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일기 - 우크라이나의 눈물
올가 그레벤니크 지음, 정소은 옮김 / 이야기장수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 초에 아빠는 뜻밖의 뉴스를 하나 접했단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뉴스였어. 그 전부터 전쟁의 조짐이 있었지만, 설마 요즘 같은 시대에 러시아 같은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나라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 그런데 실제로 전쟁은 일어났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전쟁은 현실이 되었단다. 그리고 그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구나. 그 기간에 군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인들도 목숨을 잃었다고 했어. 한 사람의 어리석은 리더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평화와 생명을 빼앗아간 것인가. 전쟁은 어떤 이유가 되었든 옳지 않은 것이란다.

 

1.

그 책을 쓴 지은이 올가 그레벤니크에게도 마찬가지였어. 올가 그레벤니크는 우크라이나의 동화 작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였어. 자기 일을 하면서 식구들과 행복한 삶을 살던 그에게 전쟁은 그의 삶 자체를 변화시켰단다. 안 좋게, 무섭게, 불안하게… 갑작스러운 전쟁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포탄으로부터 그나마 피할 수 있는 지하생활이었단다. 그 지하생활을 시작하면서 지은이는 연필 한 자루로 그림과 짤막한 글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어. 지은이가 그린 그림은 물감으로는 칠하지도 못한, 연필로 스케치만 대충한 그림들인데, 그림 속에 공포가 담겨 있었단다.

지하실에서 나오는 것은 생명을 걸고 나와야 했어. 언제 폭격이 올지 모르니까 말이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보여서 두려움에 떨던 그들. 지은이는 전쟁이 나고 생전 처음 하는 일들도 했단다.

죽을 것을 대비하는 일.

========================

(96)

전쟁 첫째 날 내 아이들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내 팔에도 적었다.

혹시나 사망 후 식별을 위해서.

무서운 사실이지만 그 생각으로 미리 적어두었다.

========================

지은이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나라를 탈출하기로 결심했단다. 그렇게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가고, 지은이의 블로그의 팔로우들의 도움으로 불가리아에 가서 그곳에 머무르고 있단다. 안타깝게나 성인 남자들은 국경을 넘을 수 없어서 남편은 우크라이나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구나.

========================

(102)

리보르(르비우)

이별의 도시.

남편과 작별인사를 나눠야 하는 지점.

 

남편은 국경을 넘지 못했다. 남자들은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우리는 마지막 하루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

도시를 걸으며 산책했다.

마지막으로 식당에 갔지만, 한입도 삼킬 수가 없었다.

식당의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우리가 8일을 보낸 지하실 분위기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마지막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다.

혹시나 ‘파괴공작원’으로 오인될 수 있어서,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 산책은 그림으로만,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만 간직하고 있다.

========================

그들이 헤어지면서 곧 만날 것을 기약했을 텐데,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지은이 올가 그레벤니크의 가족들은 만나지 못하겠구나.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나서, 더 이상 희생은 일어나지 않고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구나. 올가 그레벤니크의 남편과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식구들 모두 안전하게 지내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다시 재건하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후 일기를, 그때는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다시 찾은 행복에 대한 책을 출간하면 좋겠구나.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내 나이 서른다섯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것라곤 생각지 못했다.

책의 끝 문장: 이곳은 경이롭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3-01-04 16: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오기를 기원했지만 결국 해를 넘기네요.
평화를 기원하는 날들이 아니라 평화가 찾아온 날이 되기를 여전히 기원합니다.

bookholic 2023-01-06 13:26   좋아요 1 | URL
네, 생각보다 너무 길어지고 있습니다.ㅠㅠㅠ
얼른 빨리 끝나길~~~
 
변두리 로켓 야타가라스 변두리 로켓
이케이도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케이도 준의 <변두리 로켓>의 네 번째 이야기 <야타가라스>를 읽었단다. <변두리 로켓> 4권까지 출간되었는데, <야타가라스>를 읽음으로 일단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변두리 로켓>은 다 읽은 거지. 5권도 나올지 모르겠구나. 4권의 제목 야타가라스는 일본 고대 신화에 나오는 길을 안내해주는 까마귀로 다리가 세 개가 있다고 하는구나. , 다리가 세 개인 까마귀는 우리나라도 삼족오로 전설 속의 까마귀가 있는데 일본에도 있구나. 아무튼 <변두리 로켓> 시리즈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쓰쿠다를  중심으로 회사원, 특히 연구원들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그렸단다.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 골리앗 같은 대기업을 상대하며 살아남은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도 알게 해주는 소설이었지.

주인공 쓰쿠다는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아 쓰쿠다 제작소를 경영하는 사장이었잖아. 돈도 중요하지만, 기술과 제품의 품질을 더 중요시하는 정체성이 확고한 사람. 그리고 인간미도 물씬 풍기는 그런 사람이었지. <변두리 로켓> 3권에서 기어고스트라는 중소기업을 도와주었는데, 그 기어고스트가 쓰쿠다제작소를 배신했었지. 그 기어고스트라는 회사도 4권에 또 나온단다. 4권의 주제는 인공지능으로 자율 주행하는 농업 로봇에 대한 이야기란다.


1.

, 그럼 4권의 이야기를 해볼게. 1권부터 쓰쿠다제작소와 일을 같이 해왔던 대기업 데이코쿠중공업. 데이코쿠중공업의 자이젠이라는 사람이 쓰쿠다를 잘 이해해주고 도와주었지. 자이젠은 이번에 보직을 바꾸면서 농업 로봇에 대한 신제품을 기획하게 되었어. 자이젠은 인공 로봇의 주요 기술 중 하나인 트랜스미션과 소형 엔진을 쓰쿠다제작소에 맡기고자 찾아 왔단다. 그리고 한가지 더 부탁이 있었어. 농업로봇의 핵심기술인 자율주행 기술을 가지고 있는 노기 교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쓰쿠다의 옛친구였거든. 그 사람에게 같이 하자고 부탁 좀 해달라는 것이었어.

