실체관에 익숙한 우리가 이 구조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무는 천지의 시작이댜라고 해놓으면 천지가 에서부터 시작되었다거니 천지가 로부터 발생했다고 이해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이는 잘못입니다. 동양 철학을 가까이하려면 한자를 신중하게 다루는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자는 시대마다 의미를 더하거나 변형시켜 진화해왔기 때문입니다.

선진 시대의 철학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요즘 나오는 한자사전의 가장 앞에 기록된 뜻만을 가지고 덤비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는 요즘 이해로 보면 당연히 시작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노자는 라는 개념을 비롯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자가 말하는 비롯됨이란 없는 데사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라 의지해서 같이 가는 겁입니다.

(133)

모차르트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피터 월리가 쓴 <철학가게>에는 다음과 같은 모차르트의 말이 나와 있습니다. “음악은 음표 안에 있지 않고 음표와 음표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안에 있다.”

(181)

인간 존재의 근거가 이성 대신에 욕망으로 설명되면서 우리의 현대는 시작됩니다. 이성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하여 공통의 비율과 공통의 계산력을 사용하지요. 그래서 집단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이해하면서 인간에게는 점점 물질(육체)이 더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욕망은 집단보다는 개별자에게 더 분명히 확인되죠. 육체성을 통해서 인간은 각자가 됩니다. 그래서 세계는 이제 집단적 통합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적 융합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할 것입니다.

현대에서는 세계를 해석할 때 사유보다는 무시되었던 경험이 새롭게 부각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사유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에서 경험이 부각되는 시대로, 정신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던 시대에서 육체 혹은 욕망이 새롭게 조명되는 시대로 이행하는 것이죠. 집단에서 개별로, 보편에서 특수로, 본체에서 현상으로 건너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194)

해를 해만으로 보거나 달을 달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달을 해와의 관계 속에서, 해를 달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것이지요. 해를 해로 보고,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은 해와 달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요. 분리된 것으로서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라고 합니다. 반면 해와 달을 상호 연관 속에서 인식하는 것을 ()’이라고 하는데, 달과 해가 존재적으로 따로따로 분리된 두 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이루는 한 벌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죠. 해와 달을 동시에 포착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입니다. 이것이 노자의 통찰입니다.

(205)

도가사상에는 광이불요(光而不耀)’화광동진(和光同塵)’과 같은 표현들도 있습니다. ‘광이불요빛을 발하지만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음을 의미합니다. 외부의 것들을 제압할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절제와 그 절제가 빚어내는 탄성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말이지요. ‘화광동진자기 빛을 다른 흙먼지들과 함께 펼쳐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버림을 의미합니다. 빛이 난다 함은 하나의 방향으로 무엇인가가 드러나는 겁니다. 대립면의 긴장을 품은 사람은 하나의 빛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구슬처럼 빛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돌처럼 소박하지요.

(242)

노자는 <도덕경> 41장에서 대기면성(大器免成)’을 말합니다. 즉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죠.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굳지 않고 그냥 너덜너덜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로 읽어도 됩니다. 그런데 보통은 이 구절을 대기면성으로 읽지 않고, ‘대기만성(大器晩成)’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새기죠. 이런 말도 할 수 없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노자의 의도가 반영된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기면성이라는 구절 앞에는 정말 큰 사각형에는 모서리가 없다(大方無隅)”고 기록되어 있고, 그 뒤에는 정말 큰 음에는 소리가 없고, 정말 큰 형상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구절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245)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일을 그르치는 지름길입니다. ‘내 아들을 반드시 의사로 만들어야겠다는 부모의 선의(善意)가 탈을 내잖아요.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치자가 어떤 신념을 고집하는 한, 그 신념으로만 세계를 해석하게 되어 그 신념을 집행하는 것을 진리를 행하는 것으로 자처하게 되어 버립니다. 선의 확신에 빠져버리는 것이죠.

(253)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덜고 또 덜어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르는구나.

