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이 이해하는 지진의 과학
홍태경 지음 / 김영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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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진에 대해 알고 싶은 건 오직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지진이 오나요?


경주와 포항에 들이닥친 규모 5 이상의 두 지진은 대답한다. "네, 옵니다."


2011년 후쿠시마를 집어삼킨 동일본 대지진의 규모는 9.0이었다. 1945년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100만 개와 맞먹는 수준이었으며 1900년 이후 지구에서 발생한 지진 중 네 번째로 강력한 놈이었다. 일본 역사에는 처음으로 기록된 규모였다. 이런 대규모 지진은 주로 일정한 주기를 갖고 도래하는데 동일본 대지진은 869년 이후 1,142년 만에 다시 찾아온 짐승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은 단순히 땅을 울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진과 함께 발생한 해일의 최대 파고는 40m에 달했으며 이는 아파트 14층 높이에 달하는 크기였다. 해일은 시속 700km의 속도로 후쿠시마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그곳에 뿌리 박혀 스사노오와 싸워도 지지 않으리라 자부하던 원자력 발전소를 산산조각 냈다.


동일본 대지진을 이렇게 상세히 묘사하는 이유는 이 지진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진앙지 쪽을 향해 최대 5cm가량 이동했기 때문이다. 경주와 포항의 지진은 우연이 아니었다.


말했듯이 큰 지진은 주기성을 갖는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기의 역사를 끈질기게 기록해 둔 탓에 우리는 당시에도 굉장히 큰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말은 언제든 그 정도 규모의 지진이 현재의 한반도를 강타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행히 우리 정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고층 건물과 신축 건물들에 대한 내진 설계 기준을 높였고 지진의 근본 원인인 단층을 찾는 노력을 기울였다. 지진 피해를 줄이려면 무너지지 않게 대비하는 것 못지않게 대피 경보가 중요하다. 최근엔 툭하면 울리는 휴대폰 경고 문자로 피로감이 쌓였지만 어쨌든 시스템이 동작하고 있다는 건 확인한 셈이니 아주 얻을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내 머릿속에서 경주와 포항의 지진은 이미 잊힌 지 오래 기 때문이다. 아마 그 지역 사람이 아니라면 당시에도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 수 있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재앙에 대비하는 사람들은 늘 이런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재난 영화의 클리셰로 등장하는 파멸을 예고하는 과학자와 그걸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정부관계자는 결코 남 얘기가 아니다.


지진이 서울을 덮치지 않는 이상 이 무관심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남산타워가 쓰러지고 시그니엘의 허리가 반으로 꺾여야 우리는 비로소 지진의 존재를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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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최호영 옮김 / 생각연구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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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견해에 따르면 감정은 보편적이다. 지역, 나이, 문화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슬픔과 기쁨과 분노와 기타 등등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을 똑같이 느낀다. 예를 들어 이혼 숙려 캠프에 빌런이 등장하면 '분노 뉴런'이 활성화되어 심박수와 호흡, 혈압을 상승시킨다. 그들의 아픈 과거사를 듣고 나면 이제 '슬픔 뉴런'이 켜질 차례다. 우리 뇌는 우리가 이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도록 특별하게 배선되어 있다. 웨이퍼에 감광 용액을 바르고 EUV로 깎아 회로를 그리듯, 뇌는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제작되어 새 생명에 탑재된다. 이것이 미국 영화와 한국 음악과 유럽 소설이 전 세계인에게 먹히는 이유다. 감정은 보편적이니까.


이 책은 감정에 대한 고전적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저자가 '구성된 감정 이론'이라고 부르는 견해에 따르면 이혼 숙려 캠프의 빌런을 봤을 때 우리에게 닥친 일은 매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빌런이 미친 짓을 했을 때, 그 장면이 내 안의 분노 회로를 촉발해 앞서 언급한 전형적 신체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순간 분노를 느낀 까닭은 특정 문화 속에서 성장한 나의 입장에서 볼 때, 특정한 신체 감각이 미친 짓을 목격한 것과 동시에 일어날 경우 '분노'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이미 오래전에 '배웠기' 때문이다.


