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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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됐다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이다.


아우슈비츠.


그곳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움을 주는 이름. 나치는 1942년부터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학살할 계획을 세웠고, 아우슈비츠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운영된 최대의 수용소였다. 1945년까지 유럽 전체 유대인의 80%에 해당하는 600만 명이 파이널 솔루션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는 저자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담은 수기이고 2부는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 1부에서 얻은 교훈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1부의 체험으로 인해 2부는 쉽게 반박할 수 없는 신빙성을 갖는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외면해왔는데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겪은 그 생생한 체험들이 내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우려였다. 굳이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유대인 학살은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고, 나치의 극우적 사상에 동조해 비슷한 단체를 지지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꼭 읽어야 할까? 하지만 저자의 차분한 말투는 자신의 고통에 공감하고 분노해달라는 폭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깊이 탐구해볼 수 있는 객관성을 만들어낸다.


둘째는 이런 류의 책들이 곧잘 빠지는 상투적 교훈에 대한 걱정이었다. 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너희들은 못할 게 없다는 식의 우월함 또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라는 폭력적 행복론 그리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대책 없는 꼰대 사상.


인간은 자신이 겪는 고통에 있어서만큼은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다(그래서 저자가 정말 대단한 것이다). 누군가에겐 거듭된 취업 실패가 인생의 최악으로 각인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올 A+를 받지 못한 고통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고통에 우열을 가려 극복 가능성을 따지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


모든 건 마음의 문제니 그냥 웃자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아무리 웃어봐도, 내 앞의 현실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날카롭게 내 마음을 찔러 들어오는데 무엇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냐는 말이다. 사람들은 낙천과 긍정을 종종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낙천은 그저 모든 게 잘될 거라 믿는 것이고, 긍정은 인생이 시궁창에 빠졌다는 걸 자각하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 궁리하는 태도다. 그러니까 긍정적인 사람은 얼마든지 비관적일 수 있다. 생각과는 다르게 낙천론자의 현실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외부의 상황이 어떻든 내가 취할 행동은 '나는 행복하다'라고 외치는 게 전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을 바라는 주문에 불과하다.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시련이 인생의 필수인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말이 곧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는 걸까? 물론 아니다. 내가 주장하려는 건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p.211)."


지치고 힘든 삶에는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삶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냉담하게 탐구하는 이 책이 잘 맞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위로를 받아도 결국엔 지옥 같은 아침이 반복되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내 삶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새로운 다짐을 한 당신에게 일말의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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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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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책은 재미가 없다. '천국 대신 지옥을 선택한 살인자와 세속의 정의를 믿는 아마추어 탐정. 범죄의 소굴에서 벌어지는 서스펜스 누아르'라는데 지옥을 입에 달고 사는 주인공은 중2병이 심하게 온 애 같고 세속의 정의를 믿는 건 맞지만 아마추어 '탐정'이라고 부르기엔 모자란 데가 한참 많은 수사 방식, 범죄의 소굴은커녕 그냥 조금 복잡한 일상생활로 보이는 배경 탓에 서스펜스도 누아르도 느낄 수 없는 게 바로 이 책 <브라이턴 록>이다.


<파리 대왕>을 지은 윌리엄 골딩이 '그레이엄 그린은 20세기 인간의 의식과 불안에 대한 궁극의 기록자다.'라고 평했어도, 고전의 진정한 부활로 여길만한 <넛셀>의 작가 이언 매큐언이 이 책에서 얻은 교훈을 '진지한 소설이 흥미진진한 소설이 될 수 있으며, 모험 소설이 관념 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들이 무엇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대작가들이 단순히 립서비스를 하진 않았을 테니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찬찬히 읽고 고전의 정수를 느껴보기 바란다. 아무튼 나는 포기.


소설가 J.M.쿳시는 책 뒤의 해제에서 그레이엄 그린의 작가적 혈통을 조지프 콘래드의 직속 후배이자 위대한 첩보원 존 르 카레의 선배로 정의한다. 조지프 콘래드의 책은 <암흑의 핵심>밖에 읽은 적이 없지만 적어도 그 책은 이렇게 지루하진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실제 MI6(영국 첩보부) 소속이었다는 점, 그리고 서사를 질질 끈다는 점에선 존 르 카레와 확실히 비슷하지만 이 위대한 첩보원의 지루함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끈끈한 빌드업이라는 점에서 훨씬 쫄깃하다. 서스펜스 누아르를 읽고 싶으면 곧장 존 르 카레를 향해 달려가는 게 유익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가 너무 '젊다'면 레이먼드 챈들러는 어떤가? 그레이엄 그린보다 훨씬 옛날 사람임에도 챈들러의 소설은 더 현대적이다.


분명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어디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이언 매큐언의 평에 힌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험 소설과 관념 소설. 쉽게 말해 장르와 문학 사이. 그레이엄 그린도 자신의 작품을 줄곧 오락 소설과 진지한 소설로 구분했는데 <브리이턴 록>이 어디에 서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누군가는 이 소설이 오락과 진지 사이를 아슬아슬 줄타기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내 보기에 이야기는 줄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곤두박질쳐버렸다.


