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니커즈를 신고 세상 밖으로 나가 거리를 활보하고 싶었다. 배터리파크부터 조지워싱턴브리지까지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하지만 커다란 쇠망치 같은 피로가 덮쳐오는 바람에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진심으로 절망했다. 아무리 차별화하려고, 달라지려고 기를 써도 나는 결국 엄마처럼 돼버리는구나. 소파에 누워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여자가 되는구나. 내가 조와 잤던 게 아빠와 잔 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던 건 조가 나이 많은 유부남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보는 관점에 남자-남편-아빠, 여자-아내-아이라는 철옹성 같은 구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 P293

언제나 나에게 왜냐고 물었다. 한 번씩 숨쉬기가어렵다고 느끼는 건 왜인가요? 마음이 직사각형 공간인건 왜 그래요? 왜 특정한 작은 공간만 항상 공격을 받는걸까요? 그 공간이 넓어지고 확장돼 삶을 채워주지 못하는 건 왜죠? 왜 그럴까요? - P295

모든 ‘왜‘가 달리는 순간마다 도시의 거리를 달리고 내삶의 거리를 달릴 때마다 위에서 아래로 고꾸라지듯 내게쿵 하고 떨어졌다. 책상에 묶여 있는 게 아닐 땐 나가서달리곤 했다. 숨이 찰 때까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미칠 것같을 때까지. 당장 행동해! 움직여! 채워 넣어! 너한테는시간이 없고 멈춰서 숨 고를 시간은 더더욱 없어. 물론 언젠가는 숨도 편하게 쉴 수 있고, 여유를 부릴 수도있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냥 맨발로 필요한 것을 향해뛰어. 내면 공간이 잠깐 넓어졌다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게 느껴지니, 더 빨리 더 많이 일해 더 빨리 끝내라니까.
못하겠어. 가슴 안쪽에서부터 고통이 느껴졌다. 사실 타자기 앞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몸 어딘가가 아팠고, 일어나면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 상태로 30분을더 그 앞에서 버텼다. 그러다가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
다시 나를 타자기 앞으로 질질 끌고 가 묶었다. 그게
차라리 나았다. 그러지 않으면... - P295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가다가 뭉텅이로 사라져버리기도한다…………. 마흔여섯, 마흔일곱, 마흔여덟・・・・・・ 이제 과거는 없고 계속 진행되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일흔여덟, 일흔아홉, 여든, 맙소사. 엄마가 팔순이 되었다. 우리는여전히 가만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거실 소파에 앉는다. - P298

그날 저녁 내내 슬프고 고요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줄곧엄마에게 내려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엄마는무척 어여쁘게 보인다. 결이 고운 흰머리, 보드라운 피부그 자체로 완벽한 작품처럼 보이는 주름지고 지친 노인의얼굴 하지만 지난 세월은 엄마를 엄마만의 세계로 끌고가고 눈에는 다시 그 혼란이 찾아온다. 엄마를 놓아주지않는 저 끈질긴 삶이라는 혼란.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말한다. - P300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미는 듯해 그 고통을 감
히 느낄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정말 그렇네." 나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
엄마의 부드러운 얼굴이 결심이라도 선 듯 확고하고 단단해진다. 나를 보더니 강철 같은 목소리로, 이디시어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 - P301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른다. - P301

"그래 맘대로 하든지." 나 하는 짓이 어찌나 마음에안 드는지 목소리까지 떨린다. 엄마의 오만 엄마의 경멸.
엄마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기질. 절대적으로 엄마곁에 머물러 있을 것들. 언어의 상징이 존재의 숙어로 이것들이야말로 엄마의 자아를 완성한다고 믿는다. 타인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건 불쾌한 일에서 헤어나는 엄마만의 방식, 당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방법, 옳고 그름을 아는 법,
당신의 주장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 순간 엄마의 삶이 이해되면서 묵직한 돌이 가슴을짓누르는 것만 같다. - P309

