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을 디자인하라 (40만 부 리커버 에디션) - 없는 것인가, 못 본 것인가?
박용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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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디자인하라>는 동류의 책들이 갖고 있는 치명적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선언은 있는데 구체적 방법이 없다는 것. 좋은 사례를 여럿 제시하면 그것을 귀납적으로 추론해 핵심을 뽑아내는 건 독자의 몫일까? 뭐 두어 발 양보해 그렇다 쳐도 사례 자체가 그다지 신박하지 않은 건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워낙 옛날에 나온 책이라 개정판을 뽑았음에도 내용이 낡았다. 게다가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너그럽게 보면 유명 마케터의, 자기 자랑 섞인 에세이로 읽어줄 수 있을 것이다.


무명의 내가 하는 말을 여러분이 들어줄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으니 몇 마디 남겨보려 한다. 그래도 창의력이 요구되는 직종에서 십수 년 일하다 보니 나에게도 나름의 방법이 생겼다. 물론 나는 석사도 박사도 아니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서비스를 만든 적도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 하는 말은 아, 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관점을 달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관점을 물리적으로 바꿔보는 것이다. TV를 예로 들면, 보통 우리는 이 사물을 앞에서 바라보지 않는가? 이걸 옆이나 뒤 혹은 아래에서 쳐다보라는 것이다. 거짓말 같지만 진짜로 다르게 보인다. 이렇게 한번 봤다고 세상을 뒤흔들 새로운 TV 디자인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낯섦은 새로운 가치가 흐를 수 있도록 사고에 균열을 낸다. 이 균열이 겹치고 겹쳐 결국 다른 세계가 깨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서로 다른 개념 혹은 단어를 임의로 붙여보는 것이다. 한쪽에는 생각나는 동사를 잔뜩 적어놓고 다른 쪽에는 명사를 꺼내놓은 뒤 무작위로 조합해 보자. 비는 보통 내린다와 함께하는데 이 방법을 통하면 터진다와 짝꿍이 될 수도 있다. 터지는 건 보통 뭔가에 맞았거나 부딪혔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니 이번엔 그 대상을 임의로 붙여보자. 벽, 지렁이, 구름, 라이터, 귀, 빛? 귀에 맞아 터진 빗방울. 빗방울이 빛에 부딪혀 터져 버렸다. 좋은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만큼 확실하다. 그냥 '내렸다'와 짝을 이뤘을 때 보다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세 번째는 사물의 핵심을 완전히 반대로 끼워보는 것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스피커. 빛이 없는 전등. 바람이 불지 않는 선풍기. 이런 식으로 사고를 확장해 나가면 어느 순간 드리프트하듯 아이디어기 미끄러져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소리가 나지 않는 스피커에서 벽면 자체가 진동하는 영화관을, 빛이 없는 전등에서 간접 조명을 떠올리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에 언급한 방법들은 치열한 연구의 결과도 공인된 방법도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바로 이 방법의 무용함을 증명하는 산증인이기도 하지 않은가! 하지만 방법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내 능력의 한계가 문제일 수도 있다. 양자 역학의 세계를 열어준 건 아인슈타인이었지만 그걸 정립한 건 후대의 과학자들인 것처럼. 오늘은 이 정도에서 정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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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스타 2023-11-15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한깨짱 2023-11-19 10:14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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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소설은 하나의 진실을 네 개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물론 독자에 따라 '독특함'이란 표현에는 동의를 거부할 수도 있다. 흔히 '라쇼몽 식'이라 불리는 이런 서술 방식이 여러 미디어에 심심치 않게 존재해 왔던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특함이란 단어를 좀 더 유심히 돌아보면 확실히 '유일함'과는 다른 궤를 그린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트러스트>는 유일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소설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이야기의 1부는 주식으로 억만장자가 된 앤드류 베벨의 이면을 폭로하는 소설 속 소설이다. <채권>이라 불리는 이 소설에서 앤드류는 대공황기에 공매도를 때려 주식 시장을 궤멸시키고 본인은 떼 돈을 번 인물로 그려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덕적으로 지탄했지만 앤드류는 오히려 거품 낀 주식 시장을 자신이 바로 잡아줬다고 생각한다. 1부에서 이 논란만큼 중요한 건 헬렌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 앤드류의 아내 밀드레드 베벨이다. <채권> 속에서 그녀는 남편만큼 재능 있었지만 정신 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여성으로 묘사된다.


