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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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무서운 책이다. 태어나서 이렇게 충격을 받아본 책이 몇 권이나 있었나 싶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역사학과 생물학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역사서다. 시원부터 현대에 이르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600쪽으로 정리한 조감도. 혹은 인문학 총서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냥 정리를 잘한 거냐 하면 그렇지 않다. 모든 사안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선보인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인류는 약 7만 년 전 인지혁명을 일으켜 이후 3만 년 전 까지 언어, 바늘, 배, 활과 화살 등 다양한 도구를 발명했고 이는 현대 호모 사피엔스 사회를 이룩하는 초석이 된다. 그리고 이 인지 혁명은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속에 속한 유일한 인간 종으로 만들어 준다.


인류의 진화에 대해 우리가 갖는 많은 오류 중 하나는 먼 옛날 살았던 수 많은 원시인들이 하나의 종 안에서 순차적으로 진화해온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예컨대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 호모 에렉투스가 되고 호모 에렉투스가 진화해 호모 사피엔스가 됐다는 식으로 말이다. 진실을 말해주자면 그렇지 않다. 호모 사피엔스나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등은 모두 같은 시간 서로 다른 장소에서 살아간 독자적 '인간 종' 이었다. 고시히카리, 오대쌀, 추청, 남평, 동진 등으로 나뉘는 쌀의 품종과 똑같은 의미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의 결과로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 종이 됐다.


이 세상에 우리와 조금 다른 '인간'이 살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세계 인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다. 우리는 결코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지구에 사는 수 많은 동물 종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일 네안테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우리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호모 사피엔스 대통령은 자국민이 네안데르탈인과 결혼하는 걸 금지하거나 힘세고 강인하지만 우둔한 그들을 잡아 노예로 부렸을까? 아니면 스포츠 팀이나 군대에서 활약하는 네안데르탈인과 회계와 법률 회사에서 일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우러져 서로의 차이를 좀 더 잘 이해하는 화목한 사회를 이뤘을까? 이런 가정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필연에 균열을 낼 수 있다. 그것은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상상은 곧 피비린내나는 범죄를 암시하는 흔적을 따라 나아간다. 호모 사피엔스의 대규모 인종 청소라는 혐의를 향해.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적 과오를 비판하는 책이 아니다. 그저 있었을 법한 가정들을 제시할 뿐이다. 어쨌든 호모 사피엔스는 인간 속의 유일한 승리자였고 자연을 독점한 그들은 바다로 산으로 삶의 터전을 넓혀나가며 수 많은 동물 종을 멸종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호모 사피엔스는 확실히 네안데르탈인 보다 힘이 약했다. 메머드의 발길 한 번이면 대 여섯 명의 호모 사피엔스가 케첩 범벅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조직적이었다. 선발대를 보내 동물 떼를 추적하고 역할을 분담해 사냥에 나섰으며 교묘히 함정으로 유인했다. 이것은 분명 의사 소통의 힘이었다. 바로 언어가 승리의 칼자루였던 것이다.


언어는 효율적 사냥의 필수 요소였지만 오직 그것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그 정도 의사소통이라면 침팬지, 고릴라, 돌고래 등 다른 포유류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언어의 가장 큰 목적은 '뒷담화' 였다. 호모 사피엔스는 뒷담화를 통해 관계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았고 관계에 대한 정보는 집단을 조직, 운영, 확장하는 데 필수 요소였다. 누가 누구와 관계를 맺고 무엇을 원하고 누가 믿을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정보. 이것으로 호모 사피엔스는 150명 가량의 집단을 이룰 수 있었다.


여기서 150명 이라는 숫자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뒷담화를 통해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의 규모가 딱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는 이 임계치를 넘어 수 만, 수십 만이 거주하는 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허구를 창조해내는 능력이었다. 인간은 신화, 종교, 민족, 국가라는 상상의 존재를 만들어 수 많은 인간을 하나로 묶어낸다. 