엄마는 겁에 질렸다가 이내 뉘우치고 나를 가여워하기 시작한다. 요즘 들어 엄마는 부쩍 유순해졌고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 "아니야, 아니다." 엄마는 황급히 수습한다. "엄마 이야기야. 그때는 그랬다고. 뜻 있어서 한 말 아니야. 넌 당연히 잘 살았지. 그건 세상이 다 알아줘. 그렇게 성내지 마라. 세게 말하려던 것뿐이니까.
엄마가 잘못 말했다. 이제 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쏟아지던 말이 느닷없이 멈춘다. 다른 생각이 엄마를 사로잡은 것이다. 엄마가 방어의 방향을 튼다. "너 정말 모르겠니?" 엄마는 애원하듯 말한다. "엄마한테는사랑밖에 없었잖아. 내가 뭘 가져봤겠니.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달리 뭘 가질 수 있었겠니? 네가 인생 얘기하는거 다 옳지. 다 맞는 말이야. 너한테는 일이 있었잖아.
너만의 일이 있잖아. 너는 여행도 많이 했고, 세상에나, 여행이라니! 넌 지구 반 바퀴는 돌아봤지. 난 여행은 꿈도 못 꿔봤는데! 나한테는 네 아빠 사랑밖에 없었어. 인생 살면서 누릴 게 그것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그 사랑을 사랑했다. 아니면 뭘 어쩔 수 있었겠니?" - P317

엄마가 침묵을 깬다. 이제 격한 감정이 거둬진 목소리,
그저 호기심에 대답을 바라는 초연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면 엄마랑 좀 멀리 떨어져 살지 그랬니? 내 인생에서 멀리 떠나버리지 그랬어. 내가 말릴 사람도 아니고."
나는 방 안의 빛을 본다. 거리의 소음을 듣는다. 이 방에 반쯤 들어와 있고 반은 나가 있다.
"안 그럴 거 알아, 엄마." - P31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3-03-01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

전 어제 읽기 시작해서 1/3
지점을 통과하고 있답니다.

은하수 2023-03-01 10:54   좋아요 1 | URL
그래도 비비언 고닉의 매력에 푹 빠지셨을 거예요..그렇죠? ^^
 

탐험을 나선 지 거의 12 개월여 만인 1915년 11월 21일 인듀어런스 호가 침몰했다. 남극의 얼음 위에서 대원들은 보트를 끌고 새로운 캠프를 찾아 이동해야 한다. 그 과정이 너무 고되고 힘들지만 행군을 몀출 수는 없었다. 멈춘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부 페이션스 캠프

대원들은 부서진 배에서 약 100m 떨어진 넓고 안전한 부빙 위에 캠프를 설치했다. 다섯개의 텐트에 인원이 배정되었고, 각 대원들에게는 슬리핑백이 지급되었다. 기온은 영하39도까지 떨어졌다. 가장 가까운 육지는 60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때의 일을 맥니쉬는 이렇게 적었다.
 "가죽 백이 18개밖에 없어 우리는 제비뽑기를했다. 난생 처음으로 내가 당첨되었다."
 대부분의 고급 대원들은 질이 떨어지는 재규어울 백을 뽑았다. 하지만 거기에선 조작의 냄새가 강하게 풍겼고, 일부 대원들은 즉시 그사실을 알아차렸다.

노련한 뱃사람인 베이크웰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제비뽑기가 약간 조작되었다. 섀클턴 대장과 와일드 부대장, 웨슬리 선장, 그리고 다른 고급 대원들 모두가 울 백을 뽑았기 때문이다. 품질이 좋고 따뜻한 가죽 백은 모두 일반 대원들의 몫이었다." - P79

