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통권 159호 - 2018년 3월~4월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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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또다시 봄이 찾아왔구나. 예전에 봄이라고 하면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이 떠오르지만, 봄이 온다고 하면 미세먼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구나.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식구가 봄을 맞이하여 놀러 가면 미세먼지가 언제나 따라와서 숙소 안에 콕 박히게 만들었잖아. 그래서 올 봄은 아예 놀러 갈 생각을 접었단다. 역시나 시도 때도 없이 미세먼지가 습격하여 화를 돋구는구나. 그래도 최근에는 좀 나아졌지만, 언제 또 습격할 지 모를 일이야. 여름철에 더위에 의한 불쾌지수란 것이 있는데, 이젠 미세먼지로 인한 불쾌지수 또는 울화통지수라는 것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정말 대책이 없는 것인가….

아빠의 어린 시절의 향기로운 봄은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인가. 정말 답답하구나. 봄이 되어서 그런지 이번 녹색평론의 부제는 약간 봄과 비슷한 “농본주의가 세상을 살린다라고 정했단다. 농촌이 살아야 나라도 살고, 농촌이 살아야 미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단다. 이번호에 농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녹생평론에서는 그동안 줄곧 농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단다. 다시 한번 특집으로 정리를 해 준 것 같아 좋았어.

미래에 단 하나의 직업이 남는다고 하면 그것은 농업일 거야. 그런데 그 농업이라는 것은 산업농, 기계농은 아니고 소규모 자작농이 되겠지. 농업을 하라고 해서 무조건 하면 되는 것은 아니란다. 산업농과 기계농 등 대규모 기업형 농사는 오히려 땅을 망치고 지구를 망치고 환경 오염의 주범인 것이야. 산업농 시스템은 엄청난 비효율을 자랑하고 있단다. 그런 비효율성 때문에 비료 사용이 날로 급증하게 되고, 이 비료는 지하수를 먹는 하마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물부족을 부추기게 되고이산화탄소, 메탄 등 온난화 가스의 주범을 배출하게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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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산업농은 단절된 부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식품생산과 인간의 영양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즉각적인 금전적 수익 추구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농민들과 농기업들은 갈수록 옥수수처럼 영양가 낮은 작물의 단일 재배에 집중하고 있다. 옥수수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작물인데, 흔히 영양가 없고 열량만 높은식료품으로 가공된다. 그 결과 1990년에서 2010년 사이에 빈곤지역을 포함해서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불건강한 식생활 패턴이 빠르게 증가했다. 오늘날 비전염성 질환의 대부분이 식사와 관련되어 있는데, 2020년이 되면 그러한 질병이 전세계 사망 원인의 대략 75%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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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럼 대안이 있는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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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단순하게 말해서, 자연 순환의 질서를 깨뜨리고 인간이 마음대로 인위적인 무언가를 하는 게 공업이라고 한다면, 농업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조종하기보다 자연의 순환이라는 큰 틀에 순응해서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또 그 과정에서 부산물을 땅으로 돌려 땅을 비옥하게 하고 자연환경을 더 풍요롭게 만들면서요.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순환의 틀에 순응하면서 산다고 해도 훼손은 되거든요. 자연이 소모가 돼요. 그렇지만 그걸 최소화할 수는 있어요. 그 방법이 유기농업적 삶의 방식이라고 나는 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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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법의 소농이 답이 될 수 있단다. 그런데 작게 농사를 지내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 수 있겠니. 자본주의에서 돈이 없으면 사람 노릇을 못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아빠는 다른 건 모르겠고, 농민들에게는 기본소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그것만이 죽어가는 농업을 살리고, 좀더 많은 사람들이 농업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싶어.

두달 후면 지방선거가 있단다. 이번 광역단체장 중에서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주겠다는 공약을 들고 나오는 후보가 있으면 좋겠구나. 이제, 우리 사회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용어는 많이 익숙해졌잖아. 이제쯤은 나올만한 공약 아니겠니…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이 책에서 생태순환농사, 즉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장길섭씨를 인터뷰한 글을 실었는데, 그 인터뷰를 맺으면서 장길섭씨의 농장을 묘사하는데,, 글쓴이가 이야기한 것처럼 낙원의 모습이 떠오르더구나. 아마 아빠도 마음 한 구석에는 시골에서의 삶을 동경하고 있는 것을 숨길 수 없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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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농장을 둘러보았다. 집 뒤에는 농산물 가공작업을 하는 건물이 있고 안에는 저온창고, 곡물 가루를 찌는 커다란 솥, 제분기, 반죽기, 발효기 등의 설비가 잔뜩 있었다. 거의 모두 선생이 손수 설계하여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뒤편에 강의실 겸 식당, 주방, 숙소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고, 또 그 뒤에 축사가 있었다. 널찍한 축사에는 20여 마리의 암소와 송아지, 돼지 20여 마리, 산양, 닭이 느긋이 어울려 놀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와 보니 잔돌이 많은 넓은 밭이 겨울 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한쪽에선 마늘과 양파가 추위를 피해 비닐을 덮고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 옆에는 작은 비닐하우스 여섯 동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모두 녹비작물로 덮여 있었다. 증폭제를 만들어 보관해둔 상자도 눈에 뜨였다. 5,000여 평 땅에서 이 많은 일을, 선생 내외분의 힘으로 감당해오신 것이다. 이 농장은 선생 가족의 보금자리인 동시에 농업의 가치를 알리는 학교이며, 선생이 이루고자 했던 바로 그 낙원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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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올해가 메이시유신 150주년이라고 하는구나. 다른 나라 역사적인 사건을 뭐 좋은 거라고 이야기하나 싶을 수 있겠지만, 일본이 그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맞이하여 성큼 오른쪽으로 또 나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글들을 실은 것 같구나. 메이지유신 150주년과 요즘 일본 동향에 대한 글은 적은 이유를 알겠더구나. 일본이 점점 우경화되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지. 최근 들어 대동아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구나.

일본의 권력층인 속마음은 변한 것 없이, 그동안 꾹꾹 참고 지냈던 것은 아닌가 싶구나. 그리고 그 속마음을 다시 끄집어 내 행동으로 나타내는데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그런 모략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구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안 하는 일본의 자세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잖니. 1945년 종전조서에도 아시아 민중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언급이 안되었대. 이미 그때부터 사과라는 것은 마음에 없었던 거야. 그들은 종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생각한거야.. 그들은 메이지유신을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자랑질을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제국주의국가의 시작이었고, 그로 인해 아시아 민중들이 오랫동안 고통 속에 살았던 것을 그들은 모른 채 하는 거야. 그럼에도 그들은 메이지유신에 대한 그림자는 보지 않고, 빛만 보려고 하는구나. 그리고 메이지유신의 공로자를 드라마로 제작해서 영웅시 한다고 하는데, 그들의 역사왜곡은 끝이 없어 보이는구나.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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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현재 아베 정권은 단계적으로 현행 평화헌법을 전쟁이 가능한 헌법으로 개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와 아울러  교과서 내용에서도 점진적으로 제국주의시대를 긍정적으로 기술하는 분량을 늘려가고 있다. 또한 국가 틀(헌법)의 개편과 함께 국민들의 제국주의 역사와의 친화를 도모하기 위한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다. 메이지유신 150주년은 그것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일등 공로자인 사이고 다카도리는 평화사절 파견론자로 계속 미화될 것이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일본 공영방송의 대화드라마는 역사의 진실에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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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시한번 탈핵을 이야기를 다루었단다. 탈핵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해. 이번에는 독일의 환경단체 인터뷰를 실었어. 2020년이면 전면적인 탈핵을 하는 독일의 에너지 상황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한가 싶었어. 정상적인 국가와 국민이라면 탈핵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당연한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왜 그렇게 힘든지 모르겠구나.

독일은 탈핵을 대비하여 재생에너지의 비율을 꾸준히 높이고 있대. 2016년에는 31.5%가 재생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대. 재생에너지 중에서는 풍력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바이오, 태양광 순서라고 하는구나. 재생에너지의 초기 설비 비용으로 전기료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하는데, 국민들도 그런 것을 감수하고도 찬성을 한다고 하는구나. 지금 돈이 문제인가? 나의 안전과 건강에 직결되어 있는 문제인데개인이 얼마의 돈을 써서 안전과 건강이 보장된다면, 누구나 돈을 쓸 것이야. 당연한 것 아니겠어.

독일은 어떻게 이렇게 탈핵에 국민 전체가 공감대를 가지게 되었을까? 독일의 핵발전 반대 운동의 역사는 무척 길다고 하는구나. 1970년대부터 이미 반대 토론이 이루어졌어. 그리고 지방자치정치구조이다 보니 거센 지역 주민의 반대가 있으면 주정부는 주민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대. 그리고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영향도 컸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독일은 녹색당이 의회에 상당수 진출하여 탈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는구나. 물론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야. 그들은 기존의 화력발전소와 원전도 아직 가동을 하고 있어. 수출원이기 때문이야. 화력발전소와 원전에서 만들어낸 전기를 주변국가들에게 팔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러다 보니 화력발전소, 원전 등이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있어.. 최근 정치권에서도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입장이라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대. 이런 정치권에 대한 움직임에 대해서는 시민사회의 견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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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탈원전은 이미 역사의 대세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화력발전을 확실히 포기하는 일이다. 원전을 폐쇄해도 갈탄 사용을 중단하지 않고는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독일은 세계 갈탄 소비 국가이고, 대형 전력회사들과 지자체들이 관련되어 있어 탈석탄은 쉽지 않다. 독일에는 이미 폐쇄된 원전들이 있는데, 해당 지역에 그와 연계된 일자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발전소 폐쇄가 지역경제에 실질적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갈탄은 다르다. 게다가 이 지역들은 구조적으로 취약하며 높은 실업률과 인구 감소까지 겪고 있다. 따라서 갈탄산업을 대체하려면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주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주에 대해서는 연방정부의 지원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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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이런 모습을 하면서, 부럽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우리나라는 언제쯤 국민들이 원전의 고위험성과 고비용에 대해 이해를 할까. 탄핵촛불처럼 탈핵촛불이 타오를 수는 없는 것일까.

4.

