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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투명사회>는 어렵다. 한병철의 글은 선언과 설명이 번갈아 가며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글을 쓰는 것 같다. 그래서 독해는 오래 걸린다. 철학에 대한 한병철의 관점을 생각해 봤을 때 이는 의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철학은 오래 머물러 숙고할 기회를 주는 학문이다. 읽자마자 이해가 되는 글은 투명한 글이다. 거기엔 깊이가 없다. 하나 하나 껍질을 벗겨 의미의 속살을 깨물어 먹는 묘미가 없다. <투명사회>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불투명한지를 자랑한다.
그의 책을 어렵게 만드는 두 번째 이유는 통념의 역전이다. 철학은 원래 저항의 학문, 의문의 학문이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당당히 질문을 던지는 것. 한병철은 이같은 철학의 본질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독특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연했던 세계가 무너질 때 우리는 엄청난 감정의 소모를 경험한다. 한병철의 철학은 우리를 탈진하게 만든다.
한병철은 부정성의 철학자다. 부정성이란 무엇이냐, 지난 수 세기 동안 우리가 싸워왔던 질병, 무지, 억압, 독재, 착취 등 세상의 온갖 나쁜 것들을 떠올리면 된다. 한병철은 인류의 문명이 이같은 부정성을 몰아내는 방향으로 진보해 왔다고 말한다. 성과는 훌륭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오래, 더 편하게, 더 자유롭게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사회의 병폐들이 오히려 부정성이 사라진 바로 그 공간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정성을 없애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싸워야 할 부정성이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얻은 자유의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가 어떻게 인간의 짐이 될 수 있는지, 그리하여 왜 인간이 그 숭고한 가치를 버리고 독재의 품 안으로 달려가는지를 밝힌 바 있다. 자유란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에서 어떤 뜻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한 대답까지 자도으로 주는 것은 아니었다."(p.230. 역자 해제 중).
"투명사회에 대한 한병철의 비판은 이러한 부정성의 사상을 시각적-인식적 차원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중략) 모든 것을 손쉽게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으로 전환해주는 디지털 기술은 시각적-인식적 부정성의 축소 내지 제거에 기여한다."(p.231. 역자 해제 중)
우리는 현대 사회를 정보 사회라 부른다. 정보 사회에서는 정보의 유통이 부를 창출한다. 오늘날 정보의 유통 속도가 광속을 지향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더 빠른 유통은 더 많은 유통을, 더 많은 유통은 더 많은 돈을 야기한다. 그래서 정보는 투명해야 한다. 메타포를 포함하는 정보, 비밀을 간직한 정보, 은밀히 암시하는 정보, 즉 해석이 필요한 정보는 우리 앞에서 멈춘 채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선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긴 글이 읽히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쉽게 풀어내야 한다는 강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숙고와 사색은 정보 유통의 최대 적이다. 수용하는 즉시 '좋아요'로 반응할 수 있는 것들만이 유통될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더 이상 해석을 원치 않는다. 사실 해석은 비밀로 둘러싸인 텍스트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가는데서 쾌락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일종의 에로티시즘이다. 하지만 정보는 투명하다. 그것은 이미 다 벗은 채로 세상을 돌아다닌다! 한병철이 현대 사회를 "포르노 사회"로 명명하는 것도 그래서 납득이 된다. 은밀한 가림과 유혹이 사라진 알몸 사회. 즉각적인 충동과 외설만을 감각하는 사회. 우리는 진정한 쾌락을 느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관점에서 나는 찌라시가 왜 그토록 빠르게 유통되는지 생각해 보려 한다.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또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찌라시는 불투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것은 네트워크를 타고 전염병처럼 번져 나간다. 이유가 뭘까? 찌라시는 일종의 폭로고 폭로는 투명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람의 이면을 드러낸 것처럼, 가면을 벗겨 낸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너무나 어설픈 연기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왜? 인간은 사실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게 사실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남의 속살을 보고 싶은 추악한 욕망, 타인을 발가벗겨 모욕하고 싶은 더러운 욕망이 우리의 착각을 부채질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엉망으로 만드는 게 정치인이라는 사실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에게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 한병철은 "그렇다"고 말한다. 우리가 권력자에게 투명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들은 우리를 속속들이 보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몰래 죄를 지어도 끝내 법의 심판을 받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더 진실된 사회, 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상호 감시의 사회'를 만들 뿐이다. 한병철은 신뢰가 "오직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98p) 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모든 걸 투명하게 보고 있다면 어떻게 신뢰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신뢰가 아니라 판단일 것이다. 그러니까 신뢰는 결코 투명함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투명하리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투명성을 부패와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사람은 그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p.14).
투명한 것이 옳은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가 정말로 투명해져야 한다면 세상에서 개성은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자신의 독특함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독특한 소수는 평범한 다수에 의해 억압받고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인간들만 존재하는 획일화된 사회,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전체주의 사회, 그것이 바로 투명사회의 종착지다.
우리는 타자의 불투명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타자를 투명하게 만들려는 의도에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거기엔 피아를 구분하려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발음이 어려운 일본어를 시켜본 뒤 잘 못하면 조선인이라 판단해 무조건 살해했다(당시 일본인은 지진의 혼란을 틈타 조선인이 폭동을 저지른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그들은 누가 일본인이고 누가 조선인인지,
투명하게 알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