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미래 - 코로나가 가속화시킨 공간 변화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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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코로나 시기에 나와 공간의 미래에 대해 얘기한다. 이 대단한 전염병은 우리의 시대를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 시대로 바꿔놓았다. 상업 중심지에 불멸의 성전처럼 서 있던 대형 쇼핑몰들은 폐허가 되었고 일 년에 일조씩 적자를 내던 쿠팡은 유통 거물 신세계를 가뿐히 즈려밟았다. 공간이 해체되면서 권력이 재분배된 것이다.


코로나가 몰고 온 재택근무 열풍은 꿈에 그리던 일상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처럼 보였다. 출퇴근이 사라지면 기업은 더 이상 중심가의 노른자땅 위에 서 있을 필요가 없어진다. 직주가 얼마나 근접하냐에 따라 수억 원씩 차이가 나는 아파트의 가치도 재평가가 불가피하다. 대도시에 모여있을 필요가 사라진 사람들은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점점이 흩어져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도시는 사라졌는가? 많은 기업들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히 재택근무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도시는 전보다 더 북적거린다. 우리가 도시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직주근접과 부동산 투자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은 여러 가지의 생각이 부딪히고 융합하는 용광로의 역할도 한다. 시골보다 도시가 역동적이고, 흥미롭고, 더 많은 기회가 생성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도시는 젊은 남녀의 더 많은 만남을 보장한다. 대 코로나 시대에도 강남과 홍대의 클럽은 다른 나라 이야기가 펼쳐졌었다. 연애를 아무리 틴더로 시작하더라도 그 완성은 오프라인 만남에서 이뤄지는 법이다. AI는커녕 AI할아버지가 와도 강릉에 사는 상철과 목포에 사는 현숙의 연애는 오래갈 수가 없다. 돌이켜보면 인류 역사에는 우리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던 팬데믹이 몇 번이나 존재했었다. 그럼에도 도시는 귀신같이 부활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도시는 위기를 맞을 때마다 해체가 아닌 재구성을 택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간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논의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유현준 교수가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팬데믹 이후와 결을 맞추고 있는지는 솔직히 좀 의심스럽다. 코로나는 핑계일 뿐이고, 유현준의 상상극장을 팬데믹에 끼워 팔고 있는 건 아닌가? 이 책은 유현준 교수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곳곳에서 빛을 발함에도 불구하고 산만함을 지울 수가 없다.


도보도시와 발코니가 있는 집, 낡은 건축법을 없애고 다양성과 창의력을 발휘하는 건설사에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자는 주장, 그리고 지하에 하이퍼루프나 로봇들이 운영하는 물류 시스템을 만들자는 이야기. 이런 것들은 사실 저자의 유튜브나 다른 책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다. 딱히 코로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이리저리, 여러모로 돌려봐야 끼워 맞출 수가 있다.


여의도에는 유현준 건축사무소가 맡은 재건축 단지가 있다. 건물 외벽에 그 사실을 홍보하는 대형 현수막을 걸어놔 지나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볼 수 있다. 여의도라는 입지에 유현준이라는 브랜드가 추가됐으니 얼마나 좋은 아파트가 나오겠는가! 사실 나도 너무너무 기대가 된다. 하나같이 똑같은 디자인, 그걸 탈피하겠다고 수두 환자처럼 들쭉날쭉 발코니를 빼놓은 아파트들. 생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답답한 건축계에 유현준의 아파트가 벼락같은 깨달음을 내려주길 바라면서, 한편으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 똑똑한 교수님이 어떤 선택을 할지, 정말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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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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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피플>은 전형적인 하루키 소설이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데 등장인물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 '환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루키는 단단하게만 보이는 우리 세계가 실제로는 얼마나 놀라운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메타포를 이용하여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예컨대 우리 지구는 초속 30km로 우주 공간을 떠돌고 있는데 약간의 덜컹거림은커녕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도 받지 못한다. 초속 30km라니. 총알의 속도가 초속 300m니까, 이보다 100배 빠른 공 위에 올라 우주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멈춰 서서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인식의 성긴 그물망을 촘촘히 당겨 당연하게 흘러나가던 것들을 잡아채야 한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이야기로 바꿔낸다. 알쏭달쏭한 메타포를 입혀서. 그럴듯하게. 때로는 충격적으로. 때로는 공포스럽게. 때로는 미궁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TV피플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거실에 등장한다. 가구를 재배치한 뒤 들고 온 TV를 설치한다. TV피플은 나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나는 TV피플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본다. 바라만 볼 뿐이다. 텔레비전은 말끔한 신품이었다. 취급설명서와 보증서까지 비닐 주머니에 담겨 TV옆에 셀로판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TV피플이 벽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고 스위치를 눌렀다. 지글지글한 하얀 화면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TV를 점검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하나가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내 위치에 앉아, 텔레비전이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했다.


