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산문
박준 지음 / 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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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이 돌아왔다. 드문드문 해가 비치는 안개 낀 숲 속에서 부슬비를 맞는 기분은 여전하다. 그리워하는 이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리워하는 사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채 꾹꾹 눌러 담아 애먼 곳에 풀어놓는 것을 들으며, 나는 그 말이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그리움에 따뜻해진다.


태어날 때부터 노인이었던 이 남자는 함부로 지껄인다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한다. 모나고 성긴 돌들을 가슴속에서 벼려 티 하나 없이 맑은 쟁반에 담아 내온다. 박준의 이야기를 듣고 부끄러워지는 이유는 내 언어의 못남 때문이기도, 한 때는 나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늙은이는 언제나 나를 과거로 데리고 간다. 변해버린 내 모습을 탓하지 않고, 그저 손을 잡고 돌아가 물끄러미 나와 함께 나를 바라본다.


박준은 어떻게 이리 살 수 있을까? 우리가 같은 세계,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보는 이에 따라 그의 서정이 유별나고 촌스럽고 낯간지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내 뒤를 밀치고 지나가는 거칠고 우악스러운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의 세상이 유리관에 담긴 분재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그는 진심으로 살고 있으며 다행히 그 진심이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 같다. 별난 세상, 이런 사람도 하나쯤 있어야지 하는 게 아니라, 다들 잊고 살았던 것들을 떠올리며, 잔인하게 짓밟고 걸어온 풀들을 미안한 마음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박준은 두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수필을 내놨다. 닦달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서 빨리 그의 세 번째 시집을 읽고 싶다. 사실 그의 수필과 시는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닮아있어, 진심은 뭐가됐든 그의 말을 더 듣고 싶다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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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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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가 모조리 의심받는 이 세상에서도 철학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모리스 리즐링의 말처럼 "결국 인생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두 개의 물리력에 속박당한 채 평생을 살아간다. 저주와 같은 이 힘은 중력과 시간이다. 특히 철학에 양분을 제공하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우리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며 끈질기게 죽음을 향해 끌고 간다. 미약해 보였던 그 힘은 점점 강해지며 우리의 발걸음을 느리게 한다. 철학은 그 느려진 속도를 체험하는 순간 태어난다. 시간은 우리 앞에 문득 마지막 장의 장막을 펼쳐놓는다. 장막은 굳게 닫혀 있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마지막'이라는 벌레는 온 마음을 헤집고 다니며 불안과 상실의 공포를 낳는다.


에피쿠로스는 이 두려움을 무시로 해소하려 했다. 그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현재가 아니며, 죽음이 현재일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p. 485) 우리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것들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은 남아 있는 자들이 감당할 몫이지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보부아르는 에피쿠로스의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보부아르가 경멸한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 즉 '늙음'이었다. 우리가 청년으로 태어나 청년으로 죽는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늙는다는 게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보자. 그건 감기몸살의 오한과 무기력을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 같은 느낌, 물에 젖은 솜옷을 걸친 채 매일 100km의 행군을 감행하는 느낌일 수도 있다. 뭐가됐든 늙는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그 끔찍함에 눈이 멀어 우리는 일종의 인지적 함정에 빠진 건 아닐까? 노화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절망에 빠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노화는 내가 반드시 맡아야 할, 바꿀 수 없는 배역이지만 그 배역을 어떻게 연기할지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보부아르는 결국 '우리'라는 연대 속에서 우울의 치료제를 찾은 것 같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좋다. 그들의 계획 안에서 내 계획을 발견하면 내가 죽어서 무덤에 묻힌 후에도 내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p. 494)


기차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와 몽테뉴처럼 죽는다. 새벽에서 황혼을 잇는 이 철도를 따라 소크라테스와 루소와 소로와 쇼펜하우어와 에피쿠로스와 시몬 베유와 간디와 공자와 세이 쇼나곤과 니체와 에픽테토스와 보부아르가 차례차례 기차에 오른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덜컹거리는 의자에 앉아 우리를 마주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것은 수업이 아니라 여행이다. 강의를 듣는 게 아니라, 우리는 대화를 한다. 기차의 속도는 간혹 고개를 돌려 경치를 감상할 수 있을 만큼 느리다. 레일을 따라 울리는 규칙적인 덜컹거림이 포근한 음악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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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살인 2 - 내 안의 살인 파트너
카르스텐 두세 지음, 전은경 옮김 / 세계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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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스텐 두세의 <명상 살인 2>는 형만 한 아우가 없다는 전례를 망설임 없이 따르는 소설이다. 요쉬카 브라이트너라는 신비로운 남자에게 명상을 배운 뒤 자신이 일하던 로펌의 대표들과 마피아 보스를 입맛대로 요리하던 비요른. 자신을 협박하던 마피아를 자동차 트렁크에 유인해 땡볕에 말려 죽인 뒤 분쇄기에 갈아 물고기 밥으로 던져준 남자. 명상과 살인이라는 섞일 수 없는 두 빛이 운명처럼 교차하며 지금껏 보지 못한 색을 발하던 이야기가 바로 전작 <명상 살인>이었다.


