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고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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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시마 유키오. 본명 하라오카 기미타케. '금각사'의 저자. 극우파 민족주의자. 원자폭탄 두 방에 가까스로 제 정신을 차린 일본을 다시금 폭력의 핏물 속에 빠뜨리기 위해 안달하다 스스로 배를 갈라 새빨간 선혈로 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정신병자.


난 이 사람이 싫다. 우파를 증오하니까. 그냥 우파만해도 치가 떨리는데, 극우파라니. 이런 남자가 쓰는 소설은 그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아무런 의미없는 구둣점조차 심기를 거스를게 분명하다. 세상에, 극우파의 소설이라니!





그럼 왜 나는 미시마 유키오를 펼쳐 들었나? 싫어하려면 그 만큼 더 잘 알아야 한다는 유치한 집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미시마 유키오, 고작 31세에 문학 인생의 절정을 맞은 천재, 당대 최고의 소설가. '금각사'라는 이름은, 그래 소설을 읽기 시작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보았지. 그러니 어쩔 수 없잖아. 정치적 견해 때문에 하나의 기념비가 될 수도 있는 문학을 놓쳐 버릴 수는 없어. 나는 그 정도로 참을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 궁금해 미칠 지경,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사람들은 이 정신병자에게 그토록 환호하는가. 나는 이런 호기심에 걸려든 평범한 독자인거야. 그리하여 펼쳐든 작품이 바로 이 '가면의 고백'. 





첫 장을 읽는 순간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의외였다. 이 소설은 미시마 유키오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자전에 가깝도록 써낸 소설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묘사되는 소년은 미시마 유키오 자신일 것이다. 그런데 글 속에 근육질의 일본도를 든 극우 꼴통의 중년 아저씨는 없었다. 허약하고 창백한, 말라 비틀어진 소년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그는 어린 시절 자가 중독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고비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소년의 옆을 지키는 빚쟁이였던 것 같다. 죽음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허무와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찬미를, 이 병약한 소년도 지니고 있었다.


소년은 죽음을 사랑했다. 총알이 심장을 뚫고 지나가 분수처럼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지는 병사를, 뜨거운 장작 위에서 갈기 갈기 태워져버리고 마는 잔다르크를, 소년은 사랑했다. 죽음에 대한 찬미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망과 비례한다. 무서운건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주머니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다. 더럽고 무례하고 혐오스러운건 고통이다. 소년은 고통이라는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고 죽음을 찾아 떠나는 탐험가다. 끝없이 고통스러울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는 생각은 지극히 합리적인 생긱이다. 고통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람에겐 죽음이 황홀할 수 있는 것이다.


소년은 끝내 고통의 열매를 얻지는 못했다. 삶이 지속되자 그는 남성을 욕망했다. 그것은 아마 강함에 대한 갈망이었을 것이다. 허약한 자신에 대한 증오가 커질수록 덩달아 커지는 생명력에의 갈망. 그것은 사춘기 소년에게 남성을 사랑할 기회를 안겨줬다. 또래의 친구들이 나체의 여자를 떠올리며 은밀한 습관을 문지를 때, 소년은 벌거벗은 남성의 육체를 상상하며 자위했다.


죽음과 비정상적 사랑의 근처에서 우물쭈물하다 소년은 성인이 되었다. 그 때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너는 20세에 죽을거야'라는 말에 당혹감보다는 우쭐한 쾌감에 젖었던 청년은 막상 그것과 마주하고 나자 공포에 몸을 떤다. 공습 경보가 울리면 누구보다도 빨리 방공호로 대피했던 것이다. 모든게 정상이 되가고 있다는 신호였을까? 청년에겐 사랑하는 '것 같은 여자'까지 생겼다. 청년은 여자와 함께 잔디밭에 앉아 키스를 나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청년에 따르면, 임시로 고용해 몸에 달고 있었던 '정상성'이 키스 후에 찾아온 무감각과 서글픔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던 것이다. 여자는 결혼을 원했다. 청년은 정중히 거절했다. 





