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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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능력이 독재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얼핏 능력주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노력한 사람이 가장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가장 큰 보상을 차지한다. 얼마나 명쾌한가? 찌르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따져 봐도 능력의 우열을 판단한다는 게 생각보다 깔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특히 그것이 '보상'과 결부되었을 땐 말이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짓는 사람과 주식 천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두 사람의 연봉 차이는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왜 나오는 걸까? 능력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시를 짓는 능력이 주식을 거래하는 능력보다 저급하거나 시인이 주식 트레이더보다 노력을 '덜'한 것이다. 평가가 부당한가? 최선의 변명은 보상이란 그저 시장이 그 일에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지 실제적 가치와는 무관하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경제화된 세상에서 한 해에 벌어들이는 수익의 차이로 능력의 우열을 가리려는 유혹을 피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시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는 주장에 공감을 하는 사람도 막대한 국가 보조금을 시인들에게 연금으로 지급하자는 주장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것이다.


능력주의의 더 큰 문제점은 그 능력이 오로지 노력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라는 신화를 퍼뜨린다는 점이다. 이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탓을 모두 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우리를 심각한 우울에 빠뜨리는 동시에 성공한 사람들이 차지하는 부와 명예가 모두 정당하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못할 게 없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시스템에 부정이 있다는 걸 알면 노동계급은 그것에 정치적으로 도전할 힘이 생긴다.'(p. 192). 그러나 상류층이 차지한 부와 명예가 오롯이 개인의 능력에서 비롯됐다는 믿음이 굳건한 사회에서는 약자의 요구가 모두 패배자의 떼쓰기로 전락해 버린다. 이쯤에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성공이 개인의 능력에 의한 것이 맞지만 그 보상이 적당하냐는 것이고, 둘째는 성공이 정말로 개인의 능력 때문이냐는 것이다. 전자를 지지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들의 양보와 자비를 전제해야 하므로 결국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석연치 않은 감정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반면 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노력=능력=성공으로 고착된 편견을 깨부술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반론을 만들어내야 한다.


나는 성공이 '노력'만큼 '운'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모바일 서비스로 큰 성공을 거뒀다면 그게 내 노력의 결과라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성공의 토대, 즉 국민 대다수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세상에 태어난 건 순전히 운에 불과하다. 장영실은 아마 나보다 몇 배는 뛰어난 발명가였음이 분명하지만, 그에게 이백 년의 시간을 더 줬어도 엘론 머스크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재능이 노력의 결과라는 믿음도 수십 년간 수많은 똑똑이들을 지켜보며 회의적으로 변한 게 사실이다. 내가 정말로 뜻이 있어 지금부터 30년간 소설을 진지하게 써나가면 언젠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까? 재능이 정말로 노력의 결과라면 당신이 어디에 있든, 나이가 몇이든, 지금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마이클 조던이나 제프 베조스 또는 코맥 매카시가 될 수 있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면, 그 낙천성에 박수를 쳐줄 순 있지만 당신 앞에 놓인 생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진심 어린 걱정도 같이 전하고 싶다. 물론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한다.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위대한 투자자나 CEO가 된 사람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성공이 '신화'로 포장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런 일이 '거의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데 동의해야 한다.


마이클 교수님은 예의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수많은 주장이 존재함을 알려줌으로써 우리를 사고의 바다에 빠뜨린다. 무엇을 믿든 그건 자유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졌을 때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같은 말을 수백 페이지에 걸쳐 반복한다는 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비해 한참은 아쉽지만, 현대인의 겪는 불안과 온 세계에 몰아치는 정치적 격동이 어떤 이유로 발생하는지 분석한다. 핵심 내용이 이미 <정의란 무엇인가>에 실려 있어 <공정하다는 착각>보다는 그쪽을 추천하지만, 교수님의 팬이라면 오랜만에 나온 이 신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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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 - 신화학의 거장 조지프 캠벨의 ‘인생과 신화’ 특강
조지프 캠벨 지음, 권영주 옮김 / 더퀘스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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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신화에 미쳐 있었다. 중동의 길가메시부터 힌두의 크리슈나, 인드라, 시바 동양의 복희, 여와, 염제, 북유럽의 오딘, 발할라, 이집트의 라, 오시리스, 호루스, 남미의 케찰코아틀까지. 흔해빠진 그리스 신화는 거론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건 그냥 기본이었으니까. 나는 전 세계의 신화들을 수집하며 그것들을 조금씩 잘라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곤 했다. 이런 왕성한 욕구는 조지프 캠벨을 만나면서 무너졌는데, 주범은 그가 지은 <동양 신화>라는 책이었다. 이야기가 아닌 학문으로서의 신화. 그것은 어린 마음을 가득 채웠던 모험의 로망에 찬물을 끼얹기 충분했다.