<명상 살인 2>에 없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구성과 유머다. 하나하나 떼어 놓은 장면들은 21세기에 사는 독일 유명 로펌의 변호사가 겪기에는 말도 안 될 정도로 하드보일드 하지만 그것들은 충분히 그럴싸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비요른의 능청스러운 유머는 보기 싫은 균열들을 잘 메꿔주었다.


<명상 살인 2>는 확실히 작위적이다. 미스터리를 도입한 건 좋은 시도였지만 끝까지 유지하는 뒷심이 부족했다. 꼬아서 꼬아서 맺어 놓은 이야기는 허를 찌르는 반전도 없었고 그 꼬아 놓은 결들을 음미하며 감탄할 정도로 정교하지도 않다. 모든 요소는 그저 이야기를 위해 복무할 뿐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지는 못한다.


유머의 수준이 너무 높아진 것도 문제였다. 특유의 시니컬하고 비틀어진 유머는 취저라는 말로는 부족, 도대체 언제 울린 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메마른 내 마음의 종을 미친 듯이 흔들어놨었는데, 이번엔 독기만 가득할 뿐 독해조차 쉽지 않은 초고층 코미디가 되어버렸다. 지난해 만담 챔피언이 그 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느낌.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지만, 유머는 모쪼록 힘을 빼야 빛이 나는 법 아니던가.


서점에서 <명상 살인 2>를 발견했을 때 지체 없이 손에 들었다. 정말 단 0.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랜 독서의 세월 중에도 몇 번 만난 적 없는 영혼의 단짝. 나는 카르스텐 두세를 그 정도로 아꼈고 내 시력이 다하는 날까지 기꺼이 그의 인세를 더해줄 각오가 되어있었다. <명상 살인 2>는 이런 마음을 모조리 불태워버린 나쁜 책이다.


물론 속편에 대한 혹평은 전작에 대한 애정의 크기에 비례하는 법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 2>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조롱과 무시를 받은 이유는 <라스트 오브 어스>가 전 우주 콘솔 게임 대상에 출전해도 기꺼이 대상을 거머쥘 정도로 명작이었기 때문이다. 쓰고 보니 이 말 보다 정확하게 내 마음을 대변하는 건 없는 것 같다. 태어나서 딱 한 번 콘솔게임을 해봤고 그게 <라스트 오브 어스>였다고 해보자. 당신은 몇 년 동안 그 감동을 가슴에 안고 살았는데 자, 이제 라오어 2가 나왔다. 두둥 탁!


지금 이 순간 나를 괴롭게 하는 건 이미 이 세상에 <명상 살인 3>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형보다 잘한 아우로 손꼽히는 <터미네이터>도 3편에서는 망작이 되었는데 2편을 제대로 망친 이 시리즈가 본 궤도에 오를 수 있을까? 영화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라도 바꿀 수 있지, 소설은 그렇게도 못한다. 그냥 안 보면 그만이라고? 그러고 말기엔 이 문제가 내겐 너무 크다. 얼마 만에 다시 만난 소설인가. 읽느냐 마느냐, 정말로 그것만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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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국내 최초 프로파일러의 연쇄살인 추적기
권일용.고나무 지음 / 알마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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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마인드헌터>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열광했다. 내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해의 난도가 높을수록 그 대상은 나를 더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최근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 형 연쇄살인마들의 범죄 동기를 이해하는 건 사실상 불가하다. 그들에겐 아무런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살인을 트리거링하는 자극이 있을 뿐이고, 마치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졸음이 와 잠을 자고, 배고파 밥을 먹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최초의 연쇄살인마들이 대대적 수색과 수사에도 쉽게 잡히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동기' 때문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비과학적 수사 방식과 낡은 경찰 조직의 경직성에 그 원인을 돌리곤 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연쇄살인은 말 그대로 전례가 없던 사건이었다. 특히 한국처럼 폭발적 경제 성장으로 전통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가 문지방 넘듯 전환된 나라에서는 더더욱 급작스러운 사회 현상이었다.