2부는 앤드류 베벨이 자서전을 쓰기 위해 남겨놓은 노트다. 이 이야기에서 그는 자신을 신격화한다. 고귀한 피와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그 부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식시킨 주식 천재이자 자상한 남편이다. 반면 아내 밀드레드가 가진 재능은 철저히 지워진다. 그녀는 음악과 소설, 꽃꽂이를 좋아하는 허약하고 순종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3부는 앤드류 베벨의 자서전을 완성하기 위해 고용된 대필작가 아이다 파르텐자의 회고다. 그녀는 앤드류 베벨의 지시에 따라 그의 인생 곳곳을 땜질하고 이어 붙여 매끄러운 거짓을 만들어낸다. 앤드류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해럴드 배너의 소설 <채권>에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그는 <채권>이 진실을 왜곡했다고 믿었기에 온갖 수단을 동원해 해럴드 배너의 인생을 망가뜨린다. 파르텐자는 앤드류가 저지른 '현실을 구부리는 일'에 자신이 동참했다는 자책을 느낀다. 시간이 흘러 중견 작가가 된 그녀는 이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추적을 나선다.


4부는 아이다 파르텐자가 발견한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다. 이 일기에 따르면 앤드류의 성공적인 주식투자는 모두 밀드레드의 결정이었다. 그녀는 주식 시장의 허점을 발견하여 주가 조작의 위험성을 경고했는데, 오히려 앤드류 본인이 그 점을 악용했다는 걸 알게 되자 둘 사이는 소원해진다. 이 일기에서 앤드류는 재능 없는 멍청이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파산한 인물임이 드러난다.


<트러스트>의 1, 2부는 솔직히 지루하다. 3부에 이르러 소설은 진실을 찾아 떠나는 탐정의 흥분을 불러일으키고 4부에서는 마침내 진실이 거짓을 몰아낸 '것 같은' 승리를 제공한다. 독자는 <트러스트>의 진실이 4부에 있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모두 사실을 구부려 현실을 창조하려는 사람들로 볼 수도 있다. 밀드레드 베벨이 맞다고 믿는 이유는 그것이 일기이기 때문인가? 이 이야기가 맨 마지막에 등장했기 때문인가? <트러스트>는 이 일기가 어떤 의도로 언제, 어떻게 적혔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밀드레드에 대한 진실은 오히려 <채권>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정신병을 앓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이 일기가 그녀의 환상이 아니라는 확신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결국 <트러스트> 또한 우리 세상에 속한 현실 작가 에르난 디아스의 텍스트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그는 <트러스트> 속 인물들처럼 이 이야기를 통해 뭔가를 '구부리려'한다. 그것이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리에 선 진실을 가리려는 건지, 이를 밝히는 건 모두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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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니르 2024-01-1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재미있게 쓰셔서 1페이지부터 주루룩 읽다가 갑자기 나름 반전을 알게 되었네요... 스포일러 주의가 필요한 리뷰 같습니다!

한깨짱 2024-01-21 09:01   좋아요 0 | URL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바젤탑 - 국제결제은행(BIS)의 역사, 금융으로 쌓은 바벨탑
아담 레보어 지음, 임수강 옮김 / 더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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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제은행 BIS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우선 지급결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거의 현금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실물 카드조차 구닥다리가 되어가는 실정. 사실상 돈은 디지털화된 신호를 따라 전자 장부에 적힐 뿐 물리적인 이동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은행 앱에 찍힌 내 월급의 지폐 더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매달 우리 회사의 금고에서 은행 금고로 현금이 이동되는 걸까? 어떤 존재의 의미를 확실하게 드러내려면 그것의 부재를 가정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지급결제 시스템이 없다면 바로 앞에서 언급한 현금의 이동이 매 순간 일어나야 한다. 카카오뱅크 앱에서 신한은행으로 5만 원을 보냈다? 그 순간 카뱅의 직원은 현금을 들고 신한은행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 돈을 받은 신한은행이 금고에 5만 원을 넣고 당신의 계좌에 적어 넣으면 비로소 이체 완료다.


이 방법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효율적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과거 은행들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자 혹은 양자 간 지급결제를 이용했는데, 이 말은 상호 간의 이체 거래는 일단 장부에만 적어놓고 실제 현금의 이동은 정기적으로 날을 맞춰 이동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퍽 효율적으로 보이는 이 방식도 참가자가 늘어나면 극도로 복잡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산과 결제를 담당하는 공동기관이 탄생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기관의 이름을 중앙은행이라 부른다.