'배웠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해 우리가 분노라는 개념을 배우지 않았다면 동일한 신체 변화가 분노로 해석될 일은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엔 아주 즉각적인 반론들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이 기분들은 다 뭐란 말인가? 내가 분노를 배우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들도 없었을 것이란 말인가? 내가 머릿속에서 분노라는 개념을 지우면 분노는 사라지고, 신체는 평화를 찾고, 나는 비로소 해탈하게 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우리의 신체가 감각 기관으로부터 수집한 신호, 그것이 촉발한 신체의 변화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핵심은 그걸 해석하는 게 뇌고, 뇌는 문화적으로 학습한 개념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임의로 결합한다는 언어학 이론을 연상케 하면서 동시에 그냥 말장난 아니야?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민하게 느낀다는 '눈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눈치가 없는 사람을 우리가 뭐라고 불렀지? 개념이 없는 사람 아닌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분위기가 촉발한 기류의 변화를 포착할 만큼 '감정의 해상도'가 높지 않은 것이다. 왜? 그 변화를 해석할 개념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 연애하는 동안 이성으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어본 사람이라면 구성된 감정 이론의 핵심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이 가르쳤지. 내가 사람 만들었어.'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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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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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하나는 거짓말이다.


- 이 소설의 장르는 판타지다.


- 등장인물 중 하나는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다.


- 모든 소설가는 우울증 환자다.


- 소설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중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게 제발 거짓말이길 기도할 만큼 우울하다.


- 이야기를 참고 또 견디다 보면 마법 같은 정화의 순간이 온다. 우리 손을 잡은 고난이 눈에 선명한 현실임에도,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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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브레인 - 우리 몸과 마음을 컨트롤하는 제2의 뇌, ‘장(腸)’
에머런 마이어 지음, 서영조 외 옮김 / 레몬한스푼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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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가 뒤틀린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뒤틀린다. 누군가 위를 찢어버릴 목적으로 쥐어짜는 것 같아 잠에서 깰 정도다. 이상한 일이다. 스트레스는 정신의 영역일 텐데, 어떻게 물리적인 기관들이 영향을 받는 걸까?


생각이 모든 걸 좌우한다는 말, 일체유심조라는 이야기에는 가해자의 논리가 숨어있다. 마음의 평온이 결국 나에게 달린 문제라면 외부 조건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모두 헛수고이지 않은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내가 내 마음을 잘 다스렸다면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런 생각은 행동이 필요할 때 명상이나 하자는 비겁한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일일지니, 다투지 말고 자신의 마음이나 돌아보라. 정말 불쉿이다.


<세컨드 브레인>은 우리의 감정이, 생각이, 마음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장 내 미생물이라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실체가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장과 장 내 미생물군은 밀접한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감정과 통증 민감도,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의사결정을 좌우할 수도 있다. (p.22)


영어로 직감을 gut(내장) feeling이라고 하는데 괜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과 뇌는 정보를 '양방향'으로 전달할 수 있는 굵은 신경다발과 혈류를 이용해 소통한다. 이 신경절달경로를 통해 호르몬과 염증성 분자가 부지런히 오가며 뇌와 장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것이다. 장은 고유한 신경계를 갖고 있는데 약 5천만~1억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된다. 이는 뇌-신체 연결의 중추라 불리는 척수와 맞먹는 수치다.


