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포로 아크파크 2 : 사...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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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기원'에서 작가가 마지막 페이지를 태워 버린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크파크와 그의 세계는 완전히 산산조각나 우주로 우주로 뻗어 나갔다. 마치 태초의 빅뱅처럼.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세계는 다시 한 곳으로 수렴하여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곳은 '기원'의 마지막 페이지를 태우고 있는 작가의 작업실이다. 타들어가는 페이지, 늘어 놓은 종이와 잉크, 지우개와 붓통, 그리고 커피가 가득 담긴 찻잔. 아크파크는 중력에 이끌려 작가 옆에 놓인 커피잔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우주의 기원은 깜깜한 커피?  







 

탕! 탕! 탕!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아크파크는 잠에서 깬다. 역시 꿈이었다. 아크파크를 찾아온 사람들은 '생활 공간 검사관'. 아크파크의 아파트를 철저히 측량해 그가 공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검사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측량이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아크파크가 열어 놓은 장롱 서랍이 문제였다. 이것은 아크파크가 열어 놓은 서랍의 크기만큼 공간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걸 명백히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다급해진 아크파크는 검사관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장롱 서랍을 닫으려 하지만 이게 바로 검사관들의 함정. 아크파크는 '측량도구훼손죄'에 '잘 닫히지 않은 서랍 은닉죄'를 저지른 현행범으로 긴급 체포된다. 세상에!




 


 

재판부는 아크파크에게 따귀 두 대를 선고했다. 형은 예정대로 집행됐고 아크파크는 성 밖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추방된다. 그 곳을 지키던 문지기는 아크파크가 남쪽에 보이는 역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누군가 
아크파크의 인생을 갖고 심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 역시 짜여진 각본일까?

이 만화는 언제나 꿈과 꿈 사이에 중요한 사건들이 배치되므로 도대체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서 부터 현실인지 알길이 없다. 이런 와중에 아크파크는 또 한 번 꿈 속으로 빠져든다. 그 곳에서 아크파크는 자신이 연극 '미션'의 주연 배우로 선정됐음을 통보 받는다.

연극을 주재하는 사람들은 주연 배우가 모든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길 원하지만 아크파크는 '도대체 왜 접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기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 그리고 회의. 하지만 정해진 궤도를 달려가는 기차에게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은 덜컹거리는 바퀴일 뿐이다. 주재자들은 당장에 이 바퀴를 뽑아 버리려 하지만 때마침 울린 자명종이 아크파크를 꿈의 세계에서 건져낸다. 눈을 뜬 아크파크의 앞에는 역이 도착해 있었다. 



 




역에는 수 많은 코인로커가 닭장처럼 세워져 있었다. 코인로커는 아크파크처럼 독립된 공간을 할당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거 공간이었다. 플랫폼으로 나가보니 상황은 더 심했다. 개미떼처럼 모여든 사람들은 플랫폼 바닥에 선을 긋고 저마다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이 진짜 자기 집인것처럼 행동했지만 가구와 창문은 땅바닥에 네모를 그린 뒤 '침대', '창문'이라고 써 놓은게 다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인간은 신과 마찬가지로 존재에 목적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인간은 편안하게 잠들기'위해', 그리고 비바람을 피하기'위해' 침대와 창문의 존재를 창조한다. 즉 침대와 집은 존재보다 목적이 앞선 즉자물인 것이다. 그러나 플랫폼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침대와 창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빈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어쩌면 이 곳은 제대로된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람들, 즉 위대한 창조의 힘을 잃어 버린 사람들이 도착한 일종의 유배지가 아닐까? 열차가 도착했을 때 아크파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열차를 탈 수 없었다. 창조의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겐 세상의 비밀을 목격할 자격이 없었을 것이다.

열차는 아무것도 아닌 곳을 지나, 이 세상의 지붕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줄곧 흑백으로만 그려졌던 만화는 아크파크가 세상의 지붕에 도착해 비밀스런 뚜껑을 열자 곧 컬러로 변해 버린다. 이 순간 예외없이 아크파크는 꿈에서 깨어난다. 정확히 '사도인쇄'로 칠해진 세상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현실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당신,

혹시 컬러로 된 꿈을 꿔 본적은 없는가?  