'헤일은 브라이턴에 온 지 세 시간도 안 되어서 그들이 자기를 죽일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멋진 첫 문장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집으로 들고 왔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시작이 오랜 방황 끝에 흐지부지 마무리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브라이턴 록>은 기어이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야 만다. 아마추어 '탐정'이 심령술사를 찾아가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 사건의 단서를 찾으려 할 때 이 책을 덮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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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식사 - 대한제국 서양식 만찬부터 K-푸드까지
주영하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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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식사>는 1876년부터 2020년까지, 대한민국 밥상의 역사를 되짚는다. 맛이나 요리에 집중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식사는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가. 피부에 와 닿는 친근한 이야기가 놀랍도록 풍부하게 펼쳐진다.


한 민족의 문화는 결코 독자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치, 외교, 전쟁, 무역 등 세계와의 접점을 늘려가며 문화는 끊임없이 확장과 변화를 이어간다. 그 중심에 분명 음식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은, 음식에서만큼은 변화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김치와 각종 장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입맛은 다른 세계와 뚜렷이 구분되는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해외여행을 나갈 때마다 트렁크에 꽉꽉 담기는 김치와 라면.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한국인은 국에 밥이라는 사람들. 다른 건 몰라도 음식에 있어서만큼은 난공불락의 보수성을 유지하는 게 바로 한국인의 입맛이 아닌가?


하지만 간장만 놓고 봐도 이는 금방 잘못된 생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명 진간장이라 불리는 우리 식탁의 지배자는 사실 일제 시대에 들여온 일본식 장유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식 간장이 달고 깊은 맛이 없다고 싫어했지만 1930년대에 이르러 사람들의 마음속엔 한국이 식민지배를 벗어나기란 어렵다는 생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고급 요릿집과 부유층 주부들은 왜간장을 널리 사용했다. 해방 후 이 공장들은 한국인의 손에 넘어가지만 그들에게 제조 과정과 설비를 뜯어고쳐 재래 간장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김치의 빨간 맛조차 그리 오래된 역사가 아니다. 하나만 더할까? 지금이야 본연의 맛 운운하며 슴슴한 미식의 최정상으로 거론되는 평양냉면도 한참 인기를 끌던 '원조 시대'에는(1920~30년대) 사람들이 자기 입맛에 따라 아지노모도(일본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인공 조미료)를 타 먹었다. 주인이 넣는 게 아니라 식초와 겨자를 치듯, 먹는 사람이 원하는 만큼 넣어 먹었다는 말이다. 이 맛은 이후 가정의 식탁에까지 올라 오랜 시간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백년 식사>는 이 같은 식문화의 변화를 6개의 키워드로 설명한다. 조선의 '개항', 일제 '식민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아우르는 '전쟁', 70년대까지 이어진 '냉전', 폭발적 경제 성장의 풍요가 입맛에 침투한 '압축성장', 마지막으로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세계화'.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식품 대기업들의 꼬꼬마 시절부터 호떡이 왜 호떡인지, 멸치 볶음을 누가 왜 먹기 시작했는지까지, 익숙하지만 낯선 이야기가 흥미진진 펼쳐진다.


음식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없기가 더 힘들 것이다. <백년 식사>는 잘 만든 대중 역사서의 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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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키스토크라시 - 잡놈들이 지배하는 세상, 무엇을 할 것인가
김명훈 지음 / 비아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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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키스토크라시란 못된, 악한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kakos의 최상급 kakistos와 권력, 통치를 뜻하는 cracy의 합성어다. 쉽게 말해 개똥 같은 인간들이 지배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전 세계에 만연한 빈부격차,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부자들의 탐욕과 비도덕성에 피를 토하는 책이다. 작가는 1963년생의 한국 남자로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총 5부로 구성된 책에서 3부 한 장을 통째로 도널드 트럼프에게 할애하기도 한다. 사실 카키스토스란 말 자체를 그를 위해 준비한 게 아닌가 싶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던 루소는 정치체제를 민주정, 귀족정, 그리고 군주정으로 구분했다. 루소의 민주정은 국민 전체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었는데 이 같은 이상을 실현하는 국가는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 민주정이란 현재 대의민주제와 거의 동일시된다. 국민을 대표하는 직업 정치인을 선거로 뽑아 정치를 대리하는 것이다. 민주정은 다시 사회의 생산물과 생산 수단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눌 수도 있는데,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공산주의는 결과물을,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을 공유한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구분은 오늘날 아무런 쓸모가 없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자본의 막강한 힘은 정치의 색깔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한때 인류는 세계를 왼쪽으로 끌고 가려는 세력과 오른쪽으로 밀고 가려는 세력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온 힘을 다해 오른쪽으로 미는 집단과 적당히 미는 집단이 있을 뿐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건 정치가 아니라 돈이다. 우리는 법 앞에서 평등한 게 아니라 돈 앞에서 평등하다.