문학평론가 이명원 씨와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씨가 나눈 대담을 실었는데, 문재인 정부를 동학농민전쟁 이후 최초의 민주정부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기대를 하는 것 같았어. 아빠도 물론 기대를 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시스템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은 경우도 있을 거라 생각해.. 그런 것은 이해해 주어야지. 그리고 이왕이면 대한민국 시스템을 좀 바꿨으면 좋겠는데딴지 거는 이들이 오늘도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데, 정말 꼴보기 싫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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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문재인 정부는 단지 양심적인 진보파 정부라는 자기인식을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동학농민전쟁 이후 최초로 성립된 민주정부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사실 김대중 정부도 군사독재세력(김종필)과 연합함으로써 가능했고, 노무현 정부의 출현 역시 재벌세력(정몽준)과 어느 정도 손을 잡은 결과였다. 그래서 결국, 정권 탄생 시의 근본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이명박이라는 희대의 사기꾼과 박근혜라는 극단적으로 아둔하고 무책임한 인물에게 정권을 내주는 참사가 빚어졌던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 등은 물론 군사독재와 오랫동안 싸워왔던 민주화 투사들이 집권하여 정부를 운영한 정권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최초이다. 이 사실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이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요소요소에 최고의 인재들을 등용하여, 사생결단을 한다는 각오로 온갖 부패, 비리, 부조리에 구조를 혁파하고, 역사의 진로를 용기 있게 개척해야 한다. 그런 안목과 결연한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텐데, 좀더 두고 볼 일이지만, 실은 걱정이 많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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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에 소개된 서평들도 읽고 싶은 충동을 주는 책들이 실려 있었단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도 읽고 싶고, 이육사 시인과 그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강철로 된 무지개>도 꼭 읽어보고 있었어. 그 밖에 <시의 눈, 벌레의 눈>이라는 책과 기본소득에 관한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란 책도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올려놓았단다.


(21)

단순하게 말해서, 자연 순환의 질서를 깨뜨리고 인간이 마음대로 인위적인 무언가를 하는 게 공업이라고 한다면, 농업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조종하기보다 자연의 순환이라는 큰 틀에 순응해서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또 그 과정에서 부산물을 땅으로 돌려 땅을 비옥하게 하고 자연환경을 더 풍요롭게 만들면서요.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순환의 틀에 순응하면서 산다고 해도 훼손은 되거든요. 자연이 소모가 돼요. 그렇지만 그걸 최소화할 수는 있어요. 그 방법이 유기농업적 삶의 방식이라고 나는 보는 것이죠.

(102)

역사를 사람들의 주체적 선택의 누적으로 봐야, 역사의 실패도 잘못도 반성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우리가 자립성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과 표리의 관계에 있다. 그러한 자립한 자각적 주체성의 결여야말로 전쟁이라는 비참한 사태를 초래한 원인이 아니었던가. 모든 것을 시세나 대세에 맡기고 책임을 방기하는 태도야말로 사대주의이고,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이다.

(148)

탈원전은 이미 역사의 대세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화력발전을 확실히 포기하는 일이다. 원전을 폐쇄해도 갈탄 사용을 중단하지 않고는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독일은 세계 갈탄 소비 국가이고, 대형 전력회사들과 지자체들이 관련되어 있어 탈석탄은 쉽지 않다. 독일에는 이미 폐쇄된 원전들이 있는데, 해당 지역에 그와 연계된 일자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발전소 폐쇄가 지역경제에 실질적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갈탄은 다르다. 게다가 이 지역들은 구조적으로 취약하며 높은 실업률과 인구 감소까지 겪고 있다. 따라서 갈탄산업을 대체하려면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주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주에 대해서는 연방정부의 지원도 고려해야 한다.

(174)

예를 들어, 당장 개헌문제만 해도 그렇다. 지금의 국회에서는 결코 정당한 개헌안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다음 선거에서의 재선이다. 선거법을 개정하고 헌법을 보다 민주적으로 고쳐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이다. 게다가 자기들의 재선 가능성을 줄이거나 특권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선거법 개정은 절대로 용납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개헌이나 선거법 개정도 지난번 원전문제를 처리할 때처럼 공론조사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다. 실은 최근에 몽골에서도 헌법을 개정하면서 공론조사 방법을 채택했다고 한다.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시민들이 나서서 이를 관철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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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2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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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 그럼 <세여자> 2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1권의 줄거리는 다시 안 해도 되지?

..

고명자는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고, 옛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를 소리를 듣고, 남은 가족들과 멀어지면서 혼자 외롭게 지내게 되었어. 경찰들은 계속 감시를 하면서도 전향을 했다면서 왜 아무것도 안 하느냐고 다그쳤어. 옛 동료들을 찾아가 회유하라고 협박까지 했어. 그 와중에 단야가 국내에 잠입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 헛소문단야는 이미 모스크바에서 누명을 쓰고 죽었잖아. 단야만 생각하고 있던 명자는 그 소문을 듣고 알아보려고 했지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 무작정 나라밖으로 갈 생각에 신의주로 향했다가 사기만 당하고 빈털터리로 다시 경성으로 왔어.

그렇게 외롭게 지내던 명자에게 옛 동지 박희도와 김한경이 찾아왔어. 잡지사동양지광에서 같이 나와서 일하자고 했어. 명자와 같은 지식인 여성이 필요하다고 했지. 명자는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어. 답변을 안 하자 경찰까지 찾아와서 협박을 했어. 다시 감옥을 갈래? 동양지광에 출근할래? 결국 명자는 동양지광에 기자로 취직을 했어. 명자가 망설였던 이유는 그곳은 친일잡지를 만들던 곳이었어. 조선인들을 회유하고, 전쟁에 자연하라는 내용이었지. 그리고 그곳에서는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 명자는 다들 어쩔 수 없이 강압에 의해 전향한 척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었어. 다들 철저한 황국신민이 되어 있었어. 또 한번 크게 실망.

고명자는 기자 일만 했던 것은 아니야.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어. 박헌영, 여운형을 회유해라…. 이걸 어떻게 하겠니.. 이런저런 핑계로 미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양지광은 휴간을 했어. 다시 고독하고 우울한 시간들.. 멀리서 들려온 정숙의 소식.. 조선의용군에 들어갔다고비록 전쟁터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겠지만.. 고독하고 외로움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거야.


1.

1945 8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너무나 갑작스러운명자는 해방되기 얼마 전부터 여운형의 연락을 받고 건국동맹비밀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어. 그리고 해방 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여운형은 명자가 전향했던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견딜 만큼 견디고 나서 어쩔 수 없는 전향이라고 이해해 주었어. 해방이 된 조선땅에 소련과 미국이 진군한다는 소식은 모든 백성들에게 좌절을 심어주게 되었단다. 죄는 일본이 지었는데, 벌은 조선이 받는 기분이랄까

.

연안에 있던 정숙도 일본의 패전 소식과 항복 소식을 들었어. 조선의용군들은 모여서 경성 귀환에 대한 회의를 했어. 그동안 정숙은 창익과 다시 이혼을 하고 동지로 남았단다. 그들에게 소련과 미국의 분할점령 소식이 전해졌어. 다들 이해가 가지 않는 움직임이었지. 정숙을 비롯한 조선의용군은 평양으로 가기로 했어. 남쪽은 반공주의로 똘똘 뭉친 미국이 들어와 있다고 하잖아. 북쪽은 공산주의 혁명으로 성공한 소련이 와 있으니, 비록 고향은 서울이지만, 정숙은 평양행이 맞다고 생각했어.

행군으로 신의주를 거쳐 국내로 들어왔단다. 그들을 반기는 환영인파는 기대도 안 했을지 몰라. 하지만, 무장 해제 당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 심사까지 했을 때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평양에서도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어. 소련이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 대위를 앞세우고 있다는 소식이었어. 항일 투쟁에 있어 큰 성과를 내지 못했던 김일성이 갑자기 나서게 되니 다른 이들은 그리 좋게 보지는 않았어.

그 와중에 거기에 죽은 줄 알고 있었던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있다는 소식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지. 평양에 도착한 정숙과 조선의용군은 김일성과 만났어. 생각보다 김일성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어. 호감이 갔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도 해방 소식을 들었단다. 세죽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대를 잠시 했지만, 길이 보이질 않았어.. 길이세죽은 딸 영이, 아니 이제 러시아 이름이 더 익숙한 비비안나와 점점 멀어졌어.


2.

명자는 여운형 아래에서 일을 했지만, 미군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어.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5년간 신탁 통치를 한다고 결정했는데, 이후에는 전국이 반탁과 친탁으로 갈리게 되었어. 이때 반탁이었던 박헌영과 공산당은 친탁으로 돌아서자, 남한에서는 거의 매장 분위기였단다. 결국 박헌영은 북한으로 향했어. 남북을 초월했던 조선공산당을 창건하고 이끌던 박헌영이 북한에 오자, 대단한 환영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 하지만 북한의 일인자는 젊은 김일성이었어. 박헌영이 설 자리는 김일성의 옆자리였지.

.

명자는 해방을 했으니 단야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틈나는 대로 서울역에 나가보곤 했단다. 그런 명자를 보기가 안쓰러워 여운형은 사람을 시켜서 단야의 소식을 알아냈단다. 단야는 이미 10년 전에 죽었다고 했어. 더 이상은 알려 하지 말라고 했어. 더 이상이라 함은 죽기 전에 단야가 세죽과 재혼했다는 것이겠지. 명자가 얼마나 실망하겠어. 그동안 단야만 믿고 버텨왔는데…. 여운형은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윤동명이라는 사람을 명자에게 소개시켜 주었어. 고명자는 윤동명과 재혼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비극 하나자신을 그렇게 잘 봐주고 지원해주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한 거야. 그 시절은 그런 시절이었어. 일본의 총칼도 수십 년 생명을 앗아가지 못했는데, 같은 민족에 의해 죽는 사건들.. 정말 비참하고 슬픈 일들이구나.

한편, 정숙은 몇몇 불만들이 있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소비에트 국가 만들기에 협조하기로 했어. 김일성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야.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도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어. 김일성파, 연안에서 온 연안파, 남쪽에서 올라온 조선공선당파, 소련파 등등…. 계속되는 분파들의 갈등들김일성에 대한 불만을 가진 이들도 많았어.

.

정숙은 뜻밖의 소식을 들었어. 세죽의 소식을 들은 거야. 세죽이 유형지에서 남편 박헌영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에게 보내달라는 요청 문서를 보내온 것이야박헌영이 오케이만 하면 세죽은 평양으로 올 수 있었어. 하지만 박헌영은 냉담하게도 거절을 했단다. 세죽의 처지 좀 생각해 주지세죽은 남편 박헌영이 죽은 줄 알고 있었고, 상황이 단야와 재혼하게 만들었고, 단야와 고작 3년 생활을 하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유형 생활을 7년이나 하고 있으니책을 읽는 아빠가 다 억울하더구나. 속 좁은 박헌영어찌 인민을 보살피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변한 것이냐…. 심지어 모스크바에 와서 딸까지 만났었는데, 세죽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박헌영, 너는 이미 변절한 사람이도다. 세죽이 불쌍하지도 않단 말이야. 세죽이 잘못한 게 뭐 있단 말이야. 이 속좁은 인간아.

