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
리처드 파인만 지음, 정무광.정재승 옮김 / 승산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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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이 어쩌다 내 인생에 들어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양자역학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만났을 것이다. 이론을 전개하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 때문에 빠져들었을 테고. 나는 늘 독특한 사람들에 끌려왔다. 아무리 위대해도 개성이 없으면 마음이 가지 않는다. 리처드 파인만은 별들의 전쟁이라 볼 수 있는 양자역학의 우주에서도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이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의심과 불확실성이다. 완전무결한 궁극의 이론은 모든 과학자들의 꿈이지만 역사상 이것이 실현된 적은 아직껏 없었다. 뉴턴은 양자역학의 시작과 함께 고전으로 물러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블랙홀의 특이점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진정 최종인가? 이것이 특정 환경에서 여전히 의도한 대로 동작하는가? 과학의 역사란 의심이 역사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단언컨대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의심이다.


불확실성은 의심을 낳는 토대다. 과학의 정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법칙이, 이 진리가 현시점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결과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그 복잡하고 정교해 보이는 이론들이 우리가 알고 경험한 것들에 한해서만 참이라니. 그런데도 세상은 굴러간다. 마치 멈출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브레이크를 단 채 시속 100km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이다.


무엇을 완전히 알았다고 말하는 순간 과학은 종말을 맞이한다. 의심은 더 이상 사라지고, 과학은 종교가 된다. 과학은 확실히 확신을 경계한다. 모든 것은 과정일 뿐이다. 뉴턴은 그 모든 위대한 업적을 이룬 비결에 대해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세상을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학의 존재 이유가 바로 이거다. 누군가에게 거인의 어깨가 되어주는 것. 자기 자신이 그 어깨 위에 올라서는 정복자가 되지 않는 것.


과학이 봐도 봐도 재미있는 이유. 확실과 불확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불확실을 불안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모호한 대답을 잘 모르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답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과학보다는 종교를 갖는 것이 낫다. 정해진 결말을 원한다면 영화를 보자.


아,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다. 이 책에 지금까지 내가 기술한 이런 내용들이 나오리라 확신해선 안 된다. <과학이란 무엇인가>는 파인만의 강연을 옮긴 책이다. 잠시 과학적 태도를 버리고 확신을 하나 들려주겠다. 지금까지 읽은 파인만의 강연록 중 인상적이었던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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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서양
니샤 맥 스위니 지음, 이재훈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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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서양>의 전반부는 서양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밝히는데 주력한다. 우선 서구 문명의 모태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로마를 뜯어보자. 그리스-로마는 이를 지칭하는 단일한 단어가 없다는 것부터 이 두 문명이 얼마나 다른지를 반증한다. 그리스와 로마를 하나로 묶다니? 고대 로마인들은 어리둥절할 게 분명하다. 그리스어를 주로 사용했던 동로마조차 스스로를 로마이오이(로마인)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심지어 로마인은 스스로의 뿌리를 트로이라 여겼는데 그게 어떤 나라인가! 그리스 연합의 최대 라이벌이자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으로 완전히 망한 나라 아니던가!


그리스는 어떨까? 아테네인 이라면 자신이 스파르타, 마케도니아, 코린토스, 테베 등과 한데 묶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 세상에,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한 팀으로 묶다니, 그들이 원수보다 못한 사이였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던가? 갈등의 원인도 특별한 게 아니었다. 성격 차이라는 이혼사유보다 흔해 빠진 이유. 그것은 바로 '문화적 차이'였다.