오늘날 돈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집단은 없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전 세계 경제가 침몰 직전까지 갔음에도 월스트리트의 CEO 중 감옥에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구제 금융을 받아 자기 자신에게 막대한 성과급을 지급했고 금융 규제를 막으려는 로비에 사용했다. 정치인들은 돈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는데 선거에서 이기려면 이들이 기부하는 정치 자금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을 막아줄 최후의 보루인 시민마저 돈에 중독이 됐다는 것이다. 미디어는 시종일관 부를 우상화함으로써 돈만 있으면 최고라는 기풍을 대중문화에 깊숙이 퍼뜨렸다. 어느샌가 우리도 '돈만 많으면 형'이라는 말을 부끄럼 없이 하게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미국 사회가 kakos에서 kakistos로 진화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부패라는 말이 머쓱해질 정도로 압도적인 개망나니의 등장에 있다.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거짓말로 국민을 이간질하고 사이다로 대변되는 자극적 언행으로 팬덤을 형성해 범법을 일상화하는 상상초월의 인물. 금융과 산업계의 부자들은 이런 인물에게 풀베팅을 함으로써 부자 감세를 가속화했다. 공유와 소통을 가치로 내걸던 최신 미디어들은 거짓 뉴스를 전파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각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대한민국도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가는 선로 위를 달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스템을 미국에서 빌려왔고, 그들을 선진 사회의 표준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이니 미국의 현재가 곧 한국의 미래라고 믿을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 늦기 전에 코인이나 해서 기차의 앞칸으로 옮기는 것만이 답일까?


<카키스토크라시>는 현실을 첨예하게 기술하지만 그 원인을 파헤치고 극복 방안을 제시하는 데는 다소 아쉬움이 있는 책이다. 게다가 문제의 초점이 부패한 권력층에 맞춰지다 보니 역설적으로 문제의 해결이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하다는 인상까지 주곤 한다. 이런 생각은 그저 이 모든 상황을 한방에 해결해줄 메시아의 도래만 기다리는 소극적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사기꾼은 오히려 이런 토양에서 탄생한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위기는 정치에 무관심한 서민과 계층 상승의 꿈만 꾸며 체제에 안주하려는 중산층의 비겁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영민하게 이용하는 정치인의 등장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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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생리학 인간 생리학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류재화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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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드 발자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다면 당신은 평생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는 건 좀 오버고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어디서 한 번쯤은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발자크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소설가이자 컬럼리스트로 <인간희극>과 <고리오 영감>등의 작품을 남겼다.


워낙에 문명이 휘날리는 사람이라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끄덕 할 테지만 그의 책을 읽어본 사람 손 들어보세요,라고 묻는다면 상황이 좀 달라질 것이다. 쭈뼛쭈뼛 두리번두리번. 사실 대문호들의 작품이란 게 다 그렇다. 대부분 제목만 '확실히' 알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던가 <안나 까레리나> 같은...


아무튼 발자크도 이런 반열에 드는 사람이다. 최고의 작품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희극>을 꼽는 거 같은데, 몇 개의 작품이 워낙에 유명하다 보면 반드시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찾아 틈새를 노리는 기획이 탄생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바로 이 <공무원 생리학>이다.


사실 나도 뻔질나게 발자크라는 이름을 들어왔지만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나에게 이 번지르르한 신간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덫'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크게 논란이 된 LH 사태로(물론 그들이 공무원은 아니지만) 공기업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것도 한몫을 거들었다.


<공무원 생리학>은 19세기 프랑스, 이제 막 공화국이 된 이 갓난아이의 공무원들을 살벌하게 비판하는 책이다. 이 나라나 저 나라나 공무원은 다 똑같네 하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는 있는데, 그 이상이 없는 건 조금 아쉽다. 그냥 씹고 끝낼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길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혁명과 왕정이 엎치락뒤치락 반복되던 격동의 시대를 경험하다 보니 아무래도 작가의 감정이 뼈에 사무친 게 아닌가 싶다. 콩 코드르 광장에서 시민이 직접 왕의 목을 자른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왕들이 돌아오고, 혁명을 완성할 것처럼 보였던 국가의 희망은(나폴레옹) 제국주의의 야망에 불타 나라를 수렁으로 몰아넣었으니, 누가 우두머리가 되든 그저 배를 붙이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 바빴던 공무원들에게 분노를 내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에 깊숙이 파묻힌 감정은 역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빛이 바래는 걸 막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지나친 뜨거움은 종종 시간이 지나 민망함으로 변하곤 한다. 책 전반에 걸친 과장된 말투는 그 시대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생뚱맞게 들릴 수 있다. 감정을 이입하기 위해선 우리를 괴롭혔던 부조리한 공무의 경험을 끊임없이 떠올려야 한다.


많이 기대했던 책이기에 아쉬움도 크다. 변화구보다는 역시 직구를 노려야 했던 걸까? 오노레 드 발자크라는 큰 산을 이렇게 오르기엔 부족함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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