자전적 소설이라고는 하나, 그 말에서도 드러나듯 이것은 엄연히 소설이다. 가면의 고백에  쏟아지는 모든 고백들이 미시마 유키오를 그대로 재현한다고 생각해선 안되는 것이다. 소설은 허구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생각한다면 소설은 허구이기에 그 속에 과감한 고백을 담을 수도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해서 대부분의 소설은 작가 자신의 내면적 고백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257p, 해설 중)


나는 이 소설을 미시마 유키오의 고해성사로 받아 들이고자한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도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진지하게 탐구하려 했던 것 같다.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그래 그 새로운 출발을 위해 미시마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가 단단히 뿌리 내리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없다. 그러니 작가라는 위대한 첫발을 내딛는 바로 그 순간 그가 행할 수 있는 일은 과감히 자기를 고백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p.s - 미시마 유키오의 예술 세계는 이후의 작품을 더 탐독하고 나서야 말할 자격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문장 만큼은 아니다. 그 위력은 '가면의 고백'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눈 앞의 글자가 그대로 향기가 되어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것처럼 황홀한 언어의 춤. 굳이 소설로 묶여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문장 하나하나가 각각의 문학 작품이 될 수도 있을 정도다. 이 정도의 경지를 24살에 보여줬다니. 천재적 예술성이란, 어쩌면 죽음을 껴안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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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 2012-07-1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봤습니다.^^

한깨짱 2012-07-11 13:17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
 
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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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에 관한 책이다. 물론 영화 '후궁'의 섹슈얼리티를 끼얹고 서가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은밀한 속살을 드러내며 독자를 유혹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시기가 공교롭다. 진실은 본디 사실에 기반한 것이라기 보담 믿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잡풀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책에 바로 그러한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그다지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들어보라, 이 책은 역사서다. 부제는 '궁궐에 핀 비밀의 꽃'. 이런! 이 비밀이라는 단어에서 나약한 우리는 또 다시 은밀한 상상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지만, 믿어보라 이 책은 역사서다.




우리가 아는 궁녀의 모습은 두가지다왕을 둘러싼 병풍, 음모를 꾸미는 악녀. 게다가 그들의 유일한 짝궁은 내시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중성인. 피다만 꽃.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는 새. 순종하고 순종하고 또 순종해 족쇄가 풀려있는줄도 모르고 영원히 감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운명들. 이 모든 이미지는 어디서 부터 나왔는가. 드라마다. 이런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낸 드라마를 탓하고 싶지만 그나마 이것조차 없으면 우리 사회에  궁녀가 등장할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나는 웬지 다른 사람의 억울한 심정을 내 일처럼 분노하는 괴벽이 있다. 세상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오해에 휩싸여 평생 고독하게 살다 외롭게 죽어간 사람들. 내가 영혼의 친구라고 부르는 자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 책의 지은이도 나처럼 이해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가슴 짠한 애잔함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우리는 흔히 궁녀가 왕궁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하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본질적으로 궁녀의 역할은 왕궁의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궁의 가사 노동이란 왕이 입는 옷을 짓고 왕궁 자수를 놓는 일이었으며 왕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는 다르게 말해 궁녀가 왕궁을, 아니 조선 시대를, 아니 한 역사를 대표하는 의복과 음식과 공예 문화를 만들어내는 전문 기능인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궁녀에 대한 재인식이요 이 책의 핵심이다. 


그들이 기능인이었다면 자신의 직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을 법하고 또 그들의 소속이 엄연히 왕궁인지라 실록에도 자주 등장할 법 한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의자왕과 삼천궁녀를 봤을 때 궁녀는 적어도 삼국시대 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삼국시대는 커녕 왕조 실록이라는 위대한 기록을 남긴 조선 왕조에서 조차 그들의 모습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그것은 궁녀가 국가 최고 권력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하고 있던 정보원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궁녀의 조직도를 살펴보자. 조선시대에 궁녀는 그 업무에 따라 몇 개의 처소로 분류되었던 모양인데 그 명칭과 업무는 대충 다음과 같다.



