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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데니스 존슨 외 지음, 파리 리뷰 엮음, 이주혜 옮김 / 다른 / 2021년 11월
평점 :
이 책은 <타임>이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문학잡지'라고 부른 <파리 리뷰>에서 기획한 단편선이다. <파리 리뷰>는 1953년 출판 산업과 문학 교류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창간했다. 영문학을 다뤘으며 계간지였다. 창간 이후 7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작가의 경력, 국적, 성별,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한 소설들을 편집해왔다.
어느 날 <파리 리뷰>는 웬만한 출판사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기획한다. 열다섯 명의 작가에게 그동안 <파리 리뷰>에 실렸던 단편소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한 편을 고르고 그 소설이 탁월한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한 것이다.(자기 소설이 아니라 다른 작가의 소설을 고른 것이다)
물론, 보는 이야 즐거운 기획이지만 선택당할 소설의 작가들이 이런 기획에 흔쾌히 동의했을지는 의문이다. 문학을 해설하는 일에 기겁하는 작가들이 많은 데다 누군가 본인의 소설을 탁월하다고 평하는 걸 마냥 흐뭇하게 쳐다볼 작가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호평이든 혹평이든 비평 자체를 혐오하는 작가들도 많다. 오죽하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84일 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다 거대한 청새치를 낚은 뒤 모조리 상어 떼에 뜯겨먹힌 산티아고 노인의 이야기를 헤밍웨이와 비평가 사이의 관계로 해석하는 버전이 나왔겠는가.
그러나 소설을 선택하는 입장에선 이런 기획이 자신의 최애 작가를 여러 사람 앞에서 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작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작품에 대해 뭐라 하는 건 싫어하지만 다른 작가에 대한 얘기는 곧잘 하는 편이다. 특히 그들이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만약 내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두 소설을 두고 고민할 것 같다. 하나는 어윈 쇼의 <80야드의 질주>이고 하나는 기 드 모파상의 <비곗덩어리>다. 둘 모두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어윈 쇼의 경우 작가 자체도 낯선 이름인데, <80야드의 질주>에서 그가 크로키한 인생의 무상함은 읽은 지 몇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아무튼 나 같은 바보에게도 이런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든지 원고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이는 꽤 신나는 일이다. 아마 <파리 리뷰>의 전화를 받은 작가들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누구의 소설을 고를까. 이 소설의 어떤 면을 소개할까. 독자들도 나처럼 이 작가를 사랑하게 될까?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이란 고작 먼지 한 톨에도 비기지 못할 존재고, 그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낳은 문학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가치가 있나 싶다가도, 이렇게 문학이 사람 사이를 연결하고 열광하게 만드는 걸 보면 역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위대함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첫 소설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의 화자는 자동차 사고 현장에서 퍼붓는 비를 맞으며 '나는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I knew every raindrop by its name)' 고 말한다. 우주의 먼지들에게도 모두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이 적힌 소설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나는 문학의 폭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