명자는 남부연석회의의 남한대표 중 한 명으로 평양을 가게 되었어. 평양에서 정숙을 만나고 정숙을 통해 충격소식을 들었어. 단야와 세죽이 재혼했다는 소식그리고 세죽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자유 연애를 하는 정숙에게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단야 한 사람만 믿고 십 년 넘게 기다린 명자에게는…. 뒤늦은 심한 배신감…. 정숙은 명자에서 평양에 남아달라고 했지만, 명자는 서울을 선택하게 된단다.

비비안나는 무용수로 유명해져서 평양까지 공연을 하러 왔단다 평양에 있으면서 아버지인 박헌영도 만나고 허정숙도 만났어.

..


3.

1949년에서 50, 평양은 전쟁을 통한 남조선을 해방하는 의견들이 많았어. 정숙은 한 민족끼리 전쟁은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지만, 대세는 전쟁으로 기울었단다. 참 안타깝구나. 일제의 지옥에서 벗어난 지 채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이번에는 같은 민족끼리 전쟁이라니..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이 없었던 말인가.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게 전쟁의 불가피함을 설득해야 했어. 정숙은 모택동과 인연이 있어서 모택동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어. 중국은 개입을 안하겠다, 하더라도 미국이 먼저 개입하게 되면 하겠다고 했어. 그리고 1950 6 25일 전쟁이 시작되었어.

전쟁 직전 서울은 공산주의가 불법으로 되어 있었어. 공산주의자들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어. 명자도 도망 중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하고 있었어. 그 와중에 전쟁이 일어났어. 이때 남한은 후퇴하면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이들을 많이 죽였는데, 김삼룡, 이주하 등이 이때 처형되었다고 하는구나. 다행히 명자는 다시 풀려났어.

북한군의 진군을 본 명자는 마치 해방 때의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명자가 일했던 근로인민당 사무실에 다시 출근을 했어. 하지만, 노동당은 근로인민당이 중도 성향을 띠고 있어서 인정하지 않았고, 명자는 친일 활동을 했던 근거를 들어 전향서를 쓰라는 명령을 받았어.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이니…. 해방이라고 느꼈던 명자가 며칠 만에 다시 수감되어 며칠 동안 전향서를 쓰고 나서야 집으로 올 수 있었어. 집에 먹을 것도 없어서 굶주리는 날이 많았고, 당의 명령으로 툭하면 사역을 하러 나갔어. 결국 명자는 병에 걸려 외롭고 쓸쓸하게 죽고 말았단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면서, 북한군은 압록강까지 밀려났단다. 그러자 전쟁의 실패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기 시작했어. 전쟁이야 최고 지도자의 책임이지 뭐 볼 게 있겠니. 다만, 그에게 니 책임이다 물러나라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게 문제지. 그러다 보니 그 밑에 어떤 사람한테 덮어 씌울까 그걸 고민하게 된 거야. 결국 3여 년에 걸친 전쟁은 남북을 둘로 그대로 유지된 채 끝나고 말았어. 전쟁을 왜 한 건지

전쟁이 끝나고 북한에서는 다시 책임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수상인 김일성은 이걸 이용해서 반대파를 제거해 나갔단다. 빨치산파, 남로당파, 연안파를 차례대로 숙청했어. 박헌영은 미국 스파이로 몰려 사형을 당했어. 문화선정상이었던 허정숙은 이런 사태를 일어나지 않게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어. 그리고 자신도 연안파였잖아. 결국 허정숙은 생존을 위한 선택들을 했단다. 허정숙도 잠시 연안파 숙청 때 감옥에 가기도 했지만, 가족까지 끌어들인 협박에 결국 김일성 편에 서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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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던 세죽비비안나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모스크바에 왔어. 비비안나가 결혼하면서 비비안나도 조금씩 엄마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어. 1953년 전쟁이 끝나고도 여전히 세죽은 크질오르다에 있었어. 그곳에서 신문을 통해 박헌영의 체포 소식을 들었어. 비비안나가 걱정이 되었어. 당시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족도 벌을 받는 연좌제가 당연시되었거든..

비비안나가 걱정이 된 세죽은 모스크바로 향했어. 당시 공포 정치를 벌였던 스탈린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모스크바를 가득 메우고 있었거든하지만 모스크바 가는 길은 쉽지 않았어. 이제 나이도 있으니…. 가는 길에 세죽은 폐결핵에 걸려 위중한 상태로 모스크바에 도착했어. 딸 비비안나는 지방 공연 중으로 없었고, 사위 빅토르가 보살펴주었어. 곧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그만 죽고 말았단다. 다음날 비비안나가 도착을 해서 엄마의 임종을 보지도 못했어.

세죽의 죽음의 여정을 읽을 때 아빠도 눈시울이 붉어졌단다. 이것이 단지 허구가 아니라서 더욱 그랬던 것 같아. 자신의 열정으로 삶을 살았지만, 결국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니너무 가슴이 아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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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중에 생존한 이는 이제 정숙 하나뿐이구나. 정숙은 숙청의 바람에서 살았고, 1980년대까지도 북한에서 여러 중요 요직을 맡아서 활동을 했다는구나. 그리고 1991년 눈을 감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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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이 소설을 가슴 아프지만 재미있게 읽었단다. 지은이 조선희라는 분은 처음 알게 된 분인데, 이 분이 쓰신 다른 책들도 한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중간이 공직의 일을 맡는 바람에 소설을 쓰는데 12년이나 걸렸다고 했는데, 이런 소설을 써 주셔서 정말 고맙더구나. 직접 전할 길은 없으니, 아빠는 이 책을 주변 사람들한테 추천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전달하기로 했단다.

이 책을 읽으면서 10여 년 전 보았던 드라마 <1945>가 많이 생각이 났고, 태백산맥, 아리랑 등 조정래 선생님의 소설들도 생각이 나고, 이 책에 등장한 위인들의 평전들도 많이 생각이 났단다. 무엇보다 세 여자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이 세 분을 알게 되어 좋았고, 그들의 이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더구나. 그들이 지금은 하늘에서 다시 만나, 화해를 하고 책 표지에 나와 있는 모습으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174)
815 해방 당시 조선에 관한 한 루즈벨트는 스탈린보다 무지했고, 미국 정부는 아시아보다 유럽에 관심 있었고,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는 조선보다는 일본에 몰두했으며, 군정책임자인 하지 중장은 한국엔 처음이었다. 하지는 어느 정파가 자신의 우군인지, 이 난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정치지도자가 누구인지 헷갈렸다. 미군정이 남로당을 불법화시키는 한편 이승만, 김구 같은 극우로도 복잡한 한국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달한 끝에 그 중간 지대의 여운형과 김규식을 자신의 파트너로 찍었을 때 여운형이 암살돼버렸다.

분할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단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면 그건 여운형이었을 것이다.

(282)
세죽에겐 함흥에서 어린 시절부터 늘 그랬다. 사는 건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다. 겨울이면 춥고 배고프고 여름이면 덥고 배고팠다. 게다가 고향도 조국도 잃고 남편을 두 번 잃고 아들도 잃고 낯선 나라에서 유형수로 홀로 늙어가다니, 상상도 못 한 불운이 끝없이 밀려왔다. 남편이 감옥에서 고문당해 미치면서 마음자리가 한 번 깨지고 난 이후론 밑 빠진 독처럼 행복이 고이질 않았다. 사랑이 두려웠고 희망은 슬펐다. 단야와의 결혼생활도 언제 깨질지 몰라 늘 불안했고 결과는 걱정한 대로였다. 어쩌면 그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건 신혼의 훈정동 시절인지 모른다. 좁은 방에서 버글버글한 객식구들에 시달리며 끼니 걱정하고 밥해대느라 손이 마를 날 없었던 시절을 생각하자 세죽은 슬며시 웃음이 나면서 마음이 따스해졌다.

(297-298)
그녀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내 나이 오십, 귀찮은 것이 많아지는 나이로구나. 아니, 사람에 대한, 사람들 집단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버린 것 아닌가. 누가 잡든 권력의 속성은 똑같다는 생각, 어느 개인이 더 현명하든 덜 현명하든 집단이 되면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렇다면 권력을 포식한 집단이 권력에 굶주린 집단보다 낫지 않을까. 굶주린 이리떼보다 배부른 사자 떼가 낫지 않을까. 이건 가장 저급하고 비겁한 보수주의자의 사고방식인데 자신의 어느 결에 이토록 회의주의자가 되었던가, 하고 정숙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 한때 태산도 옮길 것 같았던 그 믿음이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349-350)
북조선도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토지개혁도 근사했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그 사상 위에 정부를 세우는 일을 해보았으니 행운이었다. 권력이라는 것도 누려보았다. 그녀는 남자들이 그것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팔자를 고쳐줄 수 있는 힘, 싫어하는 사람을 나락에 떨어뜨릴 수 있는 힘이 권력이다. 권력은 권력자로 하여금 그것이 그대로 자신의 인격이라 믿게 만든다. 또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권력은 자아도취에 빠지게 만들고 그 마력이란 때로 목숨과 바꿀 만큼 강력하다. 그녀도 권력의 맛을 보았다. 하지만 이상한 게 묻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 그녀는 땅에 떨어져서 흙이 묻어 있는 것도, 똥이 묻어 있는 것도, 그게 권력이라면 털지도 않고 주워 먹는 남자들을 많이 보았다.

(371-372)
1848년 팸플릿에서 시작된 19세기의 이론은 20세기에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투쟁으로 전개됐지만 세기가 바뀌기 전에 종료되었다. 한반도 북쪽의 소비에트 실험은 일찍이 공산주의 트랙에서 튕겨나와 해괴한 파시즘으로 가버렸다. 21세기로 넘어와서 마르크스주의는 체제나 혁명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태도와 정책의 문제로 남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경합의 시대에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르크스 이론과 레닌의 혁명은 그들을 추종한 공산주의 세계를 행복하게 만드는 대신 반대편의 자본주의의 세계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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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이야기 해줄 책은 <세 여자> 1권이란다. 모두 두 권짜리야. 작년에 신간소개에서 알게 된 책이야.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세 명의 여자 이야기라고만 정말 대충 알고 있던 책이야. 아빠는 일제시대에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아.. 특히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욱 관심이 가. 아빠가 어른이 되어 책들을 읽어보니, 학창 시절에 배웠던 위인들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더욱 그런 것 같아.

남북으로 갈라진 것은 국토만이 아니었고, 이념은 더 깊게 갈라져 버렸고, 남한과 이념이 달랐던 독립운동가들은 교과서에서 완전히 빠져버렸거든학교에서 배운 것은 잘해야 절반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지금 생각해보니, 이제서라도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것이,  그들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기억해 주는 것이 그들로 인해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종의 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졌던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의 삶이 다들 너무 극적이었어.

