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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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기 앞의 생>은 에밀 아자르의 책이다. 동시에 로맹 가리의 책이기도 하다. 로맹 가리는 <하늘의 뿌리>라는 소설로 1956년 콩쿠르 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19년 뒤 <자기 앞의 생>으로 두 번째 공쿠르 상을 수상한다. 공쿠르 상은 결코 같은 작가에게 두 번 상을 주지 않는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로맹 가리가 두 번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유서 깊은 문학상의 위원회가 도저히 두 번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베일에 쌓인 신예 에밀 아자르가 설마 로맹 가리였을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로맹 가리는 30년 간 소설가로 명성을 얻고 부를 얻고 여자를 얻는 동안 너무 지쳤던 거다. 사람들은 로맹 가리의 실재가 아닌 자기들이 안다고 믿는 로맹 가리를 믿었고 이러한 부조화는 감수성이 예민한 소설가들에게 언제나 큰 상처를 안겨주기 마련이었다. 이른바 가면의 생.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기의 얼굴에 딱 달라 붙어 숨통을 조여오는 가면에 질식하고 말지만 이 모험심 넘치는 노인은 달랐다. 자기의 또 다른 자아, 에밀 아자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은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라는 사실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는 경쟁하듯 서로의 소설을 출간했는데 로맹 가리에게 이제 갈 때가 됐다고 혹평을 쏟아낸 비평가들이 에밀 아자르의 소설엔 도저히 신인이라고 볼 수 없는 대가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찬사를 늘어놨다. 얼마나 신이 났을까? 로맹 가리는 1979년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짧은 원고를 쓴 뒤 1980년 입 안에 권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겨 생을 마감했다. 이 책의 끝에 그 원고가 담겨 있다.


<자기 앞의 생>이 쏟아내는 절망은 너무 설화적이라 오히려 동화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뜬금없이 <어린 왕자>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파리의 창녀와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 받은 14살 소년 모모는 어린 왕자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쫓는다. 하지만 모모에겐 어린 왕자와 같은 수동적 태도가 없다. 이 작은 아이는 자기 동의도 없이 폭력적으로 내던져진 삶에 적극적으로 대항한다.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입고 거리로 나가 구걸을 하는가 하면 상점에서 개를 훔쳐오고 그 개를 사랑하게되자 개에게 더 행복한 삶을 주기 위해 부자집에 팔아넘긴 뒤 그 거금을 하수구에 버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걸 떠나 보낼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사랑한다고 붙잡을 자신도 없는 멍청이 어린 왕자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길러줬던 로자 아줌마가 치매에 걸렸을 때 그녀 곁에 남아 침대와 속옷에 싼 똥을 묵묵히 치우며 집안을 돌보기까지 한다! 어린 왕자였다면 "아줌마 아파요?", "이제 떠나는 건가요?", "길들여 지는 건 그런 거죠? 상처를 남기는 거죠?", "난 이제 어디로 가요?" 따위의 개수작을 벌일 상황에서 말이다.


모모는 아직 어린 아이였고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누릴 자격이 충분한 아이였지만 삶은 그가 어른이 되기를 강요했다. 죽음이란 게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질병은 오히려 축복이다. 질병은 우리가 더이상 아무 것도 잃지 않아도 되고 아무 것도 걱정할 일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모모는 아직 어린 탓에 죽음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생' 뿐이다. 창녀에게서 태어난 고아 이슬람교도에겐 단 한톨의 자비도 내어줄 생각이 없는 삶 말이다.


