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도 배웅도 없이 창비시선 516
박준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애가 돌아왔다. 변함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사라진 것들, 지나간 것들, 그리운 것들을 노래한다. 박준의 시에는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 여백은 조용히 다가와 몇 번이고 응시하게 만든다. 나는 이 여백을 통해 박준을 오해하는데, 아마 이걸 사랑이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박준은 당황할 수 있다. 본인이 하지 않은 말들을 꼽으며 사랑한다 말하니까. 나에게 박준은 그런 사람이다.


8년 만에 돌아온 최애는 53편의 시와 1편의 산문과 함께였다. 1년에 7편 정도를 쓴 셈이다. 나는 이 느림을 원망하면서도 그 안에서 죽어간 시들이 떠오르면 다시 숙연해진다. 53편의 노래가 나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단어가 죽어갔을까. 얼마나 많은 문장이 버려졌을까. 얼마나 많은 시들이 사라졌을까. 그러나 그 단어들은, 문장은, 시는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는 것처럼, 언젠가 다시 기적처럼 나타나 우리 뒤에 설 것이다. 느리게 도착하는 시. 그래서 만남이 더 기적 같고 기쁜 시.


박준의 시는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마주치길 기대하며 매일 터미널에 나가는 사람을 얘기하는데, 그의 시를 기다리는 마음과 꼭 같다. 기대했지만,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고 있고, 그래서 이루지 못했을 때 실망하지 않는 거고, 실망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는 건데,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지 하는 순간 등 뒤를 두드리며 조용히 서 있는 게 박준의 시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만나고, 그렇게 헤어졌다.


나는 박준을 두고 다시 내 길을 간다. 나는 그의 시를 가져다 며칠은 지어먹었다. 눈으로만 읽기엔 아까운 시였으니까.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의 시를 꾹꾹 눌러 담고 싶었다. 섬세하지 못한 몸에 시는 거의 다 빠져 흘러가버렸지만,


나는 그 스침에도 행복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8-03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의 분위기가 다가오는 리뷰입니다. 좋네요

한깨짱 2025-08-10 08:08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뵙습니다. 박준처럼 인사하고 싶은데, 마중 없이 오셨으니, 배웅도 없이 보내드립니다.

바람돌이 2025-08-10 10:21   좋아요 1 | URL
이러 너무 멋있는 인사인데요. 몰랐는데 한깨짱님 시인이셨군요.

한깨짱 2025-08-17 09:34   좋아요 1 | URL
시는 다른 세계의 언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곳에 있죠.
 
초가공식품, 음식이 아닌 음식에 중독되다
크리스 반 툴레켄 지음, 김성훈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책을 읽으면 도대체 뭘 먹어야 하나, 걱정이 들면서도 그게 너무 크다 보니 오히려 포기를 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세상 자체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굴러가는데 나 혼자 무슨 힘으로 내 길을 가겠는가. 건강식이라고 불리는 저칼로리, 저당, 저탄수, 고단백 식품들조차 초가공의 중심에 서 있는 게 현실이다. 입맛은 정직해서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식품 업계는 빠르고 영리하다. 그들은 우리보다 몇 수는 앞서간다.


어떤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 몸에 그 음식이 제공하는 영양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너무 그럴듯해서 믿기 힘든 이 이야기는 사실인듯하다. 진화 과정에서 식욕이 생존에 얼마나 유리한 욕망이었는지 상상해 보자.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는 욕망은 좀처럼 꺼뜨리기 어려운 뜨거운 감정이라는 걸 잘 알 것이다. 이걸 이용해 우리 몸이 부족한 영양소를 채운다는 생각은 멋짐을 넘어 우아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과거와는 다르게 거의 항상 과영양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식욕이 아주 유용한 욕망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식품 업계가 이 메커니즘을 너무 잘 이용한다는 게 우리의 비극이다.


초가공식품의 특징은 크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부드럽다. 그래서 먹는 속도가 빠르고 분당 섭취 칼로리가 높으며, 혈당을 급격히 올리고, 섬유질이 적어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아 금방 허기가 진다. 음식이 부드러운 건 치과적 문제까지 야기하는데, 이빨이 운동을 안 하니 골밀도가 낮아져 쉽게 깨지거나 썩는 것이다.


