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함께 춤을 - 시기, 질투, 분노는 어떻게 삶의 거름이 되는가
크리스타 K. 토마슨 지음, 한재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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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분노, 시기, 질투, 슬픔, 우울,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포장지를 걷어낸 순수한 감정들. 나는 이걸 '부정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우리는 감정에 이중잣대를 들이민다. 기쁨과 환호 행복은 늘 갖고 싶은 최고가의 명품이지만 그 반대에 있는 것들은 진열대에도 오르지 못한다. 이것들은 모두 어떻게 해서든 버리고 싶은 쓰레기들이다.


나는 화를 잘 낸다. 하지만 가장 화가 날 때는 화를 내는 나에게 화내지 말라고 할 때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다 너만 손해다. 화내서 이룰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화를 내는 게 아니다. 화를 내고 싶어서 화를 내는 것이다. 모욕을 당하거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나는 화가 난다. 그건 내가 나와 내 일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의미다. 사랑하는 것이 망가졌을 때 화를 내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럴 때 웃으면 일류가 된다는데, 나는 일류가 되고 싶지 않다. 그저 나 자신에, 내 감정에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다.


당신은 부정적인 감정이 당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 채울 때 어딘가에 그걸 버리거나 깨끗이 씻어내고 싶을 것이다. 이해한다. 그 감정이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많이 뜨는 것 같다. 마음 수련이니 명상이니 긍정적 사고라든지 낙천이 몰고 오는 행운 같은 것들. 내게는 부정적 감정들이 오히려 연료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내 마음은 실로 부정을 태워 태양을 만드는 핵융합 용광로다. 나의 부정은 중력을 만들어 부정을 끌어모으고 끌어모은 부정의 힘으로 더 큰 중력을 만든다. 나는 이 구덩이를 '공'으로 비워두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집착을 벗어던지고, 오욕칠정을 끊어내고, 고통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욥이 되고 싶지 않다. 내 꿈은 성인이 되는 게 아니다. 나는 인간이 되고 싶다. 인간을 초월한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위버멘시가 아니다. 나는 자라투스트라가 아니다. 나는 석가가 아니다. 나는 예수가 아니다. 나는 공자가 아니다. 나는 나다. 나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다. 소리 지르고, 울고,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으르렁 대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분노로 입을 닫고 싶다.


이것이 악마와 함께 사는 법이다.


저자는 간혹 모호한 태도를 보여 나를 화나게 한다. 이 감정들을 흘려보내지 말고, 이겨내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끼라고 하면서, 어느 순간 너무 지나친 건 좋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공자를 비판하면서 은근슬쩍 중용의 도를 밑장에서 빼든다. 나는 지나친 분노가 터지는 이유는 지나친 분노가 터질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로 인해 마음에는 구멍이 나고 인간관계는 파괴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삶 아닌가? 그렇게 뚫린 구멍들을 평생 기우며 살아가는 게, 인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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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없이 이해하는 지진의 과학
홍태경 지음 / 김영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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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진에 대해 알고 싶은 건 오직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지진이 오나요?


경주와 포항에 들이닥친 규모 5 이상의 두 지진은 대답한다. "네, 옵니다."


2011년 후쿠시마를 집어삼킨 동일본 대지진의 규모는 9.0이었다. 1945년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100만 개와 맞먹는 수준이었으며 1900년 이후 지구에서 발생한 지진 중 네 번째로 강력한 놈이었다. 일본 역사에는 처음으로 기록된 규모였다. 이런 대규모 지진은 주로 일정한 주기를 갖고 도래하는데 동일본 대지진은 869년 이후 1,142년 만에 다시 찾아온 짐승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은 단순히 땅을 울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진과 함께 발생한 해일의 최대 파고는 40m에 달했으며 이는 아파트 14층 높이에 달하는 크기였다. 해일은 시속 700km의 속도로 후쿠시마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그곳에 뿌리 박혀 스사노오와 싸워도 지지 않으리라 자부하던 원자력 발전소를 산산조각 냈다.