이제 나는 신화가 인간의 삶과 우리 세계에 대한 상징일 뿐이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됐다. 그래서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을 손에 들었을 때 그 제목이 온전히 나에게 쏟아지는 메시지라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지은이 조지프 캠벨.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신화를 공부하다 보면 지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여러 문명권에서 굉장히 흡사한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개개의 이야기는 그 지역 환경에 맞춰 조금씩 변형되기는 하지만 큰 틀에선 사실상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류가 공통으로 경험한 역사적 사실에서 찾을 수도 있고 세상을 해석하는 인간 심리 또는 상상력의 보편성에서 찾을 수도 있다. 무엇을 택할지는 자유지만 전자를 굳게 믿는 사람들의 신화는 그 민족만의 평화와 번영을 비는 편협한 신앙으로 변질되려는 유혹을 피하기가 어렵다. 예컨대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홍수 이야기들을 자신의 신앙을 확증하는 원료로 사용하게 된다. 역시 여호와의 징벌은 실존했던 사건이야! 전 세계 사람들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잖아! 하지만 5분만 시간을 내도 각 민족과 그 신화의 탄생 연도를 시간순으로 줄지을 수 있는 우리가 그런 생각을 고집하는 게 맞는 일일까? 유대인이 나타나기 한참 전에 이미 그런 이야기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었다는 걸 알고 나서도?


이 아름다운 지구에 화약 먼지와 피 폭풍을 일으키는 범인이 누군지를 생각해보자. 신화를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홍수의 원인은 엔키의 분노도 여호와의 징벌도 이미르의 죽음도 아니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 선배들의 걱정과 불안이 상상력과 만나 탄생한 이야기들일뿐이다. 한때 그 이야기들은 우리 삶의 토대가 되었고 오로지 우리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신앙이 되었고 때로는 죽음도 무릅쓰는 전사를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류는 끊임없이 성장했고, 이제 내가 진정한 신화의 의미를 알게 된 것처럼 충분히 성숙한 나이가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신화가 갈라놓았던 울타리의 안쪽에서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가선 안된다. 사실상 거짓말에 불과했던 그 신화들을 모두 뽑아낸 뒤 인류 전체, 나아가 이 지구와 우주의 평화를 도모하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 늘 그렇듯 인류를 나아가게 하는 건 바로 그 거짓말, 바로 그 이야기였다.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은 1958년부터 71년까지 쿠퍼유니언포럼에서 조지프 캠벨이 한 강연 25개 중 13개를 묶어 만든 책이다. 강연 모음집이 대개 그렇듯 통일된 주제가 일관되게 진행되는 건 아니라 다소 산만한 건 사실이다. 게다가 조지프 캠벨이 전하고자 하는 건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세계다. 독해의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차이'가 만들어내는 편협과 증오가 깊게 뿌리내리는 요즘 세상에 생각해볼 만한 것들을 전해준다. 우리는 누군가가 만든 창조물이 아니라 모두 우주의 먼지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생명들이다. 그것은 인간들만의 관계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저 초원의 톰슨가젤도, 새벽녘 고요히 흐르는 강물도, 우리가 딛고 사는 이 지구도, 사실은 모두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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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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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말을 더듬는 열네 살 소년이 언어 교정원을 다니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 소년의 내적 고백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라 딱히 드라마틱한 줄거리는 없다. 읽는 이에 따라서 상당히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는데, 다행히 책이 얇다.


