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짧은 역사 - 한 권으로 읽는 하버드 자연사 강의
앤드루 H. 놀 지음, 이한음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생각하는 건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다. 쪼개고 쪼개고 보면 인간이라는 복잡한 유기체도 다른 사물들과 동일한 입자의 조금 다른 배열에 불과한 존재라는 게 얼마나 기가 막힌 가! 결말만 두고 보면 이 세상이 전지적 창조자의 꼼꼼한 기획물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절묘한 결과가 저절로 만들어졌을 리는 없지 않은가. 생명의 신비를 곱씹을수록 이 의심은 확신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구의 역사는 이 세상이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약 46억 년 전 우주를 떠돌던 작은 먼지들이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알갱이를 이루고, 더 큰 중력을 갖게 된 알갱이가 다른 먼지들을 흡수하면서 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태양이었고 이 야심만만한 신성 주위의 암석과 얼음들이 뭉쳐 달에서 화성만 한 크기의 천체 약 100개가 생겨났다.


이들은 같은 자리만 지키고 살기엔 아직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고 우리가 수금지화목토천혜(명왕성은 얼마 전 우리의 곁을 떠났다)로 알고 있는 캡틴 플래닛, 파워레인저, 세일러문과 같은 팀을 이룰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면 무엇을 했을까? 막아 세울 교통경찰도 없는 진공의 고속도로에서 '충돌'말고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고향이 될 지구가 완성된 지 거의 수천만 년 뒤에 화성만 한 천체가 고민도 없이 지구에 돌진했다. 쾅! 엄청난 양의 바위와 가스가 우주 공간으로 터져 나왔다. 터져나간 파편들이 뭉쳐 조금 작은 별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는 지구의 궤도에 잡혀 훗날 '달'이라 불리게 된다.


충돌과 폭발의 시대는 짧지 않았다. 심지어 대양이 생긴 이후에도 지구는 그 대양을 모조리 증발시킬 정도의 강력한 운석 충돌을 셀 수 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창조를 위한 파괴의 시기이기도 했다. 현재 우리 고향별의 암석, 물, 공기의 대부분을 공급한 게 바로 이 운석들이기 때문이다. 43억 년~42억 년 전 무렵부터 지구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중력이 촉발한 대충돌의 시대가 다시금 중력의 힘 앞에서 질서로 수렴한 것이다.


지구는 이 평화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지각과 맨틀은 열심히 서로를 주고받으며 오늘날의 판구조를 만들었다. 여전히 창조론의 끈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희소식을 알려주자면, 판구조는 행성 형성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땅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게 창조랑 무슨 상관이냐고? 놀랍게도 '그 결과 지구는 일반적인 행성 차원을 넘어 대양과 대기, 산맥, 화산을 갖춘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행성이 되었'기(p.79) 때문이다.


<지구의 짧은 역사>는 아주 작은 사건으로 촉발된 상호작용이 수십억 년에 걸쳐 축적된 결과가 바로 우리의 세계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시간을 되짚어 나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로우며 여러 가지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우주여행을 떠나 1억 년 전 지구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행성을 보게 된다면 1억 년 뒤 이 별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있을까? 그냥 현재 우리의 지구와 같은 모습이라고 상상하면 될까?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나타나 서로를 죽이는 대학살을 벌이고 환경을 파괴하고 기타 등등 이하 생략. 그러나 보통은 수십억 단위로 세어지는 우주의 역사 속에서는 아주 사소한 차이가 대단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의 역사는 태초의 바다 위로 번개가 쳤을 때 시작됐다. 번개가 만들어낸 아미노산은 서로 결합해 단백질을 만들어냈고 그 순간 세상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그러나 그때 그 아미노산들이 수십억 년 뒤 지구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기 위한 의도로 결합을 시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들이 명확한 계획과 의지를 따라 이뤄지는 것 같지만 시작은 아주 우연한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촉발된 행동은 이후 세상과 끊임없이 상호작용 하며 점점 커져나간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뭐가됐든 '하는 것'이고,


'멈추지 않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이전트 러너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르 카레는 1931년 영국 도싯주 풀에서 태어났다. 이게 얼마나 옛날인지 알고 싶다면 1931년이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한 해라는 걸 떠올리면 된다. 존 르 카레는 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옥스퍼드 장학생이 되어 언어학 공부를 추가했다. 1956년부터 2년간 그 유명한 이튼 스쿨에서 아이들에게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가르쳤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정보부를 떠난 짐 프리도가 어느 시골 학교의 교사로 숨어 지내던 장면이 여기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1959년 영국 외무부로 일터를 옮긴 그는 MI6에서 첩보 활동을 시작한다. 1961년 요원 신분으로 첫 장편소설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발표한다. 우리의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가 탄생한 책이다.


