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패로
메리 도리아 러셀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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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외계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포착하여 우주로 모험을 떠나는 이 소설은 360페이지에 이를 때까지도 외계인이 등장하지 않는 인내심 강한 소설이다. 넷플릭스로 드라마화가 됐다면, 총 두 시즌으로 기획했다 치고 시즌1의 마지막 회, 엔딩에 가서야 슬쩍 외계인의 얼굴이 등장하는 셈이다. 나는 간질간질 떡밥만 흘리고 핵심 줄거리는 나무늘보처럼 전개하는 이야기들을 진심으로 혐오한다. 더블 제이의 <LOST>나 스페인판 <종이의 집> 같은 거 말이다.


그러나 이런 걸 소설로 읽고 있으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 위대한 작가들이 추구하는 건 외계인이 발견됐다는 가십이 아니라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는 지적 탐구이기 때문이다. 어슐러 K. 르귄의 작품들이 SF를 넘어 일종의 사회과학 소설로 읽히는 것처럼, 이 소설 <스패로>는 정확히 같은 길을 지향한다.


나는 늘 외계 생명체가 발견됐을 때 이 세계의 종교가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생각해왔다. 신은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했는데 외계인은 언제 만든 걸까? 설마 안식일에 특근을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 종교인들이 새로운 대륙과 인종을 마주할 때마다 써 내려간 잔인한 합리화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외계인이 우리만큼, 혹은 우리보다 우수한 문명을 보유하고 있을 땐 얘기가 좀 다를 것이다. 종교는 그 숭고한 의미와는 다르게 늘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봉사해왔는데, 저 먼 우주의 이웃이 우리보다 훨씬 강해 도저히 지배가 불가능해 보일 때는 어떤 교리를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다. 역사상 처음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득세할지, 아니면 그들을 사탄의 군대로 간주해 성전을 촉구할지. 뭐가됐든 우리 삶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하고 폭력을 조장해온 종교들은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높은 콧대가 폭삭 주저앉아 골머리를 썩을 걸 상상하면 마음이 날아갈 것처럼 즐겁다.


이 혐오와는 별개로 나는 종교의 탄생이 인간 역사의 필연이라고 믿는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공포가 설명 가능한 이야기로 대체됐을 때 인간이 느끼는 안도를 생각해보자. 이 믿음이 결국 인간을 하나로 결집시켰고, 도시가 만들어졌고, 집단생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과학 기술이 발달하게 됐다. 종교가 없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웠을까 생각하다가도 내가 누리는 문명의 이기들이 결국 그걸 계기로 발명됐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어 마음이 착잡하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신은 인간이 종교를 만들 수밖에 없도록 세상을 창조한 셈.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부처님 손바닥 위의 원숭이처럼. 나는 이것이 지구인으로서 갖는 내 인식의 한계임을 바란다.


<스패로>는 예수회 신부 에밀리오 산도즈가 외계 문명의 존재에 담긴 신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소설이다. 나는 간질간질 떡밥만 흘리고 핵심 줄거리는 나무늘보처럼 전개하는, 내가 혐오해 마지않는 이야기처럼 이 글을 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쪼록 내 의도가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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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
이종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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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의 취객이 빈 쇼핑백을 들고 버스에 탄다. 승객은 많지 않았지만 좌석은 이미 다 차 있었다. 남성은 악취와 술냄새를 풍기며 좌석들을 노려보다 건장한 30대 청년 앞에 선다. 그러더니 툭, 툭 들고 있던 쇼핑백으로 청년의 다리를 친다. 반응이 없자 남자는 고개를 바짝 들이대 다리가 아프니 자리를 비켜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남자에게서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몰려온다. 참다못한 청년이 똑같이 언성을 높이며 말한다. "왜 이러세요!" 그 순간 남자는 들고 있던 쇼핑백으로 청년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쳐 그를 살해한다.


소설의 첫대목을 읽은 뒤 나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강렬하지만 그만큼 부담이 큰 첫 장면을 작가는 어떻게 풀어나갈까? 뒤에는 수백 페이지가 남아있었다.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으려면 상당한 짜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김칫국은 내가 이 소설을 장편이라고 오해한 데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은 작가 이종산의 단편선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의 표제작이다.