초가공식품은 원물의 영양소를 흉내 내어 화학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양소가 정확히 우리 몸에서 어떻게 흡수되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지 못한다. 레몬에서 추출한 비타민C를 먹는 것과 레몬을 먹는 것 사이에는 영양학적 관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영양소는 음식이라는 맥락에서 떨어지는 순간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러니 초가공식품이 건강을 위한답시고 여기저기서 영양소를 떼와 붙인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미각 신호와 영양소의 불일치는 폭식의 원인이 된다. 선술 했듯 뭔가가 당길 때는 그 음식에 담긴 영양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가공식품은 맛과 영양을 흉내 낼 뿐이기 때문에 몸은 여전히 영양소가 결핍된 상태로 유지되고, 끊임없이 먹으라는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다. 초가공식품은 우리 몸을 해킹하고 있다!


감미료, 유화제, 방부제 등이 장내 미생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까지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이 모든 걸 단번에 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익히지 않은 채소와 생선, 고기 등으로 식단을 꾸린다. 물론 양식 생선과 고기에는 항생제라는, 채소에는 농약이라는 빌런이 남아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정민 배우의 말처럼 넷플릭스를 대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재미있다. 그간 한국 문학계에서 잘 보이지 않던 궤가 그려진다. 잡다한 일상의 비루함을 연로로 삼아 이 시대의 문학을 이끌어가던 부류가, 이제는 그게 보편적 현실이 되어버린 시대를 만나, 모두의 마음을 관통하는 감성을 얻은 것 같다.


물론 자기 세계를 시대와 연결하는 재능을 모두가 가진 건 아니다. 아마 비범과 평범의 차이는 그 한 끗일 것이다. 그 작은 다리를 놓을 수 있느냐 없느냐, 그걸로 세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허물을 벗는다. 그러니 얼핏 과소평가로 들릴 수 있는 이 문장들에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딱 하나만 고르라면 못할 짓이고 두 개를 고르라면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와 <혼모노>다. 선택이 더 주어진다면 <스무스>까지. 하지만 차례에 멈춰 하나하나 소설의 이름을 짚어나가다 보면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도 눈에 밟히고 <메탈>도 발목을 잡는다. 그만큼 괜찮은 소설집이다.


'덕질'이라는 소재가 특별한 건 아니다. 하지만 성해나의 <길티 클럽>은 좀 더 날카롭다. 덕질이 만든 커뮤니티의 속성을 정확하게 꿰뚫는다. 아무도 모르는 무언가를 혼자서만 좋아하는 마음. 이런 마음은 필시 설명을 부른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걸 좋아하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후의 세계는 죽림칠현의 뺨따귀를 날릴 정도로 현학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공고해진 세계는 역설적으로 더 큰 담을 쌓아 '일반인'의 출입을 허락지 않는다. 덕후들이 배교하는 순간은 우리 '작은 것들의 신'이 대중의 시야에 들어올 때다. 뭣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나의 신을 만지고 환호한다.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이를 계기로 덕의 세계는 둘로 나뉜다. 입덕이 뜨기 전이냐 후냐. 나는 진짜 너는 가짜. 진또배기를 가르는 기준은 하나 더 있다. 나의 신이 윤리와 도덕의 늪에 빠져 추락했을 때조차 그것을 신으로 섬길 수 있느냐!


<혼모노>는 이미 제목부터 진짜와 가짜가 무엇인지 묻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소재는 무속이다. 어려운 무속은 아니고 점집의 이야기다. 자기가 모시던 신이 앞집으로 이사 온 새파랗게 젊은 여자의 몸으로 옮겨가면서 발생하는 몰락과 질투의 이야기. 지질하고 구차하게 흐를 수도 있는 이야기를 대마신전쟁 급의 에픽으로 만든 건 전적으로 성해나의 재능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결투씬'은 염력이 난무하고 부적이 날아다니는 판타지가 아님에도 숨죽여 집중하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다. 승부가 갈리는 순간엔, 약간 소름이 돋을 정도다.


나는 박정민 배우가 완전 오버를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령에 따랐을 뿐!? - 복종하는 뇌, 저항하는 뇌
에밀리 A. 캐스파 지음, 이성민 옮김 / 동아시아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은 명령에 복종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경험적으로 이는 더 이상 증명이 필요치 않은 명제다. 아우슈비츠, 르완다, 캄보디아, 베트남, 광주. 대학살의 서사는 늘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에필로그로 이야기를 닫는다. 아무리 들어도 끔찍한 결말이다.