존 르 카레가 은행 직원에게 요청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본인의 계좌 잔고가 일정액을 넘으면 꼭 자신에게 전화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출간된 후 어디메쯤 그 운명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후 첩보원 데이비드 무어 콘웰은 영원히 존 르 카레가 되어 작가의 인생을 살아간다.


<에이전트 러너>는 2020년에 생애를 마감한 존 르 카레가 2019년 마지막으로 써낸 소설이다. 죽기 직전까지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다는 것도 놀라운데 동서냉전으로 시작한 그의 세계가 브렉시트까지 이어져왔다는 걸 생각하면 경이로움마저 든다. 존 르 카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에이전트 러너>는 브렉시트 시대의 혼란한 영국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적국은 러시아.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등 전 세계를 극우화시켜 혼란에 빠뜨리는 데 러시아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특히 가짜 뉴스를 이용해서). 콜드워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이후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노골적이고 조직화된 범죄를 선택한 것은 정말 러시아답다. 그들의 악행을 보고 있으면 지옥의 왕이라 불러도 시원찮을 미국이 어린애처럼 보일 정도다.


존 르 카레는 이 소설에서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렇다고 모국인 영국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간 이 첩보 마에스트로의 소설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국적을 막론하고 이 세계에 몸담고 있는 이 모두를 어떻게 그려왔는지 알 것이다. 대의도 윤리도 없는. 양아치가 도둑놈을 쫓고, 도둑놈이 강도를 쫓는, 비열하고 지저분한 세계. 특히 영국은 그런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다분하다. 두 번의 전쟁으로 지옥의 왕좌를 미국에서 내주기 전까지 온갖 이간질로 세계사에 분탕을 쳐온 이는 다름 아닌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이빨 빠진 호랑이는 과거의 영광이 너무 눈부셨던 나머지 본인이 아직도 슈퍼 히어로라 생각하는 주제넘은 착각, 아니 치매를 앓고 있다. 미국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든든한 맏형인 척 하지만 사실은 엉덩이나 핥는 푼수 주제에 말이다.


위대한 대영제국은 유럽의 연대 없이도 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존 르 카레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자신은 더 이상 모국을 향한 혐오를 참지 못하고 아일랜드 국적을 취득한다.


<에이전트 러너>는 소설의 전반부 대부분을 은퇴를 앞둔 첩보원의 가정사와 배드민턴 얘기로 장식하는데도 독자를 문장 안으로 잡아끈다. 500kg짜리 청새치를 잡아 올려 머리를 내려치기 전까지 천천히 나무 방망이를 깎는 노인의 정수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작품 세계 전체를 두고 봤을 때 <에이전트 러너>의 스케일은 소품에 가까울 정도다. 조지 스마일리의 17단계 첩보 여정을 단편으로 요약한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 경쾌함이 책장을 넘기는 손을 가볍게 한다. 골수팬들이야 반대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존 르 카레의 작품으로 베스트 앨범을 낸다면 나는 이 작품을 1번 트랙으로 넣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덤의 침묵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고정아 옮김 / 엘릭시르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지막 소년>의 압도적 힘에 이끌려 선택한 임프린트 엘릭시르의 소설 <무덤의 침묵>이다. 저자는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화산의 나라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출신이다. 레이캬비크는 LCK의 담원 기아가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결승을 앞두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졌다). 아무튼.


'남자는 아기가 바닥에 앉아 씹고 있던 것을 빼앗아 들자마자 그것이 사람 뼈라는 것을 알았다.'(p.5)


<무덤의 침묵>을 읽기로 결정한 건 바로 이 첫 문장 때문이었는데, 북유럽 특유의 그로테스크가 사방을 에워싸는 압도적 분위기를 기대했달까? 사실 끔찍한 살인 사건은 미국이 전문인 것 같지만, 북유럽을 배경으로 핏물이 번지면 더 섬뜩한 느낌이 있다. 날씨 탓일 수도, 희고 창백한 그들의 외모 때문일 수도 있다. 전부 스트레오 타입에 불과하겠지만.


<무덤의 침묵>은 첫 문장의 충격만큼 무서운 소설은 아니다. 실제로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면 이렇게 해결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평범한 경찰 수사 이야기다. 주인공이 뛰어난 추리력을 발휘하거나 상상도 못 한 엽기 살인 행각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심지어 연쇄 살인도 아니다! 살인 사건을 추적해 가는 형사 시리즈에서 익히 기대할 만한 것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소설은 범인이 누구인가, 왜 죽였는가, 어떻게 그를 잡을 것인가에 힘을 쏟기보다는 범죄가 주변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를 지그시 관조한다. 여기에 주인공 에를렌뒤르의 망가져버린 가정사가 평행으로 흐르며 상처 투성이의 인간사가 펼쳐진다. 스릴러, 서스펜스보다는 확실히 드라마에 가깝다.


