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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육식주의를 해부한다, 10주년 기념 개정판
멜라니 조이 지음, 노순옥 옮김 / 모멘토 / 2021년 8월
평점 :
동물을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답을 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질문 자체를 떠올린 적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동물을 먹는 게 당연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렸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부당한 권력들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습관처럼 전혀 의식되지 않지만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을 속속들이 정해놓는다. 우리는 이 이름 없는 이데올로기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죽을 때까지, 눈을 가린 채 걸어 나간다.
이미 내면화된 삶의 규범을 떨쳐내기 위해선 그것에 이름을 붙여 세상 밖으로 꺼내야 한다. '육식주의(carnism)'란 말이 탄생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김춘수의 <꽃>으로 인해 이름 붙이기란 행위는 우리에게는 퍽 낭만적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는 건 그렇게 잔잔하기만 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개념으로부터 구분되어 떨어져 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에서 잘라 광야로 내보내는 것. 이는 분리된 개념이 정상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효과가 있다. 채식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 깐깐하고 신경질적인, 별거 아닌 걸 대수롭게 여기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이런 편견이 떠올랐다면 이름 붙이기란 행위가 얼마나 잔인하고 교묘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부자들은 브랜드가 없는 최고급 옷을 입는다고 했던가? 이 세계를 움직이는 배후의 조정자라면 누군가가 자신을 직시해 인지하는 걸 원치 않을 것이다. 아마 '육식주의'란 이름이 없었다면 채식주의는 영원히 비정상의 범주에 갇혀 부당한 편견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레베카 솔닛의 책 제목처럼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이는 우리가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한 단계만 파고들어도 그 기준이 단단하지 않으며 상당히 임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동물을 대상화하고 하나의 집단으로 추상하는 것도 육식주의를 내면화하는 전략 중 하나다. 우리가 만약 소, 닭, 돼지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고 그들을 보통명사가 아닌 그들의 고유한 이름으로 부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자.
미주보다는 명노 안심이 맛있어 보이네요. 명노 두 근만 주세요.
혹은,
예진이처럼 적당한 크기가 요리하기 좋더라고요.
혹은,
머리는 버리고요, 혜미 가슴만 세 토막으로 잘라주세요.
유대인 학살에 의심 없이 가담한 SS친위대도 아기 상어 노래와 당근을 좋아하는 외까풀의 6살 소녀 레베카를 칼로 찔러 죽이라는 명령에는 쉽게 복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학살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이 몰개성화된, 유대인이라는 집단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동물을 먹는 건 생명유지에 필수적이라는 신화도 육식주의를 정당화하는 주요 개념 중 하나다. 하지만 곡물을 통해서도 단백질 합성이 가능한 필수 아미노산을 모두 섭취할 수 있다는 건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더 게임 체인저스>는 운동 능력을 강화하는 것 또한 알려진 바와 같이 고기가 아니라 채식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채식은 그럭저럭 단백질 섭취가 가능한 수단을 넘어 UFC 챔피언이 되거나, 발롱드로 수상, 뚜르 드 프랑스 우승을 위한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채식이 더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데도 육식이 멈추지 않는 현실에는 안 될 거라는 회의주의와 잘난 척 말라는 냉소와 나는 도저히 못하겠다는 포기가 자리한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좀 바꿔보자. 예컨대 조선은 절대 일본의 식민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거나 아무리 잘난 척 떠들어봐야 민주주의는 오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로 말이다.
당신이 이런 생각을 갖고 독립투사와 무고한 시민을 잡아다 고문했던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오늘날 당신의 손주가 당신의 눈을 바라보며 '할머니(또는 할아버지)는 왜 그때 나쁜 놈이 시키는 대로 착한 사람을 잡아다 고문을 했어요?'라고 묻는 말에 '그땐 그게 너무 당연한 일이었지'라며 웃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크게 괘념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육식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동물이 비참하게 살아가는지, 얼마나 많은 동물이 잔인하게 살해되는지, 윤리적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