생각해보자. 이슬람 교도들은 왜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지구 반대편의 이슬람 교도들을 형제라 부르는 걸까? 우리는 왜 올림픽 시상대에 걸리는 태극기를 보며 가슴 뭉클해 하는가? 그들이 알라, 성경, 단군, 국기의 존재를 함께 믿기 때문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라도 하나의 공통된 신화를 믿게 되면 대규모 협력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다. 소규모 집단이야 단순한 수렵과 채취로도 충분히 먹일 수 있었겠지만 수 만, 수십 만의 사람들을 굶기지 않으려면 혁명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법이다. 인류는 오래지 않아 그 해답을 찾아냈다. 바로 농업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자, 이제 인류는 유례없는 성장을 거듭해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규모의 집단을 이뤄냈다. 하지만 성장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농업 혁명은 조, 피, 귀리, 콩, 벼, 밀 등 다양한 곡식을 골고루 섭취하던 수렵인의 식탁을 벼 또는 밀로 고정시켜 버렸다. 집단 전체의 영양을 한 두 종의 곡물에 맡겨버린 상태. 그들에게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충고를 해줬어야 하는데! 예컨대 어느 해 이상 저온 현상이 발생해 벼들이 모두 얼어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귀리와 피, 조가 자라던 들과 사과, 배, 밤이 떨어지던 숲은 이미 불태워 논으로 바꾼지 오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먹을 걸 구해야 할까? 도시의 출현과 농업의 시작으로 인해 인류를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기아라는 재난에 맞닥뜨리게 된다.


어쩌면 유전자 환원주의자들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역사란 그저 유전자의 의지로 쓰인 시나리오일 뿐 고귀한 정신의 산물이 아니다. 인류는 더 강해지기 위해 신화와 국가라는 허구를 만들어냈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 강해진단 말인가. 이득을 본 건 오직 유전자 뿐이다. 개개의 행복 따윈 아무런 관심이 없어, 유전자의 목적은 그저 개체수를 최대한 늘리는 거니까.


<사피엔스>는 규모를 지향하는 현대 사회에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수렵 채취인들은 이른바 문명인들보다 굶주리지도 않았고 덜 행복하지도 않았다. 평균 수명은 다소 낮을 수 있었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 더 행복한 삶을 누렸다. 그들은 전쟁에 참여하라는 국가의 부름도 받지 않았고 집단 간의 갈등도 비교적 원만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끔찍한 살육과 전쟁은 언제나 정착민의 소유였다. 한 마을에 집과 소와 논과 곡식 창고를 가진 사람만이 그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법이다. 애초에 먹을 만큼만 축적하던 수렵인들은 몸이 가벼웠다. 그 정도 규모의 사람들을 먹일 곳은 얼마든지 다시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들은 미련 없이 살던 곳을 떠나 쓸데 없는 다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역사는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모든 해답은 역사 안에 있다. <사피엔스>를 읽고 나면 그런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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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개정증보판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8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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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대단한 문화 유산이다. 때로는 정쟁에 휘말려 왜곡된 사실이 적히고 한 때는 나라를 빼앗겨 왜인의 손에 편찬을 맡겨야 할 때도 있었지만 실록은 500년이 넘는 과거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한 권으로 읽든 두 권으로 읽든 조선왕조실록은 살아 생전 꼭 한 번 읽어야 할 역사다.


한 권으로 요약하다 보니 너무 빡빡한 건 단점이다. 또 왕의 비빈, 친척들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는 데 스토리 없이 신상명세를 읊다보니 지루한 감이 있다. 태정태세문단세 까지는 워낙에 잘 알려진 내용이고 나의 경우 세종실록까지도 읽은 탓에 초반은 상당히 끈적끈적 했다. 후루룩 넘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재미는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에서 시작한다. 호랑이 같던 수양대군. 왕위가 탐나 기어이 할아버지를 따라 왕자를 죽이고 왕이 된 이 남자는 왠일인지 하나같이 자식들이 허약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를 받았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가족 전체가 그 죄책감에 상당히 시달렸고(우리로 따지면 작은 아버지가 조카를 죽인거니까) 가까스로 둘째 아들이 남아 예종으로 즉위하지만 그도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 세조의 요절한 장남 덕종이 낳은 둘째 아들이 조선의 제 9대왕 성종으로 등극한다. 성종은 25년 넘게 조선을 통치하며 드디어 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대의 칼부림을 끝내는가 싶었지만 그 장남은 그 이름도 유명한 연산군!