쓰쿠다는 옛친구도 오랜만에 볼 겸, 농업 로봇은 침체된 농업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도와주겠다고 했어. 자이젠과 쓰쿠다는 함께 노기 교수를 찾아갔단다. 그런데 노기 교수는 기업체와 함께 일하는 것을 꺼려했어. 왜냐하면 예전에 산학협업을 했다가 사기 당하고, 자신의 기술만 쏙 빼앗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기업체와 다시는 일을 안 하려고 했단다. 쓰쿠다의 계속된 설득으로 결국 함께 하기로 했단다. 친구인 쓰쿠다도 참여하니까 믿을만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데이코쿠중공업 내부에 사정이 생겼어. 늘 남의 업적을 가로채는 마토바 이사가 이번에도 자이젠이 기획했던 농업 로봇 프로젝트를 가로채 자신이 총책임자가 된 거야. 그리고 트랜스미션과 엔진을 자체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단다. 원래 쓰쿠다제작소에서 하기로 했던 것인데 말이야. 트랜스미션과 엔진을 자체개발을 하게 되니 쓰쿠다제작소는 그 프로젝트에서 할 일이 없어지게 된 거야. 자이젠은 난처한 입장이 되었고, 쓰쿠다가 빠지니까 노기 교수도 안 한다고 했어. 자이젠의 부탁으로 쓰쿠다가 노기 교수를 다시 한번 설득해서 일단 참여하기로 했단다.


2.

그렇게 데이코쿠중공업에서 농업 로봇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침 방송에 중소기업들이 모여서 다윈 프로젝트라는 연합프로젝트를 기획해서 무인 농업 로봇을 출시한다는 소식이 나왔단다. 데이코쿠중공업으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지. 다윈 프로젝트에 참여한 회사는 쓰쿠다제작소를 배신했던 기어코스트, 쓰쿠다제작소의 경쟁업체이자 기어고스트와 손을 잡은 다이달로스, 그리고 키신이라는 회사인데, 이 키신이라는 회사로 바로 앞서 노기 교수의 기술을 빼간 그 회사야. 뭔가 도덕적으로 좋지 않은 비양심적인 회사들이 모여 있구나. 그런 회사들이 모였으니 결과는 뻔해 보이는구나. 하지만 현시점에서는 다윈 프로젝트의 제품이 데이코쿠중공업의 것보다 앞서 있었단다.

데이코쿠중공업이 엔진을 자체 개발하긴 하는데, 데이코쿠중공업은 대형 엔진만 만들었지, 소형 엔진은 경험이 없었단다. 다윈 프로젝트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소형 엔진을 새로 개발해야 하는데, 그것은 오랜 시간이 걸려서, 그들이 계속 해오던 대형엔진을 적용하기로 했어. 그러다 보니 농기계가 커지게 되었단다. 표면적인 이유는 다윈 프로젝트와 다른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미였는데, 대형 농기계의 시장이 많지 않아서 농민들을 도와주겠다는 처음 취지와 많이 달라졌단다.

얼마 후 열린 농업 축제에서 무인 농업 로봇의 첫 시범운전이 있었어. 다윈 프로젝트에서 개발한 무인 농업 로봇인 무난하게 성공했단다. 일반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겠지만, 전문가들 눈에는 여러 허점들이 있었단다. 그래도 무난하게 시범운전은 성공적이었지. 그에 반해 데이코쿠중공업은 허수아비를 들이박고, 도랑에 빠지는 등 완전 실패였단다. 회사 이미지만 잔뜩 안 좋아지고 말았지.

이 소식을 데이코쿠중공업의 도마 사장도 알고 격분했단다. 자신은 농업 로봇의 기획이 소형인줄 알았는데 왜 대형으로 바뀌었냐고 화를 냈어. 이것은 다 그 얄미운 마토바가 그랬던 거지. 도마 사장의 지시로 다시 소형 농업 로봇을 만들게 되었고, 사장의 지시로 트랜스미션과 엔진은 쓰쿠다제작소에서 맡게 되었어. 시간은 지체되었지만 다시 원 궤도를 찾은 것 같구나. 쓰쿠다제작소는 고민이 하나 있었어. 엔진은 그들의 주력제품이라서 자신 있었지만, 트랜스미션은 경험이 부족했거든. 그래서 기어고스트의 창업멤버였지만 배신당한 후 현재는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시마즈 유를 설득하여 영입했단다. 노기 교수도 참여를 했어. 이 정도면 변두리 로켓 시리즈에서 나오는 인력들 중에는 베스트멤버였어.


3.

얼마 후 시제품이 나왔어. 시운전을 해볼 제격인 사람이 있었지. 얼마 전까지 쓰쿠다제작소에 다니다가 아버지의 농업을 물려받기 위해 시골로 내려간 도노무라. 도노무라는 흔쾌히 오케이하고 자신의 논에서 무인 농업 로봇을 시험 운행하게 했단다. 이렇게 데이코쿠중공업의 무인 농업 로봇을 진척을 보일 때, 다윈 프로젝트는 더 앞서 달리고 있었어. 이미 수십 농가에 제품을 주고 제품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가끔 멈추는 현상이 있었어. 전원을 껐다 켜야 다시 동작을 했어. 그러다가 어떤 한 시료는 전원을 껐다 켜도 작동을 하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았어. 그 불량품을 가지고 와서 확인해 보니, 트랜스미션의 변형이 되어 있었어. 그런데 그것이 프로그램 버그라고 연락이 프로그램을 업데이트를 했단다. 뭔가 찜찜하고 불안한 일들이구나.

무인 농업 로봇이 개발되면서, 일본의 총리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윈 프로젝트 제품과 데이코쿠중공업 제품 모두 총리 앞에서 시연을 하기로 했어. 그런데 정작 총리는 다윈 프로젝트 제품의 시연만 보고 시간이 없다고 자리를 떴단다. 총리는 정치적으로 봤을 때, 중소기업들이 연합해서 만든 제품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야, 자신의 지지도가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대기업인 데이코쿠중공업 제품의 시연은 보지도 않고 자리를 뜬 것이란다.

