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표본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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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는 사이코패스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사실 사이코패스라는 소재는 캐릭터를 쉽게 만들어준다. 엽기적인 악행이 본성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마음껏 난도질을 해도 된다. 악마를 벌주는 일에는 누구도 죄책감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고백>은 정말 통쾌했다. 악마성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에게 깃들어있다는 것도 주요했다. 외면과 내면 모두 투명할 정도로 순수한 악은 읽기가 쉬웠고 그만큼 찢어버릴 때 행복했다. 자기보다 더 큰 악을 만났을 때, 똑똑한 소악마가 지옥의 왕을 만났을 때, 어른보다 끔찍했던 악행은 애들의 장난으로 전락하고,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만드는 징벌의 무게에 짓눌린 악인의 눈물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인간표본>에는 사이코패스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런데 정확히 말해 이들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여러 사람을 죽여 미술품으로 전시한다는 생각을 일반인이 떠올리기 어렵긴 하지만 이미 많은 부분에서 모방의 냄새가 난다. 작가 본인도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를 거론하지 않았는가. 캐릭터도 단단하게 구축하지는 못했다. 담담하게 살인을 저지른다고 모두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소설은 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세상이 그저 불타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얻기 위해 세상을 불태우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 행위자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아이라는 점은 <고백>과 동일하다. 하지만 이 특징이 캐릭터와 행위, 이야기 사이의 괴리를 메웠는가는 의심스럽다.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도 없는 소설은 두 가지 화장으로 자신을 꾸민다. 하나는 나비라는 소재고 다른 하나는 반전이다. 둘 중에는 그나마 나비가 더 잘 먹었다. 반전은 붕 뜬 화장처럼 이야기에 스며들지 못했다. 반전이라는 대목에서 <인간표본>은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용의자 X의 헌신>처럼 보인다.


<인간표본>은 읽지 않아도 되는 소설이다. 미나토 가나에를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면 <고백>에서 멈추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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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전쟁 - 우리는 왜 이 전쟁에서 실패를 거듭하는가
요한 하리 지음, 이선주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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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전쟁>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간단하다. 마약을 합법화하자는 것. 마약 합법화? 우선 이런 나라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마약은 엄두가 안 나고 대마 정도는 머릿속에 몇 개 떠오른다. 그것도 비범죄화와 합법이 뒤섞여 있는데 그 차이를 설명하는 건 뒤로하고, 네덜란드, 캐나다, 미국의 일부 주 정도가 떠오른다. 많은 연구 끝에 오해가 풀린 대마가 이 정도인데 헤로인, 필로폰, 코카인을 합법화한다고?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자는 세 개의 질문을 던진다. 마약으로 인한 범죄는 왜 일어나는가? 마약은 중독성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누가 마약을 하는가? 저자는 첫 번째 대답부터 강력한 훅을 꽂아 넣는다. 마약 범죄는 대부분 그걸 불법화했기 때문에 벌어진다. 만약 살인을 합법화하면 살인으로 감옥에 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살인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말장난을 하고 싶은 건가? 그게 아니다. 마약을 금지한다고 수요가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결국 그 '시장'은 범죄조직에게 기회가 된다. 암시장을 과연 누가 운영하겠는가? 국가 공무원? 마트 주인? 수요가 많은 상품은 법으로 막는 순간 어둠의 길로 빠져 통제할 수 없는 태풍이 된다. 이 시장은 균형과 견제가 이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금지물은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고 중독자들은 오른 가격을 벌충하기 위해 절도나 사기, 나아가 강도 같은 강력 범죄를 저지른다.


경쟁 업체 입장에서는 더 좋은 상품을 싸게 제공하기보다는 유통 지역을 장악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쿠팡에 올려 총알 배송을 해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많이 팔려면 그들이 언제나 쉽게 찾아올 골목을 차지해야 한다. 그러니 무력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마약으로 인한 강력 범죄는 대부분 중독자들이 아니라 이 범죄 단체들이 저지른다.