이것이 바로 역사를 읽는 재미다. 태종은 수 많은 피바람을 일으켜 문제가 될 만한 싹을 뿌리째 뽑았고 그것이 건국 초의 불안한 왕권을 다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조선은 세종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피 냄새는 수 십 년이 넘도록 족보에 남아 기어이 수양대군의 야망에 불을 지폈다. 태종이 피를 뿌리지 않았다면 수양대군의 야심도 잠자코 눈을 감은 채 평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세조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왕위를 탈환할 수 있도록 도왔던 수 많은 권신들이 그의 사후에는 독처럼 남아 권력을 휘두르고 왕위조차 마음대로 주물렀으니까.


성공이나 성취는 그 당시에만 놓고 보면 확고불변한 완전체 같이 느껴진다. 그것으로 끝. 앞으로는 쭉 그 성공의 단물을 빨고 살면될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성공을 가능케 했던 바로 그 요소가 오히려 해가 되어 모든 걸 망쳐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성공안에 실패의 씨앗이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실패 안에도 성공의 씨앗이 있는 거 아닐까?


역사를 읽으면 일희일비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깨닫게 된다. 지금은 모른다. 죽었다 깨나도 모른다. 오늘의 성공은 내일의 실패로 이어지고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흥망성쇠. 어쩌면 그건 리드미컬하게 순환하는 미지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총량은 정해져 있어 행운이 지속되는 자는 그저 몰아서 받는 것 뿐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나는 괜찮아, 울지마, 아프지마 따위의 말 보다는 이 딱딱하고 건조한 역사에서 더 큰 위안을 얻는다. 불행엔 관성이 있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방향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되지만 긴 시간을 놓고 볼 때 언제나 바닥은 존재하고, 바닥에 닿은 자는 슬픔에 매몰되어 완전히 정신을 잃지 않는 이상 다시 한 번 힘차게 뛰어 올라 숨막히는 절망의 수면 밖으로 솟구칠 수 있다. 비록 내 생애에 그것이 이뤄지지 않을지라도, 그 의지는 반드시 이어진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500년의 시간을 한 권으로 압축해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도 이 한 권처럼 훅, 하고 지나가 그 땐 그랬었지 저 땐 저랬었지 하고 차분히 음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살아 생전엔 절대로 누릴 수 없다는 게, 인생의 비극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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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여행법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마스무라 에이조 사진,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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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여진 여행기를 읽는 것은 자신이 직접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p.8).


그렇다. 여행에는 그 즐거움 못지 않게 많은 수고와 노력이 다른다. 비행기는 갑자기 연착을 하고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선 멀미를 한다. 따뜻할 걸로만 생각했던 지중해의 태양은 완전 습하고 뜨거워 견딜 수가 없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여행을 좋아하는 한 남자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여행 보다는 여행을 준비하는 걸 더 즐긴 탓에 매번 준비만 마치고 실제로 여행을 떠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계획을 완벽히 마친 뒤 다가오는 여행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두근 반 세근 반 가슴이 떨려와. 하지만 정작 당일이 되면 기차를 타러 갔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뭐 이리 허무한 얘기가 있냐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 남자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여행은 현실이고 기다림은 꿈이다.