그렇게 다윈 프로젝트의 무인 농업 로봇이 데이코쿠중공업의 것보다 앞서 갔단다. 시장 출시도 먼저 하고 홍보도 잘되어 매출이 급증했단다. 그에 반해 랜드크로우라는 이름으로 출시한 데이코쿠중공업의 무인 농업 로봇은 매출이 저조할 수밖에 없었단다. 대기업이긴 했지만 무인 농업 로봇에 있어서는 후발주자였으니그렇게 되자 데이코쿠중공업의 비인간적인 캐릭터 마토바가 이번에도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어. 데이코쿠중공업의 하청업체 중에 다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업체들도 있었는데, 그런 하청업체에 압력을 가해서 다윈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원자재도 공급하지 못하게 했단다. 그래서 다윈프로젝트는 생산 중단까지 이어지게 되었어.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마토바는 하도법 위반으로 고소당하고, 데이코쿠중공업은 그 일이 마토바의 독단적인 일이라고 판단되어 마토바를 자르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단다. 아빠가 보기에 마토바는 이미 이전 시리즈부터 계속 하도법을 어겼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서야 재판을 받고 회사에서 잘리게 되었구나. 그렇게 다윈 프로젝트의 원자재 수급 문제는 해결되나 싶었는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단다. 그들의 출시한 무인 농업 로봇이 현장에서 계속 고장이 나는 것이었어. 불량품들을 확인해 보니 모두 트랜스미션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어.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데이코쿠중공업에서 개발한 랜드크로우의 트랜스미션이 필요했어.

그 트랜스미션은 바로 시마즈 유의 작품이었잖니. 기어고스트에서 배신당해 잘리고 쓰쿠다제작소에 스카우트된 시마즈 유. 기어고스트는 그런 인재를 자르고,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회사를 배신하더니 큰 곤욕에 빠지게 되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겠다고 쓰쿠다제작소에 찾아와 트랜스미션의 특허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당연히 거절했지. 자신들을 배신한 회사에 무엇이 이쁘다고

그런데 고장 난 무인 농업 로봇 때문에 봉변을 당한 농민들을 보고, 어떤 것이 과연 농민을 위한 것인가 다시 생각하게 된 쓰쿠다. 결국 데이코쿠중공업에도 진심을 이야기하여 설득하고, 시마주 유와도 이야기를 해서 트랜스미션의 특허를 다윈 프로젝트에 사용할 수 있게 했단다. 그렇게 훈훈하게 이야기를 끝이 났단다.

<변두리 로켓> 시리즈의 결말은 늘 훈훈하게 끝이 나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 예상을 했는데, 이번에는 너무나 훈훈하게 끝나는구나. 현실감마저 떨어질 정도 훈훈했어. 5권이 출간될지 모르겠지만, 4권에서 마무리해도 깔끔하게 잘 끝난 것 같구나. 소설 <변두리 로켓>이 인기를 끌면서 일본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어디서 봐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회 되면 한번 보고 싶구나.


PS:

책의 첫 문장: 역으로 이어지는 긴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시마즈 유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이타미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몽주 나남창작선 118
이병주 지음 / 나남출판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어른이 되나 나서는 역사를 참 좋아하는데, 학창 시절에는 역사 과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단다. 아빠가 어른이 되어 역사의 재미를 알게 되고 나서, 학창 시절에도 그런 재미를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여러 번 했어. 학창 시절의 기억력은 어른 때의 기억력보다 오래 가고, 역사 성적도 좋았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그런 아빠의 DNA를 물려받았는지 너희들도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 같더구나. 그래서 역사에 관심을 끌게 하려고 재미있는 유튜브도 찾아보고, 재미있는 책도 찾아보고심지어 아빠가 이야기를 해 줘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를 만나도 좋겠다는 생각에, 올 상반기에 방영되었던 <태종 이방원>이라는 드라마를 같이 보기로 했잖아. 우리가 3회까지 봤는데, 아직 고려 말이었지. 이성계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주변 인물들그 중에는 정몽주라는 사람도 있었단다. 그 또한 이성계와 개혁을 함께 하려고 했지만, 큰 그림이 달라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인물이었지. 그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집에 사두고 읽지 않은 이병주 님의 <정몽주>라는 책이 생각이 났단다. 이왕 읽을 것, 드라마와 연관 지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되었단다.

이병주라는 분은 아빠가 알기에 현대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많이 쓰신 분으로 알고 있어. 하지만 아빠가 한창 책을 좋아하기 시작하던 때는 이미 고인이 되셔서 그의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단다. 이번이 처음이었어. 이 책이 맨처음 출간된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어려운 우리말과 한자어들이 많이 나왔단다. 하나하나 국어사전을 찾아보면서 읽기에는 힘에 부쳐, 앞뒤 문맥을 보고 뜻을 유추하면서 읽거나, 한자어 같은 경우는 한자가 같이 써 있어서, 어설픈 한자 실력으로 뜻을 해석하면서 읽어나갔단다. 어려운 한자어나 생소한 우리말의 경우는 출판사에서 주석을 달아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1.

정몽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단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전기나 평전 등은 읽은 적이 없어. 이번에 읽은 이병주 님의 <정몽주>는 소설이지만, 그의 삶을 좀더 알게 되는데 도움이 되었단다.

….

고려 공민왕 9. 정몽주는 장원급제로 벼슬의 길을 시작했단다. 하지만 순탄하지는 않았어. 당시에도 권력 싸움이 장난이 아니었단다. 당시 권력은 김용이라는 사람이 잡고 있었는데, 정몽주의 스승인 김득배도 김용의 반대세력이었어. 김용은 반대세력을 가차없이 죽였는데, 거기에는 김득배도 포함되어 있었단다. 김용은 점점 욕심이 심해지고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고 말았단다. 고려말의 정세는 혼란 그 자체였단다. 공민왕이 개혁 정책을 써서 나라를 바로 잡아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고, 그 또한 나중에는 손을 놓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어. 정몽주는 자기보다 아홉 살 많은 목은 이색과 뜻이 맞아 자주 어울렸단다. 정몽주가 주로 일한 곳은 성균관이었단다.