이번에 읽은 세 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도 실화로 하기에는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였단다.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그들은 모두 부잣집 규수로 태어나 시대에 부응하며 편하게 살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들은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았단다. 이 소설의 부제가 “20세기의 봄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들은 여름의 뜨거운 태양보다 더 뜨거운 젊음을 보냈어. 책 표지에 젊고 아름다운 세 여인이 냇가에 발을 담그고 있는 빛 바랜 사진이 하나 있어. 저 사진을 찍을 당시에 그들은 그들의 미래를 알고 있었을까? 그 사진을 찍을 당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어. 그들은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자신의 꿈을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 그럼 그들의 이야기를 해줄게

1.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삼일 운동을 이끌었던 민족대표 33. 그 중에 인권변호사로 일했던 허헌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 허헌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의 이름은 허정숙. 허정숙은 신여성이었어.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었어. 그래서 일본에 유학을 갔었는데, 그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삼일운동이 일어난 거야. 일본에 있던 허정숙은 그런 일이 있어났는지도 몰랐어. 나중에 방학 때 집에 왔을 때 그 소식을 접하고 나서 나라를 잃었는데, 편하게 공부나 하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일본이 아닌 상해로 가겠다고 했어.

아무리 의식 있는 아버지였지만, 딸 혼자서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겠니. 유학을 일본으로 가지 않으려면 안전한 미국으로 가라고 했어. 허정숙은 아버지를 속이고 무조건 상해로 갔어. 상해에 도착한 다음에야 상해에 도착했다고 소식을 보냈어. 상해에서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어 안면이 있던 이동휘를 무작정 찾아갔어. 당시 상해는 조그마한 지구라고 할 수 있었고, 식민지 조선의 망명객들이 많이 모여들 곳이었어. 1920년대 상해를 좀더 자세히 설명한 글이 소설 속에 있어 발췌해 보았단다. 아래 글을 읽어보면 당시 상해의 모습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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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1920년의 상해는 나이 스물의 식민지 청년들이 자유와 해방의 공기에 한껏 들뜰 만한 도시였다. 퇴폐와 향락의 도시였지만 동시에 사상과 문화의 별천지였다. 동양이면서 서양이었고 중국이면서 유럽이었다. 근대식 석조건물들이 아스팔트 대로를 따라 즐비했고 프랑스조계에는 식민지 베트남 남자들이 순사복 차림으로 경계를 섰고 영국조계에는 터번을 두른 인도 순사가 돌아다녔다. 또한 백주대낮에 조폭집단 청홍방이 사제폭탄으로 빌딩 하나를 날려버리기도 하고 밤마다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암살사건이 일어났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금시계를 찬 신사 숙녀들이 백화점과 오락관을 드나드는 번화한 거리 뒷골목에선 아편굴이 번창했고 식민지 조선의 망명객들이 개미굴 같은 하숙들을 얻어놓고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프랑스조계는 거리나 상점, 학교에서도 영어나 불어를 썼다. 점원이나 인력거꾼, 하인 들만이 중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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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허정숙은 사회주의 연구소에서 사회주의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주세죽이라는 조선 여자를 만났어. 주세죽은 상해로 음악을 공부하러 왔다가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어. 허정숙은 조선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박헌영을 상해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박헌영과 주세죽을 서로 인사시켜 주었는데, 박헌영과 주세죽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 정숙은 박헌영의 동료 임원근과 교제를 하였단다.

상해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잖아. 그중에는 김단야라는 사람도 있었어.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그들은 모두 1900년생 동갑이었고, 모두 공산주의자였어. 그렇다 보니 자주 어울렸어. 거기에 주세죽, 허정숙도 함께 했지. 상해에서 박헌영과 주세죽은 결혼을 했고, 주례는 여운형이 했어. 당시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은 러시아 공산당으로 독립자금을 받곤 했단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본보기로 생각했단다. 러시아 혁명이야 말로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봉건군주제를 무너뜨린, 진정한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공산당 내부에 여러 당파가 있는 것이 문제였어. 그들 당파간의 내분이 골칫거리였고, 공산당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임시정부와 갈등도 있었어. 나라 잃은 사람들이 이것저것 너무 많이 따지는 것 같구나.

2.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는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공산당을 창건하려고 했으나 잠입하다가 잡혀 형무소에 2년 동안 갇혀 있다가 나왔어. 허정숙과 주세죽도 국내로 와서 여성동우회 활동을 했어. 그리고 연인 관계에 있던 허정숙과 임원근은 결혼을 했단다. 정숙과 세죽이 여성동우회를 참여하면서 고명자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어.

고명자의 아버지는 판사로써 부잣집이었어. 어린 시절 집안에서 점지한 혼처도 있지만, 그런 결혼은 죽기보다 싫다고 했어. 정숙과 세죽을 통해 김단야를 알게 된 고명자는 사랑에 빠지고 둘은 연인 관계가 되었단다. 주세죽과 박헌영. 허정숙과 임원근. 고명자와 김단야. 당시 그들은 뜨거운 젊은이들이었어. 그들이 오늘날에 만났다면 알콩달콩 예쁜 사랑을 하였겠지만, 당시 시대는 그들은 그냥 두지 않았어. 그들 또한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었어.주세죽과 박헌영은 결혼한 사이지만, 혁명을 위해서 아기도 뒤로 미루어 두었어.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는 생계를 위해서 기자 일을 시작했어. 박헌영과 임원근은 동아일보 기자, 김단야는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어. 그리고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건을 준비했지. 드디어 1925 4 17일 경성의 어느 한 중국집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했고, 다음날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박헌영의 집에서 만들었어. 당시 박헌영과 주세죽의 신혼집은 손님으로 늘 가득 찼고, 늘 토론과 회의를 했고, 주세죽은 그들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어.

조봉암이 모스크바에 조선공산당 창당을 보고하러 가기로 했는데 책임비서로 박헌영이 동행했고, 주세죽도 일행에 포함되어 모스크바에 다녀 왔어. 그런데, 얼마 안되어 일본은 공산주의를 불법으로 규정하였고, 조선공산당은 불법단체가 되었어.

허정숙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신여성>이라는 잡지의 편집장 일을 하게 되었어. 그리고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단발 머리로 자르고 단발특집호를 내기도 했어. 그 잡지에 실린 사진이 바로 이 책의 표지로 뽑은 사진이란다. 세 여자 중에 허정숙은 다른 여자와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생각이야. 결혼을 하고 나서도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오늘날 여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야. 정숙은 그래서 결혼 후에도 다른 남자와 데이트도 했어.

정숙은 자신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을 하지만, 공산주의를 하는 남자들이 파벌싸움을 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단다. 박헌영은 정숙의 소비와 자유연애 등을 보고 공산주의자라 인정을 하지 않았어. 허정숙과 박헌영은 자주 말다툼을 하곤 했지..

고명자는 김단야의 추천으로 코민테른 후원으로 모스크바 유학 길을 떠나기로 했어. 집에서는 난리 났고, 고명자는 내심 김단야와 함께 가길 원했지만, 김단야는 국내에 남았어.

3.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본이 공산주의를 불법으로 규정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조선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있었어. 1925 11월 제 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임원근, 허정숙, 박헌영, 주세죽 모두 잡혀 들어가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되었어. 허정숙은 허정숙의 아버지가 손을 써서 풀려 나왔어. 고향에 있다가 체포를 피한 김단야는 그들의 체포 소식을 접하고 조선을 탈출했어. 주세죽은 갇힌 지 한 달 만에 풀려나 경성으로 왔어.

허정숙과 임원근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이의 아버지는 임원근이 아니라는 소문도 돌았대. 허정숙의 아버지 하헌은 세상의 정세를 파악하고 공부하고 위해 세계일주를 계획했어. 허헌이라는 분도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구나. 그 당시에 세계일주 할 생각을 하다니허정숙이 스케일이 크고 생각이 트여 있는 것은 아버지의 피를 받은 것 같구나. 그런데 허헌은 한술 더 떴어. 허정숙에게 미국 유학을 가라고 한 것이야. 자신과 함께 미국에 갔다가 자신은 세계 일주를 하고 정숙에게는 그곳에서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지. 허정숙은 흔쾌히 좋다고 했어. 이 일로 세죽과 잠시 트러블도 있었단다.

나라 꼴이 이렇고 공산당 재건이라는 큰 일을 두고 자본주의 국가 미국으로 유학이라니세죽은 정숙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 허정숙은 콜롬비아 대학에 다니게 되었단다. 1926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 일의 여파로 공산당 탄압이 다시 한번 있었는데, 이것을 제 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라고 부른단다. 이때 세죽은 또 유치장에 갇혔다가 한 달에 풀려났어. 2차 조선공산당 사건은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허헌 등이 변호사로 변호를 했어.

박헌영는 극심한 고문으로 폐인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어. 그렇게 병보석으로 풀려나게 되었어. 미국 유학 중이었던 허정숙도 국내소식을 접하고 1년 반 만에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어. 세죽과 화해도 했어. 한편 김단야는 상해를 거쳐 모스크바에 들어가서 명자와 재회를 했단다.

헌영은 병보석 상태였는데, 몰래 세죽과 함께 모스크바로 도망을 갔단다. 당시 세죽은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모스크바를 가는 길에 아이를 낳았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들은 명자, 단야와도 재회했어. 그리고 헌영과 세죽은 모스크바에서 요양도 하면서 공부도 했어.

처음 느껴보는 행복.. 단란한 가족헌영과 세죽은 딸의 이름을 영이라고 지었어. 그리고 헌영은 모스크바에서 조선공산당 대표로 활동을 했어. 당시 러시아는 권력 투쟁이 한창이었어. 레닌이 죽고 나서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는데 레닌과 성향이 비슷했던 트로츠키는 국외로 추방되었고 스탈린은 일인 지배 체제를 만들어갔어.

명자와 단야는 잇달아 국내로 들어왔어. 당시 국내는 신간회 활동이 활동하였고 여자들의 조식은 근우회가 있었는데, 근우회는 여성운동과 계몽운동에 앞장섰어... 한편 정숙은 임원근과 이혼을 하고 송봉우와 재혼을 했단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숙은 연애만큼은 자유주의자였잖아. 임원근과 이혼은 했지만 옥살이 뒷바라지는 계속 했고, 동지로써 관계도 유지했어. 정숙도 근우회에 활동을 했어.

단야의 귀국 소식이 일본경찰에 알려지면서 다시 압박이 왔고 단야는 다시 러시아로 가기로 했어. 아빠는 이때 명자도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사랑하는 사이인데 말이야. 그렇다고 조선이 안전한 곳도 아니고 말이야. 명자도 그러고 싶었지만... 단야는 홀로 갔어. 그리고 얼마 뒤 명자는 감옥에 갔다가 풀려났어.