장 신경계가 수집하는 풍부한 감각정보는 뇌에 전달되고, 뇌는 이를 분석해 장의 기능을 조절한다. 우리 몸은 이 과정에서 '감정을 느낄 수'있다. 감정을 감각정보 그 자체로 볼 것이냐, 아니면 뇌가 해석한 결과로 보느냐는 흥미로운 논쟁이긴 하지만 별 의미가 없다. 이는 물질이 먼저냐 생각이 먼저냐를 놓고 수천 년간 싸워온 낡은 유물-관념 전쟁을 연상케 한다. 해봐서 알겠지만 이는 헛수고일 뿐이다. 둘은 미묘하게 얽혀있다. 분명히 밖이라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면 어느새 안이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정말 놀라운 건 장 내 메생물의 관점에서 이 '연결'을 바라볼 때 발생한다. 미생물도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존이 최대 과제이며 자신의 DNA를 가능한 많이 남기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이 미생물들이 번식에 유리한 음식물을 달라고 뇌에게 조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을 먹고 우울감이 감소하는 걸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당분이 장 내 어떤 미생물의 주요한 먹잇감이라면, 이 미생물들이 특정 신경전달물질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게 지나친 상상일까?


과학이 발전해서 좋은 점은 호기심이 해소되서가 아니다. 새로운 질문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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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영화 특별판) - 신의 선택을 받은 자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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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멜리는 교황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었다. 요직인 국무원장을 역임했으나 이제는 뒷방으로 밀려나 허울뿐인 추기경단 단장직을 맡은 게 전부였다. 국무원장에서 내려올 때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교황은 거절했다. 아직 바티칸에는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로멜리는 그 말이 달갑지 않았다. 대단한 평가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래도 관리자라니. 고작 그 정도 크기였을 뿐인가. 하나님의 품 안에서 크고 작은 그릇은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사람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조차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원망하지 않았던가.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후보는 아데예미, 트람블레이, 테데스코, 그리고 벨리니였다. 몸놀림이 신중하고 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이었으며 늘 품위를 챙겨 '교회의 왕자'라 불리는 아데예미에게는 아프리카의 동족들이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 우주 역사 최초의 '흑인 교황'이라는 불꽃을 지닌 남자였다.


트람블레이. 프랑스계 캐나다인. 잘생긴 외모에 날씬한 몸. 북미인 특유의 가식만 제외하면 괜찮은 남자였다. 그에겐 아시아를 비롯한 비주류의 지지가 있었다. 아! 비주류. 영원히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이들은 늘 자신을 대신할 대표자가 필요했다. 트람블레이는 그들의 열망을 연료로 콘클라베를 달릴 준비를 마쳤다.


테데스코는 여러모로 추기경답지 않았다. 우선 돼지 같은 외모가 그랬다. 열 다섯 남매 중 막내로 자랐기 때문일까? 게걸스러운 식성은 안 그래도 떨어지는 품위를 짓이겨 밟았다. 그래도 전통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추종자가 적지 않았다. 그는 가톨릭 극우파의 수장이었다.


로멜리는 벨리니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교황이라는 성좌보다는 신학자의 책상이 더 어울렸지만 현직 국무원장이 아닌가. 흑인 교황은 너무 급진적이었고 캐나다인 교황은 어딘가 우스꽝스러웠으며 테데스코는 꼴통이었다. 벨리니의 강점은 딱히 결격 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정치란 무엇인가. 끌어내릴만한 손잡이를 달지 않는 것이다. 로멜리는 벨리니야 말로 진정한 교황의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로멜리는 자기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에 늘 벨리니의 이름을 썼다.


로멜리는 첫 투표에서 5표를 얻었다. 테데스코 22표, 아데예미 19표, 벨리니 18표, 트람블레이 16표, 기타 38표였다. 처음에 로멜리는 감개무량했다. 이중 다섯 명이나 자신에게 최고의 영예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두 번째 투표에서 9표를 얻자 점점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그의 손에는 이상하리만치 운이 좋은 카드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앞선 주자들을 나락으로 끌어내릴만한 비밀들이.


여섯 번째 투표에서 로멜리는 40표를 얻었다. 일곱 번째에는 52표였다. 로멜리가 선두였다.


주님의 가여운 양, 바티칸의 관리자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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