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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평점 :
<빈곤 과정>은 말이 좀 이상한데, 무엇이든 어렵게 쓰려는 이 책의 목표와 딱 맞는 제목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서론을 읽으며 나에게 이 글을 이해할 능력이 있는지 상당한 의문이 들었고 13페이지에 걸친 난타를 맞은 뒤 정말로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나는 물질적 결핍이란 조건과 가난함에 대한 인식 및 감각 사이의 불일치에 주목하면서(서로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는) 빈곤 경험의 지층들을 헤집고, 빈자의 외연을 확장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현행의 '빈곤 레짐'을 구체적으로 탐색하고 비판하는 작업, 이 레짐을 닫힌 구조로 남겨두지 않고 새로운 변화와 가능성에 열린 어셈블리지로 만드는 작업을 모두 포함한다.(p. 8)
아마도 이런 책은 배운 사람들끼리 주고받으며 평생 읽지 않은 채 각자의 서가를 채우는 장식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같이 무식한 사람이 직접 사서 진짜로 읽을 거라고 생각하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고통은 전적으로 이 책을 사서 읽은 나의 잘못이다. 나는 서론을 다 읽고 내 한계를 인정하며 재미있는 소설로 옮겨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꺼운 양장본에 2.4만 원이라는 가격이 극심한 비염 환자의 콧물처럼 목구멍에 걸려버렸다.
다행히 이 책의 본문은 서론만큼 어렵지 않다.
<빈곤 과정>의 영어 제목은 Poverty as process다. 빈곤은 시대와 누군가의 요구에 맞춰 계속 모습을 바꿔온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냥 빈곤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이는 특별한 형태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삶의 양식이었을 테고, 좀 먹고살기 시작한 때부터는 달동네, 판자촌 등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놀라운 건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의 오늘날, 그러니까 지금 사람들에게 '당신은 가난합니까?'라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그렇다'라고 답한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구 다수가 불평등 구조의 피해자를 자처하는 "경계 없는 불평등"의 시대(p. 7)가 도래한 것이다.
이 책이 왜 우리 시대에 "경계 없는 불평등"이 만연 했는가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면 내 입장에선 좀 더 흥미로웠을 테지만 이 책은 모두가 가난하다고 울부짖는 시대에 가난을 중요한 정치적, 윤리적 문제로 드러내려면 어떤 접근이 필요한지 고민한 결과물이다.
내용 중 가장 신선했던 건 정부, 사기업, 빈곤이 한데 뭉쳐 산업화된 과정을 드러낸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빈곤 레짐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 같다. 레짐은 체계, 권력, 시스템, 프레임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우리가 빈곤을 어떻게 바라보고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사고의 틀을 정의한다. 빈곤 레짐이 동작하는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 권력이 익숙하게 반복하는 주장을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또 하나 좋았던 점은 이 레짐이 청년의 빈곤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체계에 저항하는 사람마저 자본주의의 소비자로 만든다는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은 이미 익숙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 비판에 익숙한 사람들조차 교묘하게 얼굴을 바꿔 우리 삶에 파고든 '빈곤 레짐'의 모습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소름이 돋는 지점이다.
21세기의 기업들은 채용 없는 성장을 거듭한다. 이들은 빈곤과 부의 양극화, 특히 젊은 세대의 빈곤에 상당한 책임을 갖고 있다. 이들은 타파의 대상이지만 사회공헌, 윤리적 자본주의, ESG 같은 경영 구호를 앞세운 마케팅에 청년들은 오히려 '착한 기업'의 팬이 되어 그들의 물건과 서비스를 더 소비한다.
한국해외봉사단, 코이카 봉사단처럼 청년 실업 해소를 위한답시고 기획되는 화려한 행사들도 청년들을 착취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부와 NGO는 글로벌 인재 양성이라는 미명하에 청년들을 불러 모아 가난한 나라로 파견한다. 청년들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봉사의 보람도 느끼고, 취업에 필요한 스펙 한 줄도 얻어간다. 심지어 이 모든 비용은 기업이 부담한다. 청년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저렴하게 소비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 이 놀라운 혜택에 그저 눈이 멀고 만다.
빈곤은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빈곤과 싸워야 할 활동가들은 전선이 점점 모호해지는 것을 느낀다. 인서울 대학에 다니며 1.5평짜리 원룸에 사는 20세 청년이 빈자인가? 아니면 중학교를 중퇴하고 산업 전선에 뛰어들었으나 여전히 최저시급을 면치 못하는 40세의 중년 여성이 빈자인가? 빈곤 산업의 목표는 애초에 이 전선을 넓히는 데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정상이 만연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정상으로 받아들인다. 모두가 빈자라면 더 이상 빈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결국 자신이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득세한다. 빈곤은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놀라운 건 이게 미래가 아니고, 현재도 아니며, 이미 과거가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