덜어낸다는 것은 이미 내면에 들어 앉아서 지배력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약화시킨다는 뜻이죠. 즉 그런 것들을 약화시키고 또 약화시키면 무위에 이르게 됩니다. ‘무위란 아무것도 안하는 게 아닙니다. ‘무위란 세계와 관계할 때 기존의 견고한 틀이나 방식에 갇힌 상태가 아님을 뜻해요. 이미 있는 신념, 이념, 가치관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이 돼서 자신이 고유하게 생산한 자신만의 문제의식으로 세계와 직접 관계하는 겁니다. 세계를 볼 때 기준을 갖고 보지 말라는 겁니다. 이론을 가지고 문제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안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태도가 무위입니다.

(254)

無爲而無不爲

무위를 실천해봐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을 말할 때, 노자의 시선은 절대 무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로 무위를 지나 무불위에 가서야 멈추지요. 노자의 시선이 닿고 싶어 하는 곳은 바로 무불위의 지경입니다. 노자가 무위를 강조한 이유는 무불위의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현실을 초탈하려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현실적 성취를 매우 중시했던 철학자입니다. 세상 속으로 아주 깊숙이 들어간 철학자였죠.

(258)

사람들은 세계와 어깃장 나는 데서 방황합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세계의 변화는 사람에 맞추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계는 감정이 없이 그저 변할 뿐입니다. 사람이 세계와 어깃장 나지않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할 일은, 세계가 자신에게 맞추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계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고정되어 있거나 일정한 틀을 고수하고 있다면, 변화하는 세계에 맞추는 일은 불가능하죠.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세계에 유연하게 맞출 수 있으려면 무위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사건이 생길 때나 새로운 정책을 결정할 때, 혁신에 성공하는 나라는 항상 새로 전개될 패러다임에 맞는 판단과 결정을 합니다. 반대로 혁신에 실패하는 나라들은 항상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미래를 설계하지요. 바로 유위하는 것입니다.

세계는 변합니다. 움직입니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지요. 우리의 판단, 우리의 행동은 항상 변화하는 세계와 함께해야 합니다.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과 함께하라는 것이 무위가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272)

제가 자식을 키우면서 겪은 여러 시행착오들 때문에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자식에게는 세 가지만 해주면 될 것 같아요. 첫째,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예뻐 보이질 않습니다. 자식의 꿈과 희망을 존중하고 믿어야 합니다. 둘째,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식이 아닌 자식의 성공이나 출세를 사랑해선 안 됩니다. 성적이 올라가면 더 예뻐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덜 예뻐진다면 아마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가지고 온 성적표를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셋째, 기다려줘야 합니다. 간혹 실패하더라도 기다려줘야 해요. 실패를 통하지 않고는 배울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눈앞의 작은 실패들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학습장을 잃게 됩니다. 믿고 사랑하고 기다리기. 다만 진심으로. 여기서 가정의 행복이 나오고 창조적 성휘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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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어째서 사람들이 자장면, 스파게티, 낙지볶음같이 맛난 음식들을 제쳐두고 휘발유, 유리, 신문지, 톱밥 따위를 먹고 있는 걸까. 인간은 아니 모든 생물은 자신이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단 한 번에 알아낸다. 그것을 가르시아 효과(Garcia Effect)라고 한다. 그러니까 가르시아 효과에 따르면 한두 번 재미로 톱밥이나 유리를 먹을 수는 있지만 곧 ! 이것은 인간이 차마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 나는 인간이므로 인간의 본분을 지켜야지하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정상적인 인간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인간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식료품을 규정하는 이 세계의 상상력을 전복시키고 일대 충격을 주기 위해서? 아니면 <믿거나 말거나> 같은 프로그램에 한번 출현해보려고?

(32)

나는 혜성의 충돌, 기상이변, 한 미치광이에 의해 잘못 눌러진 원자폭탄의 발사, 공기전염되는 치명적 바이러스의 출현, 인공지능과 기계문명의 가공할 발전 등등의 이유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질서 때문에 스스로 종의 역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것은 도대체 무얼 뜻하는 것일까? 마친 인류가 이백 년 전에 만들어낸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인간사회의 이곳저곳을 빨아먹고서 이제 인류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괴물로 자라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일까?