부커상 최종 후보로 뽑혔으나 수상에는 실패한 <저주토끼>의 저자 정보라는 이 책에 실린 단편선을 일컬어 '여성주의 공포소설'이라 말했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부조리와 피로를 공포라는 장르로 빚어냈다. 어지간히도 무던한 이 사회에 큰 충격을 주려면 좀 센 맛도 필요할 것이다.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82년생 김지영>을 써내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저주토끼>나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을 쓰는 작가도 있다. 다양성은 어느 순간 무조건 지켜야 하는, 다소 정치적인 단어로 변질됐는데 사실은 굉장히 실용적인 이유로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다. 주제가 영원히 싱싱하게 남으려면 이야기는 다양성이라는 외피를 둘러 독자를 질리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접하는 이런 소설들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좋은 시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빈 쇼핑백에 들어있는 것>>에는 지루한 소설들이 꽤 많다. 결말은 뻔한데 전개가 질질 끌리니 이야기의 맛이 살지 않는 것이다. 이 문장을 쓰고 하루를 더 생각해보니, 어쩌면 내가 남자여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들었다. 경찰에 신변 보호까지 요청했으나 끝내 스토킹 범죄로 죽어나가는 여성의 공포를 나는 피부로 알지 못한다. 내가 이 범죄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게 옳지 않기 때문이지, 무섭기 때문은 아니다. 이 공포를 일상에서 마주쳐야 하는 여성에게는 내가 지루하다고 여기는 그 전개들이 마디마디 공감할 수 있는 세심한 묘사로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무서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이야기인 세상. 나는 내가 꽤 알고, 공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끽해야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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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인간경영
도몬 후유지 지음, 이정환 옮김 / 경영정신(작가정신)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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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를 연 세 명의 장군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이 세명은 당대에 협력하여 천하를 거머쥔 사람들 치고는 성향이 너무나 달랐는데, 그 차이를 두견새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유명하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울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세 사람은 이렇게 답한다.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으면, 울게 해 주겠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는 패왕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치의 달인이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심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천하를 지배한 순서도 납득이 되는데, 복잡 다단했던 전국시대를 통일한 건 힘의 노부나가, 비천한 신분이었음에도 그것을 탈취하여 두 번째 주인이 된 건 지의 히데요시,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때가 왔을 때 분연히 일어나 일본 최후의 막부를 세운 건 인내의 이에야스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할 때 '주군이 내려준 간토(관동) 땅이 혼란하다'는 핑계로 단 한 명의 군사도 출병시키지 않았다. 히데요시 사망 이후에는 모든 다이묘들에게 즉각 회군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세력을 규합해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전면전을 벌인다. 세키가하라, 오사카 전투를 끝으로 히데요시 가문은 완전히 멸망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수립된다. 에도의 현재 이름은 도쿄다.


히데요시-이에야스 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중심은 오사카에서 도쿄로 이동한다. 서울-부산만큼이나 말이 다른 두 지역은 서로의 언어를 오사카 사투리, 도쿄 사투리라 부를 정도로 자기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먹는 것도 다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초밥은 원래 쥐어서 만든다는 의미의 니기리 스시로 불리는데 이게 바로 도쿄식이다. 반면 오사카는 나무  상자 안에 고기와 밥을 층층이 쌓고 눌러 만든 하코 스시를 먹는다. 사회생활에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지 오사카 출신으로 성공하려면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속설이 있기도 하다.


도쿄에 터를 잡은 뒤 이에야스는 아들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고 전면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이는 은퇴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여러 분야의 지식인과 외국인들을 모아 여론을 수집하고 나라를 운영할 정책을 만들었다. 이것을 실행하는 건 아들이었는데 정치와 행정을 분리하는 일종의 권력 분립 체제가 아니었다 싶다. 이 방법의 장점은 배후에서 모든 걸 움직이면서도 정책 실패에 따른 비난은 아들에게 지울 수 있다는 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하를 다루는 방식도 이처럼 교묘했는데 드러내 놓고 위협을 가했던 노부나가와 달리 서서히 말려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크게 소리 나지 않게, 죽는지도 모르고 스르륵.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통치 방법 중 가장 인상적인 건 '꽃과 열매를 함께 주지 않는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부와 권력의 분리였다. 일본은 칼을 쓰는 자가 붓을 드는 사람보다 지위가 높았던, 세계사를 통 털어도 이례적인 나라였는데 천하를 지배한 이후 이에야스는 무신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평화를 이룬 정부가 흔하게 취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그 불만과 갈등을 다스리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정책을 좌우하는 측근들에게는 권력을, 그렇지 못한 이들에겐 더 많은 돈을 주었던 것이다.


