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해변
이도 게펜 지음, 임재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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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게펜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테드 창인데, 그래서 소설이 굉장히 지루하다. 긴박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야기가 시종일관 만만디다. 둘 다 단편을 쓰는 것도 똑같다. 이 부분은 이해가 되는 게, 아이디어가 워낙 많다 보니 하나의 주제를 오래 전개하기보다는 여기저기 발산하는 것이다. 물론 이야기에 깊이가 없다는 건 아니다. 그건 분량이 좌우하는 게 아니니까. 박학다식한 다학제적 천재들은 신선한 소재를 짧게 구현하는데도 그 안에는 번개 같은 사색이 깃들어있다. 테드 창이나 이도 게펜이나 둘 다 과학과 문학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들이다.


<예루살렘 해변>의 단편들을 하나의 주제로 정리하기란 불가능하다. 몇몇 소설들만 소개하면, 일단 <101.3FM>은 타인의 마음이 라디오 주파수에 잡히는 설정이다. 라디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소리가 들린다. <데비의 드림 하우스>는 꿈을 제조하는 회사의 이야기다. 더 큰돈이 보장되는 악몽 제조에 발을 들였지만 차마 사랑하는 여자에게만큼은 악몽을 건네지 못하는 한 남자의 고뇌가 펼쳐진다. 페이스북에 거짓 포스팅을 하고 그게 얼마나 멀리 퍼져나가는지, 사람들이 그걸 얼마나 믿는지 실험하는 <베를린에서의 3시간 떨어진>. 한 번 꿈을 꾸면 거기서 몇 년을 살아가느라 항상 잠에 취해 있는 딸을 키우는 <엑시트>.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시술에 대한 소설 <사막을 기억하는 법> 등이 있다.


이것은 SF인가? 테드 창에게 늘 따라붙던 질문이 이도 게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장르가 무슨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도 되는가? 해당 장르의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지 않는다고 그 소설을 폄하할 이유가 되는가? 정작 당사자는 끼워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환상과 과학이 절묘하게 어우러지지만 소설들은 전혀 어렵지 않다. 복잡한 언어학 이론과 프로그래밍 원리가 주요한 줄기를 구성하고, 또 그걸 완벽히 이해해야만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테드 창과는 그런 면에서 확실히 다르다. <예루살렘 해변>은 훨씬 더 캐주얼하다. 그저 소재가 특이할 뿐 이해에 큰 노력이 필요하진 않다. 유일한 단점은 그냥 '지루함'이다.


똑같이 지루한 데다 더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선호를 묻는다면 나는 테드 창 쪽이다. 적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특수성,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의무 군 복무 등 따지고 보면 비슷한 게 상당히 많은 이스라엘이지만 어딘가 낯설다. 푹 빠져들기엔 뭔가에 가로막힌 기분이다. 어쩌면 지루함의 강도가 더 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형식면에선 더 새로운 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 난감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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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 풍문부터 실록까지 괴물이 만난 조선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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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배경으로 한 괴물 이야기가 가당 키나 한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상상력은 무죄라지만 그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통할까 싶은 것이다. 실제로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은 넷플릭스의 <킹덤> 정도만 떠오른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도 어디서 재미를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창궐>, <물괴>, <조선구마사>에 비하면 수작임이 틀림없다.


해답은 <조선왕조실록>에 있었다. 주자학에 심취한 사대부의 나라가 이토록 많은 괴물 이야기를 했을 줄이야! 실록에는 물괴(물오름, 적조, 기이한 모양의 바위 등의 자연현상과 귀신같은 초자연현상을 통칭했던 말)에 대한 언급이 차고 넘친다. 백성들 사이에서 풍문으로 도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어떤 신하의 집에 귀신이 들었다더라 하는 얘기를 왕과의 경연장에서 심각하게 주고받은 기록이 보인다. 일부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일축, 초연함을 보이지만 일부는 진실로 믿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다음은 성종 실록 197권의 일부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 안의 기물을 옮기고, 호조좌랑 이두의 집에도 여귀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부엉이는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이나 항상 궁중의 나무에서 우니, 무엇이 족히 괴이하겠는가? 물괴는 오래되면 저절로 없어진다" 했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로써 이들을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했다. _<성종실록>(197권) 1486년 11월 10일(p.123)


중종 시대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짜 괴물 이야기가 나온다. 방구(크고 두터운 개)같은, 망아지만 한 짐승이 궁궐 안을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일명 수괴(짐승이 얽힌 괴상한 것)! 영화 <물괴>가 바로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요물괴(줄여서 요괴), 즉 사람 중에 요사스러운 것이 나타나고, 물건 중에 괴상한 것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상당수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후대의 이야기꾼들이 조선을 배경으로 한 괴물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도 별일은 아닌 것이다. 누가 먼저 냄새를 맡았는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부지런하고 똑똑하다.