모모를 도와주는 건 블로뉴 숲에서 남창으로 일하는 여장 남자와 뒷골목을 제패한 아프리카 흑인, 역시 아프리카에서 도망쳐 와 쓰레기 청소부가 된 일단의 무리다. 그들은 "아픈가요?", "산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거에요." 따위의 개소리를 하는 대신 바나나와 암탉과 망고와 쌀을 가져다 준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린 왕자>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생떽쥐베리도 로맹 가리도 모두 프랑스인이었고 모두 전투기 조종사였다. <어린 왕자>가 추운 겨울 밤 따뜻한 침대에 들어가 켜켜이 저며드는 어둠과 함께 지독히 사치스러운 센티멘털을 느끼며 읽는 책이라면 <자기 앞의 생>은 똑같이 추운 겨울날 송곳처럼 피부를 찌르는 비를 맞으며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아 깜빡이는 가로등 불 빛에 의지해 읽는 책이다. 나는 침대 맡에 놓인 <어린 왕자>가 웬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나는 밖으로 나가 비를 맞으며 모모를 읽겠다. 비에 젖어 뒤틀린 책은 노랗게 변해 딱딱하게 굳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뒤틀린 책을 평생 팔 사이에 끼고 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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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4
윌리엄 포크너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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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곰>은 코맥 매카시가 왜 윌리엄 포크너의 후계자인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매카시의 남자들이 카우보이라면 포크너의 남자들은 사냥꾼이다. 카우보이는 황야를 달리고 사냥꾼은 숲을 누빈다. 차이는 있지만 둘 모두 대지를 숭배한다. 뿐만 아니다. 시뻘겋게 달궈진 난로가 온기를 내뿜는 집을 떠나 기어이 죽음이 도사리는 차가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매카시와 포크너의 남자들이다.


<곰>은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어느 남부 농장주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겨울이 되면 자기 땅에 속한 숲으로 들어가 수 십 일 씩 오두막에 기거하며 사냥을 한다. 그들의 최대 목표는 전설의 곰 올드벤이다.


올드벤은 거대한 곰이었다. 숲이 자신의 소유라 말하는 인간을 비웃듯 이 늙은 곰은 아주 오랜 시간 그 곳에 살며 그 곳을 지배했고 그 곳에 발을 디디는 인간과 대결했다. 그 대결 동안 올드벤은 발가락 하나를 잃었다. 대신 옥수수 저장고를 부수고,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를 비롯해 송아지까지 숲으로 끌고 가 잡아 먹었으며 자기 냄새를 맡고 찾아온 사냥개 수 십 마리를 갈기갈기 찢어놨다. 마침내 올드벤이 죽었을 때 그의 몸에서 산탄, 소총, 원형 탄알을 포함해 무려 52개의 탄알이 발견됐다. 하지만 올드벤을 죽인 건 52개의 탄알이 아니었다. 그의 목숨을 끊은 건 그 역시 목숨을 걸고 달려든 한 사냥꾼이 목덜미 깊숙히 쑤셔 넣은 단검이었다. 그 차가운 칼날이 왼쪽 어깨를 쑤시고 들어가 마침내 숨통을 찌르기까지, 올드벤은 거대한 몸을 일으켜 사냥개와 사냥꾼을 찢어 던졌다.


이 소설에선 올드벤과 그를 쫓는 두 사람 아이작 그리고 샘 파더스와의 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아이작은 집안의 연례 행사에 따라 어린 시절 부터 사냥을 배운 대농장의 상속자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매년 올드벤을 사냥하러 숲에 오지만 단 한 번도 올드벤을 향해 총을 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올드벤을 통해 이 숲과 나아가 자신이 상속 받았다고 믿는 그 농장들이 과연 인간의 소유일 수 있는 가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자연은, 대지는, 숲은, 그것이 자신의 소유라고 믿었던 인디언에 의해 백인에게 팔렸고 소유권을 정당하게 이전 받았다고 믿은 백인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그것을 상속했다. 이같은 구성은 대개 인디언에 대한 백인의 박해를 비판하기 위함이지만 포크너의 의도는 더 심오하다. 그는 과연 그 땅이 인디언의 것이기는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단순한 인종차별을 너머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유린이라는, 더 보편적인 주제로 소설을 끌고 나간다.