 

 

 

 

 

 

이야기는 3권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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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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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지금껏 내가 봐온 글쓰기 지침서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그리고 이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이 세 권이 전부다. 

'유혹하는 글쓰기'가 창작법 강의를 가장한 스티븐 킹의 성장기라면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글을 쓰려고 마음 먹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봐야 할 교과서 중의 교과서라 부를 만한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가 있다. 그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근원적 욕망과 마음가짐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좀 더 자세한 비교를 위해 세 책의 목차를 살펴보자. 서문 등을 제외하면 뼛속의 첫째 장이라 부를만한 것은 '초심자의 마음, 종이와 연필'이라는 챕터다. '글쓰기 만보'의 첫째 장은 '단어에서 단락까지'다. '유혹하는 글쓰기'는 
'이력서'라는 챕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서막을 올린다.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글쓰기 만보'는 교과서 중의 교과서다. 그러다 보니 좀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내용으로 시작한다. 처음 글을 쓰는 사람이든 장편 수십권을 출간한 베테랑 작가든 그들이 다루는 것은 결국 백지 위에 줄줄이 늘어선 단어다. 그리고 그 단어가 모여 단락을 이룬다. 그러니 선생님 안정효가 처음으로 가르쳐야 할 게 '단어와 단락'말고 무엇이겠는가.

반면 '뼛속'은 초심자의 '마음'으로 시작한다. 이게 바로 두 책의 큰 차이다. 오랜기간 선(禪)수련과 명상을 해왔던 작가 답게 그의 시작은 '마음'이다. 마음이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좋은 단어를 고르고 올바른 문장을 만드는 법? 그건 글을 쓰려는 마음만 확실하면 결국 갖춰지게 되있다. 문제는 역시 글쓰기의 고통을 견디고 그 욕망을 평생토록 유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다지는 것이다. 물론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써보라거나 이야기 모임을 만들어 보라거나 '그냥 꽃이 아니라 그꽃의 이름을 불러 주라'는 등 실천적 글쓰기로서의 충고도 다수 등장하지만 역시 '부사를 빼라'(스티븐 킹)거나 '있을 수 있는 것을 삭제하라'(안정효)는 말 보다는 덜 구체적인 것이 사실이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이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뼛 속'은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오랜시간 동안 글쓰기와 씨름해온 작가의 소소한 고백이 담백하게 울려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나탈리 골드버그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소설가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대단한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우리에겐 큰 공감이 된다. 그는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으로서 오늘도 어김없이 글쓰기의 고통과 욕망을 통제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가 해낼 수 있었다면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 책이 왜 좋은지 하나만 더 말해보라면, 나는 이 책이 '어떻게 쓰는가'라는 질문 밑에 '왜 쓰는가'에 대한 대답을 깔아두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세상은 이미 'How'에 대한 지침서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어떻게'가 아니라 '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그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내 마음을 다부잡는, 그런 일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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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강의 프로이트 전집 1
프로이트 지음, 임홍빈.홍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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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다음은 인터넷 정신분석 카페에서 찾은 어느 직장인에 대한 얘기다. 

나는 내 상사가 지시하는 일들을 자주 까먹곤 한다. 아침에 직접 불러 지시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퇴근 쯤에 일의 결과를 확인하려는 질문을 받고 화들짝 놀라 당황한다. 

한편 이런 일도 있다. 나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제품의 시료를 자주 잃어버린다. 잘 챙겨야지 챙겨야지 하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시료는 사라져 버린 뒤다. 이 모든게 꼼꼼하지 못하고 게으른 천성 탓이다. 반복되는 실수를 설명하는데는 이 만한 근거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지시한 일은 반드시 수첩에 적었다. 수첩을 하루 종일 내 노트북 앞에 펼쳐 놓았다. 시료에는 이름을 적었다. 시료를 관리하는 바구니도 만들었다. 