현실이 비루할 수록 일탈을 꿈꾸는 마음은 자라난다.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의 삶의 질을 그가 얼마나 여행을 바라는지로 판단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여행을 꿈꾸지 않는 자는 게으르거나 용기가 없거나 감성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지금 맞이한 현실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다른 것들을 떠올릴 여지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여행기를 읽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앞서 현실이 너무 행복하면 여행을 꿈꾸지 않는다고 썼지만 나 같은 경우는 현실이 너무 비루하여 꿈 꿀 수 없는 처지였다. 정말 한 푼의 여윳돈도 없었다. 차비를 걱정하며 회사를 다닐 정도였으니까. 이런 사정도 모르고 무작정 여행을 권하는 사람이 꼴보기 싫기도 했다. 여행이야. 여행이 답이다. 떠나라. 뭘 두려워 하는 거니. 돈이 없어도 여행은 가능해. 빚을 져서라도 가야 하는 게 여행이야. 정말 싫었다. 당시의 나는 어딘가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삶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한 시간째 앉아 지금껏 읽어본 여행기를 떠올려 봤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여행기라고 볼 수 있을까? 맞을 것 같다.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이탈리아에 가야겠다 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책이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 이탈리아에 갈 만한 돈과 시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게 송구스런 맘이지만, 이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루키 여행의 원동력은 아무래도 따분함인 듯 싶다. 이렇게 지루한 여행을 잘도 했네. 고생을 주워올 생각으로 오지만을 여행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젊은 시절 언제나 동행했던 부인이 이제는 이런 여행이 싫다며 손사래를 치기까지 했단다.


좋았던 챕터는 <우동 맛 여행>과 <고베까지의 도보 여행>이었다. 밀가루를 너무 좋아하는 탓에 '고탄수화물' 저지방 다이어트를 하는 나에게 우동은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언젠가 일본 열도를 돌며 우동과 라멘과 메밀 국수를 섭렵해 볼 생각이다. 이탈리아 파스타 여행과 함께 이 둘은 내 일생의 꿈으로 남아 있다.


해외 여행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어서인지 나는 오히려 하루키가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천천히 걸으며 특이할 거 하나 없는 정경을 담담히 읊어주는 <고베까지의 도보 여행>이 좋았다. 나도 걷는 걸 좋아한다. 멕시코나 노몬한, 미대륙을 횡단할 때는 전혀 맡지 못했던 공간의 냄새가 왠일인지 이 글에선 넘칠 정도로 충만했다. 나는 하루키와 함께 고베의 골목을 걸으며 소소하다 못해 평범한 산책을 즐겼다. 걷는 내내 나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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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7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변인과 문학 2016.가을
주변인과문학 (월간지) 편집부 지음 / 주변인과문학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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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만 하는 게 싫어 쓰기 시작했고그 일도 어느새 7년이 되 버렸다. 2년 전부터는 소설을 쓰고 있다매일 아침 한 시간. 아침 일찍 나와 글을 쓰고 있으면 오며가며 사람들이 묻는다책은 언제 나오냐고이쯤이면 뭐가 됐어도 되야 하는 게 아니냐고하지만 나의 경우 딱히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놓고 쓰는 건 아니다막연히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다언젠가는 글을 쓰는 직업을 가져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 같은 희망을 갖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1년 안에 소설을 한 권 쓰겠다 신춘문예에 등단하겠다 라는 구체적 비전을 가진 건 아니었다말하자면그냥 쓴다 라고 해야 할까?

 

하루키는 이와 비슷한 얘기를 좀 더 세련되게 말한 적 있다그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필연성’ 때문이라고 했다쓸 수 밖에 없는 상황딱히 정의할 수 없는어떤 미지의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책상에 앉아 종이를 펼치고 펜을 들게 만드는 것많은 사람들이 이런 건 나도 쓰겠다.” 라고 말하지만 평생 동안 단 한 자도 쓰지 못한 채 흙으로 돌아가는 이유도 이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들에겐 써야 할 필연이 없다내림굿을 받지 않으면 온몸이 아파 견딜 수 없는 무병 환자처럼어느 순간 이야기가 목에 걸려 토해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시간이쓰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찾아온다.

 

인간의 삶이란 그 자체가 고유한 이야기고그래서 산다는 것 만으로도 작가가 될 자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지만결국에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서 나고 만다.

 

나는 7년 전 어느 날 그 필연을 느꼈다.