게임이나 소설을 기획하다 보면 한국의 괴물 이야기를 찾아볼 때가 많다. 서양의 괴물들은 정리된 게 종종 있지만 한국의 전통 요괴 이야기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그러던 중 <한국 괴물 백과>라는 책이 눈에 띄어 몇 년 전 고민도 하지 않고 샀던 기억이 있다. 알고 보니 이 책은 SF소설가 한 분이 자신의 블로그에 정리하던 괴물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이분이 <한국 괴물 백과>를 쓰면서 아쉬웠던 점을 보강해 새 책을 한 권 내놓는다. 그게 바로 이 책 <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이다.


놀라운 건 이 SF 작가가 바로 <토끼의 아리아>의 주인공 김재식 님이었다는 것이다. 한 작가의 책을 세 권이나 읽었음에도 그게 같은 작가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니. 기연이라면 기연이라 부를만하다.


이 책은 <한국 괴물 백과>를 조선 시대로 한정하고 각각의 괴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덧붙였다. 흥미진진한 소설은 아니지만 과거를 배경으로 한 괴물 이야기의 근원을 찾고 싶은 사람이라면 참고할만한 내용이 많다. 좀 다른 얘긴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조선왕조실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는 인터넷에서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하니 아직 발굴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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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18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킹덤이 그렇기 인기라서 봤지만 저는 솔직히 별로 재미없더라구요. 그래서 이 책도 시큰둥하게 넘겼는데 한깨짱님 글 보니 궁금해집니다. ^^ 조선왕조실록은 정말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고라는 생각이 또 드네요

한깨짱 2021-04-19 19:06   좋아요 0 | URL
저도 도무지 킹덤이 왜.... <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은 정독할 책이라기 보다는 이야기 짓는 사람들이 참고 도서로 옆에 두고 볼 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조선의 최대 유산은 조선왕조실록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행동경제학 - 행동 설계의 비밀
마이클 샌더스.수잔나 흄 지음, 안세라 옮김 / 비즈니스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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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경제학은 행위의 주체인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판단한다. 즉,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자주 거론되는 예시 중에 절약의 역설이 있다. 경제가 불황에 진입했을 때 개인이 허리띠를 졸라매면 오히려 공황에 빠질 수가 있다. 소비가 줄면서 기업은 더 큰 위험을 맞고 그 결과 실업의 증가와 개인 소득 하락의 악순환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살기가 빡빡해졌을 때 오히려 소비를 늘리는 사람들이 있을까? 전문가들이 아무리 어리석은 일이라고 호소해봐야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도대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떤 개인이 그런 판단을 내리겠는가?


인간은 이성적이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이성의 입장에선 그걸 결함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바로 인간의 본모습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본인에게 이득이 된다고 해도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혹은 믿음이 없으면 행동하지 않는 게 바로 인간이다. 때때로 판단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내린다. 인간이 정녕 이런 존재라면 전통 경제학은 그 기반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소수의 이단아들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들었다.