몇일 
뒤 나는 내 시료가 또다시 사라져 버린걸 깨달았다. 잃어버린 시료를 찾아 사무실을 헤매는데 상사가 나를 불러 유럽향 모델의 진행 상황을 물어 보았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동시에 멋적은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질문이 이미 몇일 전부터 계속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내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글을 올린 남자는 그 날 이후로 정신과를 찾았다고 한다. 그는 몇 주에 걸쳐 진료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루종일 눈 앞에 펼쳐둔 수첩을 두고도 지시한 일을 까먹은 이유는 내가 격무에 시달려 주의가 흩으러졌기 때문이 아니다. 시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기어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시료 분실의 이유 또한 
잘못된 관리 방법에 있는게 아니다.

상사의 업무 스타일은 어지간히 나와 맞지 않았다. 일거수일투족을 마이크로 매니징하는 꼼꼼함이 답답했고 말랑말랑 유연한 상황에서도 기어이 딱딱한 논리적 체계를 세우고마는 강박이 나는 지독히도 싫었다. 내가 매번 시료를 잃어버리고 상사의 지시를 잊은 이유는, 

내가 그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반복된 실수는 잠재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상사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다. 내가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때 마다 내 마음은 '당신이 시킨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실수는 심리행위다. 심리란 '마음의 작용과 의식의 상태', 행위란 '의지를 가지고 하는 짓'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실수는 심리행위다'라는 말에는 실수가 결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즉 그 속엔 명백한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위 이야기는 실수가 심리행위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전형적 사례다. 



<꿈>

나는 한 때 핵폭탄이 떨어져 주변의 모든 것들이 먼지로 사라져 버리는 꿈을 반복해서 꾼 적이 있다. 나는 눈 앞에 떨어지는 핵폭탄을 보고 미친듯이 도망쳤지만 결과는 언제나 매한가지, 먼지가 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런 꿈을 해석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시 나는 취업 준비생이었다. 한창 낙방을 거듭하고 있었다. 나는 골방에 쳐박혀 지겨운 영어 공부와 자기 소개서 쓰기를 반복했지만 취업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초조와 불안이 꿈 속에서 핵폭탄과 지구 멸망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프로이트를 꿈 해몽가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그가 집중한 것은 꿈의 '해석'이 아니라 꿈의 '원인'이었다. 프로이트 이전의 사람들은 꿈을 뇌의 경련, 혹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해프닝 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실수 행위의 탐구에서 보여줬듯 프로이트는 꿈에도 명백한 의도와 기능이 있다고 믿었다.

프로이트는 꿈이 인간의 '소망 충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봤다. 그것은 꿈이 잠재된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인데, 우리는 매일 밤 꿈을 꿈으로써 현실 세계에서 도저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 꿈 얘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핵폭탄이 떨어져 사람들이 죽는 꿈을 반복해서 꿨다. 그것은 분명 취업에 대한 불안과 초조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난 이 꿈 얘기에서 몇 가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내 꿈은 반복될 때 마다 완전히 동일한 모습으로 재현됐지만 거기서 딱 한 가지 매번 변화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죽는 친구들이었다. 모든 것이 똑같았음에도 유독 이 부분만이 달랐던 이유는 뭘까? 나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방법에 따라 차분히 나의 내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내 친구들을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걸 고백하는 건 쉽지 않다. 만일 당신의 정신과 의사가 당신의 꿈 얘기를 듣고 이런 해석을 내렸다면 십중팔구 책상을 뒤엎고 병원을 뛰쳐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모두 열고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보자. 