각 방 명칭

 이름

 지밀

각종 궁중 의례에서 왕이나 왕비 등 인도, 시위

궁녀 조직의 헤드 쿼터 개념으로 총무, 회계 업무를 담당

서적 관장, 글 낭독, 글 필사!, 의례에서 왕을 수행하는 등의 업무 담당

 침방

책에는 제반 의대 거행에 종사, 라고 나와는 있으나 도무지 말의 의미를 알 길이 없고 추측컨대 침실 또는 건강을 관리하지 않았나 싶다

 수방

각종 자수에 종사(왕이 입는 곤룡포, 그 가운데 화려하게 놓인 용 모양이 바로 이 궁녀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내소주방수라상! 및 음식물 거행에 종사 
 외소주방각종 궁중 잔치에서의 잔치상 담당 
 생것방수라에 올리는 각종 과일, 간식을 담당 
 세수간

세숫물을 대령하고 욕실 물품을 세탁 

 세답방

각종 세탁, 불 때기 및 등촉(어두워지면 궁궐 곳곳에 있는 등잔에 불을 붙이러 다니는 일), 침실 청소를 담당 

 퇴선간수라상을 물리고 처리하는 곳 



이렇게 보면 왕 없이 궁녀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궁녀가 없으면 왕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궁녀가 왕의 생활에 밀착해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만약 왕을 살해할 목적을 갖고 있다면 나는 우선 궁녀의 조직도와 각 처소에 소속된 인물의 명단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그런 다음 퇴선간 궁녀를 포섭해 왕이 평소에 무엇을 즐겨 먹고 무엇을 남기는지, 그 습관을 물어볼 것이다. 그 다음 내소주방의 궁녀를 포섭해 왕이 좋아하는 음식이 나갈 때면 그 안에 아주 조금씩 독약을 탈 것을 명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나에게 포섭되지 않는다면? 난 그들의 신상명세를 털 것이다. 병들어 있는 노부모, 범죄를 저질러 잡혀간 오래비 등등, 내가 수집한 정보는 곧 그들의 약점이 되고 그만큼 그들은 나에게 포섭되기 쉬워진다. 


독살이 불가능할 땐 자객을 보내는 것도 유효하다. 이번에 나는 우선 지밀에 소속된 궁녀 중 야간 경계를 총괄하는 사람을 포섭할 것이다. 그 다음 거사일에 맞춰 궁녀의 경계 인원을 반으로 줄일 것을 요청한다. 세답방의 궁녀를 포섭하는 이유는 자객의 침투 경로에 일부러 등촉을 하지 않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다음 차례는 침방의 궁녀다. 자객은 기별을 주고 받은 침방의 궁녀를 따라 왕의 침소까지 이동한다. 그 다음에...


역모에 궁녀가 빠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궁녀를 알지 못하면 거사는 불가능하다. 궁녀는 왕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으며 그의 사적인 습관과 건강 상태와 잠드는 장소까지! 그러니 이들에 대한 정보를 드러내놓고 공개한다면 그것은 왕의 처소를 저자 거리에 내놓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궁녀의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추안급국안'이라는 범죄 심문 기록에서다. 조선 시대에 중죄인의 심문 내용을 기록했던 이 책에는 역시 심문 답게 죄인의 출신과 이력을 상세하게 기록해 두고 있으며 이는 왕조 실록에도, 궁중 의례에서도, 국가의 행정 문서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궁녀의 정체를 밝혀주고 있다. 어린 나이에 입궁해 평생을 수절하며 살다 모시던 상전이 죽고 나면 출가해 비구니로 생명을 마감해야 했던 그들은, 자신의 근본을 범죄 심문 기록에서나 고백할 수 있는 불행한 여인들이었던 것이다. 


책은 이 밖에도 궁녀의 성과 사랑, 월급, 재산, 출신, 자격, 특기할 만한 궁녀 이야기 등을 파편적으로 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궁녀에 대한 기록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반증이리라.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닥치는 대로 궁녀에 대한 기록을 모아 희미해져가는 존재를 부여잡는 일일 뿐이다. 이건 이거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누군가 초석을 다지지 않으면 기둥도 마루도 지붕도 집도 없을 테니까. 