(79)

현대인은 아무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해요. 전기가 발명되고 매머드 도시가 등장한 이후로 현대의 밤은 일종의 교란상태에 빠져 있죠. 게다가 자본주의가 선물한 최고의 유산은 바로 불안이에요. 보험, 증권, 부동산, 주식…… 현대 경제는 불안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알다시피 불안은 숙면의 최고의 적이에요. 그리고 불면은 다시 불안을 만드는 악순환이 진행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늘 불안한 겁니다. 반대로 원시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영적인 존재였죠. 해가 떠 있는 시간은 일하는 시간이었고 해가 지고 나서는 꿈을 꾸고 쉬는 시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신의 섭리에 따르면 삶의 반은 일하고 나머지 반은 꾸어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밤에는 잠만 자자는 얘긴가요?”

(200)

이 우주적 가르침에 따르자면 한 개체가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의 사이클이란 언제나 자신의 시간단 하나뿐이다. 우리에게 이해심이 부족한 게 아니다. 우리는 애당초 이해란 걸 할 수가 없다. 번개돌이는 달을, 달은 토끼를, 토끼는 번개돌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더 빨리 늙어가고, 누군가는 더 빨리 배가 고프고, 누군가는 더 빨리 사랑했다가 더 빨리 식어버리고, 또 누군가는 그토록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졌다며 밤새 죽을 듯이 울고 난 다음날 새로운 남자와 또다시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늘 하는 말은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왜 사랑하지 않느냐.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 내가 너희만할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너희들은 어쩌자고 이따위냐? 같은 말뿐이다.

(201)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삶의 방식 이외에도 아주 많은 삶의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얼토당토않고 무모해 보여도 그것은 그들이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나름대로 고안한 필연적인 질서라는 것을 모른다. 모르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우리는 충고를 한다.

이봐, 이제 프리셀은 그만두고 좀더 생산적인 일을 골몰하는 게 어때?”

내가 프리셀을 빼앗아버리면 그는 아마 자살해버릴지도 몰라하고 말하면 사람들은 농담하지 말라는 투로 피식 웃는다. 하지만 정말이다. 프리셀 이외에 이 지루하고 막막한 세계를 견디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그는 정말로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버릴지도 모른다.

(269)

실제와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공포를 혹은 공포의 환상을 물리적인 세계에서 실제로 만난다. 환상 속의 악어는 실제로 사람을 물어죽이고, 삼십 센티미터 높이의 계단에서 떨어지면 온몸이 바스러진다. 그들은 악어를 상상해서는 안 된다. 악어를 상상하면 악어는 곧장 진짜 악어로 바뀌고 그들을 공격한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인 악순환이 시작된다. 환상 속의 악어를 실제로 만난 환자는 더 무섭고 강력한 악어를 상상하게 되고, 그러면 이빨이 더 커지고 몸이 더 부풀어오른 거대한 악어가 그들을 공격한다. 처음에는 살을 할퀴고, 두번째는 발가락을 물어가고, 세번째는 다리 전체를 물어가고, 결국에는 그들을 잡아먹어버린다.

이제 다시 물어보자. 당신은 아직도 침대 밑에 있는 악어가 가짜 악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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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말이다. 그는 잔인하게 덧붙인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15)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익숙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와 관련된 좀 더 심도 있는 책을 선택한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하나의 분야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는 불편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 세계를 무너뜨리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책을 선택한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 세계의 지평을 점차 넓혀가는 사람이 있다.

