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섬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호밀밭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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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행동하는 양심 쥴피 리바넬리의 <마지막 섬>을 2024년의 첫 책으로 읽었다.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은 작품 속의 화자인 '소설가'가 말하길 '마지막 은신처,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자투리땅'이라고 표현하는 유토피아였다. 결국 오래가지 못했고 낙원과 같았던 섬은 디스토피아로 막을 내리고 말지만. 


처음에 작은 하나를 내어주었지만 그것이 점점 커져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권력의 탐욕스러운 칼날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처음엔 알지 못한다. 아무도 승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작은 것에 굴복했던 우리들, 독재자와 그에 동조했던 사람들 모두 결국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굴복해서 패배했다. 점차 수위를 높여가던 권력의 폭압이 얼마나 더 극에 달할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했기에 패배했다. 그 나무들이 잘려 나갔을 때, 그리고 구멍가게 아들이 얻어맞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냈어야 했다. 저항했어야 했다.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전 대통령이 시도했던 모든 것들을 너무나 순진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갈매기들은 저항했고, 타협하지 않았기에 승리했다." (286쪽)


     "인간은 저항한다는 정의를 망각한 것, 이기주의, 예측 부재, 외면, 독재에 굴복, 작은 것에 대한 탐닉과 같은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 글은 우리 일상에서의 작은 굴복들이 만들어낸 작은 원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86쪽)   



1960년, 1980년 두 번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던 터키의 상황은 우리와 많이 닮아 있다. 친이슬람 정당의 집권과 군부의 통제는 이에 맞서고자 하는 터키 국민들의 저항을 강하게 억압했고, 저항 세력은 미약했다. 그 가운데서 쥴피 리바넬리는 독재에 저항하였다. 군 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하였고 해외로의 도피와 망명 시간도 길었다. 그의 경험들은 그의 여러 작품에도 투영되어 있고 <마지막 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군부 독재 정권 뿐만 아니라 친이슬람 독재 정권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억압적인 독재 정권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모든 결정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하여 결정이 내려졌다고 하지만 결국은 독재자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작품의 줄거리를 보면서 오늘 내가 오랜만에 영화관 가서 보고 온 영화 "서울의 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섬>을 읽다 보면 '전前 대통령'으로 표현되는 권력자의 모습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전前 전全대통령"이라는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 속 그 사람이 원하는 방향과 작품 속 '전 대통령'의 모습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작가는 우리가 익히 들어 왔던 '다수가 정의다 '라는 말의 당위성?을 부정하고, '민주주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수의 독재' 라는 말로 대답한다. 정말로 민주적인 권력이 되려면 다수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권력분립이 완벽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완벽한 권력분립이 과연 가능한가. 터키에서의 사정도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상황을 봐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한 번 권력을 잡은 자는 그 권력에 중독이 되고 다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억압적인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고, 자신들이 주도한 '무력 선전' 방식으로 인해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되는 독재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마지막 섬>에서는 모두가 패하고 오로지 갈매기들만이 '저항했고, 타협하지 않았기에' 승리한 암울한 상황이 벌어진다. 작품에서 '소설가'는 말한다. "사실 어딘가에 악이 존재한다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조금씩의 책임이 있는 거야."(172쪽)라고. '소설가'의 이 말에 동의한다면, 우리에게 온갖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행하던 독재자들은 결국 우리가 방관하고 물러서고 타협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저항하는 것은 고귀한 것"이고 희생이 따르지만 저항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서서히 독재자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에게 처음부터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저항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한 갈매기들처럼!


<마지막 섬>은 독재자의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동조함으로써 모두가 패배하는 극단의 상황이 우리와 너무 닮아 있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마지막 섬'은 특정 국가에 한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무시하고 관심을 끊고 진저리를 치면서 감시를 게을리하는 사이에 수많은 진실들은 묻혀버릴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동조하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고 있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오늘도 나는 뉴스를 보며 핏대를 올린다. 쉽게 굴복하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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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절대 비밀‘로 지켜왔던 그 지상 낙원에서 평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 P13

내가 그 낙원을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설명할 용기를 또 어떻게 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작은 섬에 있는 잣나무 숲, 천연 수족관같은 새파랗고 투명한 바다,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협만 그리고 순백의 유령처럼 쉬지 않고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에 대해 내가 이야기해봐야, 사람들은 기껏 관광지에서 파는 엽서 속 풍경 정도나 떠올리지 않을까. - P13

그곳은 사계절 내내 온화하고, 밤이 되면 사람의 넋을 빼놓는 재스민 향기에 뒤덮이는 외딴섬이었다. 숲속에 자리한 낡고 오래된 집과 함께 세월에 내맡겨진, 자급자족이 가능한 독립된 세상이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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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읽기 시작!
끝까지 잘 읽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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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이메일로 이런 글을 주고받는 관계라니...
넘 멋지지 않나!
스토리는 마구 재밌고 흥미롭고 그런건 아닌데
근데 이들의 연애사는 어떻게 전개가 될지 궁금해서 일단 계속 읽어보고 있다.
앨리스와 아일린의 편지글도 좀 궁금하고...

