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를 조율하고 나서 에를레뻬스가 슬기로운 눈으로 한참 동안 예지게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에 마치 바다에서 반사된 듯한 어렴풋한 빛이 떠올랐다. 그런 다음 그는 길쭉한 손가락들을 돔브라의 기다란 목 아래위로 움직이면서 현을 뜯기 시작했고, 모든 음역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동시에 테마가 전개될 때면 현들로부터 풍부하게 울려 나오는 새로운 화음들을 이끌어 내며 종횡으로 악기를 구사했다. 그 음악을 들으면서 예지게이는 자기에겐 그 음악이 쉽지도 않을 뿐더러 해석하기가 편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그는 느긋한 기분으로 손님 노릇을 하면서 편안하게 들을 작정이었지만 돔브라에서 울려 나오는 첫번째 음이 그에게 다시 자신을 일깨워 주었고, 그를 즉시 슬프고 괴로운 생각들의 심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째서였을까? (728/1054)
에를레뻬스는 돔브라의 달인이었다. 옛사람들의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느낌들이 현들을 통해 다시 살아났고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다시 불타올랐다. 이따금 예지게이는 상의 안주머니에 숨겨진 목도리를 더듬으며 이 세상에 자기가 사랑하는 한 여인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를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곧 기쁨인 동시에 고통이었다. 그는 그녀 없이 살 수 없었고 그러므로 언제까지고 그녀를 사랑할 것이었다. (729/1051)
에를레뻬스는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그리고 얼마나 훌륭한 연주자인가! 난 이런 일은 생각도 못했는데.〉 에를레뻬스의 연주를 들으면서 예지게이는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기에 바빴다. 그는 자기의 삶을 위에서 조망하려고, 날개를 쫙 펼쳐 상승 기류를 타고 스텝 위로 떠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높이 날아오른 솔개처럼 그의 삶 위로 높이 떠오르고 싶었다. 그의 눈앞에 겨울철 사 (731/1054)
로제끄의 드넓은 경치가 보이는 듯했고 거의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철로가 굽이진 곳에 몇채의 건물들과 불빛들이 모여 있었다. 보란리-부란니 간이역이었다. 그 집들 중의 한 곳에 우꾸발라와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잠들었겠지만 우꾸발라는 어쩌면 아직 자지 않고 생각에 잠긴 채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집에는 자리빠와 그녀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는 더 큰 슬픔이 놓여있었다. 아이들이 아직껏 저희 아버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는 이상, 어느 곳으로 간다고해도 그녀는 진실에서 도피할 수가 없었다.......(732/1054)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부란니 까라나르는 제게 한 번 더 안장이 얹히고 다시 주인의 통제하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순순히 복종했다. 그 낙타는 이제 소리를 덜 질렀으며 걸음걸이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는 곧 가장 적당한 속도에 도달하여 마치 태엽 장치로 달리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사로제끄를 가로질렀다. 예지게이 역시 진정이 되었다. 그는 바람을 막기 위해 몸을 잘 감싼 뒤에 말라까이 모자를 내려 여몄고, 그런 다음에는 낙타의 두 혹 사이에 좀 더 편안히 앉아서 보란리-부란니로 돌아갈 생각에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757/1054)
그러나 다음에 예지게이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힘겨운 삶에 대한 생각들로 되돌아갔다. 그의 집에서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으려면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 고통을 안으로만 숨기지 않고 자리빠에게 〈사실은 말입니다, 자리빠,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아부딸리쁘의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아 가지고는 출세를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리빠만 괜찮다고 한다면 그 아이들은 예지게이의 성을 물려받을 수 있다. (758/1054)
눈앞에 마을이 보이자 까라나르가 속도를높이기 시작했다. 그 낙타는 이제 몸이 더워져서 땀을 흘리면서도 다리를 쭉쭉 내뻗었고, 내쉬는 입김이 구름처럼 뿜어 나왔다. 예지게이가 집으로 다가갈 때쯤 두 대의 화물 열차가 그 간이역에서 만났다가 하나는 서쪽으로 다른 하나는 동쪽으로 지나갔다. 예지게이는 까라나르를 곧장 우리에 넣을 작정으로 집 뒤에서 낙타를 세웠다. 그러고는 낙타에서 내려 한끝에 추를 달아 땅에 묻어 둔 묵직한 사슬을 집어 들고 그것으로 까라나르의 앞다리를 묶은 다음 그 낙타를 혼자 남겨 두었다. 좀 진정을 시키고 나서 안장을 내려야 되겠 (760/1054)
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몹시 급해서이기도 했다. 곱은 등과 다리를 펴자마자 예지게이는 우리를 나서려고 했다. 바로 그때 큰딸 사울레가 그에게로 달려왔다. 양가죽 외투를 입은 채로 힘겹게 몸을 움직이며 예지게이가 서둘러 딸에게로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너 감기 걸리겠다.」 그가 말했다. 사울레가얇은 옷만 입고 달려 나왔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뛰어가거라. 나도 곧 들어갈 테니까.」 「아빠.......」 사울레가 제 아버지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다울하고 에르메끄가 가버렸어요.」 「걔들이 가버렸다고? 어디로?」 「얼마 전에 떠났어요, 걔네 엄마하고 같이요. 기차를 타고서 가버렸어요.」 (761/1051)
「떠났다고? 언제?」딸이 한 말을 믿을 수없어서 그 아이의 눈을말을 되물었다. 「오늘 아침에요.」 「그랬었구나!」 예지게이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넌 집으로 뛰어가.」 그가 딸아이에게서 손을 빼냈다. 「내 곧, 금방 가마. 집으로 가거라, 지금 당장!」 사울레가 집 안으로 사라졌다. 예지게이는 우리 문을 닫으려고도 하지 않고서 양가죽 외투를 그대로 걸친 채 자리빠의 바라끄 집으로 향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도 그는 자기 귀로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딸아이가 뭘 잘못 알았을 것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762/1054)