명자의 엄마는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명자를 반 강제로 고향으로 데리고 갔지. 그리고 나중에 서울에 다시 왔다가 메이데이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 끝에 풀려났어. 이후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명자가 전향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아무도 명자에게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어.

정숙은 송봉우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가 아이를 낳는다고 가석방되었고, 아이를 낳은 후에 다시 감옥에 갔어. 아버지 허헌도 감옥을 수감되었고, 그러다가 1932년 허헌과 허정숙 모두 출감을 했단다. 그때는 이미 신간회와 근우회는 모두 해산되고 없어진 뒤였단다. 암흑의 시절이었지.

4.

한편, 러시아에서 공부를 마친 헌영과 세죽은 상해로 돌아왔어.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 공산당 재건이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어. 네 살이 된 딸 영이는 모스크바 보육원에 맡겨둔 채였어. 그들은 상해에서 중국인 부부 행세를 했어. 당시 상해는 그들이 마지막 상해를 떠났던 십 년 전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어. 이제 상해는 일본의 손아귀 안에 있었어. 살벌한 분위기였지.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의 홍구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의거이라는 쾌거도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던 것이었고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는 행동반경을 좁게 만들었단다.

러시아로 가려던 단야도 상해에 머물고 있어서 그들과 재회하기도 했어. 그런데, 결국 헌영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어. 당시 상해에 많은 조선인들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끌려갔어. 세죽은 더 이상 상해에 있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갔어. 이때 단야와 함께 갔는데, 안전을 위해서 둘은 중국인 부부 행세를 하였단다.

그리고 모스크바를 떠난 지 이 년 만에 도착을 하였어. 딸 영이는 세죽을 기억하지 못했어. 한국말도 다 잊고 러시아말로만 이야기를 했어. 그것을 보고 세죽은 어찌나 가슴 아파했는지 몰라. 남편 헌영은 조선으로 끌려가고, 남편 친구와 도망을 위해 위장 부부 행세를 하고, 어린 딸은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공산주의고 뭐고, 이상국가 건설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싶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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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287)

세죽은 벤치에 앉아 함흥에서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가장 그리운 건 조선의 봄이었다. 조선의 봄은 따스했다. 세죽은 동네 아이들과 나물 캔다고 마구니 들고 들판과 야산을 쏘다녔다. 6년 전 함흥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뵈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산만 한 배를 부둥켜안고 성치 않은 남편과 서로를 부축하면 집을 떠날 때 어머니는그래, 어여 멀리멀리 가거라라고 오른손을 휘휘 저으면서 왼손으로 옷고름을 쥐고 눈물을 찍어냈다. 올해 일흔여섯인데 생전에 어머니를 다시 뵐 수나 있을까. 남편은 지금 어찌하고 있을까. 멀쩡할까 미쳤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딸은 아직 그녀를 엄마로 부르지 않는다. 아이는 보육교사를 엄마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인생은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 세상에 눈 떴을 때부터 세상은 위험하고 불친절했다. 삶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절망을 떠안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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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후 모스크바 생활이 행복한 것도 아니었어. 모스크바도 이 년 전보다 더 강력해진 스탈린의 일인 독재 체제가 구축되었고, 공포정치가 모스크바를 점령하였어. 세죽과 단야도 몸을 사려야 했고, 상황이 그들을 같이 살게 만들었어. 세죽은 단야와 혼인신고를 하였단다. 세죽은 헌영이 조선에서 당연히 죽은 줄 알고 있었거든.단야는 헌영의 소식을 알고도 세죽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그런 썰도 있단다.

5.

감옥에서 나온 정숙은 송봉우가 전향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계를 끊었어. 그리고 아버지의 지원으로 태양광선 치료원을 시작했어. 물론 그 사이에 많은 시련을 겪기도 했지. 아버지 허헌도 금광사업을 시작했고, 가끔 정숙의 치료원에 들렀어. 어느날은 공산주의자 청년 최창익을 치료원에 데리고 왔는데, 정숙과 최창익은 이후 사랑을 하게 된단다. 명자의 부친상 소식에 정숙은 오랜만에 명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소문과 달리 명자는 밀정 같지는 않았어. 하지만 이제 명자는 더 이상 공산주의자는 아닌 듯 보였지. 허정숙은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열렬한 공산주의자였고,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창익과 함께 다시 조선을 빠져나가 남경에 갔어. 그리고 창익과 결혼을 하였단다.

모스크바에서는 세죽이 단야의 아이를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어. 아들의 이름은 비탈리로 지었단다. 보육원에 있는 딸 영이와 가끔 만나지만, 딸 영이는 세죽을 불편해하는 것 같았어.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아 스탈린은 자신들의 측근들도 토사구팽하듯 숙청시켰단다.

그리고 조선인들 사이에 일본 스파이가 있다면서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죽였어. 조선인들은 이걸 이용하여 서로 반대파에 있던 이들을 무고하기도 했는데, 이성태라는 사람이 김단야를 밀정이라고 무고했단다. 김단야는 아무도 모르게 끌려갔고, 세죽은 김단야가 죽은 지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어.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족에게도 벌이 내려졌어. 그래서 세죽은 갓난 아기를 데리고 카자흐스탄으로 유형을 가게 되었단다. 추운 겨울 긴 유형 길을 비탈리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병에 걸리 운명을 달리했단다. 홀로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세죽은 외롭고 무서운 유형 생활을 시작했어.

정숙과 창익은 남경에 있다가, 일본군의 남경 점령 전에 빠져 나와 무한으로 도망갔고, 다시 일본군에 쫓겨 연안에 도착했어. 당시 연안은 중국 소비에트의 수도이자 본거지였어. 그리고 많은 조선인들도 항일 투쟁을 하고 있었지. 정숙은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고, 그곳에서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공산당의 핵심 인물들과 인연을 만들었단다. 또 항일투쟁을 하는 조선인들도 많이 만났는데, 김산으로 더 유명한 장지락을 만나기도 했어. 연안에서 세 계절이 지나고 정숙과 창익은 실재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태항산으로 이동하였단다. 1939 7 10일이었지.

여기까지가 세 여자 1권에 대한 이야기였단다. 아빠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것처럼 세 여자가 오늘날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 아빠는 소설을 읽을 때 감정이입을 하면서 책을 읽고는 하는데 세 여자 중에 특히 세죽에게 자꾸 감정이입이 되더구나. 그녀의 삶이 너무 안타까웠어.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였지만, 세상은 그녀의 삶을 행복하게 하지 않았어. 멀고 먼 유형길을 떠나 낯선 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 또한 다 지나간다고 했는데

다시 행복한 날은 올 수 있을까.


(61)
정숙이 반격에 나섰고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소설이란 말이죠. 인물의 심리묘사만 제대로 해도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거예요. 심리가 사회를 반영하니까. 그 안에 리얼리즘도 있고 인민성도 있어요. 소설에 그렇게 교조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톨스토이도 설 자리가 없어요. 레닌은 톨스토이를 러시아혁명의 거울이라 했지만 플레하노프는 그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귀족 작가 정도로 취급했지요. 그래서 플레하노프는 레닌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는 종국에는 분파주의밖에 못 되는 거지요. 단순한 주의주장으로 달려가버리면 소설이 아니라 팸플릿이 되는 거예요. 카라마조프의 둘째 아들 이반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우직한 건 단순하고 현명한 것은 모호하다고. 그리고 진실은 복잡한 데 숨어 있는 거라고."

(337)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인생이 깨진 거울처럼 돼버린 것이. 딸을 두고 상해로 갈 때였을까, 조선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밀항할 때였을까, 아니 영생학교에서 퇴학당할 때부터였을까. 거울이 한 번 깨지고 나면 거울에 비치는 모든 것은 갈라지고 어긋날 수밖에 없다. 단야도 마찬가지였다. 이 풍운아에겐 아내도 가정도 바람이고 구름이다. 줄잡아 열 군데 학교를 전전하던 다혈질의 학생이 고향 집 아내에게 무슨 정이 있었겠으며 명자와는 결국 아내냐 애인이냐의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제는 친구의 아내를 맞이했으니 운명이 그에게 행복한 남편이 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죽은 단야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단야처럼 유쾌하고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기로 했다. 그런 결심은 효과가 있었다. 마음을 가볍게 띄워 올리자 자주 웃음이 터졌다.

(394-395)
"조선에 있을 때는 사회가 미성숙하고 여건이 열악하다 보니 최선의 인간이라는 공산주의자들조차 쓸데없는 파벌투쟁에 힘을 낭비하고 있구나 했어요. 연안은 물론 많이 달랐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 아닌가 싶어요. 당이 전투력을 유지하려면 때로 숙당작업이 불가피하겠지요. 한데 온갖 개인감정과 파벌적 음모가 끼어들면서 활동가들이 개죽음한단 말이지요. 그걸 피할 수 없는 게 인간이라면 인간성이란 원칙적으로 진화가 불가능한 걸까요? 혁명 과정의 문제이고 혁명이 완료되면 달라질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소련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395)
창익은 읽은 책을 접어 탁자 위에 놓고 침상으로 왔다.
"혁명이 완료되면 달라질 거다, 라는 생각이 바로 이상주의라는 것 아니겠소. 나는 그런 이상주의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버렸소. 정치란 양의 얼굴을 한 늑대요. 어떤 정치에도 최선은 없소. 진보는 상대적인 것이고 더 나은 쪽을 택한다는 것뿐이오. 마르크시즘이 봉건제보다 낫고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니까. 끼니도 해결 못하는 중국 인민들에게 아편을 강제로 떠먹인 것이 자본주의요, 그 자본의 나갈 길을 개척하는 게 제국주의 총칼 아니오? 부르주아 정치라는 게 뭐요? 자본가들과 지주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이요. 장개석이 지금 하는 짓이 그것 아니오? 지주 자본가들이 장개석군대를 먹여 살리고 있잖소? 장개석 일파는 중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더라도 공산정부의 토지개혁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오. 장개석은 끊임없이 일본하고 뒷거래하고 있소. 아마 서안사변 없었으면 일본에 황하 이북을 내줬을 거요. 중국을 반토막 내서 그 반쪽이라도 챙기는 게 낫다는 심보요. 그런 장개석에 비해 모택동은 단연 우월하오. 정치에 최선은 없소. 차선을 선택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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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1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1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1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김현영 님 강연을 통해서 ‘허정숙’이라는 분을 처음 알았어요. 권김현영 님이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허정숙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허정숙의 삶과 활동을 중점적으로 다룬 책이 있는지 찾고 있는 중입니다. <세 여자> 이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bookholic 2018-04-21 22:1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허정숙이 광복 이후 북한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남북 관계가 더욱 좋아지면 허정숙과 같은 북한에서 활동한 이들에 대한 저술도 많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즐거운 휴일 되십시오.^^
 
신해철 : 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8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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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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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는 그가 좋았다.