두 가지의 방법이 있는 것이다. 익숙한 세계의 깊이를 더하는 방법과 불편한 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

(20~21)

추상적인 상상을 해보자. 방금 하나의 어린 정신이 태어났다. 이 정신은 완벽한 하나의 세계로서 결함 없이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정신의 이름은 ()’이다. ‘은 평화롭고 고요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어린 정신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자기 안에서 자라난 질문들, 모순된 결론들과 대면하는 것이다. 이제는 공존할 수 없다. 정상적인 자기 자신과 모순된 자아상을 분리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반대되는 자아상을 이제부터 ()’이라 이름 붙이고, 자아로부터 떼어내자. 이제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것과 대면하게 되었다. 자아와 반자아의 투쟁이 시작된다. 치열한 투쟁 결과 어린 정신은 모순된 자아상을 수용한다. 이제는 도 아니고 도 아닌 새로운 성숙한 정신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숙한 정신의 이름은 ()’이다. ‘은 완벽한 하나의 세계로서 결함 없이 정상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제 은 동시에 이 된다. 이 과정은 끝없이 반복되며 하나의 정신을 성장하게 된다.

(41)

성숙하고 똑똑한 학생일수록, 주체적이고 심오한 학생일수록 현행 교육 시스템에 적응할 수가 없다. 반면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변태를 길러주기에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다.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나이에 자신의 욕구를 억제할 줄 알고, 친구나 가족의 안타까운 삶에 무관심할 정도로 자신의 좋은 성적을 위해 반복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기형적인 학생만이 더 건강하고 정상적인 학생일지도 모른다.

(64)

구약은 신과 인간이 맺은 오래된 약속을 뜻하고, 신약은 새로운 약속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예숙 그리스도가 기준이 된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약속이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어 종교적 시각으로 해석되어 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기록이다. 27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구성은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 그리고 묵시록이다. 복음서는 4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1편으로, 사도들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서신은 총 21편으로, 사도들의 편지다. 마지막 1편은 묵시록으로, 요한이 계시에 의해 기록하였다.

(92)

이 질문은 대학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다. 답을 찾기 위해서 나는 도서관에 앉아 철학과 과학 서적을 뒤적였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붓다에 관한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붓다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그렇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타자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102)

젊은 나의 생각은 옳았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완전함 혹은 충만함의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에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122)

물론 이런 대답은 어떤 사람들을 화나게 할 수 있다. 평생 하나의 관점이 옳다고 믿어온 사람에게 이런 불분명한 선택은 불경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묻고 싶다. 왜 하나의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야 하는가? 왜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서둘러야 하는 것인가? 물론 세상에는 제한된 시간 내에 빠르게 결정해야 하는 문제도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이건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146)

정리해 보자. 무엇이 문제인가? 플라톤주의가 절반의 세계를 억압한 것이 문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이념, 사유, 종교, 도덕만을 추구한 나머지 구체적인 현실을 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늘의 가치만을 추구하다가 대지를 더럽히고 말았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니체는 근대를 끝내려고 한다. 플라톤주의를, 그리스도교를, 이성중심주의를,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끝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149)

그렇다면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 다시 말해서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내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 현실로 돌아오라는 니체의 제안이다. 이상적이고 불변하는 본질의 세계 같은 것은 없다. 초월적 세계의 잡히지 않는 그 무엇만을 추구하다가 현실의 건강함을 짓밟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신의 죽음은 필요하다.

(155)

여기에는 어떠한 이유나 목적도 없다. 성장도 없고, 휴식이나 끝도 없다. 다만 영원히 같은 삶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가? 당신은 영원회귀의 진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끔찍한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런 영원회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허무주의의 최고 형태다. 이러한 극단적인 허무를 인정하고 나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한 번 더!”라고 외치며 허무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초인이다.

(166)

하지만 나는 당신이 여행하는 영혼을 가졌으면 좋겠다. 여행하는 영혼들은 대체로 숨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물을 파는 영혼은 비교적 사회에서 환영받는다. 그래서 여행하는 영혼의 소유자도, 우물 파는 영혼의 소유자도, 모두 자신이 우물을 파는 영혼인 것처럼 행동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전문가가 되려고 한다. 평생을 거쳐 하나의 분야를 파내려가고자 한다. 당신의 부모도,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당신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왜 누구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지, 왜 평생을 소진하여 하나의 전문 분야를 가져야만 하는지를 말이다.