역사를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 하나하나가 생소한 것이었기에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제조 상궁'이란 말을 회식 자리에서 폭탄주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들에겐 신선한 지적 오딧세이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다.


p.s. - 이 책은 2004년에 초판이 나왔다가 8년 만인 2012년 5월 재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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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섬 -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우영 옮김 / 다른우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한 때 프랑스어권 소설가 중에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역시 아멜리 노통이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라. 이 여자는 벨기에 사람이다. 그녀는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를 프랑스어라고 부르는 걸 싫어한다. 아멜리 노통은 확실히 자극과 개성을 추구하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푹 빠져들만한 매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갈증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멜리 노통 하나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보바리 부인'(플로베르 작)을 만나고 '비계 덩어리'(모파상 작, '여자의 일생'이라는 소설이 더 유명하다. 하지만 이 남자의 최고작은 뭐니뭐니해도 '비계 덩어리')와 조우한다.


하지만 당신이 아직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당신은 프랑스 문학사의 거대한 기둥 하나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름에서 부터 확연한 아이덴티티가 느껴지는 이 남자, '아나톨 프랑스'다.





1844년, 아나톨 프랑스는 태어났다. 본명은 '자크 아나톨 프랑수와 티보'(Jacques Anatole François Thibault). 센 강 기슭에서 조그만 서점을 운영했던 아버지 탓에 어릴 적 부터 책과 친했다. 아나톨 프랑스는 '황금 시집'으로 데뷔한 이래 꾸준히 평론과 소설을 썼고 그 당시 사람치고는 드물게 오래 살며 1896년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1921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수상작은 바로 이 소설 '펭귄의 섬'이다.





노벨상 수상자, 아카데미 회원같은 권위적 색채와는 어울리지 않게 '펭귄의 섬'은 아주 유머러스하다. 마치 개그맨의 만담을 보는 것 같은 친근함이 있지만 사회와 역사를 향한 풍자의 칼날은 섬뜩하리만치 날카롭고 정확하다. 


간단한 줄거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평생을 수도원에서 보낸 '성 마엘'은 어느날 자기 앞에 나타난 돌구유를 보고 그것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평생동안 수도원을 나가 본 적이 없는 성자가 여행을 떠난다. 성 마엘은 이후 37년동안 세계를 돌며 218개의 교회와 74개의 수도원을 세운다. 여전히 성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던 어느날 성 마엘은 자신이 처음으로 세례를 내린 외디크 섬의 주민들이 또 다시 우상을 숭배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첫 복음 전파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낀 마엘은 또 다시 돌 구유를 타고 여행을 떠나지만, 늘 그렇듯 영웅의 여행에는 시련이 따르기 마련. 악마의 유혹에 빠진 마엘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순수한 돌구유에 돛과 키를 달게 된다. 노인은 남쪽으로 키를 잡고 항해를 시작했지만 이윽고 강한 물살에 의해 남서쪽으로 떠밀려 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강한 바람이 불자 돌구유는 통제 불능, 성스런 여행은 타락한 의지와 함께 속절없이 얼음의 땅을 향하게 되었다.


갖은 고초 끝에 거대한 섬에 도착한 마엘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다. 그 땅에는 대학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처음 본 이방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 들일만큼 온순하고 선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감동한 마엘은 그곳의 주민들에게 세례를 내려 하나님의 축복을 내려주었다. 그러자 천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성 마엘이 사람으로 착각한 이들이 봄철을 맞아 짝짓기를 하러 몰려든 펭귄이었던 것이다. 지독한 근시와 여행의 고초는 이 노인으로 하여금 펭귄을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례를 인정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성인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한다. 성인들은 세례의 효험이 형식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내용에서 나오느냐를 두고 두패로 갈려 싸웠다. 한 때 질투와 시기의 대명사로 유대인에게 저주와 멸망을 안겨줬던 신이었지만, 다가오는 세대에 '선한 의지'로 부각되길 원했던 신은 그 자애로운 마음을 발동하여 펭귄을 사람으로 변신 시킬 것을 명한다. 그리하여 펭귄은 사람이 되었고 사람은 역사를 만들었다. 