그 집의 입구 근처에 쌓인 눈에는 발자국이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예지게이는 문을 홱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필요 없는 (762/1054)
물건들이 널린, 썰렁하게 버려진 방을 보았다. 거기에는 아이들의 흔적도 자리빠의 흔적도 없었다. 「어째서? 왜?」 예지게이는 여전히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서 허공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정말로 가버릴 수가 있지?」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도 예지게이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산산이 부서진, 그가 이제껏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산산이 부서진 느낌이었다. 그는 외투를 그대로 걸친 채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또 마음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슬픔과 배신감과 상실감을 어떻게 멈출지도 모르고 방 한가운데에, 차갑게 식은 난로 곁에 서 있었다. (763/1054)
그에겐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그는 벽 쪽으로 돌아서서 뜨겁고 슬픔에 젖은 얼굴을 차가운 널빤지에다 누르고 비통하게 울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 동안 그의 손에서 조약돌들이 하나 또 하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안간힘을 쓰며 그 조약돌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 조약돌들은 하나하나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텅 빈 방 안 구석구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다음에 그는 벽을 따라 기었고, 양가죽 외투를 그대로 걸친 채 말라까이 모자를 눈 아래까지 내려 쓴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비통하게 울다가 호주머니에서 그(764/1054)
전날 자리빠가 선물해 준 스카프를 꺼내 눈물을 닦아 냈다.
얼마 동안 그는 텅 빈 집에 그렇게 앉아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를 가늠해 보려고 했다. 자리빠는 일부러 그가 없을 때를 틈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난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예지게이가 자기를 떠나 보내 주려고 하지 않을까 봐 무서웠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그녀의 생각이 옳았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떠나보내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거기에 있었더라면 나중에 결과가 어찌 되든 그는 절대로 그들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상상을 해보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그들은 거기에 없었다. 자리빠는 거기에 없었다! 아이들도 거기에 없었다! 그는 그들을 잃은 것이었다! 자리빠는 그가 없는 사이에 떠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떠나는 편이 더 쉬 (765/1054)
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내비친 적이 없었고, 그 텅 빈 집을 보게되는 것이 예지게이로서는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녀를 위해 기차를 세운 게 틀림없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까잔갑! 바로 그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스딸린이 죽던 날 예지게이가 그랬던 것처럼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겼던 것이 아니라 간이역 책임자에게 지나가는 열차를 멈춰 달라고 요구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우꾸발라 역시 그들이 되도록 빨리 떠나는 데 한몫 거들었을 것이었다. (766/1054)
복수를 해야겠다는 울분이 억눌린 채 시커멓게 그의 머릿속에서 들끓고 있었다.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있는 힘을 다 끌어모아 보란리-부란니라는 이 저주받을 놈의 간이역에있는 모든 것들을 싹 쓸어서 하나도 남김없이박살내 버리는 것뿐이었다. 그런 다음에 그는 (766/1054)
분노가 치밀어 올라 예지게이는 까라나르의옆구리를 후려치면서 사납게 욕설을 퍼부었고 안장을 들어 올려 한옆으로 팽개친 다음, 낙타의 다리에서 사슬을 풀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고삐 끈을, 다른 한 손으로는 손잡이에 감긴 채찍을 들고서 뒤에서 으르렁거리며 따라오는까라나르를 잡아끌고 스텝으로 나갔다. 몇 번인가 예지게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까라나르가 으르렁거리지 못하도록 팔을 휘둘러 겁을 주기도 하고 고삐 끈을 잡아당겨도 보았지만 어떻게 해도 소용이 없자 침을 뱉고 나서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낙타가 으르렁대는 소리를 참을성 있게 견디며 바람을 뚫고서 걷고 있었다. 황혼에 덮인 스텝은 이제 점점 어두워져서 차츰차츰 윤곽을 잃어 가는 중이었다. 그는 길게 쌓인 눈을 헤치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마음을 단단히 도사려 먹고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 (770/1054)
그리고 마침내 간이역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 이르자 까라나르를 세운 다음 잔인하게 복수를 할 채비를 했다. 그는 코트를 벗어던지고 나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양손이 자유로워지도록 누비바지 혁대에 고삐 끈을 붙들어 맸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채찍 손잡이를 움켜쥐고서 그 지독한 슬픔을 안겨다 준 대가로, 품은 원한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그 짐승을 채찍으로 후려 때리기 시작했다. 사납게 인정사정없이 연달아 채찍을 내리치고 고함을 지르고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면서.......