당시 국경 너머에서는 여진족이 침략하였는데 이때 군사(軍師)로 전투에 참여했다가 이성계와 최영을 만나게 되었단다.

...

정몽주는 사신으로 명나라를 가기도 했단다. 당시 명나라는 주원장이라는 사람이 막 나라를 세운 시기였어. 정몽주는 명나라의 학자들과 교유를 통해 친목을 다졌단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어. 배가 다 부서지고 사람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혼자 무인도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10일간 지내다가 지나가는 해적의 도움으로 다시 중국 대륙으로 가게 되었단다. 정몽주는 고향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했지. 그곳에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지내다가 한참 뒤에 고려로 돌아왔단다.


2.

정몽주가 돌아온 고려는 더 엉망이었어. 공민왕은 미소년들의 모임인 자제위를 만드는 등 향응에 빠졌어. 그렇게 매일 향응에 빠져 살다가 결국 살해당하고 말았단다. 공민왕이 죽고 10살 밖에 안된 우왕이 왕위에 올랐단다. 우왕은 고려 33대 왕이란다. 이때 정몽주는 성균관 대사성을 맡고 있었어. 당시 신하들은 외교 정책에 있어 둘로 갈렸단다. 먼저 이인임을 중심으로 원나라를 지지하는 친원 세력이 있었고, 새로 개국한 명나라를 지지하는 친명 세력이 있었어. 그런데 권력을 잡고 있는 이는 친원파였고, 이인임은 반대파인 친명파를 유배 보냈는데, 거기에는 정몽주, 정도전도 포함되어 있었단다. 다행히 유배는 오래 있지는 않고 금방 풀려났단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계속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했단다. 왕은 뭐 하는 것이 있냐? 없었단다. 무능한 왕이었어.

그리고 또 하나의 골칫거리 왜구들이 있었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정몽주는 이번에는 일본에 가게 되었단다. 그곳에서 환대를 받으며 1년간 머물러 왜구 문제에 대해서 협의를 하고 돌아왔지만, 그 이후에도 왜구는 끊임없이 조선 백성을 괴롭혔단다. 그런 것을 보면 일본에서 보낸 1년의 성과는 실패라고 할 수 있겠구나.

친원파 이원임이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친원정책을 계속 펼치고 반대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정몽주는 사직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단다. 그리고 고민에 빠졌어. 민심을 잃은 무능한 왕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고민. 친원정책의 주요 정책은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란다. 그 당시 원나라는 이제 몰락해 가는 나라이고, 명나라는 세력을 키워나가는 신흥국가인데, 원나라에 줄을 선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지. 그렇다고 명나라도 관대한 나라는 아니었단다. 우리나라한테 무리한 조공을 요청했어. 가뜩이나 명나라와 적대정책을 펴고 있는데, 조공을 요청했으니 점점 사이는 안 좋아졌단다. 정몽주는 고려와 명나라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명나라에 갔지만 명나라 황제는 만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단다.


3.

개경에서 정변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진압하면서 신하들이 싹 물갈이를 하게 되었단다. 수상격인 문하시중에 최영, 부수상격인 수문하시중에 이성계가 앉게 되었어. 명나라와 관계가 좀 좋아지나 했으나, 명나라에서 다시 호랑이의 코털, 아니 고양이의 코털을 건드렸단다. (차마 당시 고려를 호랑이에 비유할 수 없겠더구나.) 명나라에서 원라나가 차지했던 고려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했어. 우왕과 최영은 안될 말이라고 하면서 명나라와 전쟁을 하겠다고 했단다. 최영이 우수한 장군이지만, 외세 흐름을 읽는 눈은 밝지 못했나 보구나. 정몽주는 이색과 함께 전쟁을 막을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어. 결국 최영은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명령을 내려 명나라를 공격하라고 지시했어.

우군도통사 이성계, 좌군도통사 조민수는 요동정벌이라는 명을 받고 출정했단다. 정몽주만 명과 싸움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야. 이성계도 그렇게 생각했어.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출정은 했지만, 이성계는 시간을 끌었단다. 출정도 늦게 하고,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가는데도 20일이나 걸렸어. 그리고 위화도에서 장마라는 핑계로 한참 머물렀어. 명령이 거둬지길 기다린 걸까? 아니면 또 다른 결정을 위한 숨고르기였을까? 겉으로는 비 때문에 출동을 하지 못한다고 최영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단다.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결정했어. 개성에는 이성계의 군대를 막을 군사가 없었지. 그렇게 개성에 입성한 이성계는 권력을 잡게 되었어. 우왕은 왕이랍시고, 군사들을 데리고 회군 세력을 처단하겠다고 그들 집을 찾았지만 아무도 만나지도 못했어. 우왕은 헛걸음을 하고 이색과 정몽주를 찾아와 하소연을 했어. 정몽주는 그런 우왕을 내치지 못하고 조언을 했단다. 하지만, 우왕이 힘이 있는가. 권력을 잡은 이성계가 왕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하면 내려와야지, 우왕은 왕 자리에서 내려왔고, 그의 아들 창왕이 왕위에 올랐단다. 이미 고려는 이성계의 나라가 된 듯 했어.

그 당시 목자득국(木子得國)이라는 말과 함께 역성혁명의 소문이 돌았어. 목자득국(木子得國)에서 목자(木子)라는 말은 이성계의 성씨인 이()를 풀어쓴 말로 이성계가 나라를 얻게 된다는 뜻이란다. 정몽주와 이색은 왕이 무능하지만, 고려라는 나라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이성계의 오른팔인 정도전은 이미 역성혁명을 꿈꾸고 있었고 뜻을 달리하는 정몽주를 탄핵하자고 했지만 이성계가 반대했단다.