그래서 샘 파더스의 죽음은 납득이 된다. 그는 인디언 추장과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오랜 시간 숲에서 살며 백인이 그 자리에 없는 동안 숲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는 매년 올드벤 사냥에 나서지만 아이작과 마찬가지로 그를 죽일 생각은 전혀 없다. 그가 사냥에 나서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52발의 탄알을 맞고도 죽지 않고 달려 나가는 올드벤의 생존을 목격하기 위해서. 그는 백인을 조롱하듯 끈질기게 생존하는 올드벤을 통해 자신의 땅을 뺏긴 것에 대한 복수의 쾌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샘 파더스의 인생은 좀 더 끈적하다. 그의 삶은 이 숲과 숙명처럼 엮여 있다. 샘 파더스로 하여금 곰만큼 늙은 몸을 일으켜 기어이 사냥에 나서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죄의식, 자신이 팔아 넘김으로써(편의상 샘 파더스가 숲을 팔아넘긴 인디언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자) 핍박을 받게 된 자연에 대한 죄의식이다. 그는 전우를 팔아 넘겼으나 그가 목숨을 잃지는 않기를 바라는 밀고자의 심정으로 매년 사냥에 나선다. 그러나 올드벤은 분 호갠벡(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혼혈)과 그의 잡종개 라이언에 의해 목숨을 잃고 그의 숨이 끊어지는 바로 그 순간 샘 파더스 또한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밝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다. 샘 파더스의 죽음은 속죄를 위한 자살이었을까? 아니면 동일시에 의한 주술적 죽음이었을까? 나는 샘 파더스가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믿는다. 원래 인디언은 자연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과 함께였고 그것이 주는 대로만 먹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순간 그것이 자신의 소유라고 착각을 했고 끝내 백인의 거래에 손을 얹고 만다. 샘 파더스의 죽음은 그것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연의 벌이다.


<곰>은 총 다섯 장에 걸쳐 이어진다. 1, 2, 3, 5장은 올드벤 사냥과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4장은 과연 인간이 자연을 소유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문제 의식이 포크너 특유의 난해한 이야기로(그래도 곰은 포크너의 작품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소설) 펼쳐진다. 4장은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므로 올드벤과의 사투만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장을 건너 뛰어도 좋다. 하지만 이 소설을 쓰게 된 포크너의 의도가 궁금하다면 이 4장을 절대로 흘려보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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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로큰롤
오쿠다 히데오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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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의 책은 처음이다. 이름은 많이 들어 봤는데, 일본 현대 작가들 중에는 거품이 낀 사람들이 많아 선뜻 찾아볼 마음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우연히 신간의 출간 광고를 보게 됐고 두 페이지 쯤 미리 보기 해봤다. 그리고 바로 구매.


훌륭하지 못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도 훌륭한 '에세이'를 쓰는 경우는 자주 있다. 소설과 에세이의 작법 난이도 차이 때문이다. 아무래도 소설은 어렵다. 구성도 있어야 하고 캐릭터도 있어야 하고, 아무튼 겁나 짜증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에세이는 그냥 쓰면 된다. 다소 중구난방 다른 애기가 이어져도 "이 에세이는 참 구성이 엉망이에요"라고 투덜대는 독자는 없다.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에세이는 쾌변 같은 것이다. 소설은 변비고. 그래서 하루키는 장편 하나를 쓰는 동안 그토록 많은 에세이를 쏟아내는 것이다. 안 그러면 똥독이 올라 죽어버리거든. 에세이 조차 한 단어 한 단어 바위에 새기듯 힘겹게 밀어 쓰는 사람은 아마 김훈이 유일할 것이다.


<시골에서 로큰롤>은 오쿠다 히데오를 오늘의 오쿠다 히데오로 만들어준 Rock 음악에 대한 이야기다. 국가를 막론하고 Rock 음악은 청년기에 앓게 되는 병인 것 같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웃사이더들이 청년기에 앓는 병이다.