기대하는 게 달랐을 땐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는 편이다. 중간, 마지막, 아니면 그 사이 어디선가 새로운 감동이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밝혀진 독서의 지도는 이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에를렌뒤르 시리즈를 더 읽을 것 같진 않다. 작가는 2008년 프랑스의 일간지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공감할 굴곡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행복은 관음의 대상이고 불행은 공감의 대상이다. 그런데 공감이란 상처를 나눠 갖는 일이다. 상처를 나누며 우리는 큰 띠를 이뤄 하나로 묶인다. 그 아래서 상처는 아물고 인생은 더 탄탄해진다. 하지만, 그 결과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서 상처의 기억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나는 그 상처를 성숙하고 우아하게 치유하기보다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로 날리고 싶은, 유치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이미 죽어버린 악마를 쫓는 건, 그래서 내게 좀 밋밋하고 아쉬운 일이었다. 나는 교수대에 걸린 악마의 머리를 보며 치유를 얻고 싶다. 인과응보는 이제 현실에서 완전히 사라진 유니콘이 됐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아이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에겐 이유를 막론하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내게는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는 게 바로 그것이다. 저작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국내에 소개된 작품만 고르면 더 줄어든다. 시간 순으로 보면 <핏빛 자오선>(1985), 일명 국경 삼부작으로 불리는 <모두 다 예쁜 말들>(1992), <국경을 넘어>(1994), <평원의 도시들>(1998),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 <로드>(2006), 최초의 영화 시나리오 <카운슬러>(2013), 희곡 <선셋 리미티드>(2015), 마지막으로 이 책 <신의 아이>(2021)가 있다.


매카시의 소설은 난해하다. 특히 소설의 배경이 과거로 갈수록 심하다. 문체가 시적이라 상징이 많은 데다(매카시의 소설 속에선 멕시코 마약 카르텔 두목마저 셰익스피어가 된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를 이어 붙여 문장을 길게 끌고 가는 탓에 읽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 번역의 한계까지 한 술 거들면 문장 하나를 집중해서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불분명한 인칭대명사의 사용은 악명이 높다. 지금 말한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싶어 한참을 생각하거나 페이지를 되짚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카시를 읽는 이유는 그의 소설이 지닌 묵시록적 분위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소설이 가진 문학적 가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떤 답답한 행동을 고집스럽게 이어가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숙명성에 이끌린다.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망설임 없이 inevitable이라 말하고 싶다.


<신의 아이>에서는 이런 생각이 좀 희석되는데 주인공의 악행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인 것 같다. 레스터 밸러드는 시간과 살인, 방화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르는 말종이다. 정상참작 요소는 딱 하나뿐이다. 마몬(돈을 상징하는 악마)의 아이들이 그를 그의 땅에서 내쫓은 것. 하지만 에덴에서 쫓겨났다고 아담과 이브가 보니 앤 클라이드가 됐던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매력적인 사냥꾼 루엘린 모스는 우연히 주운 돈 가방에 눈이 멀었고 그 대가를 치렀다. 그의 욕망은 충분히 공감할만하고 그 결과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레스터 밸러드는? 그는 벌을 받지 않는다. 대학병원에서 폐렴 치료를 받다 편안히 숨을 거둔다. 그의 시체가 덜컹덜컹 잘려 해부학 교재로 이용되기는 하지만, 산 채로 그런 일을 당했어도 시원찮을 인간이지 않은가? 매카시는 레스터 밸러드를 향해 '아마도 당신과 다를 바 없는 하느님의 자녀'라 부른다. 다른 작품들에서 매카시의 인물들은 죄를 '짓는' 인간으로 나타난다. 죄가 인간의 선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신의 아이>에서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죄'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매카시에게 신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에게 이 세상이 돌아가는 꼴은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의 아이'란 조롱의 의미로 들린다. 세상을 돌아보라. 인간이 어떻게 신의 피조물일 수 있는가?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 해도 우리를 낳은 게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기도를 해도 사악한 인간이 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가장 희망적인 해석은 이 세상이 천국에 사는 진짜 신의 아이들이 죄를 지어 벌을 받기 위해 내려온 곳이라는 가정이다. 한때는 우리 모두 신의 아이였다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자위.