모든 은행은 중앙은행(한국은행)에 당좌 계좌를 연 뒤 일정 금액을 예치한다. 대한민국에서는 하루에만 70조 원이 넘는 돈이 손을 바꾸는데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기만 하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주고받은 돈의 총합이 0이라면 현금은 이동할 필요가 없고 차액이 있다면 그만큼만 중앙은행의 금고에서 또 다른 금고로 이동하면 된다. BIS는 바로 이 기능을 국가 간 거래에서 제공하는 기관이다.


<바젤탑>은 BIS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국가 간 지급결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며, 그 핵심에서 발견할 기회는 무엇인지, 리플 같은 암호화폐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바젤탑>은 정확히 다른 방향을 지향한다. 이 책은 BIS의 기능보다 정치적 역할에 집중한다. 독일의 1차 세계대전 전쟁 배상금을 수취하여 다른 나라에 지급하기 위해 탄생한 이 은행은 이후 나치의 전쟁 경제를 운영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사람들은 각국의 중앙은행을 사악한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신성한 기관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중앙은행은 권력자의 의도나 이해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계 정부의 중앙은행이라 볼 수 있는 BIS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선술 했듯 BIS의 역사는 그 어떤 은행보다 정치적 똥투성이로 가득하다.


사실 중립이란 말만큼 허구적인 게 없다. 특정 목적을 달성하려는 집단의 노력을 '정치'라 정의한다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의 행위는 정치적이다. 은행이 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정치적 통제와 감시를 받는 것 또한 합당한 게 아닐까? 더욱이 단 한 번의 결정으로 수많은 지구인들이 직장을 잃거나 삶이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기관이라면 말이다.


취지에는 상당히 공감하는 바이나 이러한 얘기를 반복해서 지루하게 늘어놓는 게 <바젤탑>의 한계다. 그들의 선택과 존재가 실물 경제에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들을 어떻게 견제해야 하는지는 제시하지 않는다. BIS와 나치의 관계를 부각하여 사람들에게 이 비밀스러운 슈퍼파워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목적은 알겠으나, 그 내용을 400페이지나 반복하면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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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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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현우는 1990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서울로 이주했으나 사기를 맞아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좁은 마산 바닥을 돌아다니며 월세살이를 했다. 열아홉 살 무렵엔 어시장 근처의 신포동에서 살았는데, 술 취한 노인들이 소리를 지르고 노래방의 고성이 그대로 흘러나오는 어수선한 동네였다. 고양이들이 비린내 나는 바닥을 활보했다. 의거탑 앞에는 붉으죽죽한 홍등가가 자리했다.


서울에서 살다와 서울말을 쓴다는 것이 마산에서는 따돌림의 이유였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맞기도 많이 했다. 공부는커녕 사는 거 자체가 힘들었다. 아버지는 심각한 바람둥이라 두 번째 결혼마저 온전히 마치지 못했다. 천현우는 계모와 함께 여관에서 살았다. 그렇게 초등학교 2학년까지 마쳤는데 계모 심여사가 돌연 병에 걸려 아버지의 집으로 옮겨야 했다. 생부는 여전히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해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열 살짜리 아이는 어두운 밤을 늘 홀로 지새워야 했다. 어쩌다 집에 들어온 날엔 다른 여자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럴 때면 바닥에서 자야 했다.


영양실조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날 평생 처음 보는 생모가 자신이 기르겠다며 아이를 데려갔다. 그리고 학대가 시작됐다. 생모는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아들의 입에 효자손을 쑤셔 넣는 여자였다. 밥을 남기는 날엔 그 자리에서 밥그릇이 얼굴로 날아왔고 피시방을 가겠다고 하면 발로 배를 걷어찼다. 청소를 안 하는 날엔 피부가 검게 타 죽을 때까지 엉덩이와 종아리를 맞았다. 그 집엔 수상한 남녀가 함께 살았는데, 이모와 삼촌으로 부르던 그 둘은 어린 현우의 앞에서 성교하는 취미가 있었다.


견디지 못한 아이는 문득 생부가 자기 명의의 기초 생활 지원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죽지 않을 만큼 다친다면 아버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었다. 아이는 스스로 몸을 던져 발목이 으스러진다. 병원을 찾아온 아버지에게 천현우는 심여사의 이름만 불렀다. 그렇게 모자는 2년 만에 재회한다.


짐승과 정신병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기르는 사람과 산다는 건 행복이었다. 그러나 여관방을 전전하던 심여사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었겠는가. 전기와 수도는 끊기기 일쑤였고 가난은 찐득하게 달라붙은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이나 가려는데 심여사가 고졸만큼은 안 된다며 굳이 굳이 전문대 진학을 고집했다. 등록금도 없으면서 무슨 대학을. 150만 원을 빌리면 선이자 떼고 120만 원, 거기다 한 달에 십몇 퍼센트씩 이자가 붙는 사채가 심여사의 유일한 답이었다. 이자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예감한 천현우는 5년간 키운 게임 캐릭터와 아이템을 팔아 150만 원을 마련한다. 그곳에서 전기기술을 배워 산업요원으로 군복무를 마친 뒤 청년은 용접의 세계로 들어선다. <쇳밥일지>의 시작이었다.