4.

당시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단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면 우왕의 아들 창왕도 신돈의 핏줄이 되는 거야. 정도전의 조언으로 이성계는 이 소문을 진실로 규정하고 창왕을 폐위시키게 된단다. 그리고 왕씨 친척 중에 한 명을 골라 왕위에 세우게 되는데 그가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란다. 그러니까 공양왕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왕이 된 거야.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의 자손이 아니라 신돈의 자손이라고 했으니 그들을 죽이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어. 결국 우왕과 창왕도 죽고 말았단다.

그런데 공양왕이 그냥 허수아비 왕은 아니었던 것 같아. 이성계와 뜻이 달랐던 정몽주를 찾아왔단다. 그리고 정몽주도 고려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이성계를 척을 둘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어. 그는 이성계 반대파 세력을 끌어 모아 힘을 키웠단다. 정몽주는 이성계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개각을 주도했는데, 이때 이색을 비롯하여 그의 측근을 조정에 배치하고 정도전 등은 지방으로 발령냈단다. 정몽주의 뜻은 명확했단다. 고려라는 나라 유지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개혁을 추진하는 것. 정몽주가 이런 움직임을 보이자 이방원이 정몽주를 술자리에 초대하여 그를 설득하였는데, 이때 지은 시조가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라는 시조란다.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

===========================

한마디로 왕조가 무슨 상관 있냐, 우리 같이 새 왕조에서 잘 살아보자고 한 것이야. 하지만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답했단다.

===========================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뜻이 필요 없는 문장이구나. 이로서 이방원은 정몽주를 설듯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설득할 수 없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

….

정몽주도 강하게 나갔어. 이성계가 낙마하여 부상당하고 있는 동안, 이성계파를 탄핵시키려고 했어. 이 소식을 듣던 이성계가 부상한 몸을 이끌고 개경으로 급히 돌아왔고, 정몽주는 이성계를 병문안 겸 협상을 하려고 갔다가 서로의 뜻만 확인하였단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사주한 이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었단다. 그렇게 정몽주라는 걸림돌이 사라진 이성계는 3달 뒤 공양왕마저 추방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새로운 왕이 되었단다.

그렇게 이 소설은 끝이 났단다. 많은 부분을 알고 있던 내용이라서 신선함은 떨어졌지만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고려말 정세를 이해하게 되어 좋았단다. 우리가 이제 보기 시작한 <태종 이방원>에서는 정몽주가 조연이지만 어떻게 그려지는지 유심히 봐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화려한 등장이었다.

책의 끝 문장: 그런데 이 비광이 춘추를 거듭하는 동안 민족을 광피(光被)하는 영특한 빛으로 되는 것이니 역사의 요묘함이 역연(歷然)하다고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이번에 읽은 책은 제목 때문에 예전부터 눈 여겨보던 책이란다. 명랑한 은둔자라니은둔을 하면서 명랑할 수 있는 사람. 이 책 제목처럼 아빠도 이걸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서 혼자서 놀기.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혼자서 할 것들이 정말 많아서, 지루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물론 방안에 책들도 많고 스마트폰도 있고, 컴퓨터도 하나 있어야겠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집의 서재 같은 공간이라면 명랑한 은둔자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이 책은 안타깝게도 지은이 캐럴라인 냅의 유고작이라고 하는구나. 마흔둘에 적은 나이로 불치병으로 세상을 등진 지은이 캐럴라인 냅. 아빠는 이 사람의 책을 이번에 처음 읽어 본 것인데,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이라는 책도 블로그나 인터넷 서점에서 책 겉표지만 여러 번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지은이였구나. 옮긴이의 말에서 지은이 캐럴라인 냅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는데 캘럴라인 냅이 엄청난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그걸 이겨내는 과정을 쓴 책이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이라고 했단다.

아빠가 이번에 읽은 <명랑한 은둔자>라는 책이 너무 좋았단다. MBTI에서 첫 번째 인자가 강한 “I”인 아빠가 공감하는 내용도 많았지만, 글들이 재미있고 유머도 있으면서 생각거리도 많이 던져 주었단다. <명랑한 은둔자>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도 읽어볼 생각이다. 리스트 추가.


1.

<명랑한 은둔자>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캐럴라인 냅의 유고작으로, 그가 생전에 남긴 에세이들 중에 좋은 것만 추려낸 에세이 베스트 모음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구나. 이 책을 통해서 캐럴라인 냅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그려지더구나. 어떤 일이나 사물, 생각, 행동 등에 한번 꽂히면 중독될 만큼 빠져드는 사람? 앞서 이야기했지만 술에 중독되었다고 했잖아. 그래서 이 책에도 술에 관한 이야기들이 여럿 나온단다. 술 중독을 이겨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아닐까 싶구나. 아빠도 젊은 시절에는 술을 어느 정도 마실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술을 많이 마시기도 했지만, 나이를 좀더 먹고 나서는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단다. 술이 뭔가 해결해 준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머리만 아프게 하거든. 요즘은 가끔 시원한 맥주 한 두잔 마시는 정도? 아무튼 캐럴라인의 술의 중독을 이겨내서 쓴 글들이 좋았단다.

=========================

(212)

술은 그토록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우리가 술에 절어 있을 때는 술이 유일한 해결책인 듯, 술이 자신을 산산조각 나지 않게 붙잡아주는 접착제인 듯 느껴지죠. 하지만 사실은 술이 문제의 근원이죠. 술은 우리가 꼼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발바닥을 바닥에 붙여놓는 접착제죠. 그날 아침, 저는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어쩌면 퍼뜩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생각이 점차 자라서 결국 저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

(223)

술은 재미나 친밀감 같은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줄 순 있을지라도 그런 감정들은 진짜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화학물질 덕분에 변한 나는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김에 흉금을 터놓는 대화를 오래 나누었다. 하지만 술을 마셨을 때 진짜 나는-어떤 면에서는 자신감 있고 다른 면에서는 겁 많은 나, 강한 동시에 약한 나-마음속에서 뒷전으로 물러났고, 그래서 안전해졌을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 혼자였다. 술을 끊는 것은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오는 것, 혹은 망가진 TV 안테나를 고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시야가 더 밝아졌고, 다른 사람들하고는 세상하고든 접촉이 더 또렷하고 확실해졌다.