(198)

이러한 인류원리를 더 확장해보면 이런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어. 20세기 미국의 물리학자 존 휠러는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찰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이 말에 대해서 고전 물리학자들은 격렬하게 반대할 거야. 왜냐하면 고전 역학에서의 우주는 인간의 존재와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실체니까. 하지만 생각해볼 만한 문제야. 지적인 존재들로부터 완벽하게 은폐된 동시에 자기 충족적이고, 그 안에 어떠한 지적인 생명체도 보유하지 않은 우주를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도대체 그 대답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230)

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가 이상주의자이며, 특히 인간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점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윤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신성한 의미를 깨달아 일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다. 노동과 헌신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주의 낙원을 이룩하고자 했던 것이다.

(244~245)

군을 전역하고 현실세계에 던져졌을 때, 그래서 나는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지금의 어설픔과 실수들이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성숙한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먹고살기 위해 애쓰고 경쟁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낯설음을 나는 결국 극복할 것이다. 군대에서 적응했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나는 잘 적응할 것이다. 다짐했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리라. 어떤 고민도 하지 않고, 어떤 책도 읽지 않으리라. 남들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하고 말 것이다. 돈을 벌고, 경제적인 안정을 찾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행복한 노후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종종 서글펐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성실한 청년이 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나의 영혼은 이미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292)

사고 이후에 알게 되어 매일 듣고 있는 노래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노래다.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la Vida}’. 당시에 내가 이 노래를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가수가 누구인지, 노래의 가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언어를 뛰어넘는 그녀의 깊고 낮은 음성 때문이었다. 그 깊은 목소리는 나를 항상 예민하고 몰고 가는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다. 나는 눈만 감으면 되었다. 그러면 불안한 세상 속에서 나만의 안전한 공간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렇게 늦게까지 공원 벤치에 앉아 노래를 들었다

(315)

네 맞아요. 당신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걸 잘 알아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보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이 미운 거죠. 그래서 더 세속적인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거고요. 하지만 당신은 잘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삶을 용기 있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렇지만 반쪽짜리 삶이었지요. 굳이 이상을 저 멀리 내팽개칠 필요는 없었어요. 지금처럼 현실을 묵묵히 걸어가세요. 동시에 언젠가 필요할 때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이상도 함께 품고 가세요. 아무도 당신에게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359)

[파드마삼바바] 허망해하지 마라. 너는 잘하고 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해라. 미련과 아쉬움과 후회를 만들지 마라.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너를 심판하는 존재 같은 것은 없다. 삶과 죽음이 바로 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401)

나의 경계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에겐 경계가 없다. 나는 모든 것에서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에서, 내면과 외부에서, 자아와 세계에서. 그래서 이것이 슬픔이 된다.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나라면 구면의 밖으로는 어떻게 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의식의 지평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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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회의 방향성은 둘 중 하나다. 시장의 자유 또는 정부의 개입. 그리고 이 두 가지 방향성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은 세금이다. 세금은 사회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근원이다. 거칠게 말하면, 세금으로부터 모든 사회 문제가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세금에서 시작된다.

(37)

우선 지금의 누진세율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는 견해부터 알아보자. 이들은 현재의 누진세 제도 자체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보기에 누진세는 국가가 소수의 고소득자들의 권리를 강제로 침해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시장에서 노력하고 투자해서 얻은 성과를 보호해주지 않는 국가는 경제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윤리적으로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현재의 누진세율을 낮추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지금의 누진세율이 너무 낮다고 생각하는 견해에 대해 알아보자. 이들이 보기에 누진세는 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빈부격차가 극단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바로 지금이 누진세를 강력하게 적용할 시점이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들은 과세표준에서 최고구간에 해당하는 세율을 최대한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45)

시민은 놀랍도록 참을성이 강해서 문제가 악화되는 시점까지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 가시적으로 문제가 발생해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너무 늦어 사태가 악화되었을 때가 보통이지만, 시민의 움직임은 사회의 분위기를 역전시킨다.