아웃사이더는 아웃사이더를 알아보고 우리에겐 우리만의 언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다. 엄청 재밌다. 동시에 오쿠다 히데오가 정말 부러웠다. 그는 Rock 음악의 탄생과 중흥기에 청년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일종의 숙주 같은 거다. QUEEN이 전세계적 명성을 얻기도 전에 그들의 라이브 공연을 본 사람이란 말이다. 아웃사이더들은 누구나 알만한 밴드의 누구나 알만한 앨범에 대해 말하기 보다는 그들의 알려지지 않은 명반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고, 그걸 일종의 라이센스로 여기고, 그런 걸 알아보는 자기 자신에 도취하고, 그런 얘기를 관심도 없는 남들에게 해줄 때 자부심과 우쭐함을 느낀다. 그런데도 오쿠다 히데오가 싫지 않은 이유는? 잘난척 쟁이들 특유의 꼰대스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Rock Will Never Die라고 외치지 않으면 Rock 음악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공포를 떨쳐낼 수 없었던 90년대 중반에 처음으로 그 음악을 접했다. 그 때 Rock은 온갖 양념이 뿌려져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자극적 음식으로 변해버린 시기였으므로 그 맛을 먼저 본 나는 명반이라는 걸 들어도 "이게 뭐?"하며 오히려 촌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서 오쿠다 히데오가 알려주는 수 많은 앨범을 직접 들으면 당신도 비슷한 감상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월이 흘렀다. 나도 나이를 먹었다.


그러고나니 이제 이 음악들의 맛을 알겠는 거다. 확실히 옛날 음악들은 차분히 앉아 들어야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것들이 대다수다. 그 때는 음악 감상이라는 것이 실제 '취미'로 존재하던 시대였다. 사무실에 앉아, 출퇴근 길에, 음질도 형편없는 MP3와 차마 형언 할 수 조차 없는 엉터리 이어폰으로 듣는 듯 마는 듯 음악을 흘려 듣던 시절이 아닌 것이다.


오쿠다 히데오 덕분에 오랜만에 음악의 참맛을 느꼈다. 사 놓고 잘 쓰지 않던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60년대 말에서 70년대 말까지 이어지는 Rock 음악의 본류를 깊숙히 빨아들였다. 그러고 나니 알겠다. 역시 Rock이 최고다.


세상 모든 게 시시해져도, Rock 만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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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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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건 1944년 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 때 '미 전시정보국'과 '전략조사국'에서는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뭔가, 그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비록 전쟁이 끝난 1946년 출간되긴 했으나 이는 점령지 일본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탈바꿈 한다.


전시였던 탓에 루스 베네딕트는 '원격 타문화 연구'를 위한 기법을 특화해 일본을 연구한다. 이는 획득 가능한 문헌 자료들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재해석하고 일본 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인터뷰를 추가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인지 <국화와 칼>을 읽다보면 일본인이 세계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기 보다는 실험실 안에 고립된 타계의 생명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만큼 같은 점도 많이 갖고 있다. 하지만 문화 비교 연구에서 이런 점은 종종 간과되곤 한다.


차이는 회자될 수록 신화화 되는 경향이 있다. <국화와 칼>이 처음 나올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차이를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일본을 이해하게 됐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이런 인간도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일본을 '구경'했을 것이다. 타문화간 이질감과 몰이해를 강조하는 건 어쩌면 이해를 목표로 진행되는 문화 비교 연구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책을 읽을 때 더 철저히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역사를 보면 거의 모든 국가는 봉건 사회를 거쳐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발견하는 근대화 과정을 겪게 된다. 계급이 사라지고 단 하나의 인간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근대화 과정에서 오히려 계층적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 시대 일본의 정치인들이 행한 첫 번째 조치는 천황을 국가의 정점으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봉건 시대 일본의 계층 구조는 백성이 자기 번의 다이묘를 섬기고 이 다이묘들이 쇼군을 섬기는 이중 구조였다. 개화기 정치인들은 쇼군을 제거하고 번을 폐지했다. 이로써 위계 질서는 천황을 중심으로 더욱 단순해졌으며 추가로 영주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충돌할 갈등도 근본적으로 없애버렸다.


