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어스 포커 (완역본) - 월스트리트 천재들의 투자 게임, 《빅 쇼트》 작가의 대표작!
마이클 루이스 지음, 장진영 옮김 / 이레미디어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라이어스 포커>는 마이클 루이스의 씨앗이자 뿌리이다. 이 책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데, 이 작가의 시작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아직 모든 작품을 읽어본 건 아니지만)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유일한 책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당연히 후기작들에 비해 부족한 점은 많다. 나는 영화 <머니볼>을 적어도 10번 이상 봤고 감독 베넷 밀러(베스트는 <폭스 캐쳐>다)를 무지하게 좋아하지만 해티버그가 역전 홈런을 때리며 오클랜드를 20연승의 고지에 올려놓는 장면에선 두고두고 땅을 쳤던 사람이다. 원작 <머니볼>에서의 묘사가 훨씬 생생하고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루이스는 그런 남자다. 오로지 글만을 이용해 영화보다 생생하게 장면을 연출하는 사람.


그래도 풋풋한 맛이 있다. 왜 그런 기분 있지 않은가. 대가의 젊은 시절을 바라볼 때 나오는 흐뭇한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라이어스 포커>에는 이후 마이클 루이스가 펼쳐나갈 세계의 단편들이 곳곳에 박혀있다.


우선 강을 거슬러 오르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런던 경제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은 이력 때문일까? 마이클 루이스는 예측 가능한 경로를 따라 번듯한 세계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우편물 관리팀의 야간 당직자로 취업했다 세계 최고의 채권 트레이더가 된 남자나 아무도 망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 채권을 공매도하기 위해 직접 상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 남자의 주요 먹잇감이다. <라이어스 포커>는 이 맛이 조금 연하긴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루이스 라니에리가 <빅 쇼트>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책을 <빅 쇼트>의 프리퀄이라고 하기엔 양심이 허락지 않지만 설정집 정도로는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이클 루이스가 살로몬 브라더스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마 <빅 쇼트>도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살로몬 브라더스에 다니며 경험한 일을 기록한 르포이자 에세이다.


둘째는 이게 이야기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현장감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에서 오는 것 같다. 하나는 깊이 있는 정보, 둘은 구성 능력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마이클 루이스의 책에는 거의 삼국지 수준으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심지어 그들에겐 모두 고유한 서사가 존재한다! 저자는 수많은 정보들이 어느 순간에 어느 순서로 나와야 하는지 절묘하게 아는 것 같다. 얼핏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가, 그것도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펼쳐지는데도 불구하고(영화 <빅 쇼트>를 떠올려보라. 주요 인물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 이야기는 늘 극적인 방식으로 한 곳을 향해 수렴한다. 문장력이 좋은 건 당연한데, 문장 자체를 잘 지어낸다기보다는 문장을 늘어놓는 순서를 잘 안다고 말하는 게 더 맞는 평가일 것이다. 사실을 가지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라이어스 포커>는 마이클 루이스의 농익은 작품들에 비해 모든 스탯에서 하나 둘 정도가 빠진 느낌을 주는 책이다. 구성의 탄탄함도, 인물의 매력도, 사건의 흥미 측면에서도 다 그렇다. 하지만 마이클 루이스라는 이름을 지우고, 처음이라는 말에 담긴 이해를 몇 움큼 꺼내보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러드
힐러리 맨틀 지음, 이경아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황무지로 둘러싸인 페더호튼은 과거에 박제된 야생의 마을이다. 주민들은 몽매하고 미신에 빠져있다. 그곳에 가톨릭 교회가 존재한다는 건 기적이었다. 교구 신부는 무신론자였다. 수녀원장은 폭군이었다.


어느 날 홀연히 페더호튼에 들이닥친 주교는 이 어리석은 마을을 개조하기 위해 변화를 요구한다.


"현지어 미사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나? 생각해 본 적은 있고? 나는 그런 미사에 대해 생각 중이네." (p.20)


교구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사람들이 이해하게 될 거라는 뜻입니까?"

"바로 그걸세."

"라틴어 미사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 사람들이 영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고생 중입니다." (p.21)


이상의 대화는 결코 과거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교구 사제의 보수성과 페더호튼 주민들의 무지, 그리고 현지 사정도 모르고 무리한 행정을 펼치는 주교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교구 신부가 반항하는 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었다.


"이 어리석은 돼지야."(p.39)


정말 막장이 아닐 수 없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주교가 파견한 젊은 신부 플러드(Fluud)가 나타난다. 그의 등장 이후 페더호튼에서는 주교의 바람대로 '변화'가 나타난다. 새까만 신부복에 깃든 이 신부는 악마인지 천사인지 모를 신비한 행동을 거듭한다. 잠들어 있던 페더호튼이 깨어나고 그 기지개와 함께 우연인지 기적인지 모를 사건들이 한데 뒤엉켜 쏟아진다. 마치 홍수(Flood)처럼.