처음 꿈에서 나와 함께 죽은 건 20년 가까이 사귄 죽마고우였다. 둘도 없는 내 친구지만 난 한 때 이 친구에게 심각한 컴플렉스를 느낀 적이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그 컴플렉스는 죽을만큼 괴로운 것이었고 
'이 친구가 사라져 버렸으면'하는 소망을 품곤 했다. 두 번째로 죽은 친구 또한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언젠가 일을 하다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의 도움으로 화해하고 그 후로는 더욱 친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나는 앞으로 이 친구와는 절대 같이 일을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의 일을 모두 잊었고 지금도 여전히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무의식은 그 때의 감정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다 나의 이성이 잠드는 시간을 틈타 당시의 불쾌한 감정을 꿈 속으로 밀어넣어 친구들을 살해하는 기쁨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과격한 얘기라고 생각하는가? 프로이트의 꿈 해석은 언제나 이 같은 욕망들을 전제로 한다. 꿈의 내용으로만 봐서는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도 그 속에 잠재된 욕망들을 파해치고 나면 어김없이 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꿈은 도대체 왜 우리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 걸까? 그건 우리의 꿈이 검열을 당하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많이 느슨해지긴 하지만 우리의 윤리, 도덕, 욕망을 억압하는 이성들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꿈은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을 상징하는 대체물을 만들고, 그것의 일부를 과장하고, 또 삭제하고 때때로 하나의 상징물로 압축하여 자신의 본 모습을 완전히 지워 버린다. 

꿈의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이처럼 왜곡된 상징의 필름들을 오리고 붙여 숨겨진 욕망을 현상해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

프로이트가 실수와 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것이 신경증과 매우 유사한 매커니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글자는 분명 한글인데 봐도 봐도 미궁이다(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가 이 책을 반이나 차지하는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채 이런 리뷰를 쓰고 있다면 그건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를 모독하는 일일까? 하지만 모르는건 모르는거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이 책에 대한 나의 얘기가 여기까지라는 거다.

p.s - 누가 이 책을 쉽다고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꿈의 해석'전에 이 책을 보라는 사람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꿈의 해석'을 봤기 때문이다. 조만간 그 책에 대해 써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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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는 감독 롭 마샬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영화였다. 개성 이만점의 캐릭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유머, 비관습적인 액션 등 전작들이 쌓아온 DNA를 송두리째 날려 버린 이 영화의 유일한 칭찬 거리는, 캡틴 잭 스패로우를 조니 뎁이 연기했다는 것 정도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업적을 이토록 손쉽게 무너 뜨릴 수 있을까? 제리 브룩 하이머는 전시관의 유리를 깨고 더러운 쇠사슬을 걸어 명예의 전당에 잠들어 있는 전설의 블랙펄을 쓰레기 투성이의 바다위로 끌어내고야 말았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냈더라도 그 본성은 역시 장사꾼에 지나지 않음을 천명한 사건이라고나 할까?

영화가 재미없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감독이 바꼈다. 잭 스패로우의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이를 통해 독특한 코미디를 영화에 이식한 고어 버번스키가 다른 영화의 연출을 핑계로 떠나 버렸다. 물론 바톤을 이어 받은 롭 마샬도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이 남자의 데뷔작 '시카고'를 보라! 그러나 다음 작품 게이샤의 추억(2005), 최근작 나인(2009)에 이르기까지 롭 마샬은 완연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남자에게 
시리즈의 새 기점이 될 중요한 작품을 맡기는게 옳은 결정이었을까? 롭 마샬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시대극과 모험영화'라고 했지만 개봉한 영화를 보면, 때로는 그냥 좋아하는 걸로 끝낼 일도 있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둘째는 키이라 나이틀리와 올랜드 블룸의 부재다. 심각했다. 지금까지 캐리비안의 해적은 윌 터너(올랜드 블룸),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 잭 스패로우(조니 뎁), 이 세 사람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간 이야기를 때로는 
미스테리로 또 때로는 액션 활극으로 풀어나가며 타이트한 긴장감과 볼거리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 익숙한 삼각 관계가 해체되고 나자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는 말 그대로 '낯선 이야기'가 되어 망망한 바다 위를 표류했다. 

나는 잭 스패로우와 새로운 적 
검은 수염, 그리고 소문난 인어가 쏟아내는 모험과 코미디를 기대하며 집중을 거듭했지만,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건 나를 아득한 꿈 속으로 빠뜨리는 강력한 수면제였다.