「네놈은 맞아야 돼! 맞아야 돼! 망할 놈의짐승! 이건 모두 네 탓이야! 모두가 다 너 때문이라고! 조금 이따가 네놈이 어떤 빌어먹을 데로든 가고 싶어 하는 데로 가게 놔주겠지만 먼저 네놈을 병신 만들어 버리고 말겠어! 맞아라! 또! 이 탐욕스러운 놈! 여태까지도 네놈은 물리지가 않아서 도망을 쳤다 이거지! 그사이에 자 (771/1054)
리빠가 애들을 데리고 가버렸단 말이다! 네놈이 나한테 그런 못할 짓을 하다니! 이제부터 난 어떻게 살란 말이냐? 네놈이 상관없다면 나도 상관없어! 그러니 이거나 받아라! 또 이것도! 이 나쁜 놈!」
까라나르는 쏟아지는 채찍질 아래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줄을 끊으려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다가 두려움과 고통에 눈이 뒤집혀서 제 주인을 넘어뜨려 가지고 눈 위로 끌면서 내닫기 시작했다. 거세고도 엄청난 힘으로 그 낙타는 제 주인에게서 벗어나려고, 제가 억지로 끌려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그를 개처럼 끌면서 달리고 있었다. (772/1054)
「지옥에나 떨어져 버려!」 예지게이는 비명처럼 고함을 지르고 나서 눈 속에 자기의 몸이 끌려 파인 자국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모자도 양가죽 외투도 다 잃어버린 채 그는 얼굴과 손의 피부가 화끈거리는 중에도채찍을 휘두르며 어둠 속을 계속 걸었고 그러다 갑자기 끝없는 공허감과 무기력감이 엄습해오자 눈 속에 무릎을 꿇고서 머리를 감싸 쥐고소리 없이 울었다. 사로제끄 한복판에서 오직 혼자 무릎을 꿇은 채 그가 들을 수 있던 소리는 스텝 위를 질주하거나 휙휙거리면서 눈을 휘젓는 바람 소리, 그리고 점점 드세어지는 눈발이 내리는 소리뿐이었다. 조용히 사르락거리며 내려앉는 수백만 개의 눈송이 하나하나가 헤어지는 아픔을 덜어 줄 길은 없다고, 사랑하는 사람없이는 살아갈 도리가 없다고, 다른 아버지들 (775/1054)
이 친자식을 대하는 것보다도 더 애지중지했던그 아이들이 없이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는 거기에서 죽어 눈으로덮이고 싶었다. <세상에 신 같은 건 없어! 삶에 대해서 뭣한 가지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신이 어디 있어? 또 다른 사람들에게선 도대체 뭘 기대할수 있지? 신 같은 건 있지도 않아!〉그것이 그날 밤 사로제끄의 사무치는 고독속에서 그가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전엔결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는 종종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했던 옐리자로프에게서, 과학적 견지에서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믿었다....... (776/1054)
그리고 지구는 상층 기류에 씻기며 그 궤도를 계속 돌았다. 그렇게 지구는 눈 속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눈 덮인 사막 한가운데서 잊힌 한 남자를 싣고 축 위에서 자전하며 태양 주위로 운행을 계속했다. 영토와 세력을 잃은 어떤 왕도, 황제도, 통치자도 부란니 예지게이가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졌던 그날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절망에 빠져 무릎을 꿇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지구는 계속 돌았다. (776/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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