줄거리만 봐도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명으로 사람이 된 펭귄은 이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간의 역사를 되풀이 하며 사유 재산과 토지의 경계를 만들고 전쟁과 살육을 발명한다. 아나톨 프랑스는 이 펭귄의 역사를 프랑스의 역사에(신화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1:1로 대입하며 날카로운 풍자를 전개하는데, 겉으로는 프랑스의 역사에 국한된 것으로 보이는 이 스케일은 사실상 인류의 역사로 확대한다 하더라도 모자랄 것이 없을 만큼 깊은 사유로 독자를 압도한다. 


보통 노벨상 수상 작가의 책들은 뭔가 멜랑콜리하고 어려운 맛이 있는데, '펭귄의 섬'은 정말 정말 재밌다. 하나도 어렵지 않다. 현대의 작가 중 이와 유사한 소설가를 찾자면 '커트 보네거트'가 있을 것이다. 둘은 모두 휴머니스트로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권위와 폭력에 거부한 성인들이었다.


종교? 그거 그냥 사람이 만든거 아니야? 나의 신을 믿어라 믿지 않겠다로 처참한 살육의 파티가 벌어진다면, 그따위 것 그냥 사라져 버리는게 우리를 위해 더 나은게 아닐까? 그렇다면 예술은? 미에 명확한 기준이 존재한다면 시대마다 천차만별로 변화하는 예술의 역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대의 생각은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이 진실의 권위는 독특한 실험과 창의를 발현하는 예술가들을 질식시키지. 진실, 정의? 그런건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게 나을지도 몰라. 아무리 선한 의지도 진실이 되는 순간, 정의가 되는 순간 폭력을 잉태하니까.


나는 아나톨 프랑스가 남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지적 회의주의와 신랄한 비꼬기로 가득찬 그의 소설은 태어날 때 부터 반항심으로 가득차 있던 내 영혼과 깊은 교감을 나누며 마음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선사한다. 산 사람하고만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은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아나톨 프랑스는, 매일 매일 역겨운 권위에 피투성이가 되는 내 마음에 편안한 안식처가 된다. 그를 만난건 정말 행운이다.


p.s -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은 번역본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군사 독재와 그 정신을 이어 받은 정치 세력이 이 땅에 단단한 보수적 권위의 성벽을 세운 탓이리라. 이처럼 비상식적인 사회를 이토록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뭘까? 나는 '펭귄의 섬'의 문구를 인용해 이를 설명하려 한다. 


'정부의 한결같은 조처도 축복받은 한국 사회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본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정부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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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변 세계문학의 숲 1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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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다크나이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되거나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라쇼몽'의 주인공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후자에 속했다. 22살에 데뷔해 13년간 불꽃같이 펜을 놀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 근대 문학의 영웅. 오늘날까지도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은 '아쿠타카와 상'이다. 내가 그의 환생이라고 여길정도로 진정 사랑한 '다자이 오사무'조차 평생 이 상을 받지 못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자살을 했지만, 영웅이 되지는 못했다. 이게 모두 '아쿠타카와 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첫인상은 '스마트'다. 문장이 깔끔하다. 주절주절 하지 않는다. 지저분한 풍자나 비겁한 자조가 없다. 아주아주 자신감이 넘치는 젊은이다. 이야기의 소재도 예상 밖이었다. 캇파(일본의 정령. 개구리를 닮은 정령), 불륜, 창작의 괴로움,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코, 참마 죽 등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주제는 진지하고 깊이가 있지만 매우 경쾌하다. 예의 대작가라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어깨에 힘을 팍 준 위압감이 없다. 기본적으로 굉장히 모던하다. 현대 문학의 아버지란 얘기는 괜히 하는게 아니었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단편들은 마치 80년대 '브라운(Brown)'의 전자 제품 같은 느낌이 든다. 아주 세련되고 아름다우며 군더더기가 없는 디자인의 정수. 신기한건 그의 외모 또한 대단히 세련됐다는 사실.





읽는 순간 감이 오는 책이 있다. 그 사람의 전작을 모조리 독파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기분. 게다가 단편 작가다. 편안한 마음으로 한편 한편, 시간이 나는 대로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편안한 이 느낌. 


