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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태어나서 처음으로 폴 오스터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압도적이다.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라는 부제가 달렸는데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쓴 것 같다. 그냥 모든 소설을 이렇게 써줬으면 좋겠다. 확실히 모든 작가는 자기 체험을 얘기할 때 더 생생하고 더 진실되고 더 아름답다.
<빵 굽는 타자기>가 왜 재미있는고 하면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근거로 책 뒤 쪽에 나오는 두 편의 희곡을(희곡이나 소설이나 어쨌든 극화된 글 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길) 제시한다. 나는 이 희곡들을 한 번에 10페이지 씩 넘겨서 봤는데 그건 나에게 속독술이나 투시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뭉텅이로 페이지를 넘겨 책을 뭉개버리고 싶을 정도로 두 희곡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빵 굽는 타자기>에도 극적 각색이 있는지 없는지(그러니까 이걸 소설이라고 간주할 만할),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안다고 해서 딱히 대단한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패스하자. 그냥 내 주장이 틀린거지 뭐. 재밌으면 된 거 아냐!
나 같은 폴 오스터 혐오자가 왜 또 다시 폴 오스터의 책을 꺼내들었는지에 대해 얘기해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들어보라. 사실은 전혀 생각이 없었다. <환상의 책> 이후로 그와는 완전히 짜이찌엔, 굿 바이, 사요나라 해 버렸으니까. 도저히 그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데 얼마전 <그림과 문장들>이란 책을 읽으며 어마어마한 문장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기적같은 역전을 꿈꾸었다.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위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터무니 없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중략) 한쪽에는 시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돈이 있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잘 다룰 수 있다는 데 내기를 걸었지만, 처음에는 한 입, 다음에는 두 입, 다음에는 세 입을 먹여 살리려고 애쓰면서 몇 년을 지낸 뒤 결국 내기에 지고 말았다.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p.146)
이 말은 우리 우주에 사는, 소설가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생물들을 위한 잠언이다. 이 말 하나만 가슴에 품고 살면 당신의 삶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진리요 빛이요 바다를 집어 삼킨 캄캄한 폭풍우를 뚫고 들어오는 등대의 가르침이다. 명심하라. 누구나 돈을 갖진 못하지만 우리 모두는 시간을 갖고 있다. 폴 오스터는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은 탓에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이르러 결국 시간도 돈도 모두 잃고 말았다.
나는 너무 늦게서야 이 진리를 만났다. 돈은 애초에 없었으니 별로 원망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많던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나는 일 초도 멈추지 않고 꼬박 꼬박 쌓이는 시간을 수십 년이나 모았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을 담은 그릇은 밑 빠진 독이었고 시간은 빠진 밑을 따라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시간은 헤어진 연인과 같고 제 때에 뒤집지 못해 까맣게 타버린 삼겹살과 같다. 떠나간 연인에게 전화를 걸거나 타버린 삼겹살을 먹는 건 자유지만, 자유란 결코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무적의 화폐가 아니란 걸 알아두시길. 어쩌면 그 놈의 자유가 우리를 궁지로 몰아 넣은 주인공 일지도 모른다. 자유는 쓰기는 쉽지만 길들이기란 죽을만큼 어려운 괴물이니까. 당신의 인생이 왜 이리 누추한지 알고 싶다면 이 괴물이 어디에서 뛰놀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혹시 그 곤궁한 인생을 역전시키고 싶으면 괴물을 가장 놓고 싶지 않은 곳에 데려다 놓으라. 그리하면 고통과 함께 원하는 것을 얻을지니.
1947년에 태어난 폴 오스터는 1977년이 되서야 이 진리를 깨달았는데, 진리를 깨달은 후에도 한참이나 어두운 통로를 헤매다 1978년에는 파경을 맞았고 1981년이나 1982년, 혹은 1983년 쯤에 겨우 겨우 한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그리고 소설은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폴 오스터는 "여기까지 온 이상,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노력해서,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172) 정말 소름끼치게도,
그 마지막 한 번의 노력이 나와 당신에게 폴 오스터란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