=========================

캐럴라인은 먹지 않는 것에도 중독되어 거식증에도 걸렸었다고 하는구나. 몸무게가 38킬로그램까지 빠졌다가 나중에 회복을 했다고 했어. 그뿐만 아니라 담배에도 심하게 중독되었는데, 옮긴이의 말처럼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등지지 않았다면 나중에 담배도 끊고 나서 그것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런 책이 세상에 없어서 안타깝구나. 그리고 또 하나의 중독. 이 책을 관통하는 은둔, 고립, 고독에도 중독된 사람 같아 보였어.

=========================

(16)

우리는 고립을 지리와 상황의 결과로 여기곤 한다. 혼자가 된 과부, 남편은 죽고 아이들은 다 자란 여자, 그는 고립된 사람이다. 늙고 쇠약한 사람, 아예 물리적으로 바깥세상에 나갈 수 없는 사람, 그들은 고립된 사람이다. 하지만 고립은 또한 마음의 상태일 수 있고, 실제로 종종 그렇다. 칩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선택을 결정짓는 상태인 것이다. 마치 당신이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나는 고립으로 추락한다. 어둡고 비자발적인 추락은 가속이 붙어, 내가 저지하기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나는 혼자 있기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연속 열 번이나 열다섯 번이나 스무 번쯤 하고 나면, 더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하지만 캐럴라인이 말하길 고독은 차분하지만 고립은 무섭다고 했어. 그리고 고립에 빠지기도 하지만 고독을 즐기려는 노력도 했고, 사교적인 생활도 노력한 것 같았어. 고독을 즐기면서 사교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쌍둥이 기술이라고 했고, 자신은 이제 막 시작했다고 했거든그것이 완성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여 안타깝구나.

=========================

(24-25)

혼자 있다는 것, 그 모든 다양한 형태는-혼자 살거나, 싱글이거나, 배우자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갖거나-연습이 필요한 기술이다. 고독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돌볼 의욕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교적인 생활을 가꾸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기꺼이 취약해질 줄 알아야 한다. 캐럴린 하일브런이 그 쌍둥이 기술을 터득하는 데는 60년이 걸렸다. 내 친구 그레이스는 40대 중반인 지금 그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20년 동안 혼자 살아온 그는 이제 프라이버시와 교유의 균형을 예전보다 더 자주 달성할 줄 안다. 나로 말하면,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


2.

고독과 고립을 오가던 캐럴라인 냅이었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진했단다. 비록 자신의 아이는 없었지만 조카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단다. 캐럴라인 냅은 이란성 쌍둥이 언니가 있었는데, 둘은 전혀 다른 성격과 외모를 가졌다고 했어. 늘 고독했던 캐럴라인과 달리 언니는 사교적이면서 활달했거든. 그 언니의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고, 그런 조카를 보면서 자신의 아이도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사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고,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

=========================

(84)

내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작은 인간 발전기 같은 록산이라는 이름의 두 살 조카를 볼 때면 나는 모성애 덩어리가 된다. 아이를 붙잡아서 껴안고 싶고, 그 자그만 얼굴과 손에 뽀뽀하고 싶다. 두 살 아기들이 즐기는 무한 반복 게임을 몇 시간이고 할 수 있다. (내가 아이를 쫓아서 30번 빙글빙글 돌고, 아이가 나를 쫓아서 30번 빙글빙글 돌고) 아이가 특히나 아이답고 사랑스러운 행동을 할 때면-낮잠을 자려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웠거나, 잠시 낯가림하며 제 아빠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있을 때-심장이 녹아내린다. 홀딱 반하겠네, 나도 아이가 있으면 좋겠어. 나는 생각한다.

=========================

….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글들도 많이 실려 있었단다. 늙어가는 부모님을 보고 드는 생각을 적은 글은 아빠도 많이 했던 생각들이라 공감이 많이 갔단다. 점점 늙고 쇠약해 가는 부모님들. 두 분 중에 먼저 한 분이 돌아가신다면 나머지 한 분께서 잘 생활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그리고는 잘 못해드린 지난 시절들의 생각 말이야.

=========================

(119)

최근에 부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부모님이 전보다 더 늙고 약해지신 듯 보인 적 있는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적 있는가? 젠장,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 혼자 남으면 어쩌지? 아니면 이런 생각.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시면 어쩌지? 아버지가 혼자 생활하실 줄이나 아나?

사람들이 흔히 부모님에게 느끼는 죄책감, 그러니까 당신이 부모에게 좋은 자식이 아니었다는 걱정이 들 때가 있나? 혹은 만약 부모님이 아프실 경우에 당신이 좋은 자식 노릇을 하지 못하리라는 걱정이?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고?

나와 같은 입장이 된 것을 환영한다. 당신이 그동안 누리던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이제 끝난 것이다. 부모님 은혜의 시기란 당신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부모를 걱정할 만큼은 나이가 들지 않은 시기, 그 짧은 기간을 뜻한다.

=========================

지은이 캐럴라인 냅의 부모님들은 일년을 두고 돌아가셨단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캐럴라인의 글들에 애절하게 담겨 있었단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일 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부모님이 떠난 빈 집을 비우는 것에 대해 적은 글은 아빠나 언젠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울컥 하더구나. 사람의 삶이라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힘든 일을 겪게 되는 것 같구나.