동일본 대지진을 이렇게 상세히 묘사하는 이유는 이 지진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진앙지 쪽을 향해 최대 5cm가량 이동했기 때문이다. 경주와 포항의 지진은 우연이 아니었다.


말했듯이 큰 지진은 주기성을 갖는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기의 역사를 끈질기게 기록해 둔 탓에 우리는 당시에도 굉장히 큰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말은 언제든 그 정도 규모의 지진이 현재의 한반도를 강타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행히 우리 정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고층 건물과 신축 건물들에 대한 내진 설계 기준을 높였고 지진의 근본 원인인 단층을 찾는 노력을 기울였다. 지진 피해를 줄이려면 무너지지 않게 대비하는 것 못지않게 대피 경보가 중요하다. 최근엔 툭하면 울리는 휴대폰 경고 문자로 피로감이 쌓였지만 어쨌든 시스템이 동작하고 있다는 건 확인한 셈이니 아주 얻을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내 머릿속에서 경주와 포항의 지진은 이미 잊힌 지 오래 기 때문이다. 아마 그 지역 사람이 아니라면 당시에도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 수 있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재앙에 대비하는 사람들은 늘 이런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재난 영화의 클리셰로 등장하는 파멸을 예고하는 과학자와 그걸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정부관계자는 결코 남 얘기가 아니다.


지진이 서울을 덮치지 않는 이상 이 무관심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남산타워가 쓰러지고 시그니엘의 허리가 반으로 꺾여야 우리는 비로소 지진의 존재를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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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최호영 옮김 / 생각연구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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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견해에 따르면 감정은 보편적이다. 지역, 나이, 문화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슬픔과 기쁨과 분노와 기타 등등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을 똑같이 느낀다. 예를 들어 이혼 숙려 캠프에 빌런이 등장하면 '분노 뉴런'이 활성화되어 심박수와 호흡, 혈압을 상승시킨다. 그들의 아픈 과거사를 듣고 나면 이제 '슬픔 뉴런'이 켜질 차례다. 우리 뇌는 우리가 이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도록 특별하게 배선되어 있다. 웨이퍼에 감광 용액을 바르고 EUV로 깎아 회로를 그리듯, 뇌는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제작되어 새 생명에 탑재된다. 이것이 미국 영화와 한국 음악과 유럽 소설이 전 세계인에게 먹히는 이유다. 감정은 보편적이니까.


이 책은 감정에 대한 고전적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저자가 '구성된 감정 이론'이라고 부르는 견해에 따르면 이혼 숙려 캠프의 빌런을 봤을 때 우리에게 닥친 일은 매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빌런이 미친 짓을 했을 때, 그 장면이 내 안의 분노 회로를 촉발해 앞서 언급한 전형적 신체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순간 분노를 느낀 까닭은 특정 문화 속에서 성장한 나의 입장에서 볼 때, 특정한 신체 감각이 미친 짓을 목격한 것과 동시에 일어날 경우 '분노'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이미 오래전에 '배웠기' 때문이다.


'배웠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해 우리가 분노라는 개념을 배우지 않았다면 동일한 신체 변화가 분노로 해석될 일은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엔 아주 즉각적인 반론들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이 기분들은 다 뭐란 말인가? 내가 분노를 배우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들도 없었을 것이란 말인가? 내가 머릿속에서 분노라는 개념을 지우면 분노는 사라지고, 신체는 평화를 찾고, 나는 비로소 해탈하게 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우리의 신체가 감각 기관으로부터 수집한 신호, 그것이 촉발한 신체의 변화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핵심은 그걸 해석하는 게 뇌고, 뇌는 문화적으로 학습한 개념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임의로 결합한다는 언어학 이론을 연상케 하면서 동시에 그냥 말장난 아니야?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민하게 느낀다는 '눈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눈치가 없는 사람을 우리가 뭐라고 불렀지? 개념이 없는 사람 아닌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분위기가 촉발한 기류의 변화를 포착할 만큼 '감정의 해상도'가 높지 않은 것이다. 왜? 그 변화를 해석할 개념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 연애하는 동안 이성으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어본 사람이라면 구성된 감정 이론의 핵심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이 가르쳤지. 내가 사람 만들었어.'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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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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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하나는 거짓말이다.