10월 30일 아침, 행군 준비가 완료되었다. 일단 섀클턴, 허드슨, 헐리, 워더로 구성된 답사 팀이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섀클턴이 "이제 로버트슨 섬으로 간다!" 고 소리치자 모든 대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답사 팀의 임무는 빙구와 얼음 덩어리 등 장애물을 헤치고 보트와 썰매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오후 2시 55분, 강아지 세 마리와 그동안 인듀어런스 호의 마스코트였던 고양이 ‘치피 여사‘ 를 크린이 총으로 쐈다. 한 번도 썰매를 끌어본 적이 없는 강아지 시리우스의 처리는 맥클린에게 맡겨졌다. 시리우스는 총구를 빤히 쳐다보며 맥클린의 손을 핥았고, 맥클린은 손을 너무 떠는 바람에 총알을 두 방이나 쏘아야 했다. 총소리가 얼음 위로 울려
퍼지며 모두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 P83

며칠 동안 ‘회수 팀‘이 인듀어런스 호와 오션 캠프 사이를 오가며 필요한 물건을 날랐다. 비록 상당량의 물품들이 눈 속에 파묻히긴 했지만, 그래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일부를 포함하여 많은 물품들을 회수할 수 있었다. 갑판에서 조타실을 통째로 떼어와 보관창고로 사용했으며, 맥니쉬는 갑판에 구멍을 뚫고 배 밑바닥으로 내려가 무엇보다도 소중한 식량을 꺼내 왔다. 설탕과 밀가루 봉지가 나오자 모두 환호했으나 호두와 양파, 소다수가 나타나자 대부분 신음소리를 냈다. - P86

얼음이 녹으면서 주변 경치가 조금씩 변했다. 들쭉날쭉했던 병원이 조금씩 편평해졌고 곳곳에 작은 물줄기가 만들어졌다. 낮도 훨씬 길어져서 새벽 3시에 뜬 해가 오후 9시나 되어야 질 정도였다. 대원들은 물개를 사냥하고 카드놀이를 하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나오는 글을 놓고 입씨름을 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11월 21일 저녁, 개에게 먹이를 준 뒤 텐트에서 책을 읽거나 잡담을 하고 있던 대원들에게 갑자기 섀클턴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배가 가라앉는다!"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온 대원들은 높은 망루 위에 서서 인듀어런스 호의 최후를 말없 - P93

이 지켜보았다. 뱃고물이 하늘 높이 치솟더니 곧 이어 뱃머리부터 서서히 물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대원들을 태우고 처녀 항해에 나섰던, 헐리에 의하면 ‘바다의 신부‘ 였던인듀어런스 호가 마침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모두들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베이크웰은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목구멍에 무엇인가 걸린 것 같았는데 삼킬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는 완벽하게 외로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섀클턴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후 5시에 인듀어런스 호는 머리부터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장 상처를 많이 받은 뱃고물이 맨 마지막으로 물 속에 들어갔다....도저히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 P94

12월 21일 새클턴이 대원들에게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12월 23일에 다시 서쪽으로 행군을 시작한다." 하지만 많은 대원들이 이번발표를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다. "모든 면에서 지난번보다 상황이 훨씬 좋지 않다." 그린스트리트는 이렇게 적었다. "대장이 행군 생각을포기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우리 텐트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 P95

먼저 18명이 줄을 연결하여 배 두 척을 끌고 조심스럽게 눈길을 헤쳐나갔고, 나머지대원들은 필요한 물품들을 정리했다. 텐트, 요리 도구, 창고, 썰매 등을 꼼꼼히 챙겼고, 남은 배 한 척은 오션 캠프에 남겨두었다. 꼬박 8시간에 걸쳐 강행군을 한 첫날, 그들은겨우 2km를 걸었다.

며칠 동안 힘들고 별 소득도 없는 행군이 계속되었다. 대원들은 충분히 쉬지도 못했고, 허기를 완전히 채우지도 못했으며, 옷은 항상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루에 2km씩 빙구와 질퍽한 얼음 위를 걷느라 모두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힘들고 희망도 없는 행군이다. 더 이상 이런 짓을 하고 싶지 않다." 베이크웰은 이렇게 적었다. - P95

섀클턴은 결국 어쩔 수 없이 행군 중단을 결정했다. 힘겨웠지만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 대원들은 단단해 보이는 얼음 위에 새로운 캠프를 만들기로 했고, 이틀간의 탐색 끝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일렬로 텐트를 세웠다. 온갖 좌절에도 불구하고 이젠 부빙 위에서의 생활을 다시 확립해야 했다.
"캠프 이름을 ‘페이션스 캠(Patience Camp)‘로 정했다." 오들리는 기록했다.

