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의 단편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3
마지막 단편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을 읽었다.
마지막까지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미루고 읽지 않았던 시간이 미안해지는 ...^^

어린 시절, 기남의 가장 달콤한 몽상은 고통 없이 단번에 죽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생각만큼 기남에게 위안을 주는건 없었다. 그런 기남의 세계에 다섯 살짜리 진경이 들어왔고, 삼년 후 우경이 태어났다. 아이들을 사랑하면 할수록 죽음이라는 관념은 위안이 아니라 두려움이 됐다. 하지만 이제 기남은 두렵지 않았다. 아이들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가눌 수 없이 쓸쓸해질 때면 자신의 죽음이 아이들에게는 자유를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P300
마이클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기남을 바라봤다. "부끄러워요?" 기남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한동안 마이클을 가만히 바라보다 기남이 입을 열었다. "...... 잘못 들었어. 다시 말해줘." "부끄럽냐고 물어봤어요. 할머니, 부끄러워요?" 기남은 아무 말 없이 마이클을 품에 안았다. 아이에게서 시큼한 땀냄새가 났다. "・・・・・・응. 그런가봐." 그렇게 대답하고 기남은 불현듯 이해할 수 있었다. 부끄러움. 마이클의 말이 맞았다.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그애가 오래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 P318
"할머니." 기남의 품에서 나온 마이클이 기남의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에밀리?" "내 여자친구요." 마이클이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기남은 조심스럽게 마이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숱이 많은 곱슬머리가 우경의 어린 시절과 똑같았다. "마이클은 다정하구나.‘ "맞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너무 다정해. 한국 할머니처럼." "정말?" "근데 너무 다정하면 안 된대요." 마이클이 잠시 기남을 보다 말을 이었다.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거래요." - P319
마이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남은 그애가 한 계절만 지나도 오늘의 일을 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그애에게 그저 멀고 낯선 혈육이 되리라는 것도. 하지만 그 사실이 자신을 더는 슬프게 하지 않는다고 기남은 생각했다. "할머니." 자신을 부르는 마이클을 보며 기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고 연약한 순간이 아직은 자신을 떠나지 않았음을 바라보면서.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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