우리의 관계를 성적인 관계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섹슈얼리티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혼란스럽고 다양해 보이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우리의 방식은 점점 더 시시해보여.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는 개념, 이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여자를 좋아하는지를 깨닫게 된다는 의미인 것 같아. 내가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 과정의 1퍼센트에 불과했을지도, 어쩌면심지어 그만큼도 안 됐는지도 몰라. 
- P114

내가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 과정의 1퍼센트에 불과했을지도, 어쩌면심지어 그만큼도 안 됐는지도 몰라. 나는 내가 양성애자라는 걸 알지만, 거기에 정체성으로서 결속감을 느끼지 않아. 내가 다른 양성애자들과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내 성적 정체성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다른 의문들이 더 복잡해 보여. 답을 찾을 수 있는 명백한 방법이 없고, 심지어 내가 답을 찾는다고 해도 그 답을 명확히 설명할 언어조차 전혀 없을 정도로 말이야. 우리가 어떤 종류의 섹스를 즐기는지. 그리고 왜 즐기는지를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섹스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얼마나 많이, 어떤 맥락에서 섹스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런 개별적인 성적 취향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배울수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개념에 대한 용어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 P114

유럽과 미국의 현대 소설의 문제는 그 구조적 완결성을 얻기 위해지구상의 대다수 인간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억압하는 데 의존한다는 점이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빈곤과 고통에 맞선다면, 그러니까 그런 빈곤과 고통이라는사실을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과 나란히 배치한다면, 감각이 부족하거나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여겨질 거야. 한마디로인류의 대다수가 점점 더 빠르게 점점 더 잔인하게 착취당하는 맥락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그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무슨 일이일어나는지 누가 신경이나 쓰겠니? 그런 세상에서 주인공들이 헤어지든 계속 함께하는 그게 뭐가 중요할까?  - P118

그래서 소설은 세상의 진실을 숨김으로써, 텍스트의 반짝이는 표면 아래 단단히 파묻어버림으로써 작동해.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현실의 삶에서 그러는 것처럼 사람들이 헤어지는지, 아니면 계속 함께 하는지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돼. 우리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세상만사를, 즉 모든 것을 싹 다 잊어버리는 데 성공한다는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하는 경우에 말이야.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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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 읽어야쥐~~~
아이 씐나 씐나
따끈따끈 신간 어제 도착~~
조르주 페렉 읽고 싶어 몇 번 시도했건만
도서관 가서 책 보곤 그 두께에 놀라 포기하다 에세이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녹색광선의 새책입니닷!
첫장에 페렉 아저씨 웃는 얼굴, 완전 프랑스인 같아요. 사실은 유대인입니다. 부모님이 폴란드에서 이주해 오신 유대인이셨죠. 아버지는 제2차 대전에 자원입대해 전사하셨고, 어머니는 어린 페렉을 먼저 프랑스 남부로 피신시킨 후 파리 탈출을 시도하다 나치에 붙잡혀 1943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합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얼마 전 읽었던 제발트의 <이민자들>에서도 봤죠. 아들을 영국으로 먼저 보내놓고 부모님 두분은 결국 수용소에서 사망했다던 이야기였어요.

책머리에
한 남자가 빌랭 거리 24번지 앞에 서 있다. 남자의 이름은 조르주 페렉. 페렉은 남다른 실험 정신과 감수성, 독창적인 언어 감각으로 20 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 세기 유럽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녹색광선 편집부)


항상 사건들, 기이한 것들, 비일상적인 것들만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신문 1면에 실리는 5단 표제 기사나 굵은 글씨의 헤드라인처럼 말이다. 기차는 탈선하는 순간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고, 더 많은 승객이 사망할수록 더 많은 기차가 존재한다. 비행기 또한 납치되는 순간 비로소 존재감을드러내고, 자동차는 오로지 플라타너스 나무에 충돌하는 운명만을 지닌다. 일 년에 52번의 주말이 있고, 52번의 결산이있다. 사망자가 많을수록 뉴스에는 좋은 일이고, 숫자가 계속증가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마치 삶이 스펙터클한 것들을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의미심장하거나 중요한것은 항상 비정상적인 것처럼, 하나의 사건 뒤에는 어떤 스캔들, 균열, 위험이 있어야만 한다. 대(大) 자연재해나 역사적 격변, 사회적 갈등, 정치적 추문 등..…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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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2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는 프랑스영화 <빨간 풍선>의 한 장면인가 봅니다…

은하수 2023-12-23 16:16   좋아요 0 | URL
앗... 정말요???
비가 그치고 반짝이는 거리에 우산 쓴 노인일까요?
빨간풍선도 들고 있는거 같아요. 아이가 들고 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회색 양장본에 표지 사진도 제목의 분홍색도 아주 감각적으로 보여요^^
정성들인 녹색광선의 책이네요.

잠자냥 2023-12-23 18:01   좋아요 2 | URL
오래전에 본 영화라 기억이 희미하기는한데, 프랑스에서는 워낙 유명한 영화라 아마 맞을 것 같아요. 꼬마가 종일 빨간 풍선하고 같이 다니는 사랑스러운 영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