단편집 '지옥변'에서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게사와 모리코'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불륜 관계에 있는 두 남녀의 은밀한 마음속 정경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둘은 사랑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사랑한다. 오로지 육체적 갈망으로 여자를 품었다고 고백하지만 그 여자를 위해 여자의 남편을 죽이려는 남자. 그 남자에 의해 더럽혀지고 무시당하고 미움당하면서도 '남편을 죽여야 하지 않겠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영혼의 위로를 느끼는 여자. 이 모든 장면들이 환하게 뜬 달빛 아래에서 생생한 색채로 살아난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두 남여의 깊고 깊은 마음 속까지 내려가 반짝이는 진주 한알을 물고 올라오는 날렵한 물고기 같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35살에 죽는 것 따위, 아무것도 두려워 할 게 없지 않은가.


더 놀라운건 이 소설의 구성이다. 모리토(남자)의 독백만을 듣고선 별볼일 없던 소설이 게사(여자)의 심리와 교차하는 순간 아차 싶은 반전의 충격이 전해온다. 역시 여자의 속마음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인건가? 모리토는 게사를 마음껏 능욕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녀를 위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건 당신이야. 어쩌면 남자란 , 여자의 속임수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평생 그걸 깨닫지 못하는 멍청한 동물인지도 모르겠군.


구로사와 아키라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두 단편 '덤불속'과 '라쇼몬'을 결합해 영화 '라쇼몬'을 찍은 건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둘 모두 세련의 대가. 모던의 극치. 우리가 1950년대에 제작된 이 영화를 보면서도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 주제나 형식이 극도로 세련됐기 때문이다. 60년 전의 작품을 마치 어제 만들어진 것 같이 보여주는 능력. 세상이 변했다고 허세를 부려봐야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공사의 디자인에 큰 박수를 쳐주고 싶다. '지옥변'이란 제목과 무서울만큼 어울리는 파격적 디자인이다. 양복을 입은 남자와 기모노를 입은 여자. 그 대립에서 오는 묘한 긴장감. 세기말에 피어오른 신(新)과 구(舊)의 대결.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뒤덮은 짙은 어둠. 범인이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어둠 뿐이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이 어둠을 헤치고 심연을 탐험한다. 그 속에서 발견하는 섬뜩한 진실. 그의 작가적 역량을 진심으로 경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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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2-06-04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라는 물건은 여자의 속임수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평생 그걸 깨닫지 못하는 멍청한 동물이라는 문장이 저도 모르게 웃음 짓게 만드네요^^^ 그럴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남자입장에서도 비슷하지 않을 까요. 그렇게 살다가 정들어가며 사는것이 인생이고, 그렇게 살아가야 버텨지는게 우리 인간이라는 물건의 숙명이지요.

한깨짱 2012-06-08 13:32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렇게 살다가 정들어가는게 인생이지요. 산다는건 버티는거고 그 버팀의 원천은 역시 정인가요? 남자와 여자 모두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전 참 솔직한 편인데, 사람들은 진실을 추구하면서도 실제 그것과 맞닥뜨리면 질색을 하더라고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진중권이 진영의 불분명함과 무한의 딴지 걸기로 네티즌의 뭇매를 맞을 때도 나는 그를 존경했다. 그가 쉽게 쓰기의 달인이었기에. 사람이 모든게 완벽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그렇게 얘기하는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진중권이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그를 재수없고 짜증나는 똘똘이 스머프쯤으로 여긴다. 미치겠네, 미학 오딧세이나 서양미술사를 한 번 읽어 보라고. 잘난척하느라 집어든 곰브리치나 에코의 책 보단 훨씬 재밌을 테니까.





그런데 이 책, 쉽지 않다. 진중권이 한계를 드러낸건가? 그건 아니다.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런 문제가 뭔가? 현대 미술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양식'은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수십 년간 지속되는 안정적인 조형의 형식이었다'(5p)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양식은 여름철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격동의 마술을 연출해 낸다. '짧은 시간 존속하다가 곧 다른 것들로 교체되는 복수의 양식들의 어지로운 겅존, 그것이 바로 '모던'이라는 시대의 특징'(5p)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현대 미술은 너무나 복잡하다. 어지럽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구분지을 수 없다. 폭발할듯 피어났다 안개와 같이 흩어진다. 뿐만 아니라 양식에 철학이 포함된다. 현대 미술은 더 이상 외부 세계를 묘사하길 거부했다. 미술은 더 이상 자연의 모조품을 생산해내는 조악한 공장이 아니다. 그런데 시각적 예술이 무언가를 묘사하길 그친다면 그것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은 감정을 그리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색을 만들어 낸다. 공간을 그린다. 관념을 그린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위대한 예술을 행위한다.