이제 1916년 1월이었고 해빙의 조짐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아 부빙의 위치는 줄곧 남위 66도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면서 다시 지루함과 침울함, 그리고 고통스러운 긴장이 찾아왔다. - P96

4월 8일 저녁, ‘제임스 커드 호 바로 아래에서 얼음이 삼각형으로 갈라졌다. "배를띄울 때가 다가왔다고 느꼈다."섀클턴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4월 9일 아침이되자 대원들은 출발 준비를 모두 갖춘 채 마지막 식사를 했다. 그리고 오후 1시, 마침내섀클턴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명령을 내렸다.

배를 띄웠다. 각자의 위치는 이미 몇 개월 전에 정해져 있었다. ‘제임스 커드‘호는섀클턴과 와일드가 맡았으며 클라크, 헐리, 허시, 제임스, 워디, 맥니쉬, 그린, 빈센트, 맥카티가 탔다.
 ‘더들리 더커‘ 호는 워슬리가 책임졌으며 그린스트리트, 커어, 오들리, 맥클린, 치덤, 마츤, 맥리오드, 홀리스가 탔다.
 가장 작은 ‘스탠콤 윌스‘ 호에는 리킨슨,
맥클로이, 하우, 베이크웰, 블랙보로, 스티븐슨이 탔고 허드슨과 크린이 지휘했다.
- P9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3-03-0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만난 책인데,
반갑네요.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네요.

은하수 2023-03-01 10:53   좋아요 1 | URL
읽기 전에 가졌던 그냥 건조하기까지 했던 무관심이 미안해집니다 인간의 인내란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질수 있는건지 ... 인간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어요^^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 주었다.‘ - P38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 P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뇌리에 박히는 것은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이다. 일체의 감정은 배제되고 현재형으로 쓰인 문장들을 읽는다. 그래서 더 상상하게 되는 힘이 있다.
이 작고 얇은 책으로 읽는 작가의 인생사는 암울하고 우울하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양차 대전의 사이에서 강대국의 논리에, 침략에 두 번이나 이리저리 바둑판의 돌처럼 놓여지는 헝가리에서 여자로 태어났고,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도 없이 남의 나라(러시아) 역사와 문화를 배워야했고 결혼해서 아기를 데리고 살기 위해 국경을 넘어 난민의 삶을 살아야했으니까.
그러나 생존을 위한 일에 매진하면서도 작가의 꿈은 버리지 않았고 단조로운 공장 노동 중에도 머릿 속으로 끊임없이 시를 지어냈다. 스위스에 정착했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배웠고 글을 익혀야만 했다.
헝가리의 국경을 넘었을 때 그녀는 제 나라 말을 잃어버린 영혼의 난민이 된 것이고 -거기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인사도 하지 못하고 이별을 했다 - 영원히 백 퍼센트 이해하지 못할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게 되었다. 그녀의 첫 소설인 <비밀노트>가 파리의 쇠유 출판사에서 발매되었고 우리 나라에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세 편의 소설이 한 권으로 묶여 소개가 되었다.

책을 읽고 나서 작가의 문체를 보며 든 생각..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영작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간단한 4-5줄의 일기를 이런 단순한 나열 형식으로 감정 표현 없이 썼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길고 감정이 표현된 문장은 불가능했으므로. 즉 그 당시 영어에 관한 한 모든 것이 부족했으니까...
그래서 작가의 이런 감정이 일절 배제된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의 배경에는 헝가리어를 잃고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선택해야만 했던 저간의 사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구구절절 맘속의 감정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서툴지만 쏟아내야만 내가 살아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읽는 나는 그것이 더 절절하게 와 닿는 것이고 극도로 자제한 그 표현의 사이를 나의 상상력으로 메우게 하는 작가의 전략이 주효했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비밀노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의 공부‘에 보면,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략)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열린책들,2018,38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문맹>, 112면)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읽고 나서 작가의 말로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른 작품을 떠올렸다. 읽다 포기 했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다시 읽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3-02-2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읽었는데 자기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쓸 수 없는 환경에 직면한다는게 얼마나 큰일인지 암담하더라구요. 작가의 절망과 그 절망을 딛고 어떡하든 다시 쓰는 그 마음도 짧고 건조한 문장속에 너무 절절하게 느껴져서 감동적이었습니다.