SF, 판타지를 좋아한 대한민국의 음악 청년.

그의 집요한 광기와 좌충우돌의 불화,

어떨 땐 해학적이기까지 한 허세와 그 뒷면의 대책 없는 섬세함까지.

그는 대한민국의 1980년대가 분만한 가장 모순적인 열정을 지닌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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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아빠 세대면 신해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신해철을 싫어하는 사람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 신해철은 음악과 말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아빠 또한 그의 음악에 열광을 했고, 그의 말에 공감을 하고 감동을 받았고, 그의 생각과 영혼을 존경했단다.

지금은 가고 없지만, 지금도 그는 아빠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던 무한궤도라는 그룹을 통해서야. 그들의 시작은 너무나 강렬했으며, 그 강렬함의 여운은 아직도 진동하고 있는 듯 해.

음악평론가로 유명한 강헌이 신해철에 대한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에 아빠는 출간일을 손꼽아 기다렸단다. 이 책을 쓰신 강헌이라는 분도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이거든강헌이 음악평론가로써 신해철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끈끈하고 찐~~한 인연이 이어졌다고 하는구나.

신해철이 허망하게 세상을 등지기 얼마 전에도 그들은 신해철 노래로 이루어진 뮤지컬에 대해 계획하기도 했었대. 강헌은 신해철이 죽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일필휘지로 긴 추모사를 쓴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해. 당시 신해철의 유고집이 나오기로 되어 있어서, 이 책은 3년 뒤로 출간을 미루었다가 올 봄에 출간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강헌은 1996년에 영화 <정글스토리>를 제작하고 있었대. , 정글스토리이 영화, 아빠도 기억하고 있어. 윤도현이 신인 시절에 주연을 했던 그 영화록커가 주인공이었던 그 영화그 영화의 제작을 강헌이 했구나강헌은 음악감독을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신해철에게 부탁을 했는데 한치 망설임 없이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는구나. 1996년이면 이미 신해철은 일류스타였는데, 돈도 얼마 주지 못하는 음악감독을 흔쾌히 하겠다고 했대. 비록 영화는 흥행하지 못했지만, 신해철은 이 영화를 통해 영화음악감독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했던 것이야. 이후에도 두어 편의 영화의 음악감독을 했었다고 하는구나. 아빠도 처음 알게 될 사실이란다.

그리고 강헌은 또 한번 신해철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대. 그것은 바로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설. 그 전까지 신해철은 정치와 담을 쌓고 음악에만 충실했는데, 이 찬조연설을 함으로써, 논객으로써의 재능도 보여주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찬조연설은 명연설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어. 이 책에도 그의 찬조연설의 일부를 실어서 아빠도 다시 한번 읽어보았는데, 지금 읽어봐도 감동이구나. 신해철은 찬조연설로 끝난 것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거리 유세까지 함께 했다는구나. 한번 책임을 지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의리파 신해철.  멋지구나.

그런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까지 이어져서 추모앨범 <노무현을 위한 레퀘엠> 프로듀싱을 강헌과 함께 했단다. 이 앨범은 아빠도 가지고 있어 다시 한번 꺼내봤어.그 앨범에는 신해철의 사진도 들어 있었는데, 그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뭉클해지는구나.


1.

이제 본격적으로 신해철, 그의 음악과 삶과 영혼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앞서 이야기했던 1988, 이보다 화려할 수 없는 데뷔. 몇 해 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당시 장면을 보여 주었는데,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무한궤도를 보고 놀랜 반응이 바로 당시 무한궤도를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이었을 거야. 다시 그 화면 영상을 찾아보니, 풋풋한 신해철의 모습에 또한번 옛추억 속에 빠져들게 되는구나.


사실 그보다 먼저 1988년 강변가요제에도 출전했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본선에 진출하지는 못했대.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하지 못해서, ‘그대에게라는 곡도 음악을 반대하는 아버지 몰래, 문방구에서 파는 멜로디언을 사서 이불 속에서 하룻밤에 만들었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최고의 히트곡이 만들어진 그대에게는 정말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요즘도 응원가 일순위로 뽑고 있고, 각종 경연대회에서 불리고 있는 그대에게’… 이제는 세대를 뛰어넘어 너희들까지 좋아하게 되었잖아.^^

그룹사운드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타는 것이 드문 일이었는데, 노래가 워낙 좋다 보니 대상을 탔을 테고,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사람이 그룹사운드 출신 영원한 가왕 조용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있더구나. 그렇게 조용필과 신해철이 인연을 맺고 나서 이후에도 그 인연을 이어갔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탔으니, 이제 본격적인 활동을 해야 했으나, 아마추어 그룹의 데뷔 앨범을 만들어주려는 이들이 많이 없었대. 기획사들이 원하는 것은 돈 잘 버는 솔로 가수였던 거야. 하지만, 신해철이 원했던 것은 그룹이었어. 그때 조용필이 도움을 주었단다. 조용필이 이끌었던 밴드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만든 신생기획사에서 무한궤도의 1집 앨범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 거야. 그 신생기획사가 1990년대 우리나라 음반 시장을 이끌었던 대영AV였단다.

대학가요제에서 신해철은 서울대 그룹 실험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때 알게 된 정석원이 무한궤도에 합류하게 된단다. (정석원은 나중에 아빠가 또 엄청 좋아하게 되는 01OB를 만들게 된단다.), 역사가 만들어지던 시기였구나.

그리고 무한궤도 1…. 이 앨범에도 아빠가 정말 좋아했던 노래가 있단다.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많은 기획사들의 우려를 날려버리듯 무한궤도 1집은 크게 성공을 했어. 그런데, 무한궤도리는 이름을 지었을까? 그 그룹의 심오하고 멋있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 본적은 없었어. 이 책의 지은이 강헌도 직접 이유를 듣지 못했지만, 아래와 같이 추측을 했는데, 공감이 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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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무한궤도’, 이 특이한 밴드 이름은 스무 살 음악청년의 터질 듯한 가슴에 담은 야망과 의지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무한궤도는 산업혁명기 영국인 리처드 에지워스의 발명품으로 탱크나 불도저를 움직이는 캐터필러를 말한다. 즉 앞바퀴와 뒷바퀴를 연속적인 궤도를 연결하는 장치를 지칭한다. 무한궤도를 음악적 첫걸음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채택한 이유에 관해 그가 특별히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 네이밍에서 표명하려고 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만드는 밴드는 앞바퀴와 뒷바퀴, 그리고 가운데의 작은 바퀴들까지 모두 일체가 되어 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하모니를 일구어낼 것이며, 땅이 울퉁불퉁하거나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고랑이 패어 있다고 해도 불굴의 의지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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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한궤도 1집에 성공을 했지만, 1집으로 팀은 해체되었단다. 아무래도 신해철 1명의 대한 비중이 너무 컸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어. 아무튼 신해철은 솔로로 데뷔하면서 연이어 히트 앨범을 내면서, 특급 스타 반열에 오르게 돼그렇게 솔로로 성공했다면 성공과 돈맛에 계속 솔로를 했겠지만, 신해철의 피는 밴드를 위한 피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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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신해철에게 밴드는 평생에 걸친 화두이자 천형(天刑)에 가까운 숙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음악 친구들과 함께 밴드로 데뷔했으나 한 장의 앨범을 끝으로 솔로로 후퇴했다가, 많은 우려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인기 가수의 길을 반납한 채 다시 밴드 맨의 삶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지지와 비난의 극단적인 소요를 불러오는 도화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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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밴드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밴드가 아닌, 밴드 구성원 모두의 밴드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 아빠도 넥스트 1집을 사서 정말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본가에 아직 그 CD가 있을 것 같은데,  다음에 가면 한번 찾아봐야겠구나. 신해철의 꿈과 달리 그룹 활동의 한계도 있었어. 밴드 구성의 완벽체인 4명의 멤버로 구성이 되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신해철의 비중이 너무 컸던 것은 어쩔 수 없었어. 넥스트는 4개의 앨범으로 활동을 접는단다. 그 넥스트에 평가를 강헌은 이렇게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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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넥스트는 아직 대중적인 기반을 획득하지 못한 한국의 젊은 록 밴드들에게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였고, 나아가 극복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넥스트가 이들에게 밴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은 분명하다. 사실 1970년대의 신중현과 엽전들, 산울림, 1980년대의 들국화를 제외하면 이 땅에서 록 밴드는 저주받은 존재나 다름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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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넥스트 활동을 접고 해외 유학을 떠나게 돼. 그리고 외국에서도 계속 실험적인 음악을 하고,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멈추지 않아.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되었어.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신해철은 솔로 활동, 넥스트 활동을 다시 재개하면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단다. 삶을 마감하던 그 해에도 컴백 앨범을 발표했는데, A.D.D.A라는 곡을 듣고 역시 신해철이라는 생각을 했었단다. 그가 그렇게 쉽게 가버릴 줄

정말 슬프더구나.


 

3.

신해철.

그는 가수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해서도 논리 정연한 말로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존경스러운 논객이기도 했어. 신해철은 87학번이야. 우리나라 1987년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면 국가와 사회문제에 눈을 뜰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서 그가 박노해 시인의 헌정 앨범에도 참여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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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

신해철은 짧다면 짧은 생애 내내 롤러코스터 같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지만, 스스로 확고한 원칙을 가진 사람이다. 그 원칙은 그가 음악만큼이나 열정을 가지고 추구한 인문학적 사유에서 비롯한다. 신해철은 쫌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같은 위악의 페르소나를 유쾌하게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에도 언제나 본능적으로 약자의 입장에서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더듬이를 지녔다. 나는 그와 세 개의 트리뷰트(tribute, 헌정) 작업을 같이했다. 2001년 들국화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 2004년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2년 노무현 추모 앨범과 공연. 그중에서 사회적 반향이 상대적으로 가장 약했지만,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작업은 한국 문화사에 노동자 문학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박노해 시인이 1984년 출간한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헌정 음반 프로젝트다.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이자 문학도였던 나와 내 동년배 사람들에게 <노동의 새벽>은 시인이자 혁명가를 자처한 박노해에 대한 입장 차이와 관계없이 충격적인 의미를 담은 예술적 사건이다. 나는 이 시집이 (출간되고 20년을 지나는 동안) 크고 작은 여러 이유로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더구나 <노동의 새벽>은 단일 시집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이 노래로 만들어진 시집이기도 하다. 그래서 2004년 봄, 사상 최초로 시집 헌정 음반을 기획했다. 하지만 제작비도 충분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프로듀서가 없었다. 나는 2000년대라는 새로운 흐름에서 그저 운동권 가요의 동어반복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음악적 감각을 새로운 관점에서 부여하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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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논객으로써 각종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이 뜻하는 바를 주장했고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기도 했어. 동성동본의 결혼이 지금은 합법화되었지만, 그것이 불법이던 시절에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강력히 주장하였고,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라는 노래로도 만들었단다. 그렇게 신해철은 노래하는 지식인으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일원이었어. 청소년들에게는 삶의 방향을 이야기해주는 멘토 역할도 해주고

아무리 몇 번씩 생각을 해보아도 그의 부재는 우리 사회의 큰 손해구나. 촛불시위를 한창이었을 때 그가 살아 있었다면 함께 했을 것이고, 정권이 바뀌어 새로운 대한민국이 되어가는 모습을 함께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그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구나. 부디, 저 하늘 위에서 노무현 대통령님과 함께 만나 바뀐 대한민국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으면 좋겠구나.