'20세기에 등장한 예술운동은 저마다 선언과 강령을 발표하며 정당운동을 방불케 하는 정치적 수사를 구사하곤 했다'고 한다. 이것이 현대 미술을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20세기에 이르러 미술가들은 원하나 네모 하나 또는 모조리 검게 칠한 캔버스를 들고 나타나 이것이 회화의 근원이라고 우긴다. 우기기 위해선 철학이 필요하다. 보잘것없는 캔버스를 가리기 위해 수사를 입혀야 한다. 그래서 언뜻 보면 현대 미술은 그저 말빨만 앞세운 멍청이들의 놀이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각해도 별 도리가 없다. 하지만 20세기 예술가들의, 과거와 철저히 결별하려는 그 눈물겨운 투쟁을 보고 있으면 그것을 감히 말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 어지간히 회의적인 내게도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예전의 예술이 더 쉬웠다. 그저 손재주를 가진 젊은이가 공방에 들어가 몇년 씩 수업을 쌓는다. 그리고 독립해 화가가 된다. 그당시의 예술혼은 우리가 생각하는것 만큼 고귀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기 기술'에 대한 장인 정신과 동의어였다. 그들은 기술자였다. 결코 철학자가 될 필요가 없었다. 보이는 그대로 그리면 됐고 누가 더 똑같이 그렸는가로 평가를 받았다. 귀족과 왕궁의 후원을 받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직업인이었지 예술인이 아니었다. 화가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20세기에 화가들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다. 시민은 선악과를 따 먹었고 비로소 '자아'를 알게 됐으며 여가를 가졌고 그것을 채워줄 뭔가를 갈망했다. 화가들은 대규모 스포츠와 박람회와 사진과 싸워야 했다. 무지한 부르주아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 안에서 다른 누군가와도 다른 완전히 새로운 뭔가를 창조해야만 했다. 옆에서 누군가 검은 사각형 하나를 그려 놓고 그것이 회화의 근원이라고 얘기한다. 예술계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다. 사각형을 창조한 예술가는 화려한 수사를 갖고 있다. 나조차도(당시의 미술가) 쭉 듣고 있자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마돈나나 동산을 똑같이 베껴 그리며 만족하겠다고? 꿈도 야무지지.





현대 미술은 파괴와 저항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안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나아갔다. 체제를 거부했다. 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빗장을 건 것은 파시즘과 나치즘, 전체주의적 코뮤니즘이었다. 그들은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 튀어나온 가지들을 쳐내야 했다. 자유? 반항? 상상력? 그것은 반체제다. 탄압의 정도는 그것의 위대함과 비례한다. 세계를 지배하려는 사람들은 상상력을 두려워 한다. 상상력은 생각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생각이 살아있는 한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 


과거의 예술이 저항적이었다면 그것은 예술계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주류 미술에 대한 반감. 미술 권력에 대한 항거. 아주 아주 협소한 토라짐그러나 현대 미술의 분노 사회를 향한다. 정치에 항거하고 통치에 반대하는 사상의 향연. 풍부한 상상력과 저항의 정신이 예술에 깃들어 있고, 그것이 대중과 결합하는 날 그들만의 제국은 무너져 버린다.


20세기 미술은 하나의 거대한 정신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영적이고 숭고하며 신비하고 난해하다. 나는 그 난해함으로 인해 현대 미술은 그 소재와 주제를 떠나 어떻게 해석되더라도 상관없는 것이라 여겼다. 검은 사각형 안에서 지옥을 보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보든 그건 전적으로 나의 자유다. 그것이 현대 미술이니까. 아! 나의 이런 생각은 얼마나 순진했던가. 현대 미술의 이해를 위해선 엄청나게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머리가 모조리 뒤집혀 버리는 고통의 순간들. 


이 책을 보는 내내 나는 거대한 철학을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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