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이라는 이름은 자원활동가와 상근활동가들이 합심해서 지었다. 나는 완월동 아웃리치(Outreach, ‘손을 뻗는다,
나가서 닿는다‘의 뜻으로 외부 사람이 업소에 방문하거나 업소 입구에서 언니들에게 물품을 나누어 주는 행위, 간단한 목례, 눈인사, 안부를 묻는 등의행동을 뜻한다) 이후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구청에 단체 이름을 성매매피해상담소라고 신고하기에는 뭔가 허전하다. 성매매피해상담소 뒤에 우리가 ‘언니‘ (여성들의 자매애를 상징하고 친밀감을 표현하는 단어로 우린 성매매 당사자를 ‘언니‘라고 불렀다)에게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는지를 드러낼 수 있는,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있는 단어를 붙이면 좋겠다"라고 제안했다. - P17

우리들은 "어떤 이름이 좋겠냐? 마음껏 상상하고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 보자"라고 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한마디씩 했다. ‘언니들의 존재를 어떻게 드러내지?‘, ‘우린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있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우리를 소개하지?‘ 등의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침묵과 아이디어 내기를 반복하면서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P17

쏟아내는 말들의 성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다들 지쳐갈 무렵 누군가 ‘살림‘이 어떻겠냐고 했다. 처음 ‘살림‘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는 집에서 ‘살림 사는 것 같은‘ 여성만의 무엇처럼 느껴졌다. "너무 ‘여성‘이지 않나? ‘여성성‘이 너무 두드러진다"라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다수가 반대했다. 이 사회의 강한 성별 고정관념을 생각하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영어 survivors는 생존자,
살아남은 사람,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고, 그러자 우린 모두 "뜻이 괜찮다", "너무 멋지다"라며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렇게 우리의 이름이 된 ‘survivors‘와 ‘살림sallim‘은 ‘살린다‘와 ‘살림을 산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살린다‘는 성매매 여성을 성산업 구조의 고리와 폭력으로부터 구조해 살리고, 성매매 여성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의지를 가지고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함께 행동하자는 바람을 담은 말이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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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본 적이 있다.
그때 난 겨울이 2월의 마지막 날에 끝난다고 믿었다.
2월 28일. 가끔은 2월 29일.
아무리 춥거나 눈이 와도 2월이 지나면 그건 겨울이 아니지.
아닌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 P8

나는 얼음 위를 걸어본 적이 있다.
오직 겨울에만 볼 수 있다고 니가 말했다.
헤엄을 치거나 배를 타고서는 갈 수 없는 어떤 바위 아래를, 물이 얼면 갈 수 있다고 했다. 얼음 위를 걸어서.
나는 너의 신발에 발을 넣어볼 것을 모른 채, 너를 따라언 강 위로 올라갔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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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말했다. "난 안돼, 실은 루디에게 할 말이 있었어. 강 너머 카페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 가서 기다릴 필요 없다는 말 좀 전해 주지 않을래?"
루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서 도로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크는 말했다. "그 친구에게 예의는 지켜."
루디는 여전히 묵묵부답인 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 P305

자크는 말했다. "가봐, 난 호텔에서 기다릴게."
사라는 말했다. "난 집에 갈 거야."
자크는 호텔의 캐노피로 갔다. 사라는 루디와 둘이 남았다.
"정말 내가 가길 바라?"
"네가 가지 않을 이유가 없어."
"내가 가서 뭘 어떻게 설명을 해."
"설명하고 말 것도 없어. 널 보면 바로 이해할 테니까."
"만나러 가고 싶었잖아. 그것도 아주 많이."
"이젠 상관없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걸."
루디는 말했다. "그럼 내가 갈게."
그는 부교에 발을 들였다가 다시 사라에게 다가왔다.
- P306

그는 말했다.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는 강물을 마주한 채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사공은 끈덕지게 기다렸다. 루디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루디는 말을 이었다. "타키니아에 들르면, 아니다. 나도 같이 가야겠다." 그는 부정적으로 덧붙였다. "가이드들이 게을러서 아무래도 작은 말들을 안보여 줄 것 같거든. 가이드가 보여주지 않아서 그걸 못 보
면, 거긴 가나마나야."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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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은 어디에나 트리플 20
임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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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은 어디에나> 포근히 감싸 안아주는...!