이렇게 일목요연한 위계 질서 아래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이것이 서구 근대 국가와 일본이 다른 결정적 차이였다. 특히 이는 억압적 강제가 없다는 점에서 '권위 주의'와 구분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모두가 자기 자리를 안다, 혹은 분수를 안다는 것은 내재화된 복종이며 자발적으로 발현되므로 체제는 저절로 안정을 획득하고 꼭대기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토대를 마련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 일본의 발전과 전쟁의 밑바탕이 되었다.


독특하게도 일본은 국제 정치에서도 이 같은 생각을 고수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무력으로 점령하며 내세운 기치가 바로 '대동아공영권'이었던 것이다. 가장 우수한 민족이자 국가인 일본 아래 아시아의 모든 국가를 둠으로써 평화(?)를 회복하고 각 국가에 맞는 자리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생각이 뻔뻔한 침략의 미화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실제로 '대동아공영권'을 믿었다. 그들이 자국의 위계질서를 의문없이 내재화한 것처럼 세계도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일본이 아니었다.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일본의 통치자들은 진심으로 의아해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아시아의 국가들을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수도 모르는 뻔뻔한 미개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침략이 종종 계몽의 모습을 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일본이 승전국이 아닌 패전국이 됐을 때 아주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일본군은 전세가 완연히 기울어 패배를 눈 앞에 둔 상황에서도 포기를 모르는 전사였다. 그들은 거대한 항공모함의 막강한 화력에 '천황 폐하 만세!'를 세 번 외치고 자폭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으로 맞섰다. 그들의 비행기나 배에는 구명 도구가 없었고 그런 도구의 비치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사무라이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죽음이 당도했을 땐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이 전사라는 위치에 맞는 올바른 행동이기 때문이다. 설령 의도치 않게 죽음을 피했더라도 그 징표는 남아 끝내 할복이라는 극단적 행동으로 발현된다.


이렇듯 그들은 결코 항복을 모르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 사나운 짐승들의 입에 일제히 제갈을 채운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천황의 항복 선언이었다. 1945년 8월 15일 떨리는 목소리로 마이크 앞에 선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몇몇은 자기 주인을 그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할복을 감행한다.


우스운 건 바로 여기서 부터다. 자기 주인을 위해 할복까지 감행한 그들이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정복자 미국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미국은 주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제거되야 할 복수의 대상이었을까? 아니었다. 일본인은 자신을 패배시킨 미국을 새로운 위계 질서의 정점으로 받아들였다. 재편된 위계 질서 안에서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대던 개가 얌전한 강아지로 변해 본분을 다하고, 


이로써 체제는 무한한 안정을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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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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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


  아내를 참아내지 못한 남편의 계획 살인이 한 가족을 몰락시키는 과정을 차분하고 집요하게 그려내는 소설. 갈등은 어항 안에 떨어뜨린 잉크 한 방울이다. 다툼이 고조되는 사이 어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잉크는 힘차게 뻗어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재앙으로 확산된다. 여기엔 자비가 없다. 고작 한 방울에 불과했던 잉크는 어항 전체를 빨갛게 물들여 그 안에 숨쉬는 모든 것을 목졸라 죽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1922>의 교훈: 결혼을 하지 말자



  빅 드라이버


  한적한 국도에 못 박힌 나무를 뿌려 두고 먹잇감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거대한 강간마의 이야기. 사고를 당한 직후에 100미터 정도 온 길을 되짚어 사고 표지판을 놔뒀다면 어땠을까? 커브를 돌면서 충분히 속도를 줄였다면? 방금 무사히 함정을 피해간 저 봉고가 나처럼 사고를 당했다면? 인간은 닥쳐온 재능의 심연 속에서 어쩌면 그것을 피할 수도 있었을 이런 저런 가정을 내려본다. 그것은 과거를 바꿀 수도 없고 오히려 상처만 키울 뿐이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아주 간단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이 가정의 끝은 대개 이렇게 마무리 된다. 왜 하필 나였을까? 현실이라면 절대 답을 얻지 못할 질문이지만 소설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내가 강간을 당한 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주인공은 시간을 되짚어 올라가 점점 빅드라이버의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리고는 이 강간에 정교하게 펼쳐진 거미줄을 발견한다.