행동경제학(Behavior economics)은 경제학과 심리학이 융합된 학문이다. 판단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내려진다면 경제학도 그 관점에 서야 행동을 더 잘 예측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학제적 학문이 거의 그렇듯 행동경제학은 잡스러운 것으로 치부됐고 주류 경제학에서는 늘 뒷전에 머물렀다. 인간의 탐욕과 야만성이 똘똘 뭉친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전 세계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까진 말이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을 미시적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굉장히 좀스럽게 보일 수 있다. 내놓는 결과물을 보고도 '에이 설마', '진짜 그러겠어?'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예컨대 행동경제학은 특정 고정관념에 빠지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성과가 낮아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수학 시험에서 원래 자신의 실력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예전부터 행동경제학을 가장 잘 이해하는 분야였다. 히틀러는 인간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저녁 시간대에 연설하기를 고집했다. 야외 연설은 붉은 노을이 지는 석양을 배경으로 했는데, 그 황홀한 분위기가 달콤한 거짓말과 융합해 목전에 다다른 패배도 잊게 해 줬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행동경제학>은 비슷한 장르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실험과 결과를 담고 있다. 마케팅이나 홍보, UX, 서비스 기획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례들을 통해 사용자의 행동을 유도, KPI를 달성할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다. 책 한 권을 읽는 것으로 천지가 개벽할 성장을 하는 건 무협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이론이 아닌 사례를 다룬다. 그래서 읽기가 쉽고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비슷한 실험을 계획하고 있지만 대상을 어떻게 나누고 어떤 방식으로 실행해야 할지 몰랐던 사람이라면 눈 앞을 가리는 안개가 한결 옅어진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책을 몇 권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신선한 느낌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행동경제학 이론을 적용해볼 만한 일을 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반신반의했던 사람이라면 아주 작은 것부터 한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듯 보이지만 또 의외로 단순한 점이 있다. 간단한 수정만으로도 고객의 유입과 전환이 변화하는 걸 확인하면 더 큰 흥미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번 맛을 들이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일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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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팔이 의사
포프 브록 지음, 조은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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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존 R. 브링클리는 20세기 초반 미국을 주름잡은 외과 의사였다. 그의 시그니쳐 수술은 1917년에 시작된 '염소 고환 이식술'이었다. 염소 고환 이식술은 말 그대로 염소의 고환을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으로 발기 부전이나 불임을 치료하고 감퇴한 정력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염소 고환 이식술은 미신과 과학이 절묘한 합을 이룬 완벽한 사례였다. 왜 개, 소, 말도 아닌 염소의 고환이었을까? 키워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악마 수염을 기른 그 동물이 얼마나 '음탕한'지를. 신화에서 음탕한 악마로 대변되는 '새티로스'도 염소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이었다. 왕성한 정력이 뿜어져 나오는 근원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살로 된 두 개의 구슬이었으니 그걸 내 몸에 연결할 수만 있다면 염소의 파괴적 정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은 축제가 된 카니발도 사실은 왕을 죽여(큰 힘을 가진 자) 그 살을 나눠 먹는 풍습이었다. 뛰어난 힘을 가진 뭔가를 내 몸에 흡수시켜 그 힘을 취할 수 있다는 건 심리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이다. 유례없이 많은 자식을 낳은, 그토록 영민한 세종대왕께서도 보양식으로 닭의 고환을 즐겨먹었다지 않은가!


브링클리 박사는 순식간에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됐다. 물론 미국인의 지적 수준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기에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무언가가 급속도로 지지를 얻으면 그 반대도 비슷한 속도로 세를 이루는 법이다. 브링클리 박사에겐 그 바닥에서 가장 유명한 돌팔이 사냥꾼 모리스 피시바인이 붙었다. 모리스 피시바인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 전쟁에선 패자가 더 많은 것을 가져갔다. 브링클리는 더 큰 부자가 됐다.


정부 당국과 끝없는 충돌을 겪다 지친 박사는 아예 그 정부를 자신이 차지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는 주지사에 출마했다. 막대한 돈을 이용해 어마어마한 유세를 벌였는데, 그는 단순히 돈만 많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애초에 의학이라고는 단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는 돌팔이가 어떻게 그 위대한 America를 쥐락펴락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홍보의 대가였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욕망을 정확히 겨냥했다.


당황한 사법부과 행정부는 선거에서 그를 제거할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선거위원회는 단 한 가지 표기 'J.R. 브링클리'만을 유효표로 인정하기로 했다. 브링클리 박사님, 브리크리, J. 브링클리 등은 무효라는 말이었다. 브링클리는 라디오를 통해 행정부의 비열함을 규탄했고 마지막 집회에 치어리더들을 동원하여 철저히 주입시켰다. J 점찍고! R 점찍고! 브링클리!


브링클리가 유권자들을 집결시킨 전략은 도널드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 전략과 비슷했다. 일명 지식인이라 불리는 오만한 엘리트들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무식한 보수 꼴통이라 불렀다. 브링클리는 지지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브링클리를 찍는 사람들은 달이 생치즈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고요. 그들은 여러분들을 돌대가리라고 불렀어요."(p. 244)