나는 예전부터 종교를 만든 건 악마라고 생각해 왔다. 종교는 인간이 신과 직접 소통하는 것을 이단으로 간주한다. 종교는 교리 없이는 신앙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기독교가 교회에 오지 않는 것을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로 간주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이교도가 아니라 늘 팬데믹이었다.


사제복은 왜 검을까? 나는 속을 드러내지 않는 그 칠흑의 빛을 볼 때마다 악마가 떠올랐다. 그들은 끊임없이 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죄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자비로운 신은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하여 주지만, 사제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다시 죄인이 된다.


전통적 관점에서 플러드는 악마처럼 보인다. 아무도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설교인지 유혹인지 모를 묘한 말들. 나는 플러드가 악마 코스프레를 하는 천사 측의 스파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라는, 악마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들을 유혹해서, 울타리를 넘어, 다시 자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천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에 관한 생각 프로젝트
마이클 루이스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이클 루이스 정주행 중이다. 이번 주인공은 <생각에 관한 생각 프로젝트>. 행동경제학이라는 분야는 이제 너무 유명해졌으니 간단히 짚고만 넘어가자. 기존의 경제학은 판단 주체들이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간주했다. 인간은 어리석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논리적인 사람들이 모여있는 주식 시장이 주기적으로 버블을 형성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가정인지를 의심해 볼 수 있지만, 주류 경제학자들의 눈에 그러한 현상은 실수, 혹은 완벽히 똑똑하지는 못한 소수의 '모지리'들이 끼어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주식 거래를 경제학 교수들에게만 허락한다면 시장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행동경제학은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실수를 저지른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특별한 주장이 아니다. 행동경제학은 이 말에 '체계적'이라는 단어를 붙임으로써 비로소 주류 경제학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인간은 실수를 남발한다. 그것도 아주 체계적으로.


마이클 루이스가 <머니볼>을 쓸 때만 해도 그는 행동경제학이 뭔지 잘 몰랐다고 한다. 물론 그 단어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책 <머니볼>이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편견과 편향, 체계적 실수와 얼마나 가까웠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주변에서 그런 얘기가 들려오자 마이클 루이스는 행동경제학이란 게 뭔지 제대로 파볼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이스라엘로 날아간다.


행동경제학의 아버지라 부를만한 사람은 놀랍게도 두 명의 이스라엘 '심리학자'였다.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 대니얼은 항상 자신의 주장에 의심을 갖는 자신감이 부족한 남자였고 아모스는 자신의 생각을 항상 확신하는, 그리고 거의 모든 것에서 그 생각이 맞았던 천재 중의 천재였다. 아모스는 대니얼을 만나자마자 저 수줍고 움츠린 남자가 사실은 천재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두 사람이 공동 연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도 사람들은 대개 아모스가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대니얼이 그걸 받아 적는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대해 아모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확히 그 반대라니까!"


공동 연구는 그래서 참 어렵다. 누구의 공이 더 큰가. 이 연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누구 때문에 이 연구가 성공한 것인가. 사이먼 앤 가펑클이 그랬고 퀸도 마찬가지였다. 그 끝은 늘 불행이었고 대니얼과 아모스에게도 특별한 건 없었다. 그래도 초중반까지는 두 사람의 결속이 대단했다. 서로가 영혼의 파트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두 사람이 게이라는 의심을 살 정도였다. 두 사람은 논문의 아이디어가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대화를 하면서 덧붙여 나갔으니까. 누구의 이름을 첫 번째 논문 저자로 쓸 것인가에 대해서도 그들은 동전을 던져 결정할 정도였다. 두 사람은 자웅이 동체인 지적 생명체였다.


파국은 세상의 오해가 아모스의 공을 더 높이 쳐주면서 시작됐다. 분명한 공동 연구였음에도 맥아더 천재상은 아모스에게만 수여됐고 아카데미 회원 자격도 마찬가지였다. 스탠퍼드는 종신 교수직을 두 사람 모두에게 제안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진짜 천재 아모스만 데려오면 옵션처럼 대니얼이 따라붙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무지는 샴쌍둥이를 둘로 갈라 한 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생각에 관한 생각>은 굉장히 재미있는 책이지만 아주 두껍고, 그래서 도전이 쉽지 않다. 나는 오히려 이 책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한다. 두 사람의 핵심 연구들이 잘 정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재미있는 뒷얘기들이 주구장창 쏟아지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7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랭 로브그리예는 이름이 참 멋지다. 로브그리예만으로도 충분한데 알랭까지 붙어 있으니 더 그렇다. 써놔도 예쁘고, 읽으면 더 예쁘다. 그런데 <진>은 별로 아름답지 않은 소설이다.


읽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소설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누보로망'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직역하면 '새로운 소설'이라는 뜻인데, 사실 내용이 워낙 전위적이라 비판을 위해 만들어진 멸칭이다. 미술사에 '인상파'가 탄생하게 된 계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인상파와 마찬가지로 누보로망도 멸칭으로 시작됐지만 그 세계에서는 확고한 영역을 구축했다. 심지어 누보로망은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라 부를 수 있는 누벨바그(새로운 물결)에도 영향을 끼쳤다. 1961년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알랭 레네 감독의 <지난해 마리앵바드>는 알랭 로브그리예가 각본을 쓴 영화다.