이 편지를 쓰면서도 신해철의 노래를 들으면서 쓰고 있어. 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니, 가사 하나하나에도 깊은 뜻들이 담긴 것들이 많구나..

…. ...

(18)
신해철에 관해서는 예술가로서의 삶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지점이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논리와 행동으로 참여한 논객, 혹은 행동주의자로서의 면모다.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개입은 저 멀리 식민지 시대 이후로 근대 한국에서 대중예술인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금기였다. 이들은 탈정치화의 영역에서 대중을 웃기고 울려 위안하는 대가로 인기와 부를 누리는 예외적 시민권자였다.

(85)
신해철에게 밴드는 평생에 걸친 화두이자 천형(天刑)에 가까운 숙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음악 친구들과 함께 밴드로 데뷔했으나 한 장의 앨범을 끝으로 솔로로 후퇴했다가, 많은 우려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인기 가수’의 길을 반납한 채 다시 밴드 맨의 삶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지지와 비난의 극단적인 소요를 불러오는 도화선이기도 했다.

(120)
신해철은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부조리를 직설적으로 갈파하는 대신 그동안 수없이 불러온 사랑 노래의 문법을 계승해 표현함으로써 이 곡의 수용 범위를 확장시킨다. 그러나 신해철은 당사자가 당하는 고통의 선연함을 놓치지 않았으며, 바로 이 선연함의 무늬가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를 매너리즘에 빠진 천편일률적 여타 발라드와 구별시킨다.

(123)
넥스트는 아직 대중적인 기반을 획득하지 못한 한국의 젊은 록 밴드들에게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였고, 나아가 극복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넥스트가 이들에게 밴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은 분명하다. 사실 1970년대의 신중현과 엽전들, 산울림, 1980년대의 들국화를 제외하면 이 땅에서 록 밴드는 저주받은 존재나 다름없지 않은가?

(178)
계간지 <상상>에 실린 인터뷰에서 신해철은 ‘연예인’이라는 용어에 대한 불쾌감을 이렇게 밝혔다.
"어차피 너희 연예인들은 인기가 없으며 죽는 것 아니냐. 저는 연예인이라는 말 자체를 소름 끼치도록 싫어해요. 인기를 먹고살던 시대도 있었겠죠. 그리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면 상업적으로 음악을 판매할 수 있었던 시기 이전에는 예술이 없었는가 생각을 해보면,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원시인이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팔려고 그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인기 이전에 음악을 하자는 거죠."

(180-1)
서태지와 비교할 때 신해철의 애티튜드는 더 확연히 구별된다. 서태지가 철저한 은둔주의 노선으로 일관했다면(바로 이 때문에 이지아 스캔들의 역풍을 심하게 맞았지만), 신해철은 야동을 히히덕거리며 보는 것을 숨기지 않는 그러나 똑똑하고 명석한 머리로 공부도 잘하는 왕수다쟁이 이웃집 형 혹은 오빠 같은 애티튜드를 견지했다. 그에겐 ‘마왕’이라는,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별칭처럼 ‘교주’스러운 카리스마도 있었지만, 동시에 겸손함과 솔직함도 지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황하면서도 논리정연하고 과격한 것 같지만 근거가 선명한 논지를 비속어를 동반하고 쉽고 재미있는 구어체로 풀어내는 수사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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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18 06: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1988년 MBC 대학가요제 참가번호 16번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가 준 충격이 생생하게 기억나네요... 당시 온 가족이 함께 보고 있었는데, 노래가 끝난 후 잠시 조용했었지요.. 한참 후 아버지께서 ˝이 노래는 대중성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벌써 30년 전이네요 ^^:)

bookholic 2018-04-19 15:10   좋아요 2 | URL
그러네요. 30년이 휙~~~
아버님께서 음악적 센스가...^^

2018-04-18 0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9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자본주의공화국 - 맥주 덕후 기자와 북한 전문 특파원, 스키니 진을 입은 북한을 가다!
다니엘 튜더.제임스 피어슨 지음, 전병근 옮김 / 비아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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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읽은조선자본주의공화국이라는 책은 얼마 전에 녹색평론에서 소개되어 알게 되었어. 그리고 아빠도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책제목을 적어두었다가 이번에 읽었단다. 아빠가 딱히 이즈음 읽어야겠다고 한 것은 아닌데, 우연히 최근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좋아져서, 책을 펴면서 이 책을 읽는 시기로 깔맞춤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단다. 작년까지만 해도 남북관계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일 년도 채 안되어 교류가 이렇게 활발해질 수 있다니대통령을 잘 뽑아놓으니, 세상도 금방금방 좋아지는구나.

물론 북한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이런 분위기가 일시적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남북관계라는 것이 1차 그래프처럼 쭉 좋아질 수는 없는 것이지. 서로 밀고 당기면서, 다차원 그래프처럼 점진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려가면 되지 않겠니. 언젠가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느린 걸음이지만 조금씩조금씩 나아가야 한다고 아빠는 생각해.

...

북한우리와 아주 가깝지만,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는 곳. 언론에 비친 단편적인 모습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고…. 두 명의 영국인이 직접 취재한 북한의 이야기. 책 제목을 보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조선자본주의공화국. 북한의 정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패러디해서 지은 제목이잖아. 북한 안에서도 자본주의가 싹트고 있다는 내용이 중심내용이었단다.

 

1.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 초반에는 성공의 길을 걸었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이 컸던 것도 있지만, 북학은 소련과 중국의 삼각관계를 잘 이용했다고도 하는구나. 그리고 그 초반의 성공적인 길을 김일성의 공으로 돌려서 김일성 1인 권력을 완성해갔어. 그런데 1991년 소련이 붕괴한 이후에 소련의 지원은 뚝 떨어지고, 때마침 권력을 이양 받은 김정일의 실정이 이어지면서, 1990년대는 식량배급제가 파탄이 나게 되었어. 거기에 자연도 안 도와줘서 대홍수까지 발생했어.

1994년부터 1998년까지 기근이나 자연재해로 200~300만의 북한 주민들이 죽었다고 해. 배급제가 없어지면서, 북한 주민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가야 했어. 그러다 보니 암시장이 생기게 되었고, 시장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지. 시장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자본주의의 싹이 튼다는 것이야. 가정을 지키던 여성들이 암시장을 만들었는데, 영세 사업도 하게 되었고, 이로써 독립하는 여성도 생겨났대. 이후 시장은 더욱 번창하게 되었어.

북한 정부도 가끔 단속을 하지만, 뇌물로 해결할 수 있어. 북한 사회에 시장은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구나. 그러다가 2009 11월 대대적인 화폐개혁이 있었대. 시장 거래의 부가가치를 떨어뜨리는 화폐개혁이었어. 정부에 대한 분노도 엄청 컸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일부 엘리트들은 북한 돈이 아닌 중국 위안화나 달러로 보유하고 있대. 요즘에는 일반 주민들도 중국 위안화를 보유하고, 북한의 원화에 대한 신뢰도는 많이 떨어졌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북한의 원화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니 인플레이션이 심해져서 2013 9월 노동자 월급이 3000~4000원이었는데, 이 책을 쓰고 있을 당시(2015)에는 30만원까지 올랐대. 그리고 정부의 일을 하면서 받는 임금은 인플레이션을 따라가지 못하고 금액이 적어서, 많은 사람들이 부업을 하고 있었대. 그 부업이라는 것이 결국 시장 활동을 통해서라는구나. 그렇게 생겨난 시장을 장마당이라고 해.. 주부들이 시장 상인으로 많이 일하고, 기본생필품이 주거래 품목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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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탈북한 사람들이 무려 3만여 명이나 된다고 하는구나. 아빠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탈북한 지 몰랐어. 북한 인구의 약 0.1%라고 하는데…. 이들은 우리나라나 중국 등지에서 일을 하게 될 거야. 그런데 그들이 번 돈을 다시 북한으로 보내기도 한다는구나. 아빠는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브로커를 통해서 북한으로 돈이 엄청 들어간다고 하는구나. 중국과 북한의 북경을 중심으로 돈이 유입되고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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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알게 모르게 민영사업도 활발히 이루어져 있고, 고위인사들도 모두 자기 사업들을 하고 있대. 김씨 집안들의 사람들도 중국의 고급 호텔을 소유하고 있다는구나. 그리고 외국에 있는 한식 식당의 많이 보유하고 있대. 그러면서 평양에도 부를 과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들은 스마트폰과 명품을 가지고 다닌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평양과 맨해튼을 합성해서 평해튼이라고 부른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온 소식들이구나. 이처럼 북한에 대한 정보는 너무 적었던 거야.

 

2.

그렇게 돈이 생기다 보니 여가 생활을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싶구나. 여가 생활의 대표적인 것이 아무래도 텔레비전이 아닐까? 하지만 북한의 텔레비전 채널은 그리 많지도 않고, 재미도 별로그러면 어떻게 하겠어? 재미있는 해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영화들을 볼 수만 있다면 보겠지. 그렇게 불법으로 해외 매체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많대. 북한 대부분의 주민들이 본다고 생각하면 돼. 예전에는 DVD로 반입이 많이 되었는데, 최근에는 USB를 통해서 반입이 많이 된대. 아무래도 USB는 크기도 작고, 썼다 지우는 것도 되니 얼마나 편하겠니.

한국드라마, 한국영화, 그 밖에 외국 매체들을 많이 본다고 하는구나. 이런 것들이 탈북에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래. 그런데 한가지 문제점…. 인터넷이 특히 제한적이라는 거야. 한국 드라마나 외국 매체들을 접하는데 인터넷만큼 편한 게 없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 USB를 통한 파일 공유가 엄청 활발하대. 북한 주민들에게 있어 USB는 인터넷을 대신한다고 할 수 있어.