무소속으로 출마한 브링클리는 183,278표를 얻어 3위를 차지한다. 만약 투표용지에 그의 이름을 올릴 수만 있었다면 사실상 주지사에 당선되고도 남을 득표수였다. 1위와 2위의 표차는 고작 251표에 불과했지만 민주당과 공화당은 감히 재검표를 요구할 수 없었다. 앙숙인 두 당은 유례없이 신속한 합의를 이뤄냈다. 재검표가 3위를 차지한 브링클리를 주지사로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은 20세기 미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옛날 사람들은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그런가? 오늘날 넘쳐나는 건강식품, 노화 방지, 피부 미용을 위한 온갖 비책, 시술들을 보면 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가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는다. 면허 없는 살인자, 천재 악마, 연쇄살인마로 불리는 돌팔이 의사 존 R. 브링클리가 요즘 세상에 살았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조금만 노력해도 우리 주변의 존 R. 브링클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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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04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만한 내용이네요. 무서워요. 우리나라에서도 허경영씨 대선 나오면 찍는 사람 많잖아요. 전에 무슨 프로보니까 공중부양 배우러 허경영씨 강연이랑 무슨 연수원 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대요 ㅎㅎ

한깨짱 2021-04-05 13:55   좋아요 0 | URL
허경영 하늘궁이라는 곳이 경기도 양주에 있다고 합니다. 눈빛만으로도 질병을 치료하는 허경영씨 관련 굿즈를 판매하고 그럴듯한 숙박시설까지 갖춘, 엄청난 규모라고 하네요. 유튜브 보면 허경영씨 만날라고 모인 사람들이 꽤 되더라구요.
 
슈독 :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 자서전
필 나이트 지음, 안세민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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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기가 막힌 책이다. 휴가 땐 원래 철저히 무용한 시간을 보내는데 <슈독>을 집어 든 게 실수였다. 읽는 게 느려 한 시간에 30페이지가 고작이고 그쯤 되면 지쳐서 계속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은 손에서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강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지치지도 않고 꼬박 읽기를 며칠, 540페이지의 책을 순식간에 정복해 버렸다.


<슈독>은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의 자서전이다. 은퇴를 하고 스탠퍼드 소설 창작 과정을 수료한 뒤 직접 쓴 책인데, 대단한 필력에 구성까지 완벽하다. 태어나서 처음 써 본 책이라면 필 나이트는 진정 천재임이 틀림없다. 어딘가 고스트 라이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나이키가 원래 블루리본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오니츠카 타이거' 신발을 수입해서 파는 구멍가게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강렬한 혜성 로고가 있었던 게 아니다! 고작 남의 신발을 수입해 팔던 회사가 이제는 오니츠카 따위, 발 밑에 서지도 못할 회사로 만들어버린 동력이 어디서 나온 걸까? 여기까지만 들어도 그 과정이 궁금해진다.


두 번째로 나이키의 창업 연도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4년. 적어도 한 150년은 인류의 신발을 독점해온 것처럼 보이는 회사치곤 상당히 젊은 기업이다. 12년 뒤엔 애플이 창업하는데 IPO 시기는 두 회사가 거의 비슷했다. 신발 제조업이라고 하면 엄청난 구세대 산업처럼 보이지만 실리콘밸리의 디지털 혁명과 거의 나란히 달린 최첨단 산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건 바로 이 이야기다. 나이키가 창업을 하던 당시 운동화는 말 그대로 운동할 때만 신던 신발이었다. 그리고 운동은 운동선수들 만의 일에 불과했다. 당시는 취미로 조깅을 한다는 말이 대단히 기괴하게 들리던 시대였다.


"그때는 운동장이 아닌 곳에서 5,000미터를 달리는 것은 미친 사람들이 미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중략)

때로는 달리기 선수를 흉내내기 위해 운동장 밖에서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운전자들은 속도를 줄이고 경적을 울리며, "말이나 타세요"라고 외치고는 맥주나 청량음료를 던지기도 했다. 실제로 존슨은 펩시콜라를 여러 번 뒤집어썼다고 했다."(p.113)


상상이 되는가? 일주일 동안 운동화를 신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을 세어보자. 데님이나 면바지, 슬랙스 심지어 정장에까지 맞춰 신는 게 오늘날의 운동화다. 운동화는 현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완성하는 핵심이 되었다.


아버지에게 빌린 50달러로 자기 집 지하실에서 사업을 시작했다는 말이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 과정의 고단함이 뻔하게 그려질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결론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신기할 정도의 몰입감을 제공한다. 바로 그 현장에서 같이 사업을 하고 있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요즘따라 매너리즘에 지치고 좀처럼 뭘 봐도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람이라면 좋은 자극이 될 수 있다. 이제 막 팀을 운영하게 된 조직 관리자나 창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저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p.s - 슈독은 신발 매니아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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