레스터 밸러드는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많은 사람들이 살아생전 심판받지 않은 자들이 죽어서 가는 곳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어야만 레스터 밸러드의 죽음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맞다면, 그건 우리 자신에게도 꽤나 잔인한 믿음 아닐까? 레스터 밸러드만큼의 악마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아간다. 신의 아이로 착실히 살아왔다고 믿은 당신이 죽어서 레스터 밸러드를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당신은 그를 만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신약 성서의 저자들은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 예수의 십자가 옆에서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를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21-10-3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카시 좋아하시나 봐요. 저는 로드만 읽었네요. 영화로도 보았는데 둘 다 좋았지만 원작의 감흥이 더 좋았어요. 특유의 디스토피아와 문체적 난해함도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우리 정체는 신의 아이, 책 담아둡니다. 우리는 전직 천사였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

한깨짱 2021-11-01 15:12   좋아요 0 | URL
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숭배자입니다. 로드는 영화보다 원작이 좋았다는데 저도 동감입니다. 매카시 소설 중엔 로드가 가장 명확하죠. 근데 로드만 믿고 다른 소설로 가시면 진짜 정말 후회하실 수 있어요 ㅋㅋ

프레이야 2021-11-01 15:47   좋아요 0 | URL
왠지 그럴 거 같아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는 영화로만 보았는데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혼미하더군요 ^^ 바르뎀의 연기가 아주 그냥 무섭더군요. 언젠가 아무래도 원작으로 만나야 할 듯합니다.
 
마지막 소년
레이먼드 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히 올해의 소설로 꼽을만한 이야기다. 구성은 김언수의 초명작 <뜨거운 피>만큼 탄탄하고 재미 또한 어깨를 나란히 한다. <뜨거운 피>가 우세를 보이는 부분은 좀 더 현실적이라는 것. 그러나 <마지막 소년>에는 <뜨거운 피>보다 한 뼘이나 웃자란 유머가 있다.


고등학교 소년 바람은 미혼모이자 마약 중독자인 엄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올바로 크는 게 거의 기적에 가까운 환경이었지만 바람은 아주 성실한 소년으로 자랐다. 외박과 가출을 밥 먹듯 하는 엄마를 대신해 살림을 했고 매주 화요일에는 식기를 소독했다. 엄마는 병신과 머저리들만 골라 사귀는 재능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는 엄마를 구타하는 남자 친구들을 때려눕혀 몇 번이나 엄마를 구해냈다.  담배도, 술도, 욕도하지 않았다.


바람의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얼른 커서 입대해 말뚝을 박고 봉급을 엄마에게 보내줄 생각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좀 빠지는 데가 있다면 학교와 공부에 소홀했다는 거? 그러나 어쩌랴. 생존이 더 바쁜 이 소년에게 낭창한 학교 생활은 꿈만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사건은 어느 날 땅콩이라는 사채업자가 엄마가 진 빚을 받으러 오면서 시작한다. 바람은 땅콩의 협박에 맞서 장기매매는 불법이며 이자는 원금의 27.9퍼센트를 넘을 수 없다는 것, 자기처럼 가난하다면 갚지 않고 차라리 파산을 신청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말한 뒤, '어떤 새끼가 그딴 소릴해!'라고 고함치는 땅콩에게 <그것이 알고 싶다>의 김상중으로 맞받아치며 그를 때려눕히지만, 곧이어 다시 쳐들어온 한 무리의 깡패들 앞에서 자신의 삶이 비로소 끝에 다다랐다는 걸 눈치챈다. 바람은 엄마의 남자 친구들과 싸웠던 경험에서 한참이나 어린놈에게 두들겨 맞은 남자는 수치심 때문에 복수 같은 건 꿈도 꾸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다소 방심을 했던 게 화근이었다. 땅콩은 수치심 따위는 모르는 기대 이하의 잡놈이었던 것이다.


바람은 국어 선생님이 들려준 소설이 생각났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 자신의 누렇고 구멍 난 팬티를 보겠구나, 창피해하며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바람은 장롱을 열어 명절에 입으려고 아껴두었던 BYC 속옷을 꺼내 갈아입고 깡패들을 따라나선다. 군인이 되어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바람의 바람은, 그렇게 바람이 되어 산산이 흩어진다.


<마지막 소년>의 작가 레이먼드 조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책 뒷면엔 '순진했던 시절에 보내는 가장 잔혹한 작별 인사, 70만 부 베스트셀러 작가 레이먼드 조의 첫 번째 소설'이라는 광고 문구가 있는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 출간된 <마지막 소년>이 70만 부 팔렸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내가 손에 든 이 책이 이미 70만 부가 나갔다는 말인가? 아무튼 <마지막 소년>은 레이먼드 조의 첫 번째 소설이 맞고 그는 70만 부나 책을 판 베스트셀러 작가가 맞다. 레이먼드 조는 <마지막 소년> 전까지는 오로지 자기 계발서만을 써온 전문 작가였던 것이다.


70만 부의 책을 파는 동안 어떻게 소설 쓰기를 참을 수 있었을까? <마지막 소년>의 레이먼드 조는 애초에 소설가로 태어났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반짝반짝한 재능이 담겨있다. 덕분에 '엘릭시르'라는 이 문학동네의 장르 소설 임프린트도 알게 됐는데, 지금 이 출판사의 책들을 정주행 중이다. 레이먼드 조와 <마지막 소년>은 올해 가장 값진 수확이 아니었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