이윽고 일을 마친 아내가 집에 돌아온다. 나는 아내가 새  TV의 출현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애써 무시하는 건지 알지 못한다. 아내는 예민한 여자다. 장식장에 쌓아놓은 잡지의 순서를 기억할 정도로. 가구의 배치가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아내는 그 TV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얘기하지 않는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TV를 켜고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지글지글한 흰 화면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TV피플>은 여러 개의 단편을 엮어 만든 책이다. 맨 마지막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루키의 단편인 <잠>도 수록되어 있다. 나는 이 <잠>을 단행본으로도 갖고 있다. 평온해 보이는 일상 아래 자리 잡은 불안을 절제된 문장으로 포착하는 절묘한 소설이다. 평탄하다 못해 밋밋하기까지 한 전개 뒤에 갑작스러운 균열이 나타나 빨아들일 때, 추락할 때 맞닥뜨리는 그 느낌, 안전벨트가 나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막을 수 없는, 순수한 공포가 몸속에 스며든다.


그 밖에는 뭐, 그냥 하루키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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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요나스 하센 케미리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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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 살고 있는 아랍계 청년 아모르가 있다. 클럽에서 밤새 놀고 다음 날 깼더니 전화와 메시지가 수십 통 와 있었다.


"너 봤어? 자동차 폭탄이 있었대. 다이너마이트로 꽉 차 있었대"


스톡홀름 시내 한 복판에서 폭탄테러가 벌어졌다. 용의자는 작고 긴 머리에 턱수염이 있는 아랍계 남자였다.


"너 어젯밤에 뭐 했어?"


"기억이 안 나.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토를 좀 했지"


"아모르? 아모르?"


아모르에게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절친 샤비에게서, 사촌에게서, 카롤리나에게서. 카롤리나의 동물권익보호 단체에서 일하는 여자였다. 카롤리나는 아모르에게 정기 기부를 권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아모르는 카롤리나라는 이름이 가짜라는 걸 알았다. 아모르가 카롤리나에게 물었다.


"진짜 이름이 뭐예요?"


카롤리나는 아모르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놀랐다.


"내 이름은, 골바리..."


거봐, 당신은 거짓말했어. 아모르는 의기양양해진다. 그러다가 곧 난관에 봉착한다. 골바리가 아모르의 목소리를 기억해 낸 것이다.


"아모르, 당신 마리아 학교를 다닌 거 맞죠? 샤비라는 사람을 알죠?"


"이런. 완전히 조용해졌네? 아모르, 거기 있어? 나는 널 기억해. 네가 같은 반 여자애를 스토킹 했던 것 기억나, 그 여자애가..."

(p. 116)


아모르는 전화를 끊었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놓친 통화가 2개 있었다. 모두 샤비에게서 온 것이었다.


"아모르 전화 좀 줘."


아모르는 샤비가 아니라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어떻게 지내세요?"


"안 좋아."


"왜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못했니?"


오랜만에 전화를 한 외할머니는 자꾸 딴 소리를 한다. 아모르는 외할머니의 건강이 걱정될 뿐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외할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묻는다.