  <빅드라이버>의 명대사: "타이어 가는 건 집어 치우고." 유쾌한 목소리. "그냥 떡이나 치는 게 어때? 응?"(p.251)



  공정한 거래


  한 꺼풀만 벗겨도 인간의 몸엔 뜨거운 피가 아니라 차갑고 냄새나는 오수가 흐른다는 걸 알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시커멓게 털이난 괴물이다. 가장 친한 친구의 행복도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겉으로는 축하를 건네지만 속으론 그 행복이 오래 가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공정한 거래>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극단으로 밀어 붙인다. 스티븐 킹은 이 책의 닫는 글에서 형편 없는 글이란 "살인자들도 때로는 할머니가 길을 건너도록 도와 준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데서 비롯된다"(p.600)고 말하는데, 바로 그 짓을 이 소설에 해 버린다. 하지만 살인자들도 때로는 할머니가 길을 건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을 외면하기에 <공정한 거래>는 단순함을 획득하고 그걸로 쾌감의 폭탄을 제조한다. 어린 아이의 전쟁에는 전략도 전술도 필요 없다. 그저 막강한 탱크, 미사일에 맞아도 터지지 않는 괴물 한 대가 전장을 초토화 시킨다. 단순함이 지나치면 바보가 되는데, 사실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정한 거래>의 교훈: 친구를 질투할 거면 만나질 말자



  행복한 결혼 생활


  딜레마다. 나를 끔찍이 사랑하는 남편이 어린 아이의 성기를 이빨로 물어 죽인 괴물이란 걸 발견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경찰에 신고하는 순간 결혼 생활은 끝이다. 뿐만 아니야, 아이들은? 연일 TV가 쏟아내는 변태 살인마의 뉴스를 향해 저게 우리 아빠야 라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을까? 침묵하자니 성기가 잘린 아이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이는 잘린 성기를 찾아 지옥을 헤맬 것이다. 하지만 남편을 지옥으로 보낸다고 이 소년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소년은 지옥에서조차 이 끔찍한 살인마와 함께 하게 되는 거 아닐까? 억지라는 거 안다. 하지만 안다고 마음을 쉽게 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들과 나, 우리의 삶에서 이 남자의 존재만 똑, 잘라 낼 방법이 없을까? 여자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교훈: 결혼을 왜 하지?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단편은 하찮다, 가치 없다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단편을 거의 쓰지 않고 정말 부득이한 경우라도 중편 선에서 타협을 본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 남자가 수다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라는 건 조금만 주의를 놓쳐도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쉽다. 조금만 주의를 놓쳐도 군더더기가 덕지 덕지 붙는다. 실제 수다에선 그게 매력이지만.

  <별도 없는 한밤에>는 전 세계적으로 3억 부의 책을 팔아 치운 작가의 글이라고 보기엔 당황스러울 정도로 엉터리다. 에필로그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군더더기들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를 방해하는 건 기본이고 독자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허술한 전개가 자신 있게 이어진다. 미국은 정말 미지의 나라다. 윌리엄 포크너를 낳은 땅에서 스티븐 킹을 기르니.

  할 수만 있다면 책 앞에 이렇게 적어 전 세계의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보내고 싶다.

  "이렇게 써도 3억부를 팔 수 있습니다." 

  그들에겐 엄청난 희망이 될 게 확실하다. 그러고 보면 스티븐 킹이 맞는 말을 하기는 했다. 악덕 속에서도(살인자들도) 미덕은(할머니들이 길을 건너는 걸 도와주는) 발견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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