진짜 문제는 움직이지 않는 시민에게 있다. 상황이 악화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부동의 시민들이 문제다. 그들이 사회의 절대다수일 경우 그 사회는 균형을 잃어버리고 특정 계층, 특정 계급의 이익만을 반복적으로 보장하는 부정한 사회로 변질될 수 있다.

(69)

시민은 권리를 갖고 있는 주체를 의미한다. 서울시나 부산시에 살면 시민이고 경기도나 충청도에 살면 도민인 것이 아니다. 물론 매우 좁은 의미로는 그렇게 쓰이기도 한다. 행정구역상 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민을 언급할 때는 그런 협소한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은 의무를 이행하고 권리를 갖는 주체 모두를 지칭하는 점을 기억하자.

(103)

자유를 기준으로 본다면 역사는 하나의 방향으로 진보해온 것으로 드러난다. 역사는 자유인의 확대, 같은 말로 자유의 확장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리고 여기서 자유가 확장된다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 절대정신이 확장되고 있음을 말한다.

(111)

자유란 타자에게 간섭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자유의 정의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정의는 실제로는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우선 앞부분, 자유는 타자에게 간섭받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특정 국가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자유를 소극적 자유라고 한다. 다음으로 뒷부분,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자신이 지향하고 선택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상태가 그것이다. 이러한 자유를 적극적 자유라고 한다.

(129)

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를 인정하는 체제를 말한다. 생산수단의 개인소유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본질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자유주의를 이념으로 한다고 할 때, 이때의 자유는 실제로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구매할 자유가 있다.

공산주의는 이에 저항하며 등장했다.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를 거부한다. 타인을 착취하는 부도덕한 상품이라면 이를 개인이 장바구니에 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 없이 노동자에 의해서만 구성된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다.

(160)

시민에게는 의무가 있다.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사회의 이익을 고려해야 할 책임 말이다. 물론 모든 구체적인 사회적 쟁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세계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을 토대로 개별 사안을 단순하게 분류할 수는 있어야 한다. 시장의 자유와 정부의 개입으로, 자본가의 이익과 노동자의 이익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으로, 주주 자본주의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시민들 스스로가 개별 쟁점의 방향성을 이해하고 분류할 수 있을 때, 사회적 담론들은 합리적이고 건강하게 논의되어갈 것이다.

세계에 대한 단순한 구분. 이것이 시민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교양이다.

(183)

그런 까닭에 비정규직의 확대에 대한 논의는 문제가 있다.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 동시에 리스크까지 높이는 제도는 불공정하다. 따라서 노동자가 비정규직의 확대에 저항하는 것은 시장 원리에서 매우 상직적이고 합리적인 일이 된다. 만약 특정 정부가 노동자의 임금 인상 없이 규제 완화를 통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만을 추구한다면, 그 정부는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는 정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그에 대응하는 고용 안정성 정책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205)

한국은 오랜 기간 동안 객관주의 인식론에 기반한 교육체계를 유지해왔다. 강의식 교육과 전통적인 교실 구조 그리고 객관식 평가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교육 형식이다. 빠른 경제성장과 산업화가 요구되던 시기에 이러한 교육관은 매우 효율적으로 기능했다. 문제는 진리가 실재한다는 절대주의 세계관에 익숙하다. 반대로 고정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와 여기서 파생되는 다양성에 대한 담론들에 불편해한다.

우리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보수와 진보, 세금과 복지의 문제를 합의와 절충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 선과 악의 이념 대립으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육의 형식보다 교육의 내용에 집중해오는 동안 한국인은 진리가 실재한다는 이념을 내재화하게 되었다.

(213)

우리는 교육의 형식이 학생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교육에 대한 담론에서 중심이 되는 주제는 교육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대한 것이다. 어떤 내용을 가르치고, 어떤 교과를 강화할 것인지, 선택과목의 수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고민에 집중되어 있다. 거 근본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은 교육의 형식인데도 말이다.