두 번째 대답. 마약은 사람을 중독시킨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마약에 중독되는 사람이 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비록 그게 영화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멀쩡한 직업을 가진 번듯한 사람들이 취미로 코카인을 흡입하는 장면들이 종종 나온다. 미국에는 유명한 헤로인 중독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국가의 중대사를 다루는 사람이었는데 그 임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정부는 그가 거리에서 마약을 구매하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헤로인을 공급해주기도 했다. 그 이름은 바로 조지프 매카시. 빨갱이들을 향해 무차별 폭력을 난사했던 사나이. 역시 그건 약을 빨고 한 짓이었다.


마약은 단 한 번만 해도 인생이 끝나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마약을 하면서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 이 대목에서 저자의 대답이 폐부를 찌르고 들어온다. 마약이 사람을 중독시키는 게 아니라, 중독될만한 사람들이 마약을 찾는 것이다. 이 말은 세 번째 대답으로 이어진다.


그럼 중독자들은 왜, 무엇을 위해 마약을 하는 걸까? 고립감 때문이다. 그들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배제된 괴로움을 잊기 위해 마약을 한다. 여기서 시간선은 아주 중요하다. 반드시 배제를 중독의 앞에 둬야 한다. 아마도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외롭고 힘들다고 다 마약을 하나? 하지만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세상에는 이런 문제 때문에 마약을 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질문을 던진다고 그들의 마음이 강해져 당신 같은 '건실한 인간'이 되는 건 아니다. 상황을 바꿔보자. 회사를 가는 게 너무 힘들고 괴로워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만 힘들어?


당신의 말을 듣고 친구가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리라.


마약은 불법이기 때문에 마약을 하는 사람은 범죄자가 되고 범죄자가 됐기 때문에 직장을 잃고, 집에서 쫓겨나고, 거리로 나가 노숙을 하고, 구걸을 하고, 가게의 물건을 훔친다.


정밀 기계로 유명한 스위스라고 하면 나는 늘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파워 T의 합리자들이 떠오른다. 이 사람들의 눈에는 마약 중독자가 구제불능으로 보일 것이다. 놀랍게도 스위스는 한 때 마약 문제가 심각했다. 그러다가 이 나라에 우연히 중독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정치인이 등장했다. 그녀는 수많은 예산을 투입하는데도 감소는커녕 매년 악화되기만 하는 마약 문제에 다른 식으로 접근했다. 중독자와 전쟁을 벌이는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것이다. 그녀의 처방은 혁명적이었다. 그녀는 마약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마약을 나눠줬다. 주요 감염의 통로가 되는 주사기를 공짜로 바꿔주기도 했다. 그녀의 눈에 중독자들은 범죄자가 아니라 돌봐줘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스트레스로 폭식해 비만이 된 사람을 우리는 범죄자로 취급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견디느라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피우는 골초, 매일 밤 소주 한 병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못 자는 사람들을 경찰이 잡아가지는 않는다. 마약이 달라야 하는 이유가 뭘까? 마약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방 한 구석에 조용히 누워있다. 그가 경찰에 잡혀 회사에서 잘리기 전에는. 그렇게 집에서 쫓겨나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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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 - 2024년 타이베이국제도서전대상 소설상 수상작
탐낌 지음, 우디 옮김 / 엘릭시르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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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 낌은 한국을 좋아한다. 박찬욱을 좋아하고 팬데믹 시기에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의 핵심 주제 중 일부를 채우기도 했다. 나는 이 얘기를 국뽕이 아니라, 탐 낌이라는 인간, 이 홍콩인이 가진 문화적 개방성을 논하고자 꺼냈다.


홍콩은 자유 국가'였다'. 중국과는 달랐다. 그래서 89년의 천안문 사태 이후 완전히 불구가 되어버린 중국인과 달리 폭거가 진행됐을 때 우산 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은 분연히 일어섰고 평화로 맞섰다. 홍콩인에게 자유는 목숨과도 바꿀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좁은 땅덩이에서 이토록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 이뿐인가? 집값은 하늘을 뚫고, 거리는 맛있는 걸로 가득하고, 여름은 습기로 넘치고, 사람들은 빠르고.