셋째는 페넬로페 크루즈의 존재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새로운 여주인공 안젤리카 역을 맡았으며 안젤리카는 설정상 잭 스패로우와 애증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애증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랑과 증오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과 증오의 사이다. 그래서 애증 관계를 연기하는 배우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무게추를 따라 아슬아슬한 밀고 당기기를 해야한다.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에서 잭 스패로우를 과감히 크라켄의 배때기로 밀어 넣은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을 보라. 그에게 수갑을 채우기 전에 보여준 엘리자베스 스완의 키스는 진심이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제는 죽어줘야겠어!' 안젤리카에겐 이런 느낌이 없다. 소리를 지르고 열심히 뛰어 다니지만 그녀는 그저 철없는 말괄량이를 연기할 뿐이었다. 잭 스패로우를 파멸시키기 위한 유혹,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애틋한 사랑, 안젤리카는 이 중 어느 것 하나 보여주지 못했다. 



                       





1984년 '나이트메어'로 데뷔한 이래 조니 뎁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결코 대중적인 배우는 아니었다. 이런 그를 일약 세계적 스타로 만든 것이 바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다. 조니 뎁은 주목받지 못하는 마이너리티였고 
실제 삶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바로 그 경험을 잭 스패로우의 고독한 눈빛으로 표현해냈고 그를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악당이자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망나니로 만들어 냈다. 이렇게 탄생한 잭 스패로우가 낯선 조류에 휩쓸려 허우적 대는걸 보니 시리즈의 팬으로서 그리고 조니 뎁의 팬으로서,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낯선 조류'를 얘기하면서 인어 얘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 실망할까봐 미리 말해주면 인어는 별로 볼거리가 되지 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볼게 인어밖에 없었다'라고 한다면 그건 이 영화가 최악이었다는 얘기를 1980년대식 농담으로 표현한 거니 다가오는 주말을 위해 깊이 새겨두기 바란다(다행히 당신의 Box Office엔 쿵푸팬더2와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라는 대안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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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겠지만 X-Men 퍼스트 클래스는 X-Men 시리즈의 프리퀄이다. 배경은 1960년대 미국. 대통령은 존 F.케네디. 굳이 그 시절의 대통령을 언급한 이유는 이 영화가 존 F.케네디 재임 시절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 때문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

때는 바야흐로 냉전시대. 소련과 미국이 군비 확장에 열을 올리고 전 세계가 핵 전쟁의 위협에 벌벌 떨던 시절 이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쿠바 미사일 사태다. 

이는 사실 미국이 초래한 사건으로 
미국이 터키와 중동에 ICBM(대륙간 탄도탄: 핵탄두를 실어 보낼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자 이에 대응하여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면서 발생했다. 소련의 미사일 기지 건설 과정이 미국의 첩보 기관에 의해 발각되자 존 F.케네디는 '즉각 건설을 중단하지 않으면 제 3차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는 과격한 발언으로 온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기가 꺽인 소련이 미사일 기지 건설을 중단하면서 
존 F. 케네디를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진정한 자유의 수호자로 만들어 주지만 영화는 이 위기가 사실은 X-Men들의 활약으로 해결됐음을 가정한다. 








X-Men 퍼스트 클래스가 전작과 다른 한 가지. 그건 바로 X-Men 1, 2편의 감독이자 불과 26살의 나이에 '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 1995)'를 연출한 천재 감독 브라이언 싱어가 제작과 각본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에릭(매그니토)의 과거가(유태인으로서 고통 받은) 
비중있게 그려지고 '뮤턴트'라는 것이 가진 상징적 의미가 심도있게 다뤄진다.

사실 X-Men에서 뮤턴트들은 단순히 초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만화가 처음 등장했을때 부터 뮤턴트는 사회적 약자들을 상징했다. 1963년의 미국 사회에선 그 약자가 바로 극심한 인종 차별을 당하던 흑인들이었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일반인들의 멸시를 받는 뮤턴트들에서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공평한 기회를 박탈 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짓밟혀야 했던 흑인들을 떠올리는 건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37년 뒤, 브라이언 싱어는 이 뮤턴트들을 스크린 위로 불러 모아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만든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의 목표는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었다. 그는 원작이 가진 사회적 메시지를 그대로 계승하길 원했고 뮤턴트들이 가진 초능력이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상징으로 비춰지길 바랐다. 