학생들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교육의 형식을 통해 학습한다. 특히 진리에 대한 이념과 경쟁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발생하는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 그 원인은 우선 강의식 수업과 교실 구조 그리고 객관식이라는 평가 형식이었다. 학생들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절대적이고 고정된 진리가 어딘가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갖게 된다. 이것은 성인이 되었을 때 사외 문제를 옳고 그름, 선과 악의 문제로 접근하게 하는 경향성을 높인다. 다음으로 지속적인 교내 평가와 대입시험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경쟁과 그에 따른 결과가 정당하다고 믿게 된다. 문제는 경쟁의 형식이 사회의 책임을 개인의 책임으로 손쉽게 전환한다는 점이다. 어떠한 평가가 되었건 그에 따른 결과가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 중간으로서 대우를 받을 수 없는 평가라면, 그 경쟁은 정의롭지 않다.

(227)

교육은 경제가 결정한다. 경제적 생활과 환경. 구체적으로는 일자리와 소득격파의 정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교육의 모습이 결정된다. 문제는 일자리와 소득격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대립하는 국가 방향성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면 상대적으로 일자리의 양이 늘어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소득격차는 심화될 수 있다. 이러한 경제 환경에서 학생들은 과도한 경쟁에 노출된다. 반대로 정부의 개입을 추구하면 상대적으로 소득격파의 완화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투자가 줄어들고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 이러한 경제환경에서 학생들은 마찬가지로 제한된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과도한 경쟁에 내몰린다.

그래서 한국의 학생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저성장 시대의 도래와 빈부격차의 심화는 일자리의 수를 줄이고, 소득격차를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241)

윤리에서 말하는 정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관념과 닮아 있다. 그것은 정의로움에 대한 관념이다.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가? 어떤 사람은 기본적으로 차등적 세계를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사회에는 수직적인 질서가 있으며, 엄연히 법과 규칙이 존재한다. 이를 준수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은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세계를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절대적인 권리로서의 인권을 갖는다. 따라서 차이와 차별이 없는 수평적인 관계의 실현을 위해 사회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274)

보수와 진보는 고리타분하고 모호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평생 한 가지의 정치적 성향만을 지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평생 보수이고 평생 진보인 사람은 정치인밖에 없다. 시민은 자유롭다. 인생 속에서 변화하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에 따라 순간순간 가장 적합한 선택을 하면 된다. 이제 미디어나 타인의 말, 혹은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말고, 나와 사회의 이익을 대변할 정치적 입장을 선택할 때다.

(310)

국제사회는 저성장 시대로 돌입했다. 모든 국가가 자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경쟁하게 되었다. 이때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인플레이션 정책이다. 앞으로 국제사회는 자국의 통화량을 팽창시키고 화폐가치를 낮추려는 경쟁을 할 것이다. 미국의 양적 완화, 중국의 위안화 절하, 일본의 엔저 정책이 이러한 맥락에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급격한 통화량 팽창에 따른 부작용으로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버블이 커질 수 있다. 경제성장과 경제붕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계속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국가는 세계의 눈치를 보느라 통화량 팽창을 쉽게 진행하기 어렵겠지만, 강대국은 군사적, 정치적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스스로의 통화량 팽창의 정당성을 부여할 가능성이 높다.

(345)

시민은 그 자체로 자유다. 역사의 필연적 귀결로서 시민은 자유의 실현자다. 여기서의 자유는 두 가지 의미다. 개인으로서의 나를 구성할 자유와 사회를 선택할 자유. 삶의 현장 속에서 나는 치열하게 일하고 공부하고 경쟁하며 나를 구성한다. 동시에 세계를 분석하고 이해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선택을 해야 한다. 세계의 복잡성으로부터 잠시 회피하여 쉬고 있는 시민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을 사회적 담론의 장으로 이끌어야 할 책임은 시민으로서 당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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