유대인과 유럽인들이 한나 아렌트에게 단단히 화가 난 이유는 그녀가 나치는 전혀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던져 넣으려면 웬만한 마음으로는 불가능해야만 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우리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평시였다면 그는 유능하고 존경받는 정부 관료가 됐을 것이다. 그보다 더 명령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악이 평범함에서 나온다는 아렌트의 말은 틀렸다. 아이히만은 비범했다. 악은 평범과 비범 모두에서 나올 수 있다. 필수 조건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 '명령에 따르는'것. 머릿속에서 비판적 사고를 제거하는 것.


사람들이 어떻게 끔찍한 명령에 그토록 쉽게 따르는지 연구하는 건 의외로 찬반이 따른다. 우선 반대하는 쪽은 이런 연구가 가해자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개인의 책임을 줄이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혹여나 이 연구가 복종이 인간 본성에 내재된 불가항력적 성향이라는 과학적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 모두가 같은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동일한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가해자는 그저 운이 없는 사람, 오히려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 복종의 지옥에서도 늘 불복의 영웅들이 존재하는 것 역시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따라서 이 연구는 결국 어떻게 하면 우리가 복종의 사슬을 끊고 선을 행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을지 밝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를 대학살의 예방주사라고 부르자.


<명령에 따랐을 뿐>이 특별한 점은 이 과정을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명령을 따를 때, 부당한 명령을 이행할 때, 실제로 뇌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추적한다는 것이다. 얼핏 들어도 쉽지 않은 연구라 느꼈는데 내용을 보며 확신했다. 정말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재현의 문제로 골치를 썩는 심리학계거늘 뇌파를 측정한다고 동원된 기계, 그 인위적 실험 환경에서 획득한 결과들을 어떻게 다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의 재미는 핵심 주제를 말할 때보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이리저리 실험을 비틀 때 발생한다. 참 애쓴다. 결과는 비록 녹록지 않더라도, 그 노력에는 고개가 숙여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애슐리 엘스턴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짓말은 첫 번째가 중요하다. 거짓말은 카드로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모든 게 무너진다. 이유를 만들어 붙일수록 기둥은 무게를 더한다. 끝까지 속이려면 아무도 뒷 이야기를 물을 수 없게 깔끔한 거짓말을 던져놓은 뒤 끝까지 입을 다무는 것이다. 그러니 거짓말은 역시 첫 번째가 중요하다.


소설의 배경은 미국의 남부.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젊은 남자에게 여자 하나가 붙었다. 남부의 분위기가 원래 그런지 남자에게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동네 친구들이 가득하다. 다들 유복하고, 시간이 많고, 그래서 자기 베프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이 여자를 경계한다. 여자의 이름은 루카. 남자에게는 애비 포터라 불린다.


본명을 숨겨야 할 이유가 뭘까? 여자는 유산을 노리고 들어온 흔한 사기꾼일까? 파보니 건실한 청년인 줄만 알았던, 그러니까 우리가 미국인이라고 하면 떠올릴법한, 고속도로 대형 옥외 광고판의 흰 이빨을 드러낸 채 밝게 웃는 전형적 금발 미남이, 사실은 남부의 숨겨진 어둠을 지배하는 실력자인 것 같다. 그렇다면 루카의 접근을 사기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루카는 임무를 받은 것이다. 임무를 받았기에, 그녀는 애비 포터가 된 것이다.


다음 질문은 누가 그 임무를 줬냐는 것이다. 건실한 청년의 경쟁 조직? 쿠데타를 위한 내부의 이인자? FBI? 경쟁 조직이나 내부의 이인자가 고객이라면 루카는 프리랜서나 에이전시에 소속된 회사원일 수 있다. FBI가 고객이라면 그녀의 정체는 FBI일 것이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상대할 때는 CIA가 개입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규모도 작고, 또 FBI 같은 국내 요원이 동반하지 않는 이상 CIA는 자국 내에서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 루카가 어떤 사람이면 이 이야기가 더 재밌어 질까?


FBI는 식상하고 프리랜서나 에이전시 소속이라면 좀 판타지 같은 면이 있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는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전직 군인이나 정보부 요원이 전문적으로 약탈, 파괴, 정보를 수집하는 시장이, 정말로 존재할까?


뭐 어쨌든 소설은 꽤 잘 굴러간다. 부분 부분 반전이 있고 완전히 뻔하지는 않게 적당한 긴장과 호기심을 유지한다. 키워드는 배신이다. 더 이상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