=========================

(144-145)

화가였던 어머니의 화실을 비우는 일이 가장 힘든 부분이었던 듯싶다. 화실은 갑자기 끝난 어머니의 인생을 생생히 떠올리게 하는 물리적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죽기 직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탁자와 붓과 페인트는 늘 그랬던 모습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진행 중인 작은 작품들, 스케치와 메모, 콜라주 재료, 색칠된 종이 무더기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그 방이 텅 빈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그것은 잔인하고 부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고, 그래서 나는 겨우 일 분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

외국 작가의 에세이는 그들의 문화와 생각의 차이가 있어서 읽기 어렵거나 읽더라도 공감이 가지 않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 캐럴라인 냅의 글들은 많은 부분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 많아 좋았단다. 아무래도 아빠가 “I”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말이야. 이 책을 추천할 때는 추천 받을 사람의 성향을 연구해보고 추천해야 할 것 같구나. 오늘은 이상.


PS:

책의 첫 문장: 속삭임은 두 주째, 혹은 세 주째 쯤에 시작된다.

책의 끝 문장: 날개가 된 나의 팔, 이것이 바로 해방의 정의라고, 나는 믿는다.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쬐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 있는 것이다. - P19

해석. 물론 이것이 핵심이고, 착각에 이르는 문이다. 수줍어하는 사람들은 과묵함의 망토 뒤에 숨은 채 상대가 스스로 관계에 대해서 품는 두려움이나 편견이나 자기 인식을 투사하는 빈 화면으로 기능한다. 만약 그 상대가(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타인에게 호감을 사고 싶다고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만약 그 상태가 자신이 타인의 기대에 부합하는지 혹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불편함이나 과묵함이 그에게는 자신이 주루해서 그러는 거라고 보일 수 있다. 수줍음은 오해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수줍음을 타는 내 친구 하나는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한다. "침묵은 로르샤흐 테스트야." - P34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의 애정이란 내가 얻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 사랑받으려면 시험을 통과하고, 지적 후프를 뛰어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여겼어. 그러니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깊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내게는 놀라운 일이야. 이것이 네가 내게 준 선물이란다. 네 존재만큼이나 소중한 선물이란다. - P94

이것이 삶임을 깨닫는 데도 긴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모두 나이 들수록 삶이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니라 더 쉬워진다는 신화를 믿으며 자라는데(그리고 이것은 진짜 신화일 뿐이다), 나이 드는 부모의 모습만큼 그 믿음이 사실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것은 많지 않다. 실제로는 우리가 아니 들수록 잃은 것이 많아진다. 점점 더 크고 버거운 과제가 나타난다. 실수를 되돌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 P123

화를 터뜨리는 편이 언제나 효과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화를 내면 반드시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상처가 낫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나쁜 상황이 열을 내면 더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싸움을 잘 고르는 것 못지않게 대상을 잘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정신적으로 치고받을 의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화내는 것이 효과가 있으려면-어느 쪽에게든 생산적이거나 유익하려면-관련된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서로 신뢰해야 한다. 두 사람 모두 괴로운 시기를 견뎌보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노라는 동전의 뒷면은 친밀함일 때가 많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겁나면서도 때로 가치 있는 일인 것은 그 때문이리라. - P3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는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책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의 책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았거든. 그런데 그걸 깨준 이가 있었으니, 올가 토카르추크라는 분이란다. 아빠가 작년에 올가 토카르추크의 제목도 외우기 어려운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거든. 그래서 그 이후에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책들을 몇 권 더 사들였단다.

그 중에 한 권을 이제서야 읽었단다. 제목은 <방랑자들> 그런데 이번에 읽은 <방랑자들>은 작년에 읽은 제목도 외우기 어려운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와는 사뭇 다른 책이로구나. <방랑자들>이 분명 장편소설이라고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줄거리를 종잡을 수 없었어. 왜냐하면 각각의 에피소들이 이어지지 않고 각각의 독립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거든. 그리고 그 형식도 소설의 형식을 띄는 것도 있고, 에세이의 형식을 띠는 것도 있고, 편지 형식도 있고, 심지어 어떤 에피소드는 한 문장으로 된 것도 있단다. 아빠가 책 표지에서 장편소설이라고 본 것이 확실한데도, 다시 책 표지를 확인해 보았단다. 역시나 장편소설이라고 써 있었어.

, 대단한 형식 파괴로구나. 소설의 형식이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이런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묶어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역시 노벨문학상은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니야, 이런 생각도 들었어. 그 많은 에피소들을 관통하는 제목이 바로 방랑자들이란다. 읽다 보면 제목을 여행자들로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많은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여행을 하면서 본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여행을 하면서 느낀 생각들도 이야기하고, 갑자기 방랑과 여행의 차이점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사전을 뒤져보았단다. 간편하게 인터넷 국어사전을 찾아볼 수도 있지만, 종이로 된 국어사전을 펼쳐봤어.

방랑. 갈 곳을 정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 예문 <김삿갓은 전국을 방랑하면서 시를 지었다.>

여행. 이것저것 두루 구경하려고 다른 고장이나 다른 나라에 가는 것. 예문 <삼촌은 혼자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런 차이가 있다고 하는구나.


1.

아무튼 이 책은 장편소설이지만, 줄거리 이야기해주기 참 곤란한 책이라는 거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에세이 같은 글도 있고 편지 형식의 글도 있고 소설의 형식의 글도 있단다. 여행이나 방랑하면 떠오르는 장소인 공항에서 일어나는 일, 기차에서 일어나는 일, 호스텔 같은 숙소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있고, 그런 장소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단다. 그래도 명색이 소설인데 소설 같은 글들도 있단다. 어떤 에피소드들은 단편 또는 중편 소설의 길이의 이야기가 그것이야.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중간중간 에피소드들로 나뉘어서 이야기를 해주기도 한단다.

쿠니츠키라는 남자가 있는데 크로아티아에 여행을 왔다가 아내와 아이를 잃어버리고 경찰과 함께 찾는 이야기가 나온단다. 조그마한 섬이라서 갈 곳도 별로 없는데, 실종이 되어 걱정을 하며 찾는 것으로 에피소드가 일단락된단다. 그리고 한참 뒤쪽에 다른 에피소드에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3일만에 아내와 아이가 안전하게 돌아왔단다. 그런데 그 3일동안 무엇을 했냐고 추궁하기 시작하고 아내가 한 이야기는 믿지 못하고, 강박증과 의심증이 심해졌어. 그리고 아내 몰래 휴가를 쓰고 아내의 뒤를 밟기도 하다가 들통이 나기도 했어. 결국 아내는 아이들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지. 기분 좋아지려고 간 여행이었을 텐데, 최악의 결말이 되었구나.