 

이 책의 신인문학상 수상자 명단에 나의 이름이 있다대상은 아니기에 아직 등단한 것도 아니다상금은 적다응모된 소설은 150여편에 지나지 않는다대상을 포함한 수록작 4편에는 그런대로 품격을 겸비한 4편의 소설” 이라는 부끄러운 총평이 붙었고, 내 소설은 이야기 전개가 함께 가지 않고 제각기 노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 변명을 하자면, 아마도 글을 쓰는 습관 때문일 것이다. 세 시간, 네 시간 충분히 시간을 갖고 목표한 만큼 쓰는 게 아니라 딱 한 시간, 그 시간을 넘기고 나면 두 말 없이 손을 뗀다. 그래서 이야기는 흐름을 잃고 제각기 놀았던 거겠지. 한다고 했던 퇴고도 아직은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상을 받고 난 뒤 오히려 자신감이 떨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많이 읽을 수록 더 그렇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침묵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누가 내 글을 조롱하고 업신여긴다 할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쓸 수 밖에 없다. 쓰는 마음과 쓴 것에 대해 상처 받은 마음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두 개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각각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내 글에 박힌 가장 우울한 말을 들은 날에 썼다. 그것은 어렵거나 어렵지 않다고 따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썼다. 내 마음이 상처를 받은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쓰는 것 또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경험하며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이 왜 나왔는지 도대체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책상에 앉아 그 감정을 표현할 말을 오랫동안 찾아 보았다. 하지만 이 밤이 다 가도록 나는 아직 그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쓰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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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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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나간 싸이코패스가 무자비한 학살을 벌이는 소설을 기대했는데 그런 책은 아니었다. 80년대 스타일의 슬래셔 무비처럼. 불도저로 건물을 밀어버리는 기분으로.


현대 미국 스릴러는 불륜 없이는 불가능한가보다. 클리셰를 겹겹이 쌓아놓은 밀푀유의 느낌으로 소설은 지루한 행진을 계속한다. 문제를 직시하고 여러 번 반전을 꾀하지만 그마저도 밋밋하고 억지스러워 '스릴'은 생기지 않는다.


주인공 릴리는, 1876년에 태어났다면 대단히 참신한 악녀였겠지만 싸이코패스가 넘치다 못해 흘러 홍수를 이루는 2016년에는 너무나 평범해 보인다. 대개 이런 캐릭터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람 죽이기를 좋아했고 소설은 꼭 항상 그 유년기를 조명하는데... 이처럼 뻔한 스토리에 매력을 느끼기란 북어를 뺀 북어국에서 시원함을 느끼기보다 어려운 법이다. 


유의미한 설정은 또 다른 악녀 미란다의 등장이다. 미란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변인들을 희생시키는 소시오패스급의 극한 이기주의자다. 릴리와의 차이라면 살인을 직접하지 않는다는 것. 뛰어난 미모를 이용해 주변의 남자들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선 고전적 악녀에 가깝지만 전술했듯 릴리같은 싸이코패스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보니 오히려 그 고전적 방식 생생하게 느껴지는 반사 효과가 있다.


이 책은 릴리 미란다의 대결이 핵심이다. 두 '여성'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매우 반가워할 만한 여지가 있지만 이 대결이 타이트하게 조여진 긴장감을 전달하느냐에 대해선 의심이 간다. 이를 타개해보고자 엎치락 뒤치락 여러 번의 반전을 끼워넣지만 결과는 무리수. 반전은 사용할 수록 그 효과가 반감되는 마약같은 존재다. 쓰면 쓸 수록 지저분해질 따름이지.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펴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매력적 제목을 가지고 이렇게 밖에 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다. 제목이 생각 났을 땐 환호를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 제목을 따르지 않는다. 너무 좋은 제목이 생각나버린 나머지 억지로 붙인 것 같다. 우선 누가 정말 죽여 마땅한 사람인지 아무리 읽어봐도 모르겠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등장 인물들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일까? 아니면 죽여야 했으나 끝까지 살아남아 이 제목을 역설적으로 보이게 만든 그녀였을까?


최근에 읽은 소설들이 하나같이 재미가 없었던 탓에 우울지수가 50은 증가한 것 같다. 이런 류의 책들을 다시는 사지 말아야지. 그런 면에서 미국은 참 대단한 나라다. 산업의 힘을 믿고 그 힘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그들은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피해는 온전히 소비자의 몫이지만 그 피해를 두 번 세 번 연거푸 받는다면 잘못은 더 이상 산업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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