임선우 작가의 단편집이다. 진짜 짧은 3편의 단편과 작가의 말이라 할 수 있는 에세이 ‘초록은 어디에나‘까지 단숨에 휘리릭 읽을 수 있다.
책도 ‘작고 소중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손 안에 쏘옥 들어오는 핸디북 사이즈이다.

3편의 단편은 전작인 <유령의 마음으로>를 읽었을 때와 같은 분위기가 그대로 유지된다.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럴지 몰라도 ㅇㅣ 책을 읽으며 그때의 분위기, 포근한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등장인물들의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은 은근히 유머가 느껴진다.
슬픔은 타인의 다정함으로 어느 새 스르르 극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세지를 주는 듯 해서 좋았다.
슬픔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낙타로 나타나기도 하고 푸른 돌을 뱉어내기도 하고... 이런 설정이 우스우면서 억지스럽지 않게 풀려나가는 과정들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포근히 감싸안는 느낌...

그런 느낌을 표지에도 나타내고 싶었나보다.
스카이 블루에 초록 잎 하나, 그리고 낙타 한 마리까지... 그리고 오키나와 하늘에 내리는 하얀 눈 같은 글씨까지... (오키나와에 눈은 자주 내리는건 아니겠지? 너무 자주면... 희망이 아닌거 같잖아?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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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우 작가의 단편집.
3편의 단편과 작가의 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한 편의 에세이가 실려있다.
책은 작고 귀엽고 표지는 스카이 블루에 초록 잎 하나, 그리고 낙타 한 마리.
이 책에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초록 고래, 푸른 색 돌, 하얀 눈, 그리고 다시 초록...

♧초록 고래가 있는 방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두드려라. 문을 두드리면, 계속해서 두드리면... 열리지 않을까? 새벽 세시, 내가 문을 두드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고 찾는 이는 바로 윗집 여자였다. 일주일 전부터 내 방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는데, 윗집 여자는 줄곧 부재중이었다. 그 바람에 일주일간 전등도 켜지 못했고 방 안이 온통 곰팡이로 뒤덮이는 끔찍한 악몽에도 시달렸다. 그러나 조금 전 편의점에서 술을 사서 나오는 길에 나는 우연히 보았다. 빌라 꼭대기 층, 그러니까 내 윗집의 얇은 속 커튼 사이로 환한 빛이 구원처럼 흘러나오는 모습을. - P9

♧사려 깊은 밤, 푸른 돌
범인은 근처에 있다
빌라 CCTV 좀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추적추적 비 내리는 여름밤, 나는 빌라 화단 앞에서 집주인 겸 빌라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사고 났어요? 잠결에 전화를 받았는지 집주인은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장국영이 사라져서요. 장국영이 사라졌다고요? 아, 제가 기르는 야자나무 이름이 장국영입니다. 그러자 아이씨...… 하는 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알겠으니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합시다. 전화를 끊고 확인해보니 새벽 한 시였다. 이런. - P51

♧오키나와에 눈이 내렸어
오사카, 하고 영하 언니가 말했을 때 나는 
세 번째 샷을 내리는 중이었다. 
주영, 나랑 오사카에 가자. 그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오사카 근교에 있는 작은 고등학교 운동장. 삼 년 전 그곳에서는 한일 고교 친선 축구대회가 열렸고, 후반전 사십 분에 한국 팀이 한 골을 넣으면서 승리했다. 기념으로 학교 뒤뜰에 무릎 높이의 플라타너스 묘목을 한 그루 심었는데, 얼마나 자랐으려나. 어쩌면 어깨까지 자랐을지도.
- P105

♧초록은 어디에나
‘초록은 어디에나‘는 오래전 겨울밤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떠올린 문구이다. 
어두운 외투를 걸치고 거리를 걷다 보니 문득 초록이 보고 싶었다. 환한 초록, 자라나는 초록, 우글거리는 초록. 초록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나에게 초록은 따뜻한 슬픔의 색. 차고 단단한 파랑의 슬픔에 노란 빛이 한 줄기 섞인 푸르름. 
그러나 나는 질문하는 동시에 답을 알고 있다.
초록은 어디로 가는 법이 없다. 초록은 어디에나
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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