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TV에서 산에 사는 아이에 대해 본 적이 있다. 아이의 집은 시골 마을에서도 꽤 떨어진 산 기슭에 있었다. 아이는 고무신을 신었고 하얀 천에 직접 황토물을 들인 옷을 아래 위로 걸치고 다녔다. 주로 하는 일은 겨울산에 뿌리 내린 풀들을 맛보는 것이었고 나무 줄기를 따라 흐르는 수액의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았는데 학업 성적이 우수했고 상장이 수십장이었다. 특히 표현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평소 즐겨 보지 않는 TV를 끝까지 본 데는 아이답지 않은 기행이 눈길을 끈 탓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대목, '특히 표현력이 대단하다'라고 한데서 눈길이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의 표현력이 대단한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바로 자연이 뿜어내는 색, 향기, 맛, 소리들이 표현의 보고였다. 녹색을 12색 색연필 중에 하나로 알고 있는 나와 탱자 나뭇잎의 녹색, 겨우 살이의 녹색, 쑥풀의 녹색을 경험한 아이가 표현해내는 감수성은 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줄줄이 복사한듯 서 있는 가로수들도 곰곰히 살펴보면 저마다 개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써내려간 '가로수'라는 단어에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생생한 실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나의 언어는 개념이라는 상자에 담긴 기성품일 뿐이었다. 개념의 역할은 차이를 죽이는 것이고 '차이'의 부재는 곧 표현의 부재였다.  

똑같아 보이는 사물 속에서 '다름'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플라타너스가 뿜어내는 향기, 바싹 마른 껍질의 감촉, 떨어진 잎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무성한 가지가 발하는 푸른 잎빛을 앞으로도 결코 전달 할 수 없을 것이다.

몇 자 되지 않는 글을 쓰는데 이리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 죽어 있는 단어에 오랜 시간 볼터치를 하고 아이라인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화장을 한들 살아 있을 적의 생생함이 돌아오겠는가. 


가야할 길이, 더욱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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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답답하다. 마음이 확신으로 가득찼다가도 어느새 축축한 우울의 강바닥에 납작 엎드려버린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초조. *'삶은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야 하는건데 어느새 늑대에게 쫓기는 토끼가 되었다.

자꾸 옆, 뒤, 앞, 위 사방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간격은 더 벌어지는것만 같다. '얼마나 빨리 도착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얼마나 밝게 활활 타오를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라고 다짐한 일도 헛일이다.

나는 아무래도 즐기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지만 과연 무엇을 위한 일인가? 내 삶이 즐겁지 않다면 이 모든게 왜 필요한 걸까. 수고 롭고 짐진 자들이 찾는 곳이 수고로운 짐이 된 것 처럼 나를 위해 한다는 노력들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나는 다 타버리기 위해 불 붙는 양초고 죽기위해 걷는 Mr. 좀머다.

노자는 '배움을 단절하면 근심이 사라진다'고 했다.
스쳐 지나간 이 말이 가슴의 싸한 울림이 된다. 분명 배움을 포기하라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겠지만, 오늘만큼은 의심없이 따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굵은 글씨 출처: Sixty Nine (무라카미 류,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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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는 하북의 영웅으로 군마가 강성했으며 물자가 풍족했다. 집안으로 말할 것 같으면 4대째 정승을 배출한 가문으로 명망이 자자했고 백성들의 신임을 두루 얻고 있었다.

반면 조조의 군세는 원소에 비할바 아니요 핏줄 또한 환관의 양자였으며 젊은 시절 이름을 날린 일은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해 머리를 싸쥐고 도망간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은 조조, 반면 원소는 많은 것을 가지고도 뜻을 이루지 못한 어리석은 군주의 대명사가 되었다.

두 사람의 승패를 가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천하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고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선 먼저 전투에서 이겨야 한다. 그렇다면 전투의 승패를 가리는 요소는 또 무엇일까?

대부분의 전투를 돌이켜 봤을 때 전세를 가름짓는 승부처에는 언제나 중요한 의사 결정 대목이 등장했다. 군주가 의사 결정을 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첫째가 모사들의 훌륭한 계책이고 둘째가 계책을 듣는 군주의 태도다.

첫째 것만 두고 본다면 두 사람은 결코 상하를 가릴 수 없었다. 그러나 둘째 대목에 이르면 원소는 참패의 비평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듣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런 사람이 신하로 있을 때 크게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작게는 본인의 인생을 망치게 된다. 그러나 군주가 그렇다면 그 폐해가 막심하니 나라는 반드시 패망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시름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군주 주변에 언제나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군주가 잘 듣지 못하니 의견을 부딪혀 대항했다간 참수를 면하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듣기에 좋은 말만 하게 되고 이런 자가 높은 곳에 이르게 되니 서로가 앞다투어 아첨만 일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어느덧 미덕이 된 듯하다. 불도저처럼 밀어 붙여 성공을 거뒀다는 얘기가 신화가 되고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세태는 바로 원소에 대한 데자뷰다.