참을성의 화신이라면 뭔가 근엄하고 듬직한, 대쪽 같은 인물이 떠오르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적을 보면 이 말이 일본 역사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3인의 이야기를 끼워 맞추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너구리 영감이란 별명을 괜히 얻은 게 아니다. 판국을 좌우하는 모습을 보면 히데요시만큼 정치적이었고 여러 방면에서 도저히 의중을 알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다.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공포의 오니(귀신)라 불린 노부나가와 일 하기가 쉬울 것이다. 눈치가 빠르거나 정치적 수 읽기에 능하다면 히데요시가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속을 알 수 없는 상사만큼 일하기 어려운 사람이 또 있을까?


인내심이란 어쩌면 자기 속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행보를 오역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나는 원래 이 3인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본능적인 매력을 느꼈는데, 알아보니 나와는 참 안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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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리(理)와 기(氣)로 해석한 한국 사회
오구라 기조 지음, 조성환 옮김 / 모시는사람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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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주자의 성리학으로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책이다. 방법은 귀납적이면서 동시에 연역적인데, 한국 사회의 다양한 양상을 수십 개 늘어놓고 그 하나하나를 성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야기하기에 앞서 주자학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주자의 성리학은 이 세상을 '리'와 '기'로 설명한다. '리'란 쉽게 말해 우주의 보편적 이치, 정신, 도덕이다. '리'는 순수하게 선한 것이며 인간 모두는 하늘로부터 이 '리'를 부여받는다. 이것이 바로 주자학이 성리학으로(성즉리) 불리는 이유다. 주자학은 곧 성선설의 철학이다.


한편 '기'는 물질성이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것들. 정리하면 '리'는 인간의 도덕 혹은 정신 '기'는 육체다. 희한한 건 주자학이 악행의 원인을 '리'가 아닌 '기'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기에는 조(치우침)와 색(막혀있음)이 있는데 이런 것을 부여받은 이들이 바로 오랑캐라 부르는 민족들이다. 나쁜 기는 리를 흐리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악행을 저지르게 한다.


저자 오구라 기조에 따르면 한국인은 본성적으로 리 지향적인 민족이었다. 주자학이 조선에서 그토록 성행했던 이유는 애초에 리 지향적인 사람들이 드디어 그 성향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혹은 정당화하는 철학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인을 한국인과 동일시할 수 있느냐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비약으로 보인다. 어째서 한국을 고려도, 신라도, 고구려도 아닌 조선으로 설명하려 하는가?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한국인의 리 지향은 이 민족이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간 태초의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한국인만의 특성인가. 리란 앞서 말했다시피 정신, 이치, 혹은 도덕이다. 이 세상에 도덕 지향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독일인들은 몰 도덕적이라 유럽을 향해 그토록 진지한 사과를 거듭하는 걸까? 한편 서양인들이 수학과 물리 같은 세상의 근본 원리를 설명하는 학문에 능한 이유는 뭘까? 그들의 선천적 리 지향성 때문일까 아니면 주자학을 섭렵한 후천적 학습의 결과일까?


저자는 주자학의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며 두 나라의 특수성을 드러내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리기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들이 너무 많다. 리기론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모호하고 추상적이라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끼워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2002년 월드컵 유치 경쟁에서도 일본에는 도덕 지향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여실이 드러났다. 한국은 "월드컵을 한국(과 북한)에서 열면 남북통일과 동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한다"라는 장대한 기상과 대계의 의지가 넘치는 제언을 했다. 이에 반해 일본 측의 "전례가 없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메시지를 포기한 자가 하는 말이다.(p.17)


그렇다면 2042년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이 "월드컵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열면 중동 평화에 기여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유치 홍보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성즉리가 반영된 결과일까? 세계 여러 국가의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명분 없는 메시지를 내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국제사회에서 깡패로 통하는 러시아, 중국, 북한의 행동에도 자기 나름의 명분이 존재한다.


'도덕 지향성 국가'인 한국에서 도덕의 최고 형태는, 도덕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가 된 상태라고 여겨지고 있다. 한국인이 이상으로 여기는 인생 또한 이 세 가지가 전부 구비된 상태이다.(p. 21)


도덕과 권력과 부가 일치된 삶을 최고선으로 간주하는 게 한국인의 특수한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정말 놀랍다.