나는 '앙티로망(anti roman)이라는 말이 이 소설을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장 폴 사르트르가 나탈리 사토르의 1948년작 <어느 낯선 이의 초상>을 평하며 일컬은 말이다. 반소설. 소설 같지 않다는 말. 소설의 구성 요소들을 부정하거나 그 효과를 정반대로 추구하는 행위. 그러니까 이 소설이 재미있을 리가 있나. 이 작가들은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걸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문학동네는 <진>을 '실험적인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선전하는데 독자는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기대하는 그 무엇도 이 책에서 얻을 수 없다.


아주 지적인 소설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야기를 하나씩 뜯어 퍼즐 조각을 맞추듯 의미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만큼 피곤하다. 그 왜 유튜브 해설 영상으로만 봐야 재미있는 영화가 있지 않은가? <진>은 딱 그런 소설이다. 각 잡고 읽어야 뭐라도 나오는데 각이 잘 안 잡힌다. 몰입이 안 되니까. 이처럼 전위적이면서, 읽기도 쉽고, 재미까지 있는 소설을 떠올려보면, 쉽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왜 또 이 작가의 책을 손에 들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미 <질투>에서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질투>에 비하면 <진>은 양반이다. 책장을 더듬어 더듬어 보면 미스터리 스릴러의 조각이 만져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도대체 왜 이 책을 골랐을까? 그건 이 소설이 아주 얇기 때문이었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유일한 미덕은 짧게 쓴다는 점이다. 아무리 거지 같아도, 125p는 버틸 수 있겠지.


이야~ 근데 그게 쉽지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 감염 예고 - 팬데믹을 예견한 목소리는 왜 묵살되었는가
마이클 루이스 지음, 공민희 옮김 / 다섯수레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앙이 터진 뒤에야 주목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운이 좋을 땐 수년간, 나쁘면 죽을 때까지 조롱을 받다 반짝하고 영웅이 된다. 마이클 루이스는 그런 사람들만 찾아다니는 저널리스트다. 내가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반복해서 시청한 영화가 <빅쇼트>와 <머니볼>인데, 둘 다 마이클 루이스의 동명 서적이 원작이다. <세계 감염 예고>가 어떤 내용일지는 이 얘기만으로도 어느 정도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했다. 박쥐가 보유한 이 바이러스는 유비에게 목숨보다 중요했던 사통팔달의 형주, 오늘날의 우한에서 창궐해 세계로 뻗어나갔다. 경중은 있었지만 사실상 세계는 식물이 되었다. 물동은 멈췄고 사람은 갇혔다. 경제 위기는 수습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 바이러스 때문에 영원히 뭔가를 '다시 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사람이 숨을 거뒀다.


팬데믹을 미리 막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마이클 루이스가 놓칠 리가 없었다. 미국은 신종 인플루엔자와 사스(이것도 코로나다)를 경험하며 질병통제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를 계기로 꽤 그럴듯한 계획도 세웠다. 그래서 코로나19는 아주 중요한 기회였다. 이 계획이 잘 돌아갔다면 미국은 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빅쇼트>와 <머니볼>의 주인공은 결국 영웅이 됐지만 <세계 감염 예고>의 주연들은 관객 하나 없는 무대 뒤로 쓸쓸히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사당을 무장 점거할 정도로 정신 나간 광신도를 거느린 트럼프조차 코로나19 대응 실패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 어디를 봐도 이길성 싶지 않은 조 바이든한테 말이다.


나는 재난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는데 내부에서 이뤄지는 의사결정 과정을 초근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늘, 두 부류의 인간이 등장한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령 그 결정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더라도 과감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 나는 전자를 불안이, 후자를 용감이로 부른다.


불안이들은 보통 완벽한 계획을 추구하고 선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많고 판단이 느리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초유의 사태에선 무기력하다. 용감이들은 판단이 빠르고 기민하게 행동한다. 완벽한 계획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움직이면서 대응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넘어질 수도 있지만 그건 그저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이들을 따라가면 숨이 넘어갈 것 같고,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 짜증이 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불길 밖으로 나와 숨을 돌리고 있다.


재난 상황에서 판단이 어려운 이유는 최고의 판단이 최악의 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질병 확산의 초기에 국경 폐쇄와 격리를 결정했다면 사람들의 분노를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다. 팬데믹을 막은 게 그 판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문을 열고 나와 평화로운 세상을 보며 이럴 줄 알았다고, 별거 아닌 일에 과잉 대응을 했다고 조롱을 퍼붓는다. 재난 대응이란 불길이 활활 타올라 세상을 모조리 태우고 난 뒤에야 그 가치를 온전히 평가받을 수 있다. 정말 지독한 아이러니다. 그래서 판단은 늘 미움받을 용기를 동반한다. 그래도 코로나19는 꽤 좋은 상황이었다. 감염이 전 세계로 퍼져서 어떤 판단이 옳았는지 지구인 모두가 알 수 있었으니까. 그 기회를 놓친, 실패한 영웅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