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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의 매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63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스포일러가 있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이 소설이 재미 없지는 않을 겁니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를 드디어 읽었다. 좋아하는 열린책들 세계 문학 전집 양장본으로. 열린책들에 감사. 양장본에 감사.
<몰타의 매>는 나를 매료시킬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한 소설이다. 우선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하드보일드라면 그 대가라 불리는 헤밍웨이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OK인 나다. 나에게 하드보일드는 일종의 신앙과 같다. 나 외에 다른 문학을 섬기지 말라? 말씀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나 필요한 법이다.
하드보일드하면서 탐정소설이다. 이 말은 나에게 문학과 장르 소설의 경계에 걸쳐 있다는 말로 들린다. 경계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 곳엔 두 가지 성질이 매끄럽게 섞여 있다. 문장의 아름다움 혹은 주제의 진정성 거기에 이야기의 재미가 붙는다. 순수 문학이 화려하게 피는 꽃이라면 경계에 선 문학은 그 꽃이 진 자리에 열매를 맺는 문학이다. 터져나온 과육이 뺨으로 턱으로 가슴으로 줄줄 흐른다. 지저분하고 천박해 보이지만, 그 맛을 모르고 논하지 마오.
<몰타의 매>는 아가사 크리스티와 그녀의 추종자들이 뱉어내는 복잡한 트릭이 없다. 있는대로 플롯을 꼰 뒤 온갖 잡다한, 있을 법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트릭으로 장식하는 소설이 아니다. 범죄는 리얼하고 묵직하다. 미국 최대의 탐정 사무소에서 실제 탐정으로 일해 본 경력이 도움이 됐을 것이다.
<몰타의 매>는 탐정 소설이지 추리 소설이 아니다. 탐정은 행동하지만 추리는 생각을 한다. 탐정은 움직이지만 추리는 빙빙 맴돌 뿐이다. 탐정은 추리와는 달리 밀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방팔방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쑤셔 쥐새끼를 밖으로 끄집어 낸다. 그리고는 도망치는 쥐새끼를 온 힘을 다해 쫓는다. 이 소설엔 생각대신 행동이 있다. 지루할 새가 없다.
샘 스페이드. 유쾌한 금발의 악마 같은 남자. 그는 하드보일드를 갑옷으로 무장한 남자다. 그는 선하다고도 악하다고도 볼 수 없다. 그를 설명하는 단어는 오로지 프로페셔널, 이거 하나 뿐이다. 직업 탐정의 세계에선 이거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유명한 탐정은 어느 순간 '범인은 바로 너야'하는 쇼맨쉽을 발휘해야 하지만 직업 탐정은 범인을 본 순간 주먹을 날려 턱을 부숴버린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주 앉아 협상을 벌인다. 정의의 사도로 보이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취미로 바이올린을 켜고 독서를 하는 우아한 인간이 아니다. 우선 살아야 한다. 살아서 연명해야 한다. 휴식은 담배 한 개비와 위스키로 충분하다.
샘 스페이드는 하드보일드 최대의 적인 '사랑' 앞에서도 자기 삶의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 브리지드 오쇼네시는 온갖 거짓말로 온갖 사건을 일으킨 뒤 샘 스페이드를 엮어 소동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모든 음모가 탄로나고 만다. 여자는 샘 스페이드와 나눴던 사랑을 무기로 그를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하지만 샘, 어떻게 그런 일을!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는데 그러면 안 돼요."
"왜 안 되는 거죠?"
"그럼 당신은 나를 가지고 논 거예요? 나를 좋아하는 척한 거예요? (중략) 나를...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 않아요?"
"아마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죠?" (중략)
"나는 서스비가 아니에요. 재코비도 아니고요. 당신 때문에 얼간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p.276)
샘 스페이드. 진정한 직업 탐정. 그는 단호히 사랑을 거부했기에, 비로소 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