오구라 기조는 한국인이 강력한 도덕 지향성 = 리 지향성을 갖게 된 이유가 지정학적 위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국으로 둘러싸여 항상 존재의 위기를 겪었던 한국이 '힘'으로는 도저히 대항이 불가하자 오히려 도덕으로 무장하는 반대 심리가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사실 주자학 자체가 비슷한 환경에서 뿌리를 내린 학문이었다. 주자학은 남송 시대의 주희가 창시했는데, 당시 남송은 한족 왕조 역사상 최약체로 불리는 나약한 국가였다. 주희는 금나라의 위협으로 왕조의 멸망을 눈앞에 둔 시기에 이 강력한 도덕 지향적 학문을 창시했다. 놈들이 우리를 지배해도 사실은 우리가 더 선하고, 옳은 인간이라는 일종의 정신승리를 위해! 자자 이런 관점이라면 우리는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영국과 도덕성 대결을 벌인 마하트마 간디를 주자의 성즉리를 체화한 성인으로 추앙해야 할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그래도 여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명의 멸망을 계기로 조선 사회의 도덕 지향성은 심화되어 급속도로 경직되어 갔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국가의 위기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계급의 위기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노비 문서 때문에 조선의 계급 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맞았다. 이런 상태에서 주자학의 리기론은 지배 계급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학문이었다. 리기론은 리에 우위를 두는 철학이지만 그 리가 혼탁해지는 원인은 기에서 찾는 모순적 사상이다. 과거에는 조와 색을 타고난 기의 인간을 구분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행색으로도, 문서로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모두 거지가 되고 보니 가시적인 단서가 사라진 데다 최후의 보루인 문서까지 불타버려 이제 반상을 구분하는 법은 리를 논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됐던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오늘날의 한국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논쟁에 왜 목숨을 바쳤는지 이해할 단서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를 리기론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참신한 면이 있고, 일부는 '오!' 하는 대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주자학은 결국 지배계급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통치 수단이었을 뿐이다. 한 국가에서 지배계급의 문화가 갖는 영향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게 민족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모로 비약과 끼워 맞추기가 많은 책이니 읽는 데 각별히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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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나오키 1 - 당한 만큼 갚아준다 한자와 나오키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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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한자와 나오키>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듣도 보도 못한 이 드라마를 주저 없이 선택했던 이유는 이 작품을 만든 게 <화려한 일족>의 제작진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지지 않는다는 문법을 정면으로 돌파한 이 드라마는 취저를 넘어 큰 감동을 주었다. 주연 배우 기무라 타쿠야가 박수를 칠 때마다 등장하는 황금 잉어씬을 제외하면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이야기였다.


<한자와 나오키>는 과연 기대한 대로였다. 구성은 짜임새가 있었고 일본 연기 특유의 과잉 감정이 없어 깊게 몰입할 수 있었다. 특히 치밀한 논리와 코뿔소 같은 저돌성, 곰 같은 끈기로 난관을 헤쳐나가는 한자와의 캐릭터에는 답답한 마음을 폭우처럼 쓸어버리는 시원함이 있었다. 다소 뻔한 이야기임에도 완주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러한 장점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원작 소설의 한자와는 달랐다. 뭐랄까, 상대가 너무 약하달까? 논리의 허점을 잡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한자와의 공격력은 그럭저럭 봐줄 만했지만 적들이 받아치는 힘은 눈에 띄게 약해 긴장감이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그냥 한자와의 먹잇감 아닌가. 이마에 나는 악당입니다라고 써붙인 인물들이 유치원생도 속지 않을 것 같은 논리로 도쿄중앙은행 오사카 지점 대부계의 에이스를 이길 생각을 하다니, 야무지다 못해 맹랑한 꿈은 오히려 한자와의 캐릭터를 두드려 펴 평범하게 만드는 역효과가 있었다.


세상엔 원작보다 뛰어난 드라마나 영화가 종종 태어난다. 사실 이 말은 원작이 별로라는 게 아니라 원작의 가치를 훌륭하게 보존했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한자와 나오키>에서 만큼은 예외를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은 확실히 드라마보다 못하다. 솔직히 말해 일본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이다. 선악의 명쾌한 구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인물들, 단순한 이야기 전개는 복잡한 세상살이에 잠시 엔터테인먼트를 선사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을 바라는 독자들에게는 갈증을 남길 수밖에 없다. 애초에 그런 바람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니냐고 한다면, 흠,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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