은하수 2023-02-26 22:45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절절하게 장황한 표현보다 더 와닿았어요
사람의 심장을 찌르는 문장입니다^^ 용감한 여자이자 어머니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더 공감하면서 읽게 되더라구요
 

이런 말듣고 화 안날 여자 있을까?
이런 싸가지 없는 말 하면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앟아진다. 아무 것도 해주지 말아야 한다. 왜 해주어야 하나. 저나 나나 같이 일하고 같이 공부하는데!

이혼하길 백번, 천번 잘했다.
혼자 사는게 백번, 천번 낫다!


그제야 내가 요리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란 걸알게 되었다. 요리의 사회적 가치를 이해할 수 없었고, 왜 우리 두 사람 모두가 필요로 하는 이 서비스를 왜 번번이 내 쪽에서만 제공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의문이 들었다. 그리하여 필요 이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일부러 요리에 무심했고 무능했다.

 결혼하고 3개월쯤 지난 어느날 아침 스테판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커피를끓였네." 나는 충격받았다. 우리 둘 다 커피 애호가가 아니라 커피 맛을 따지지도 않았고 맛이 있건 없건 누가 커피를 끓여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날 갑자기 식탁 위 맛없는 커피는 나라는 인간의 결함이 되었다. 그가 언급함으로써 기정사실화 되어버린 내 실패를 바로잡기 위해 나는 동네 이탈리아 카페에 들어가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던 은퇴한남자들에게 청승을 떨었다.
 "우리 남편이요. 제 커피가맛이 없다네요" 남자들은 즉각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한 사람은 인스턴트 커피가 문제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주전자 때문이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물이 중요하다고했다. 
그래서 드립커피용 주전자와 갈지 않은 원두와 병에든 생수를 샀다. 그런데도 여전히 커피는 맛대가리 없었다.
너무 약했다. 너무 강했다. 너무 연했다. 너무 썼다.  - P216

우리가 남편과 아내라는 두 단어의 클리셰를 생각없이 받아들인 건 얼마간 젊음과 무지 때문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과 평범함이라는 환상은 관습적인 결혼이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침실에서 거실에서 서재에서 작업실로 갈 때마다 우리가 들인 이 과정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결혼이라는 마법이 통하게 하기 위해수행해야 하는 행동들을 점점 더 예리하게 느꼈다. 우리는 스스로를 창의적인 작업에만 집중할 줄 아는 사람들로 보았다.
 인테리어를 새로 한 아파트는 우리 의도를 밝혀주는 선언이 될 것이었다. 고취된 정신의 연대를 반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 공간은 하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듯했다. 딱히 그 이유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 P217

우리는 5 년을 같이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스테판이 집을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혼은 그런 식으로 끝나버렸다. 끝내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우린 끝나지 않는 싸움 끝에 결국 지쳐 나가떨어졌다. 둘 다 이 답답하고 숨 막히는 긴장이 없는 방에서 한 번이라도 숨을 내쉬고 싶었을 것이다. 함께 있는 것보다 그 공기를 원했다. 나는 집에 있던 물건들을 싹 내다 팔고 대학원을 그만두고(대학원은 언제나 추상적 관념일 뿐이었다)뉴욕으로 돌아왔다. 서른 살이었고 혼자가 되니 마음이 놓였다. 1번 애비뉴의 작은 다세대 주택에 세를 얻었고 주간지 기자로 취직했다. 그리고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꾸미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 P2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