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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 없는 한밤에 ㅣ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평점 :
1922
아내를 참아내지 못한 남편의 계획 살인이 한 가족을 몰락시키는 과정을 차분하고 집요하게 그려내는 소설. 갈등은 어항 안에 떨어뜨린 잉크 한 방울이다. 다툼이 고조되는 사이 어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잉크는 힘차게 뻗어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재앙으로 확산된다. 여기엔 자비가 없다. 고작 한 방울에 불과했던 잉크는 어항 전체를 빨갛게 물들여 그 안에 숨쉬는 모든 것을 목졸라 죽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1922>의 교훈: 결혼을 하지 말자
빅 드라이버
한적한 국도에 못 박힌 나무를 뿌려 두고 먹잇감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거대한 강간마의 이야기. 사고를 당한 직후에 100미터 정도 온 길을 되짚어 사고 표지판을 놔뒀다면 어땠을까? 커브를 돌면서 충분히 속도를 줄였다면? 방금 무사히 함정을 피해간 저 봉고가 나처럼 사고를 당했다면? 인간은 닥쳐온 재능의 심연 속에서 어쩌면 그것을 피할 수도 있었을 이런 저런 가정을 내려본다. 그것은 과거를 바꿀 수도 없고 오히려 상처만 키울 뿐이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아주 간단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이 가정의 끝은 대개 이렇게 마무리 된다. 왜 하필 나였을까? 현실이라면 절대 답을 얻지 못할 질문이지만 소설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내가 강간을 당한 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주인공은 시간을 되짚어 올라가 점점 빅드라이버의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리고는 이 강간에 정교하게 펼쳐진 거미줄을 발견한다.
<빅드라이버>의 명대사: "타이어 가는 건 집어 치우고." 유쾌한 목소리. "그냥 떡이나 치는 게 어때? 응?"(p.251)
공정한 거래
한 꺼풀만 벗겨도 인간의 몸엔 뜨거운 피가 아니라 차갑고 냄새나는 오수가 흐른다는 걸 알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시커멓게 털이난 괴물이다. 가장 친한 친구의 행복도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겉으로는 축하를 건네지만 속으론 그 행복이 오래 가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공정한 거래>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극단으로 밀어 붙인다. 스티븐 킹은 이 책의 닫는 글에서 형편 없는 글이란 "살인자들도 때로는 할머니가 길을 건너도록 도와 준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데서 비롯된다"(p.600)고 말하는데, 바로 그 짓을 이 소설에 해 버린다. 하지만 살인자들도 때로는 할머니가 길을 건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을 외면하기에 <공정한 거래>는 단순함을 획득하고 그걸로 쾌감의 폭탄을 제조한다. 어린 아이의 전쟁에는 전략도 전술도 필요 없다. 그저 막강한 탱크, 미사일에 맞아도 터지지 않는 괴물 한 대가 전장을 초토화 시킨다. 단순함이 지나치면 바보가 되는데, 사실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정한 거래>의 교훈: 친구를 질투할 거면 만나질 말자
행복한 결혼 생활
딜레마다. 나를 끔찍이 사랑하는 남편이 어린 아이의 성기를 이빨로 물어 죽인 괴물이란 걸 발견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경찰에 신고하는 순간 결혼 생활은 끝이다. 뿐만 아니야, 아이들은? 연일 TV가 쏟아내는 변태 살인마의 뉴스를 향해 저게 우리 아빠야 라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을까? 침묵하자니 성기가 잘린 아이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이는 잘린 성기를 찾아 지옥을 헤맬 것이다. 하지만 남편을 지옥으로 보낸다고 이 소년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소년은 지옥에서조차 이 끔찍한 살인마와 함께 하게 되는 거 아닐까? 억지라는 거 안다. 하지만 안다고 마음을 쉽게 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들과 나, 우리의 삶에서 이 남자의 존재만 똑, 잘라 낼 방법이 없을까? 여자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교훈: 결혼을 왜 하지?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단편은 하찮다, 가치 없다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단편을 거의 쓰지 않고 정말 부득이한 경우라도 중편 선에서 타협을 본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 남자가 수다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라는 건 조금만 주의를 놓쳐도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쉽다. 조금만 주의를 놓쳐도 군더더기가 덕지 덕지 붙는다. 실제 수다에선 그게 매력이지만.
<별도 없는 한밤에>는 전 세계적으로 3억 부의 책을 팔아 치운 작가의 글이라고 보기엔 당황스러울 정도로 엉터리다. 에필로그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군더더기들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를 방해하는 건 기본이고 독자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허술한 전개가 자신 있게 이어진다. 미국은 정말 미지의 나라다. 윌리엄 포크너를 낳은 땅에서 스티븐 킹을 기르니.
할 수만 있다면 책 앞에 이렇게 적어 전 세계의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보내고 싶다.
"이렇게 써도 3억부를 팔 수 있습니다."
그들에겐 엄청난 희망이 될 게 확실하다. 그러고 보면 스티븐 킹이 맞는 말을 하기는 했다. 악덕 속에서도(살인자들도) 미덕은(할머니들이 길을 건너는 걸 도와주는) 발견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