"아모르? 거기 있니?"


길을 걷던 아모르의 앞에 경찰차가 한 대 선다.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건다.


"알았어. 알았어."


"뭐가?"


"그러니까 그거..."


"그게 뭐?"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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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비용 - LGBT 경제학
리 배짓 지음, 김소희 옮김, 이호림 감수 / 글항아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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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BTQ가 대체 뭐가 문제인가? LGBTQ란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그리고 이들 모두를 통칭하는 퀴어를 의미한다. 아직도 여전히 보수적인 사회 문화 탓에 대놓고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 주변엔 상당히 많은 LGBTQ가 있다. 이미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일하고, 먹고, 웃으며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LGBTQ임을 알았다고 같이 일하고, 먹고 웃었던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비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와 잘 지냈던 직장 동료가 사실은 강간범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땐? LGBTQ는 범죄자가 아니다. 그저 성적취향이 다른 사람일 뿐이다.


당신이 남자고, 당신과 아주 친밀하게 지냈던 남자동료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하자. 당신은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가? 회식 장소에서 그가 당신을 덮칠까 봐? 이런 두려움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단 하나의 가정으로 증명할 수 있다. 당신은 매 회식 때마다 이성애자 여성 동료를 강간하고 싶은가? 언젠가는 반드시 그 일을 실행하고 말건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게이 동료도 마찬가지다.


LGBTQ 차별은 인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리보다 앞서는 무엇인가다. 당신이 눈, 코, 입을 갖고 태어난 게 당신의 권리가 아니듯이, LGBTQ는 사회적으로 차별을 금지하고 권리를 보장해줘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생물학, 혹은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오해와 편견은 두텁다. 그래서 인권이니, 경제적 손실이니 하는 걸 끌어다 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에 집중한다. '차별은 공짜'가 아니라는 것. 차별로 발생하는 금전적 손실은 기업의 이익에서부터 사회의 공격이 LGBTQ에 유발한 정신적, 신체적 피해에 따른 의료 비용까지 광범위하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 책은 수많은 통계를 제시한다. 그래서 책 자체는 굉장히 지루하다. 게다가 '비용'에 대한 지적이 과연 실효성이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사람들은 결국 이 비용이 LGBTQ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LGBTQ 때문에 내 인센티브가 줄어들 수 있다고? 그럼 다 없애버려야지!!


저자도 차별의 경제적 논의가 결코 인권에 대한 논의보다 앞설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한다. 세상에는 여러 이해당사자가 있고, 설득할 수 있는 요소들이 다르니, 이런저런 방법을 합치고 응용해 차별을 막자는 것이다. '차별 비용'은 여러 도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 일리가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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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양장) - 인간 사회의 운명을 바꾼 힘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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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는 유라시아의 구세계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는지 이유를 탐구하는 책이다. 놀라운 두께에 질려버릴 수도 있지만 내용은 명쾌하다. 주장을 전개하고 예상되는 반박에 재반박하는 구조를 가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내용이 있고, 자연스럽게 두꺼워졌을 뿐이다. 어려운 내용은 정말 하나도 없다.


유라시아가 타 대륙보다 더 발전한 문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잉여농산물의 생산이었다. 잉여생산물은 필연적으로 분배의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복잡한 사회시스템 예컨대 법, 정치, 행정, 군사, 종교, 문자 등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조직을 운영해 본 사람은 3명만 모여도 엄청난 갈등이 생긴다는 걸 잘 알 것이다. 수 만, 수십 만 명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두기 위해선 정교한 사회 시스템과 특히 이 구성원들을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고유의 '신념 체계'가 필요하다. 신화와 종교는 대부분 이러한 필요에 따라 '발명'되었을 것이다.(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 순서가 반대라고 주장한다) 잉여생산물은 생산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오직 이러한 사회 시스템을 유지 발전시키는 일에만 전념하는 전문가를 길러낼 수 있었다. 이로써 사회의 발전과 생산물의 증가라는 선순환 구조가 완성된다.


