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예상치 못한 순간과의 마주침, 그것을 통해 느끼는 뜨거운 심미적 체험˝, 강렬한 순간순간이 소환될 때마다 느끼는 첫 감정들... 그리고 그것과의 충돌로 충만한 소설이다!
츠바이크의 소설이 나를 또 한번 몰입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제 마지막 사랑해마지 않는 교수의 인생이 롤란트의 눈 앞에 펼쳐지려 한다.
바로 그의 입을 통해서.
난 그래서 천천히 아껴 읽으려 노력하고 있다.
남겨두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나도 혼란스러워...

그러자 바로 그 순간, 마치 주먹으로 얼굴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현관의 어두컴컴함 속에서 아버지의 그림자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반사되어 반짝이는 안경유리로 그림자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림자의 윤곽만으로도 미리 준비했던 무례한 말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목에 꽂혀 있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순간, 난 말문이 막혀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께-얼마나 무서운 순간이었는지! - 방정리를 할 때까지 잠깐 부엌에서 기다려 달라고 공손하게 요청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내 요청을 승락하신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꾹 참으시는 태도로 보아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지요. 그는 내게 악수도 건네지 않고 불쾌한 표정으로 커튼 뒤쪽 부엌으로 물러나 계셨습니다. 뜨거운 커피와 무를 삶는철제 냄비가 놓여 있는 곳 앞에서 그는 10분이나 선 채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 P29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황홀한 강의, 원초적인 연설의 정열은 예상치 못한 순간 한꺼번에 나를 끌어당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몽유병 환자 같이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으로 빽빽하게 모여있는 학생들 사이로 다가갔습니다.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호기심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에 이끌려, 부지불식간에 학생들 가운데 서 있게 된 것입니다. 교수와 나의 간격이 불과 10인치 밖에 되지 않았고, 강의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강의에 홀려 그 어떤 다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학생들 한복판에 있게 되었습니다. - P38
그토록 진실한 고뇌를 겪는 사람의 얼굴을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아들로 시민계급의 편안함 속에서 큰 위험을 겪지 않고 자란 나는, 걱정이란 기껏해야 일상의 우스꽝스러운 가면 속에서 질투의 누런 옷에 싸인 채 소소한 푼돈을 딸랑거리며 분개하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지요.
그러나 그의 우울한 표정에는 어떤 거룩한 요소들에서 비롯된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우울은 여러가지 어두운 비밀에서 나온 것이며, 무자비한 조각칼이 일찍 피폐해진 뺨에 주름과 생채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 P87
"자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다시 그가 물었습니다. 이미 그의 의지 속에는 마음의 준비가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이런 말로 마무리를 했지요. "그러면, 우리 같이 해 보세. 젊은이들이 항상 옳은 법이지. 젊은이의 말을 듣는 게 현명한거야!"
폭발할 것 같은 나의기쁨, 나의 환호성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조급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젊은이처럼 들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의기투합했지요. 즉 매일 저녁 7시, 저녁식사를 마친 직후 우리는 하루에 한 시간씩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저녁부터 우리는 받아쓰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시간. 그 시간을 내가 어떻게 설명하면 좋겠습니까! 나는온 종일 그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오후가 되면 온 신경을 녹여버릴 것 같은 숨막히는 불안감이 초조한 나의 감각을 전류처럼 감전시켜 왔습니다. - P97
그것은 완전한 비언어적인 송가였습니다. 장엄하게 설계되었으나 현세에서 무한함을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는 바다에 대한 송가(頌歌) 말입니다! 먼 곳에서 먼 곳으로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높은 곳을 향하다가 깊은 곳으로 숨어드는 바다. 그 사이에는 뜻이 없는 동시에 뜻이 충만하며, 흔들리는 인간의 나룻배를 희롱하곤 하는 바다. 그 바다와 같이 장엄한 형상의 비교를 통해 우리를 피흘리게 하고 해체시키는 원초적인 힘이 비극의 서술을 완성시켰습니다. - P99
이 모든 일들은 벌써 40년 전 있었던 일입니다만, 지금도 강의에 몰입하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입술을 빌린 다른 이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나는 나의 입술에 유일하게 숨결을 불어준 그의 음성, 존경하는 고인의 음성을 아직까지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열정의 날개를 타고 날아오를 때면 항상 나는 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의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결정지어 버렸던 것입니다. - P103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는 아주 조용히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 혼잣말을 했는데, 마치 마음이 놓인다는듯한 어조가 배어 있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네." 그는 서재에서 두 차례나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서서 경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그걸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건가? 내 아내가 자네에게 말하지 않던가?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자유롭게 한다고,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말을... 나는 내 아내에게 무엇이든지 하지 말라고 할 권리가 ㅇㆍㅂㅅ지.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어.. - P175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가 어느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억제할 필요가 있겠어? 하물며 자네에게... 자네는 젊고 밝고... 미남이지... 그리고 자네는 우리와 가까이 있지 않았는가...? 어떻게 내 아내가자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자네같이 잘생기고 젊은 친구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나는..." - P175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몸을 바싹숙이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또다시 그의 눈빛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이상한 빛... 그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기이하고 특별한 순간, 그는 내게 더 바짝 다가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였습니다.
"나도... 나도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 - P175
"이리 오게 롤란트 내 곁에 앉아!... 자네가 알게 되어서, 드디어 우리 두 사람 사이가 명확해져서 마음이 가벼워졌네... 처음에는 항상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네. 내게 자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자네가 눈치챌까봐 말일세... 그러면서도 나는 또 바라곤 했어. 내가 굳이 털어놓지 않아도 자네가 스스로 알아차리기를 말이야... 하지만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후련하네...
이제는 그 누구한테도 못했던 이야기를 자네에게 말 할 수 있어. 최근 몇 년 동안 자네가 어느 사람보다 나와 가깝게 지냈으니까 말이야... 그 누구보다 나는 자네를 사랑했어... 그 누구보다 자네는 나의 삶의 궁극적인 성과를 만들어주었지... 그러니 작별할 때에도 나에 관해 어떤 다른 이보다 자네가 더 많이 알아야 하네. 나는 어느 순간에나 자네의 질문을, 무언의 그 질문을 아주 또렷하게 느끼고 있었다네... 당연히 오직 자네만이 나의 모든 삶을 알아야 해. 내가 자네에게하는 이야기를 들어 주겠나?" 그는 나의 눈빛에서, 혼란스러워 하면서 흔들리는 내 눈빛에서 수긍하는 내 뜻을 읽었습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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