또 하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줄게. 아누슈카라는 여자가 있었어. 아들 피에티아가 있었는데, 불치병에 걸려서 늘 아누슈카가 보살펴 주어야 했단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피에티라를 보살펴 주셔서 외출을 할 수 있었어. 외출이라고 해봐야 기도하고 장보고 그런 거였지. 그런데 집에 돌아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어. 무작정 떠나고 싶었어. 기차를 타고 아무 곳에나 내리고 또 떠나고 밤이 되면 노숙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며칠이 지난 뒤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단다. 아들을 보살피며 쳇바퀴처럼 살던 아누슈카. 멋진 여행은 아니지만 자신의 영혼에게 잠시 자유를 주었던 멋진 방랑이 아니었을까 싶더구나.

….

신의 구역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어. 주인공은 옛사랑으로부터 메일이 한 통 받았어. 메일을 읽어보자 그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랐어. 그는 불치병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고 했어. 곁에는 누이밖에 없는데, 한번 와 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편지를 받은 주인공은 남편에게 학회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유럽으로 떠났단다. 그 옛사랑을 만나려고... 그렇다고 그 옛사랑과 다시 무엇인가 하려는 것은 아니고 죽음을 앞둔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생각에서였어. 그는 모르핀으로 고통을 참아가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였단다. 삶 자체가 고통이었지. 그는 자신이 편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단다. 주인공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단다.

쇼팽의 심장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단다. 쇼팽이 폴란드 사람이잖니. , 그러고 보니 지은이 올가 토카르추크도 폴란드 사람이구나. 쇼팽이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장례식도 파리에서 했다고 하는구나. 쇼팽이 죽기 전까지 누이 루드비카가 보살펴 주었어. 쇼팽이 죽기 전에 늘 고향이 묻히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대. 그래서 루드비카는 쇼팽이 죽은 뒤에 쇼팽의 심장만 따로 떼어내고 치마 속에 숨겨서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지고 와서 그곳에 매장을 했다는 하는구나. 그래서 쇼팽의 묘지는 파리에 있지만, 쇼팽의 심장은 바르샤바에 묻혀 있다고 하는구나.

….


2.

이 책은 앞서 이야기했지만 에세이 형식의 글도 많다고 했잖아. 그런 에세이들 중에 담긴 글들 중에 좋은 글들을 너희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기도 하구나. 두어 편 소개하면서 오늘 편지는 마칠게.

=======================

(83)

하지만 시간에 대해 나는 의견이 다르다. 모든 여행자의 시간은 수없이 많은 시간이 하나로 모인 결합체다. 그것은 혼돈의 대양 속에서 정리된 시간, 섬과 군도의 시간이다. 기차역의 시계가 만들어 내는 시간, 가는 곳마다 달라지는, 그때그때 약속된 시간이자 자오선의 시간이기에 그 시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간이 사라져 버리고, 먼동이 크기가 무섭게 오후와 저녁의 발소리가 계단에서 들려온다. 그저 잠시 머무는 대도시에서의 빡빡한 시간은 하룻저녁을 송두리째 바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행기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인적 없는 평원의 느긋한 시간이 있다.

=======================

(108)

뭔가를 글로 묘사한다는 건, 그것을 사용한 것과 비슷해서 결국엔 그것을 망가뜨리게 된다. 색깔이 엷어지고 모서리는 닮아서, 글로 적어 놓은 것들은 결국 희미해지고 사라져 버린다. 특히 장소에 관한 글이 그렇다. 여행 안내서들은 침략이나 전염병처럼 지구의 상당 부분을 파괴하고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다양한 언어로 수백만 부를 찍으면서 해당 장소를 속박하고 약화시키고 그 윤곽을 지워 버렸다.

=======================

(346)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공간의 형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모든 곳을 더욱 비좁게 만들고, 더욱 거대하게 만들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세부 항목들은 사라지고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모양을 잃어버리며 쪼그라들어서 불분명해진다. 낮에는 아름답다혹은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들이 밤에는 마치 형태를 잃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가상으로 존재한다. 낮 시간에 드러난 형태의 다양성, 색의 현존, 음영 따위는 전부 헛된 것이 되어 버린다. 대체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


PS:

책의 첫 문장: 나는 서너 살이다.

책의 끝 문장: 어쩌면 우리는 새로 태어날 것이라고. 이번에는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서.


심장. 그 신비는 확실히 밝혀졌다. 주먹 하나 정도 크기의 고르지 못한, 더러운 크림색 덩어리. 칙칙하고 보기 싫은 잿빛이 감도는 크림색, 크게 바로 우리 몸의 색깔이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동차나 벽지를 고른다면, 우리는 절대 그런 색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둠의 색깔이자 내부의 색깔이다. 햇볕이 들지 않고 물질이 낯선 시선으로부터 음습하게 자신을 감추는 내부. 아무것도 과시할 게 없다. 하지만 피가 돌기 시작하면 화려한 치장이 허용된다. 피는 경고이고, 그 붉은빛은 경고의 신호다. 우리를 덮고 있던 조개껍데기가 열리고 세포 조직의 지속성이 깨질 수도 있다는.
실제로 우리 몸의 내부에는 아무런 색깔이 없다. 심장이 원활하게 혈액은 펌프질 할 때 혈액의 색깔은 콧물과 같다.
- P40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인체는 전적으로 신비로운 대상이다. 아무리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완벽하게 아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것을 더욱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해 열심히 유리를 갈면서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엄청나게 어려운 언어를 창조했던 렌즈 연마공 스피노자, 그 철학자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흔히 말하듯 ‘보는 것이 아는 것’이므로. - P3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