사실 그리스라는 이름은 로마인들이 만든 것이다. 그쪽 지방의 국가들을 쉽게 관리하기 위해 붙인 라틴어. 이 신조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식민 지배자인 로마인뿐일 것이다. 일제가 만주와 조선을 지배한 뒤 두 지역을 한데 묶어 조만이라고 불렀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스라는 이름도 이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말이다. 물론 로마는 이 문제로 크게 벌을 받았다. 근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그리스와 로마를 한데 묶어 그리스-로마라 불렀기 때문이다. 말하고 있는 나조차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책의 후반부는 이 개념이 어떻게 변하고 이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개념을 다루는 자들은 대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 개념이 서로 상반되는 목적을 이루는데 활용됐다는 점이다. 유럽의 열강들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류 문명의 모태를 그리스-로마로 정했고 자기들이 그 정당한 후계자임을 강조했다. 미국은 그 식민 통치자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러니까 제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동일한 개념을 이용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진정한 후계자가 쇠락하는 유럽이 아닌 미국에 있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이 책은 참 재밌다. 역사를 그렇게 많이 읽었음에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 줄줄이 나온다는 점이 그렇다. 리빌라, 알킨디, 비테르보의 고프레도, 라스카리스, 툴리아 다라고나, 앙골라의 은징가, 윌리엄 글래드스턴, 에드워드 사이드, 캐리 람. 헤로도토스나 프랜시스 베이컨이 나오면 식상해서 죽을 맛이 날 정도다. 재미의 다른 한 축은 그토록 정치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역사가 꼼짝없이 그 안에 갇혀 유린당하는 현장에서 찾을 수 있다. 내 생각에 이 지구에서 가장 정치적인 건 역사다. 역사는 결코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사실만 기술하면 될 일이, 왜 이렇게 힘든 건가? 이 질문은 전제가 틀렸다. 사실이라는 것, 그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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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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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들의 아침 식사>는 커트 보니것 자신이 가장 쓰고 싶었던 소설이었을 것이다. 이 추측을 확신하려면 소설이 쓰인 시기를 주목해야 한다. <챔피언들의 아침 식사>는 <제5 도살장> 바로 다음에 출간됐다. 무명에 가까웠던 소설가를 전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작품. 킬고어 트라우트가 맹활약하고 이야기가 널뛰는데도 평론가들은 그 시도를 이야기의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절묘한 미학적 형식으로 인정해 줬다. 보니것 입장에서야 그냥 농담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평론가들에게는 해석의 미끼가 됐던 것이다.


짹짹?


보니것은 농담을 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렸고 자신의 작품을 벽에 붙여 놓은 바나나처럼 만드는 데 도가 튼 사람이다. 껍질이 노란색이면 <고양이의 요람>이라던가 <마더 나이트>,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가 되고 거뭇거뭇 멍들기 시작하면 <타이탄의 세이렌>이, 작두를 탄 것처럼 절묘한 상태, 그러니까 껍질은 완전히 검게 됐지만 그 속은 썩지 않아 엄청난 당도를 지닌 것이 <제5 도살장>, 까봤더니 안 까지 썩어있으면 <챔피언들의 아침 식사>가 나오는 것이다.


들어보라. 이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단한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니 고소득 전문직을 노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작가 본인의 말마따나 이 소설은 이야기가 대단히 파편화되어 있다. 짤막한 상황과 에피소드가 두서없이 분출하기 때문에 마치 브라운 운동을 관찰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난립한다. 보니것이 이런 소설을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었던 건 오직 <제5 도살장>의 성공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예기치 않은 복권을 손에 쥐고 보니것은 자신이 늘 하고 싶었고, 가장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을 이 소설에 쏟아붓는다.


나는 <챔피언들의 아침 식사>로 말미암아 국내에 출간된 보니것의 전작품을 다 읽은 사람이 됐다. 아마 하나도 빼먹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양반의 이야기를 너무나 사랑하고, 이야기를 대하는 태도까지 사랑해 그 태도를 내 몸에 그대로 덧 입히고 싶을 정도다. 이야기가 꼭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까? 누군가 잘 해석할 수 있도록 길을 내줘야 하는 걸까? 소설이 독자에게 던지는 농담이어선 안 되는 걸까? <챔피언들의 아침 식사>는 그 태도와 형식 때문이 아니라 내용 때문에 실패했다. 웃기는 장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난해난 부분이 꽤 많다.


나는 이 농담이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소설을 하나 알고 있다. 아마 보니것은 그런 소설을 쓰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 누구도 이런 소설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챔피언들의 아침 식사>가 가려고 했던 길의 종착점을 보고 싶다면 <타임퀘이크>를 읽어보라. 이 소설이 보니것의 마지막 작품이었다는 건 정말 보니것다운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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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지와 광기
야콥 하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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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지와 광기>는 육식이 범죄가 된 세상을 그린다. 물론 형사 처벌 대상은 아니다. 육식을 한다고 얘기했다간 사회적으로 매장이 될 수 있는 세상. 육식은 불문율이 되었고 어기는 사람은 윤리적, 도덕적인 비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저기, 아직도 고기 먹어요?(p. 25)


평소 하던 대로 잘 길러진 반추동물의 등살을 가볍게 구워 반짝이는 소금 몇 알을 곁들여달라고 했을 뿐인데, 마치 인육을 달라는 사람처럼 당신을 쳐다본다. 가장 비슷한 기분을 느끼려면 어떤 짓을 해야 할지 상상해 보자. 강남역 사거리를 알몸으로 걷기?