개방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정체성을 단단하게 다지는 건 신기한 일이다. 모든 것에 열려있어 온갖 것이 정신을 돌아다니는데 그 와중에 어떻게 나만의 것이 생기는 걸까? 그런데 경험적으로 보면 확실히 그렇다.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치고 개성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개방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인다. 채워서 덧붙이고, 어쩔 땐 깎아서 끼워 넣는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소설이다. 홍콩이 아니라면, 탐 낌이 아니라면, 이 소설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쯤에서 쓰우 씨가 왜 다 죽어야 하는지 얘기해 보자. 쓰우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다. 그러니 쓰우 씨가 다 죽어야 한다면 한 가계가 멸족한다는 의미고 엄청나게 많은 희생자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다행히 홍콩에서 쓰우란 성은 사우스 코리아의 황보나 독고보다 더한 희성이다. 섬을 다 뒤져 수십 명 정도를 찾을 수 있을 정도. 그래도 이 정도면 학살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쓰우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멸족을 당해야 할까?


결론적으로 행위와 처벌의 무게가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 약간은 아쉬웠다. 쓰우가 다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이야기가 너무 커져버린 탓에 주인공 혼자만의 힘으로는 풀어나갈 수 없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이 부분은 탐 낌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치서우런이라는, 신조협려의 주백통 같은 경찰 하나를 붙였는데, 캐릭터의 매력과는 별개로 그의 힘이 너무 강했다는 건 역시 이야기의 탄력을 느슨하게 만든 주범이지 않았나 싶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앞으로 탐 낌을 애정의 눈으로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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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조선 당쟁사 - ‘주자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야만과 퇴행의 역사 이한우의 지인지감 4
이한우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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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왜 당쟁이 있었는지 이해하려면 주자학을 알아야 한다. 주자는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지방 관리를 하며 약간의 성과를 냈던 것 같다. 한족 역사상 가장 허약했던 나라가 바로 송나라다. 황제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적도 있고 결국에는 무력에 굴복해 중국의 남과 북을 나눠 갖자는 오랑캐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했다. 협상이 아니라, 중화 역사상 처음으로 오랑캐의 봉국이 된 것이다. 송은 금에게 매년 은과 비단, 수만의 공녀를 바쳐야 했다.


아, 중화인이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인가. 주자는 이러한 정치 상황과 지방관리로서의 작은 성공 경험을 살려 성리학을 세운다. 이 학문의 핵심은 왕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니 중앙의 권력을 신하와 지방에 더 나눠줘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우매한 한 명의 왕이 아닌 똑똑한 다수의 신하들이 다스려야 한다. 성리학이 괜히 고려말에 싹튼 게 아니다. 고려말도 송나라와 다를 게 없었다. 오랑캐의 봉국이 됐고, 왕들은 무능했다.


저자는 조선초의 개국 공신들을 '성리학자'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강한 회의를 갖는다. 그러나 정도전을 비롯해 새 나라를 일으키려 시도한 혁명가들은 적어도 성리학의 핵심만큼은 가슴 깊이 새겼던 게 분명하다. 왕은 뒷 방에 처박아 놓고 똑똑한 자기들이 정치를 펴겠다는 것. 그런 면에서 이성계는 궁합이 잘 맞는 군주였다. 말 타고 활 쏘고 사냥하는 걸 즐겼을지언정 정치에는 큰 뜻이 없었던 사람이니까. 그들이 계산하지 못했던 건 이방원의 야심이었다. 형제를 모조리 죽이고 부왕까지 묶어 왕위를 얻은 태종의 눈에 주자 따위가 들 자리는 없었다. 모든 건 태종의 발아래에 있어야 했다.