북한에서는 음주가무를 즐기는 편이야. 음주가무는 아무래도 우리 민족의 본성인데, 그것을 억압한다고 어디 가겠니. 그러다 보니 밀주가 관행이고 이런저런 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하는구나. 노래방 기계를 가지고 있는 가정도 꽤 있대. MP3 플레이어도 보급이 되어 외국음악도 많이 접하고 있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국가요를 많이 듣는다고 하는구나. 지난 달에 평양에서 우리나라 가수들의 공연들이 있었는데, 관객들이 우리나라 노래를 많이 따라 불렀다고 들었어. 이렇게라도 계속적인 교류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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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성공적으로 마친 평창올림픽에 북한에서 모란봉 악단이 와서 공연을 했었어. 그 악단의 악단장이 현송월이라는 사람인데, 이 책에서 현송월에 대한 이야기도 하더구나. 현송월은 김정은의 전 여친이었는데, 김정은의 부인 리선주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소문이 한동안 있었대. 그러다가 모란봉 악단의 단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고그리고 올해 평창 올림픽에 오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까지 주고 갔어.

북한에서는 기본적으로 국내여행에도 불법이야. 전에 북한 작가 반디가 쓴 <고발>이라는 소설집에서 북한에서 여행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알게 되었었지. 자신의 지역 밖을 나가는 것도 허가가 필요하니 여행은 언감생심이겠지. 그런데,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조금씩 바뀌기는 했대. 사업 때문에 가는 여행객은 허가가 쉬워서 여행객이 늘어나고 있대. 물론 뇌물이 작동해야 했지. 신흥 상업 계급들도 서서히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대. 그러서인지 평양에서도 교통 체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대그래.. 북한도 서서히 변해야지, 언제까지 멈춰 있을 거냐.

담배는 어떨까? 김정일은 담배를 그렇게 싫어했다는구나. 그래서 21세기 3대 바보들을 흡연자, 컴맹, 음악을 즐기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했다는구나. 그런데 김정은은 애연가라 하는구나. 아버지 말을 안 듣는 아들이었나 보구나.^^

 

3.

이 책에서는 북한의 자본주의에 의한 변화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어.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권력 이양이 될 때도 쉽게 넘어간 것은 아니래. 김정일이 권력을 잡는데 숙부 김영주가 큰 장애물이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김정일이 끌어들인 인물이 매제 장성택이었어. 김정일의 두뇌 역할을 했다는구나.

그런데 김정은은 권력을 잡자마자 여러 인사들을 숙청했는데, 그 중에 장성택도 포함되었잖아. 장성택이 죽었을 때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대서특필했던 기억이 있구나. 그것은 김정은 혼자 결정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하는구나. 그리고 지금 김정은은 혼자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래.. 정확히 누가 책임을 지고 있는지 말하기 어렵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하고 있단다. 김정은과 그의 친척, 조직지도부 고위 인사, 그리고 이들의 신임을 받는 군 고위 인사와 당관료. 이들의 연합체가 아닐까 추측을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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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사실 지금 현재 누가 북한을책임지고있는지는 말하기가 어렵다. 확실히 김정은 막강하다. 김씨 일가의 다른 개인도 힘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북한에서 절대적이지 않다. 그들 외에도 김정은의 부친 김정일이 구축한 막후의 권력 구조가 존재한다. 그런 구조 위에 김정은 자신도 제한된 권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이 권력 구조의 명칭은 조직지도부(OGD). 장성택의 처형을 김정은의 단독 결정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 일로 인해 조직지도부가 얻을 게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동시에 조직지도부는 일반 조직이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수장도 없는 조직인 데다, 여기에 혼란을 더하는 점은 조직원 중 일부는 진짜 조직지도부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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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김정은이 국내외적으로 많이 얼굴을 비치고 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이유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

북한의 여러 정치 조직에 대한 설명도 있었는데, 국가안전보위부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대한 설명은 책의 내용으로 대신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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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국가안전보위부가 일단 당신을 소환하면 인생은 영원히 바뀌고 만다. 그 시점에 이르면 당신은 사실상 어떤 반국가 활동을 한 정치범으로 확정이 된 것이다. 기적적으로, 힘 있는 사람이 개입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당신은 약식 공개 재판에서 죄를자백하게 되고,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진다. 그 후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가족도 따라갈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이다. 결정은 국가안전보위부가 내린다. 적정한 혹은 투명한 법적 절차라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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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한 사람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장면을 텔레비전에 보면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북한에도 핸드폰이 있네이러면서 말이야. 하지만, 이미 1998년에 핸드폰을 사용했대. 그러다가 2004년에 금지를 시켰고그리고 2008년에 다시 이집트 통신사와 합작하여 고려링크라는 통신사업자를 만들었대. 200만 가입자가 있고, 이제 스마트폰도 많이들 사용한대. , 국제전화와 인터넷은 안 된다고 해.

하지만 국경 근처에서는 중국이동통신망을 이용해서 국제전화와 인터넷을 한다고 하는구나. 물론 불법이고 걸리면 뇌물로 해결하면 되고불법폰으로는 외국산 스마트폰보다는 삼성, LG 핸드폰을 선호한다고 하는구나. 한글로 되어 있어서

라디오 방송의 경우 남북한 모두 상대방 라디오 방송은 잡히지 않게끔 되어 있어. 하지만 북한의 장마당에서는 외국산 라디오가 거래되고 있대. 그리고 사업가들에게 라디오는 중요한 매체라고 하는구나. 국제 정세를 미리 파악해야 어떤 물건값에 영향을 주는지 파악할 수 있대.

, 그럼 북한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까? 이 책의 원서가 출간된 것은 2015년이란다. 그때만 해도 남북 관계도 좋지 않고, 북미관계도 좋지 않던 시절이잖아. 그런데, 이 책의 지은이들은 비교적 정확한 예측을 하고 있더구나. 마치 2018년의 봄을 예견한 것 같았어.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지은이들은 북한은 점진적인 국가 개방을 할 것이라고 했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2017 8월에 이 책을 읽은 이들은 지은이들의 예측이 희망 섞인 이야기라고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작년에는 남북관계가 무척 안 좋았으니까. 툭하면 장거리 미사일을 쏘아 올려서 주변국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잖아.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예측이 어쩌면 맞겠다 싶었어. 그것도 아주 가까운 미래에 말이야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유롭게 북한을 오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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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253)

동시에 북한이 처해 있는 보다 광범위한 지정학적 환경이 놀랄 만큼 잘 균형 잡혀 있다. ‘미치광이평양이 한국이나 심지어 미국에 핵공격을 벌일 수도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도부는 그런 자살 공격을 고려할 아무런 동기가 없다. 북한 지도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미국과 한국 역시 북한에 대한 공격을 자제할 분명한 동기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과 중국의 현상유지 지지다. 중국 정부는 최근 북한 정부를 불만스럽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제재가 북한을 한계점까지 몰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수년간 계속된 제재에도 평양에 사치품이 넘쳐나고 나아가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기 혹은 중기적으로 볼 때 북한에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큰 시나리오는 현 정권 지배하에서의 점진적은 국가 개방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은 이윤을 추구하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봉건적이고 전통적인사회주의 낙원북한은 오래전부터 바깥세계를 놀라게 할 힘이 있었다. 앞으로 10~20년 후 북한이 어떤 모습일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때까지 우리는 당혹감과 희망이 뒤섞인 심정으로 계속 지켜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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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북한의 초반 성공에는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이 있었다. 옛 소련과 중국의 지원이다. 냉전 시기 내내, 북학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양국을 영리하게 이간질해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사랑의 삼각관계’에서 교묘히 이득을 추구함으로써 고래들 사이의 새우 신세인 자신의 약점을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했다. 나중에 후대 정권이 중국과 미국의 우려를 활용해 이익을 취한 능력에서도 반복된 이 전략 덕분에 북한은 중소 양국으로부터 지속적인 구호를 얻어 낼 수 있었고, 이는 국민의 식량배급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북한 정부는 주민들이 이 모든 것을 김일성의 후덕함에서 나온 것으로 믿게 만들 수 있었다.

(72)
최근 평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시내에서 ‘태블릿 발견하기’ 놀이를 즐긴다. 북한 엘리트들 사이에서 중국에서 구입한 태블릿은 재미있는 장난감이자 신분의 상징이다. 이른바 평해튼의 젊은 거주자들이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의 모바일 기기를 가지고 노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됐다. 북한 정부도 개발에 착수해 독자 모델인 안드로이드 태블릿 삼지연을 생산했다. 하지만 삼지연은 진정한 북한산은 아니다. 운영체제는 안드로이드이고 내부 회로는 중국 회사 예콘에서 가져왔다. 가격은 200달러인데, 평양 무역박람회에서 한 대를 구입한 소식통은 ‘앵그리 버드’와 PDF 파일 리더, 미리 내려받은 전자책 약간이 갖춰진 상태였다고 설명한다. 기능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대부분의 태블릿과 비슷한데, 한 가지만 예외다. 삼지연에서는 와이파이 기능이 없다. 와이파이는 북한 내부에서 전혀 쓸모가 없는 사양이기 때문이다.

(195)
김정은의 아니 리설주는 일종의 유행 선도자다 리설주의 스타일은 평양의 신흥 부유층 여성의 전형이면서 지나치게 현란하지는 않은 수준이다. 흥미롭게도 리설주는 가끔씩 공식 행사에서 김일성 배지를 달아야 할 자리에 브로치를 단다. 또한 바리 정장을 입고, 심지어 하이힐도 신는다. 하이힐은 북한에서 최근까지도 문란하다는 이미지를 주었지만 이제는 여성성을 나타낸다. 리설주는 최고 지도자의 부인인 데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있기 때문에 의상에 관한 한 젊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다. 모란봉악단 역시 비슷하다. 김정은이 직접 창단한 것으로 알려진 악단의 단원이 짧은 치마를 입는다는 건 주민들도 옷차림에서 덜 보수적이어도 된다는, 사실상의 청신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201)
북한 사람이 한국 사람을 멋있어 하고 따라 하고자 하는 모습은 상식적으로 반정부 행위로 여겨진다. 하지만 북한 사람도 한국 사람이 키도 크고 잘생겼으며, 자기네보다 훨씬 더 나은 수준의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논평가들은 북한이 개방을 하게 되면 북한 사람이 한국의 우월한 삶의 질에 대해 ‘알아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북한 정부로서는 경제개혁을 결코 추구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북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바로 북한 주민의 정권 전복 의지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북한 사람은 정권 전복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사람이 더 나은 질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정부가 경제개혁과 개방을 추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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