신하의 뜻은 쉽게 잊혀지지만 왕국의 성벽을 허무는데는 수십년이 걸리기에,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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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글을 못썼다.  지난 몇 주 동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 리뷰를 작성해 왔고 드디어 오늘 리뷰를 등록할 수 있었지만 몇 번을 읽어 보아도 역시, 창피한 글이다. 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참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먼 훗날 이 글을 다시 꺼내 보며 이럴 때가 있었지 하며 얼굴을 붉힐 수 있는 날을 꿈꾸며 과감히 버튼을 눌렀다.   
    

  내가 리뷰를 쉽게 쓰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남과 똑같은 리뷰를 쓰고 싶지는 않다는 강박관념 때문일 것이다. 책에 대한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하고 상투적이지만 자못 진지해 쉽게 업수이 여길 수 없는 주제들을 현실의 문제와 버무려 내놓는 인스턴트 리뷰. 나는 이런 것들을 거부 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리뷰를 쓰는 내내 나만의 '스타일'을 정립 해야만 했다. 

  나는 독서를 머리 속에 씨앗을 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씨앗은 부모의 나무로부터 온 것이지만 결코 부모와 같지는 않다. 리뷰 또한 내가 읽은 책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단순히 그 책을 참조하는 하위의 개념으로 쓰여져서는 안된다. 내 글은 원본과 대등한 위치 서 있어야 하며 상호 참조할 수 있되 그를 통해 언제나 새로운 의미가 창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씨앗에 움을 틔우고 나무로 길러내는 작업과 같다. 그리고 정성껏 길러낸 나무들이 넓고 푸른 '사상의 숲'을 이룬다면 이로써 내 글은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앞서 말한 '인스턴트 리뷰'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 못한 것 같다. 그것들은 책을 소개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이니까. 내가 쓰는 리뷰라는 것은 그저 내 생각을 정리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오히려 리뷰라는 단어를 오해한 것은 나의 오만과 비뚤어진 심성이 아닐까? 

  어찌됐든 저찌됐든 다음 리뷰는 김규항의 '예수전'에 대한 글이 될 것 같다. 이 글이 또 얼마나 오래 쓰여질지 알 수 없다. 쓰기가 읽기만큼 쉬웠다면 참 좋았을텐데, 역시 보는 것과 참여하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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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유혹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그 당시엔 성(性)이 없었나 보다. 나자렛에서 태어났기에 그저 '나자렛 예수'라 불렀다.  그런데 이 이름에는 두 가지 사실이 숨어 있다.   

  첫째, 예수가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의 말구유가 아니라 나자렛의 목수 요한의 집이라는 사실.  

  둘째, 예수는 결코 날 때부터 '그리스도'는 아니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줬던 사람이었기에? 그런 것보다는 그가 앉은뱅이를 춤추게하고 장님을 눈뜨게 했으며 다섯 조각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의 장정을 먹인 기적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적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언자를, 유대의 왕을 그리고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신이 된 예수가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고뇌와 고통이 감추어진 십자가를 메고 예수는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죽기위해 태어났고 너희는 보기위해 살아왔노라' 바야흐로 예수의 십자가가 언덕 꼭대기에 곧추서고 그의 손발에 못을 박는 망치 소리가 클라이막스를 알린다. 예수는 다음 씬을 지루하게 기다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하나님의 '액션' 소리가 떨어지자 최후의 힘을 짜내 마지막 대사를 시작한다. '앨리 앨리 라마 사박타니' 사람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남길 명대사를 내뱉고 예수는 드디어 눈을 감는다.  

  '캇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바로 여기에서 중지를 외친다. 예수가 신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그것은 세계를 향한 쇼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는 한 명의 배우. 주어진 역할에 로봇처럼 임하는 꼭두각시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예수는 시뻘건 피를 흘렸다. 내 몸에서 흐르는 것과 똑같은 색깔의 피. 그리고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는 한 명의 인간으로, 너무나 나약하고 외로운 사람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하여 이런 소설이 탄생하게 되었다.  

  '길고 긴 골고다 언덕을 나 홀로 걸어가는 구나. 나를 메시아라 부르던 이들은 어디 갔느냐. 내 대신 십자가를 짊어질 사람이 한 명도 없구나. 베드로야, 그래 이 간사한 녀석아. 수제자로 불리던 너는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내 가슴에 못질을 했지. 힘세고 듬직한 야고보 너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사람들 사이로 그 큰 몸을 숨기는 구나. 요한 나의 순종하는 어린 양 요한아. 너는 어두운 뒷골목에 머리를 쳐박고 눈물이나 질질 흘리는 것으로 선택받은 사도의 책임을 다하는구나. 아아, 막달라의 여인이여. 나는 왜 당신과 함께 인간의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가. 하느님의 축복아래. 수 많은 아들 딸들을 낳아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이 때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  

  '당신이 유대의 왕 그리스도라면 당신 자신이나 구원해 보시지!'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 '아 인간적으로, 너무나 고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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