이런 이유로 X-Men 1, 2편은 주인공들이 가진 초능력의 화려함 보단 오히려 그것을 갖게 됨으로써 겪어야했던 역설적 아픔들에 초점을 맞췄다. 결론적으로 21세기의 뮤턴트들은 1963년의 흑인을 넘어 다양한 유색 인종, 소수 문화, 동성애자 등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마이너리티들을 상징하게 됐다.

브라이언 싱어가 뮤턴트들을 다루는 방식은 확실히 기존의 블록버스터 감독들과는 달랐다. 그는 뮤턴트들을 유랑극단의 신기한 괴물들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내면의 깊숙한 상처를 들춰보는 사람처럼 그의 행동은 조심스럽고 진지했다. 나는 최근에 와서야 이런 태도의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브라이언 싱어 자신이 유태인이자 동성애자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X-Men 1, 2는 아주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연기자들은 빔을 쏘고 날아다니는 걸 즐기기 보단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인식에 집중했고 이는 원작 시리즈가 암시하는 뮤턴트들의 의미를 완벽히 반영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시리즈의 3편에(X-Men: 최후의 전쟁, 2006) 이르러 완전히 반전되어 X-Men은 그저그런 액션 영화가 되고 만다. 전작의 영광을 위해 3년 뒤 엑스맨 탄생: 울버린(2009)이 개봉되지만 이 영화는 망가진 3편과 비교해봐도 처참할 정도의 재앙이었다. 이는 모두 브라이언 싱어가 슈퍼맨 리턴즈(2006)의 촬영을 위해 X-Men을 떠났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하지만 구태의연하게 과거를 따져봐야 무슨 이득을 얻겠는가? 집나간 탕자는 돌아왔고 Box Office에선 부활한 X-Men이 기다리고 있는데!









X-Men 퍼스트 클래스에선 아쉽게도 전작의 오리지날 캐릭터들이 등장하진 않는다. 대신 파릇파릇 어린 뮤턴트들이 새로운 능력과 함께 등장한다. 그들은 에릭(매그니토)과 찰스(프로페서 사비에)의 도움으로 초능력을 발전시키고 X-Men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생애 처음으로 동질감이라는 것도 느껴본다. 하지만 평화는 길지 않았다. 그들은 곧 중요한 삶의 기로에 들어선다. 돌연변이로 당당하게 살 것인가? 평생 능력을 숨기며 정상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에릭은 평화를 주장하는 찰스와 전쟁을 선언하는 자기 사이에서 고민하는 뮤턴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No more hiding.

남보다 우월한 능력을 평생 죄처럼 안고 살아가는게 뮤턴트들의 운명이다. 에릭은 이 운명의 사슬을 끊고, 돌연변이야 말로 인류 진화의 시작임을 증거하려 한다. 에릭은 묻는다. 네안데르탈인은 왜 멸종했나? 더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바로 호모 사피엔스가 사라질 차례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영화는 뮤턴트들의 심리적 갈등과 그들에대한 정상인들의 공포를 드러내놓고 표현하면서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발한다. 나는 이 노골적인 표현이 어쩌면 현실 정치에서의 *진보와 **보수의 대결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에 더더욱 영화에 집중 할 수 있었다. 에릭이 혁명을 추구하는 급진 좌파라면, 찰스는 융화를 추구하는 중도 좌파랄까? 

혹시 전작을 보지 않아 망설이는 관객들이 있다면 그런 걱정일랑 하덜들 말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나오는 순간, 당신은 시리즈의 전 편을 찾아 보고 싶은 마음에 온 몸이 근질근질해 질 것이다.


*진보: 뮤턴트와 그들을 지지하는 인간들.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집단.
**보수: 보통 인간들. 자신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진 집단에게 기득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무지와 폭력으로 표출하는 집단. 쉽게 말해 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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