이전까지 살인에 대한 수사는 모두 '동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범인이 피해자를 살해한 이유가 무엇인가. 금전인가, 치정인가, 원한인가? 범주는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단순했고 피해자의 금전 거래와 사생활을 탐문하면 용의자를 쉽게 가려낼 수 있었다. 그런데 순간 네 살 난 여자 아이가 토막 난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어떤 돈 문제, 치정, 원한이 얽혀있어야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일은 일면식도 없는 범인에 의해 저질러졌다. 수사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황무지에서도 늘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미국에선 존 더글라스가, 한국에선 윤외출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두 골방에서 소규모 팀으로 일하며 때로는 무시와, 때로는 질시를 견디며 묵묵히 그 일을 해나갔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은 윤외출과 권일용이 시작한 한국 프로파일링의 역사를 다룬다. 위에선 윤외출을 존 더글라스와 나란히 두었지만 실제 범죄 현장에서 발로 뛰며 체계를 잡은 건 권일용이었다. 집이 너무 가난했던 청년. 고등학교 졸업 후 막일을 하다 영장을 받아 그동안 번 돈을 어머니의 약값으로 모두 보내고 입대한 남자. 권일용은 한때 신부를 꿈꿨다. 가진 게 없어도 남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울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순경 공채에 합격하여 조폭을 때려잡는 기동대에서 근무하다 윤외출의 눈에 들어 프로파일러가 된다. 이후 권일용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한국 프로파일링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내가 여태껏 읽어온 프로파일링 책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책이다. 이론서가 아니라 사례분석집(Case Study)이다. 수사 과정을 동일하게 밟아가며 범죄자의 심리를 어떻게 파악하고 이용했는지 상세히 배울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를 읽으며 재미있었다고 말하기가 좀 멋쩍지만, 책장을 넘기는 동안엔 시간을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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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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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 콜필드의 목소리를 20년 만에 다시 들었다. 두서없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샐린저의 문체가 얼마나 독특한지 감탄할 기회는 번역서를 읽는 한국인에게는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남은 건 도저히 듣고 있을 이유가 없는 푸념, 걱정, 광기인데 이것들이 암시하는 메타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자기마저 이해할 수 없는 홀든 콜필드처럼, 나도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20년 전보다 훨씬 읽기가 쉬웠다는 점이다.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콜필드와 상황이 비슷했던 건 그때가 아니었나. 흔들리는 세상에, 사실 외부 세계는 언제나 굳건했고 흔들리는 건 내 자아였겠지만, 아무튼 그로부터 마음의 병을 얻어 앓던 시절은 그때가 아니었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에서야 그의 목소리에 더 공감할 수 있었을까?


역시 너무 가까우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나 또한 내 자아를 갉아먹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남의 이야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나 보다. 두꺼운 껍질을 깨고 나오는 건 결국 혼자만의 몫이다. 도와줄 이도 없고, 도와준다 한들 순순히 그 손을 잡지 못하는 촌스런 자존심과 과민은 결국 자기 자신을 어두운 우물 속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콜필드에게 탈출구는 가족이었다. 형 D.B.가 할리우드로 가 영화 시나리오 따위를 쓰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남은 건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동생 피비. 콜필드가 가출을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피비에게 쪽지를 건넸을 때 그녀가 보인 행동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 위로 피어오른 모닥불 같았다. 어둠을 몰아내는 데는 작은 초 하나로도 충분하다. 콜필드는 자기도 같이 가겠다며 옷가지를 단단히 챙겨 나온 피비를 달래 동물원으로 향한다. 몇 번씩 회전목마를 타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피비를 바라보며 그는 때아닌 겨울 소나기를 맞아 흠뻑 젖는다. 울었어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큰 비였지만 콜필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행복했기 때문이다.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콜필드는 피비와 한 약속을 지켰다. 결국 다시 집에 돌아갔으니까. 그리고는 병에 걸려 입원했다. 그는 폐렴에 걸려 죽고 난 뒤 자신의 장례식장을 가득 메울 사람들의 행렬에 대해 상상하곤 했지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정신과 의사는 9월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인지 줄곧 캐물었다. D.B.는 자신이 쓰고 있는 영화 시나리오에 출연할 영국 여자와 함께 콜필드를 찾아왔다. 좀 잘난 척을 하기는 했지만 끝내주는 미인이었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콜필드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이야기, 그러니까 <호밀밭의 파수꾼>에 적힌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이 대목에서 샐린저는 홀든 콜필드의 뒤에 숨어 어쩌면 길이 남을 수치가 될지도 모를 이 소설의 책임을 그에게 전가한다. 홀든 콜필드 혹은 J.D. 샐린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난 내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다.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The Catcher in the Rye>는 결론적으로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후회는 여전했을지 모른다. 그 바닥에서 환호는 봄날의 신기루 같은 거니까. 어느 순간 모두가 착각이었으며, 자신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다며, 마치 사악한 음모에 빠져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발을 뺄 수도 있는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출간된 건 1951년이었다. 1965년 이후로 샐린저는 그 어떤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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