자, 인간이 모여있으니 이제 '균'이 등장할 차례다. 수렵, 채집 시기 인구는 적었고 그나마 띄엄띄엄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전염병의 입장에선 아주 척박한 시대였다. 그런데 인간이 문명을 발달시키고 꽉꽉 모여 살아준 덕분에 최고의 환경이 마련됐다. 전염병은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에서 대규모 사상자를 만들어냈지만 반대로 이 역병의 시대를 견뎌낸 사람들은 자신의 튼튼한 면역체계를 후세에 물려줄 수 있었다. 이 균들은 결국 신대륙 침략시기 '쇠'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남북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총과 칼보다, 그들이 들여온 균에 훨씬 더 빠르게, 더 많이 죽었다.


이 강력한 균들은 야생 동물을 가축화하는 과정에서 옮아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인간은 삶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물소와 소 같은 농경 도구, 양, 돼지, 염소 같은 단백질원, 심지어 말 같은 전쟁 도구까지 다양한 야생 동물을 가축화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듯, 이 가축들은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몇몇 균들을 선물했다.


농경 사회로의 전환은 기술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했다. 때로는 기술이 먼저, 때로는 농업이 먼저 앞서며 각종 도구와 기술의 발전을 촉진했다. 문명 발전의 최전선에 비로소 '쇠'가 등장하는 것이다. 호주에는 지구 최대의 철광석 광산이 있지만 그곳의 원주민들은 야금술을 발명하지 못했다. 그들이 결코 열등해서가 아니었다. 호주 대륙은 작물화할 수 있는 식물이 적었기 때문에 집약적 농경이 발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방으로 고립된 환경은 외부로부터 씨앗과 기술이 전파될 경로까지 차단해 버렸다. 반면 한 덩어리로 묶인 유라시아에서는 기술의 이동 속도가 훨씬 빨랐다. 특히 유라시아 대륙에서 기술의 격차는 곧 생존의 위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 사이에서는 좋은 기술을 최대한 빨리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훔치기까지 해서라도 발전하려는 압력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쟁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당연히, 가속화한다.


그럼 이쯤에서 의문이 하나 들 것이다. 농업은 유라시아 대륙 국가들만의 전매특허였던가? 인간이 시작됐다고 알려진 아프리카에서는 오직 수렵, 채집만 할 뿐 농사를 짓지는 않았던 걸까? 아메리카에서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일으켰던, 잉카와 마야는 잉여생산물 없이 세워진 제국이었는가? 총, 균, 쇠의 관점에서만 보면 결국 유라시아와 타 대륙의 발전 속도의 차이가 인종간 우열에 근거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강한 유혹에 빠지게 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이러한 생각에 단호히 '망상'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애초에 그 총, 균, 쇠가 어떻게 발달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른바 현재의 상황을 만들어낸 궁극 원인을 찾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이 단순한 지리적 요인, 그러니까 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우수한 인종이라도 땅을 바꾸지는 못한다. 운하를 만들고, 터널을 뚫어 지리를 바꾼다고? 그렇다면 애초에 운하 또는 터널을 만들게 했던 요인은 무엇인가? 사하라 사막의 원주민들에게는 운하를 만드는 기술보다는 사막에서 수분을 보존하고 보충하는 기술이 더 중요하다. 지역이 산으로 둘러싸여 어떻게 해서든 교통의 편의를 만들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터널을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압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몽고인들에게는? 그들에게 터널 제작 기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압력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궁극 원인은 얼추 3개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 땅에는 작물화할 수 있는 식물이 충분했는가. 둘째, 그 땅에는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이 충분했는가. 셋째, 대륙의 형태가 동서로 뻗어있는가, 남북으로 이어지는가. 특히 이 세 번째는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이 책에서 밝히는 가장 탁월한 통찰이 아닐까 싶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총, 균, 쇠>를 독파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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