- 이 소설의 장르는 판타지다.


- 등장인물 중 하나는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다.


- 모든 소설가는 우울증 환자다.


- 소설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중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게 제발 거짓말이길 기도할 만큼 우울하다.


- 이야기를 참고 또 견디다 보면 마법 같은 정화의 순간이 온다. 우리 손을 잡은 고난이 눈에 선명한 현실임에도,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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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브레인 - 우리 몸과 마음을 컨트롤하는 제2의 뇌, ‘장(腸)’
에머런 마이어 지음, 서영조 외 옮김 / 레몬한스푼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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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가 뒤틀린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뒤틀린다. 누군가 위를 찢어버릴 목적으로 쥐어짜는 것 같아 잠에서 깰 정도다. 이상한 일이다. 스트레스는 정신의 영역일 텐데, 어떻게 물리적인 기관들이 영향을 받는 걸까?


생각이 모든 걸 좌우한다는 말, 일체유심조라는 이야기에는 가해자의 논리가 숨어있다. 마음의 평온이 결국 나에게 달린 문제라면 외부 조건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모두 헛수고이지 않은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내가 내 마음을 잘 다스렸다면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런 생각은 행동이 필요할 때 명상이나 하자는 비겁한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일일지니, 다투지 말고 자신의 마음이나 돌아보라. 정말 불쉿이다.


<세컨드 브레인>은 우리의 감정이, 생각이, 마음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장 내 미생물이라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실체가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장과 장 내 미생물군은 밀접한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감정과 통증 민감도,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의사결정을 좌우할 수도 있다. (p.22)


영어로 직감을 gut(내장) feeling이라고 하는데 괜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과 뇌는 정보를 '양방향'으로 전달할 수 있는 굵은 신경다발과 혈류를 이용해 소통한다. 이 신경절달경로를 통해 호르몬과 염증성 분자가 부지런히 오가며 뇌와 장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것이다. 장은 고유한 신경계를 갖고 있는데 약 5천만~1억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된다. 이는 뇌-신체 연결의 중추라 불리는 척수와 맞먹는 수치다.


장 신경계가 수집하는 풍부한 감각정보는 뇌에 전달되고, 뇌는 이를 분석해 장의 기능을 조절한다. 우리 몸은 이 과정에서 '감정을 느낄 수'있다. 감정을 감각정보 그 자체로 볼 것이냐, 아니면 뇌가 해석한 결과로 보느냐는 흥미로운 논쟁이긴 하지만 별 의미가 없다. 이는 물질이 먼저냐 생각이 먼저냐를 놓고 수천 년간 싸워온 낡은 유물-관념 전쟁을 연상케 한다. 해봐서 알겠지만 이는 헛수고일 뿐이다. 둘은 미묘하게 얽혀있다. 분명히 밖이라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면 어느새 안이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정말 놀라운 건 장 내 메생물의 관점에서 이 '연결'을 바라볼 때 발생한다. 미생물도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존이 최대 과제이며 자신의 DNA를 가능한 많이 남기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이 미생물들이 번식에 유리한 음식물을 달라고 뇌에게 조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을 먹고 우울감이 감소하는 걸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당분이 장 내 어떤 미생물의 주요한 먹잇감이라면, 이 미생물들이 특정 신경전달물질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게 지나친 상상일까?


과학이 발전해서 좋은 점은 호기심이 해소되서가 아니다. 새로운 질문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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