세상에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 있기 마련이다. 지하철에 생긴 임산부석에 분노하고, 말 안 듣는 사람을 잡아 고문하지 못하는 걸 답답해하고,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말에 눈을 뒤집는 사람들. 이 책의 주인공도 비슷했다. 주변의 시선을 고려해 억지로 육식을 끊기는 했지만 단백질 부족 때문이었을까? 점점 남성성을 잃어가던 어느 날 스스로 거세를 자행하기에 이른다. 고기를 안 먹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이다.


응급실에서 의사의 세심한 진료를 받은 바로 그날,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육수맛내기69'를 만난 것이다. 주인공의 용기는 육수맛내기69라는 수상한 이름의 남자에게 개인적 연락을 할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육식에 대한 갈망은 결국 그를 반추동물과 조류의 피비린내로 가득한 육류의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로 스스로를 이끌었다. 소시지가 광기로 변한 순간이었다.


<소시지와 광기>를 재미있는 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소설은 주인공이 경찰에 체포되어 조서를 받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오로지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진행되는 이야기. 농담은 원래 길게 할수록 지루한 법인데 이 소시지가 바로 그렇다. 모노드라마를 한 시간 넘게 듣고 있으면 정신과 의사도 질리기 마련이다. 고기를 먹지 못해 우는 소리, 광기가 일으킨 끔찍한 사건을 남 얘기하듯 지껄이는 고백. 이 인위적이며 부자연스러운 구성은 독해의 재미를 전달하는데 큰 힘이 되지 못한다.


저자 야콥 하인은 동독 시절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보스턴과 스톡홀름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아동 심리학자로 병원에서 근무한 사람이다. 원래 똑똑한 사람들이 자기 전공을 살려 쓰는 소설들이 대개 그렇다. 글은 잘 쓸지 몰라도, 이야기는 잘 짓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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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 - 나를 살리기도 망치기도 하는 머릿속 독재자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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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마음먹은 대로 행동한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놀고 싶으면 놀고. 이 말에 위화감을 느낀 사람은 아마 돈과 회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 망할 두 개만 방해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음대로 살 수 있을 텐데. 현대인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과 정신병은 아마도 이 마음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것 같다.


처음에 우리는 이 문제를 현실을 구부려 내게 맞추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세상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뒤로는 마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마음은 온전히 나의 것이니까. 그걸 구부려 현실에 맞추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적응' 또는 '포기'라 부른다. 한편 마음을 물리적 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하려는 시도도 존재한다. 이는 의외로 지구인 대다수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다. 주위를 둘러보라, 종교가 멸종해 가는 요즘에도 불교는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끌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고통은 결국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상일 뿐. 모든 것은 공이요. 그 마음을 돌아보는 나 조차도 공이니, 중생이여, 집착을 끊고 고통에서 벗어나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적응도 포기도 해탈도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의지박약으로 부르며 채찍질을 가하는 걸 보면 우리는 좀처럼 이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 고통의 굴레를 끊으려면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마음을 바꾸는 일에 그렇게 매번 실패하면서도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건 무지 때문이다. 뇌의 왕좌는 의식이 것이 아니다. 의식은 우리 행동의 극히 일부분만을 통제한다. 대부분은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곳, 아니 인지해서는 안 되는 곳의 명령으로 우리의 삶이 구성된다.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걸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의식의 왕좌를 되찾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일어나 걷기를 의식적으로 해보라. 왼발이 땅에 닿은 직후 오른 뒤꿈치를 들어 앞으로 움직이고, 뒤로 뻗었던 왼손을 앞으로, 앞으로 뻗었던 오른손은 다시 뒤로 거둬들여야 한다. 정말 이 모든 걸 '생각하면서 해'보라. 아마 세 걸음도 채 걷지 못할 것이다. 걸음을 의식한 순간 우리 몸은 걷기가 불가능해진다.


마음?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현대 뇌과학이 밝혀낸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죄책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일말의 빛을 비춘다. 문제는 당신의 의지가 아니다.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있을, 당신의 무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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