'언어 교정원'이라는 단어에서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한 한 소년의 유사가족 이야기를 떠올릴 수도 있다. 맞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내가 말하고 있잖아>에 대한 이야기는 다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루한 줄거리에 뻔한 결말까지, 어쩌면 이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그 뻔한 결과가 나름 묵직한 감동을 준다. 뻔한 것도 사실은 기술인 것이다. 그걸 어떻게 극적으로 다루느냐, 이야기가 수천 년 간 똑같은걸 반복하면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은 데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건 참 희한한 게,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더 큰 나락을 준비해 준다. 그런데 더 신기한 건 그 나락의 나락의 나락의 끝도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누가 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완벽한 어둠을 이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희미한 빛'이라는 말이 있다. 어둠이 깊을수록 희망의 불씨는 더 크게, 더 따뜻하게, 더 밝게 느껴진다. 아무리 작더라도, 그 순간 다가와준 손들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어찌 보면 잔인한 말이지만, 내가 눈물을 흘릴 때 옆에서 같이 울어줄 사람이 있다면 사는 게 더 쉬워진다. 슬픔을 나눈다는 건 그냥 좋으라고 하는 소리 같고, 사실은 내 슬픔을 옮겨주는 것이지만, 각자가 맞는 차가운 현실을 녹일 수 있는 건 결국 이 연대뿐이다.


말더듬이들의 현실은 몇 배나 더 차갑다. 인간은 의사를 말로밖에 전달하지 못하는 촌스런 동물이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종종 생각과 감정도 없는 것으로 무시된다. 사실은 마음과 머릿속에 화산처럼 타오르는 용광로가 있는데도. 소년을 도와주겠다며, 고쳐주겠다며 다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사실을 모르는 멍청이들이었다.


잘해주는 사람에게 속지 말자. 소년은 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선한 얼굴로, 다 이해한다는 듯 다가오는 사람들 모두 사실은 소년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바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한 거니까. 그리고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갑게 떠났으니까. 어느 순간 소년도 자기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타인의 냉대와 무시가 자기혐오로 향할 때 마음은 더 단단하게 굳어버린다. 밖에서 가두는 게 아니라, 안에서 잠기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엄마의 애인을 폭행한 죄로 경찰서에 잡혀간다. '거지 같은 년이 병신 같은 아들을 감싼다'라고 소리를 지르는 추한 남자 앞에서 모자는 고개를 숙인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나타는 것은 놀랍게도 언어 교정원 사람들이었다. 말 더듬이들이 뭘 할 수 있겠냐고? 그들은 각자 할 수 있는 단어를 하나씩 모아 소년에게 갑옷 같은 말 한마디를 만들어 입힌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늘 닫고 살았던 소년의 마음에 처음으로 작은 균열이 일어난다. 그의 마음속에서 뭔가 콸콸콸 쏟아지기 시작한다.


p.s - 짜내고 짜내 단어 하나를 꺼내 놓는 말더듬이는 백지 위에 띄엄띄엄 단어를 늘어놓는 소설가는 모습과 닮아 있다. 그렇게 힘들게 꺼내놓은 말을 재미있네 없네 따지는 일이 때로는 참 천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먹고살려고 하는 일도 아닌데, 이걸 계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스스로 되묻게 된다. 뭐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나 작가가 이 글을 읽고 상처를 받았다면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도 나도 똑같은 말더듬이일 뿐인데. 잘난 척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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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할런 코벤 지음, 이선혜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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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할런 코밴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싶지 않은데, 유일하게 읽은 두 권이 겹쳐도 너무 겹치는 바람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다. 오랜만에 읽고 싶은 장르 작가를 만났는데 더 나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다.


내가 읽은 두 권의 소설을 간추려 말하면, 할런 코밴의 소설엔 늘 과거를 가진 여성이 등장한다. 당연히도 엄청나게 매력적이라 한 번만 봐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남자 주인공은 그녀를 너무 사랑하는데 어느 순간 여자가 종적을 깨끗이 지운 채 사라져 버린다.


남자 주인공은 한결같이 과거에 지나치게 매여있는 집착남이다. 능력자이기에 범죄의 실상이 가려지지만 하는 짓만 놓고 보면 사실상 스토커가 따로 없다. 아무리 경고를 해도 한 때 사랑했던 여자 친구를 찾는 모험을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면서, 때로는 주변에 무한한 피해를 줘가면서 말이다.