태종의 아들은 그 유명한 세종이었고 그다음은 워낙에 단명을 했고 그다음은 이방원보다 야심이 큰 수양대군이었던지라 신하들이 까불 여지가 없었다. 성리학은 예성연중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꽃을 피운다. 중종은 사대부들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추대한 왕이었으니, 실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중종은 반정의 일등공신들 흔히 훈구파로 불리는 일당을 견제하고자 혁명가 조광조를 끌어들였으나 당시의 혁명이란 곧 성리를 근간으로 할 수밖에 없었으니 결국 자충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중종의 자리는 없었다. 그마저 역사는 훈구의 승리를 끝났고 성리학은 다시 인명선이 될 때까지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선조 시대에 비로소 붕당이 싹틀 수 있었던 건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선조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적자가 아니었다는 것. 적자란 첫째 아내에게서 난 아들이란 뜻인데 선조는 후궁의 자식이었으니 사대부의 관점에서 보면 서자였던 셈이다. 성리학은 이 정통의 균열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둘째, 뛰어난 이론가들이 있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결이 좀 달랐던 두 사람은 비로소 동서로 나뉘어 붕당을 짓는다. 이 둘이 붕당을 의도한 적도 없고, 실제로 주역도 아니었지만 이 둘을 바탕에 깐 한 사대부들은 점점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각각의 대장이(이황과 이이가 아닌 그들을 추앙한 무리) 서울의 동쪽과 서쪽에 살았느냐로 나뉜 동서 붕당은 어릴 때부터 각 당의 유력 인물들에게 배운 문하생들이 생겨나고, 그 문하생들이 다시 조정의 신하로 유입되는 순환 구조를 갖추며 조선을 당쟁의 구렁텅이로 처넣는다.


정쟁이란 게, 정말 부질없고 무능해 보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뉴스로 보는 21세기의 정치 현실을 꼭 닮아있다는 점에서 소름이 돋기도 한다. 인간은 역사로 배우는 게 정말 하나도 없단 말인가! 자꾸만 몰려드는 절망에서 벗어나 생각을 좀 달리해보자. 이것은 오히려 인간, 그리고 역사의 본질이 아닐까? 다툼 없이 진보가 가능한가? 당쟁은 확실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막기에는 효과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살아남았고 계속해서 싸웠다. 망국의 길로 접어든 건 세도 정치 때문이었다. 싸움을 멈추고 한 놈이 권력을 독식한 것이다. 정쟁보다 나쁜 건, 독재다.


당신이 무언가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데, 모든 게 당신의 뜻대로 되고 당신의 말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을 사망의 전조로 읽어야 한다. 반대 중에는 반대를 위한 반대도 있어 정말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모기가 싫다고 집을 태울 수는 없고, 소음이 싫다고 자동차를 부술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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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미래 - 편혜영 짧은소설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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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여왕이 침묵을 끝냈다. 11개의 짧은 소설과 함께, 간지에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라고 적었다. 뻔뻔하다 말할 수는 있겠지만 맞는 말이다. 이 일을 관둘 게 아니라면 결국엔 다시 일어나 걸어야 한다. 편혜영은 표절이라는 멍에를 지고 평생을 걸을 것이다. 그 실수와 반성과 회복은 계속의 과정이 될 것이다.


국내에서 끔찍과 섬뜩으로 줄을 세우면 편혜영을 따를 자가 없다. 문체도 문체거니와 이야기 자체가 싸하다. 밝은 세상만을 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문이다. 사람들은 '그로테스크'라 부르는데 나는 '리얼리즘'이라 말하고 싶다. 편혜영의 소설은 리얼하다. 그런 면에서는 의외로 김애란과 닮았다. 둘이 친하다는 소문이 과연 그럴법하다. 둘 다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뜨거운 덩어리가 현실에 남기는 그림자를 가져다 이야기를 짓는데 발라드로 치면 김애란이 김동률이고 편혜영은 이소라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면 아프고 죽을 것 같아도 '다시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편혜영은 평생 어둠에 처박혀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공포는 옷이고, 때로는 피부 같다.


그런 면에서 <어른의 미래>는 귀엽다. 스티븐 킹의 단편들, 혹은 <궁금한 이야기 Y>, 조금 더 표현하면 <실화탐사대>까지도 나아간다. 마음의 부담을 벗고 가볍게 써나간 것 같다. 그래서 읽기 즐거웠고, 또 반가웠다. 똑같이 인상을 쓰고 깊이 들어와 버리면 좀 뻔뻔해 보일 뻔했는데, 일종의 전환점 같기도 하고, 예열 같기도 하고, 준비 운동이랄까? 그녀가 그녀의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알린 복귀 소식으로 상당히 깔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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