 몇 년 간 이보다 더 빠져들어 읽은 책이 있는가 생각해 봤으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쇳밥일지>는 생생한 에세이를 넘어 소설 같은 서사를 전해준다. 1960년, 70년도 아닌 90년생이, 끔찍한 가정생활과 인권을 짓밟는 일자리를 뚫고 살아왔다니. 수도권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고, 수도권 회사에 입사해 주담대 금리를 걱정하는 삶이 사실은 얼마나 특혜를 누려온 것이었는지. 찬물을 끼얹듯 쏟아진 이 이야기들은 나 같은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각의 삶이었다. 요즘 젊은것들은 힘든 일을 싫어해 중소기업에는 안 간다는 얘기가 이 청년에게는 얼마나 찢어지는 상처가 될까.


사실 나는 이 책에 내 생각을 얹는 게, 이 책이 '재미있다'라고 하는 게, 당신들도 꼭 한 번 '읽어보라'라고 하는 게, 이 청년에게 실례가 될까 두렵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이 서커스 같은 인생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잔인한 구경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모든 이야기 위로 재밌다 내뱉는 말속엔 얼마나 섬뜩한 잔인이 깃들어있을까? 글을 잇기가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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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솔직하다
신세연 지음 / 우주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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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은 딸 하나를 둔 평범한 직장인이다. 돈도 빽도 없으나 공부는 괜찮게 해 명문대에 진학했고 부드럽게 대기업에 입사했다. 초일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상류라고는 봐줄 수 있는 삶. 하지만 형편이란 자기가 디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이라 최선은 자신의 인생이 답답하고 비루해 보였다.


주식은 허구한 날 꼬라박았고 월급은 그저 잠깐 스쳐가는 손님에 불과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정진하는 것이 답이거늘, 시간은 간당간당한 실에 달린 단두대 같아 초조의 불길과 욕망의 폭풍을 일으켜 인간의 마음을 까맣게 태워버린다.


그렇게 최선은 불법 토토에 빠져들었다.


5만 원권 돈다발을 한 아름 들고 온 친구의 모습에 최선을 할 말을 잃었다. 찌라서 개잡주에 들어가 상한가를 쳐도 하루 수익률은 30%에 그쳤지만 토토는 두 배, 세 배도 가능했다. 최선은 추천인에 친구의 아이디를 넣고 한 달 용돈 30만 원부터 차곡차곡 파멸의 이자를 적립해 나간다. 친구가 불러준 승패승패승승패는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토토. 단순한 운빨 도박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충'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팀의 전력을 분석하고 내부인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선수들의 SNS를 추적해 그들의 심리적 상태를 예측 변수로 추가한다.


사람들은 사기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뒤에나 보이는 거다. 욕망의 불을 켠 순간 눈은 멀어버린다. 용돈에서 시작한 토토에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넣었을 때 최선은 파멸의 우체부가 누르는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그는 돈과 직장을 잃고, 이혼하고, 아이를 빼앗긴다.


아, 그러나 인생이란 밑바닥이라 생각할 때 더 깊은 구덩이가 존재한다는 걸 가르쳐주는 잔인한 선생님이 아니었던가! 희망이 사라진 뇌는 인간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모 아니면 도. 어차피 더 망가질 게 없는 인생. 최선은 전업 토토충이 되어 패스트푸드로 아침을 때우는 건달이 된다. 그 삶은 온갖 악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린 무한한 추락의 땅이었다. 부패한 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선을 최후의 세계로 끌고 들어간다.


<피는 솔직하다>는 제목이 일품이다. 그런데 왜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메뉴에 찍힌 화려한 사진에 이끌려 주문했지만 맛은 그저 그랬던. 중반까지는 꽤 잘 굴러가던 기차는 마지막 30분을 남기고 심하게 덜컹거리다 아예 선로 중간에 멈춰 운행을 끝낸다. 승객은 이리저리 기워붙인 클리셰를 발판 삼아 정거장까지 걸어가야 하나, 그마저도 꼼꼼치 않아 여기저기서 파열음이 새어 나온다. 생각이 많은 밤을 날려줄 넷플릭스 B급 영화를 기대했지만 아쉬움만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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