두 남녀는 과거의 극히 일부만을 공유한 사이지만 넘치는 에로스는 과하다 못해 초현실적이다. 전근대적인 멜로 서사와 차이가 있다면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바뀌어 있다는 것. 보호가 필요한 철부지 역할은 남자가 맡고 '널 사랑해서 떠나는 거야' 류의 거룩한 초월자는 여자가 맡는다. 상황도 모르고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남자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다 결정적인 위기에 빠졌을 때 여자가 나타나 남자를 구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할런 코밴의 소설에서 가장 집중할 대목은 기, 승, 전까지다. 그래도 전체의 4분의 3이니 탓할 건 없는 건가? 그러나 전에서 결로 넘어가는 과정은 내리막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폭락을 보여준다. 당사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고작 이 정도 이유 때문에 그 난리를 치른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미국인이 아니어서 그 땅에서 일어나는, 예컨대 <차트를 달리는 남자> 같은 걸 볼 때 나오는 믿을 수 없는 음모과 공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그 나란 총과 마피아, CIA와 FBI, 국토안보부 및 기타 온갖 것들이 다 있으니까. 


어찌 보면 이 소설들은 한때 유행했던(내가 본 미드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에피소드마다 무성한 떡밥만 남긴 채 시청자의 입질을 유도하는 미드를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류의 콘텐츠들은 어쨌든 트레일러가 겁나 재밌고 초반 몰입감이 상당하다. 온갖 유혹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시청자들을 끌어다 앉히는 게 가장 높은 장벽인 이 바닥에서 그걸 가장 간단히 뛰어넘는 콘텐츠야말로 효자 중에 효자 아니겠는가?


참으로 공교로운 결과지만 내가 읽은 단 두 권의 할런 코밴은 완전히 동일한 구조와 캐릭터 설정을 갖고 있다. 나머지도 이런 식이라면 더 읽어볼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참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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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수학 - 수학이 판결을 뒤바꾼 세기의 재판 10
레일라 슈넵스.코랄리 콜메즈 지음, 김일선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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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예술은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너무 많기 때문에 죽는다." 고 말했다. 우리가 점점 숫자와 통계, 수학에서 멀어지는 이유도 어쩌면 이 세상에 숫자가 넘쳐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디를 둘러봐도 숫자 투성이다. 자기 믿음을 설득하려는 사람도, 그 믿음을 반박하려는 사람도, 심지어 인생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람도 숫자와 확률을 이용한다. 문제는 이런 숫자들을 모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숫자를 활용하는 사람들의 목적에 봉사한다.


이런 이유로 모든 숫자와 정보를 거부할 수도 있다. 지구온난화든, 부동산 거품이든, 실질 GDP 성장률이든 모두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근거하여 우리 삶을 선택해야 할까? 직관? 신앙? 이런 것들은 과연 우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까?


결론은 우리가 숫자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숫자를 믿든 믿지 않든 이 세상은 주장의 타당성을 따지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숫자를 지목한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잘 이해하지 못한 경우 우리 삶은 치명적인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법정에 선 수학>의 주제다.


이 책은 통계학과 확률이 법정에서 활용된 사례들을 소개한다. 통계는 무죄를 유죄로, 유죄를 무죄로 바꿔놓기도 했다. 그 사건이 실제로 무죄였냐 유죄였냐와 상관없이 말이다. 이 말은 숫자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잘 보여준다. 독자들은 특히 숫자가 잘못 사용됨으로써 무고한 시민의 삶이 완전히 파괴된 몇 가지 사례에 큰 분노와 공감을 느낄 것이다. 실제 이 책은 통계와는 별개로 그 재판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 몰입감을 선사한다. 잘못된 확률 계산과 거기서 오류를 찾아내지 못한 재판부. 이는 한 인간의 삶을 끝장내기엔 너무 초라한 조합이다. 결국 재판부의 실수가 드러나 재심을 받는 사례도 있지만 이미 모든 게 다 망가지고 난 뒤에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럼에도 이 책은 법정에서 숫자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늘 그렇듯 수단은 수단일 뿐이다. 문제는 그 수단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수학이 법정에서 유용한 도구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건 오류를 없애는 일이다.


수학을 동반한 주장엔 늘 눈속임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선술 했듯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 처음엔 여기서 진실을 파악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조금만 훈련하면 주요한 눈속임 기술들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누구나 알아야 할 주요 사례들을 친절히 제시한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중복되는 내용들이 많아지지만, 이 책의 취지를 달성하기엔 모자라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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