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서 한국 기업을 깐다. 애플을 본 뒤로.
지금까지는 잘해 왔지만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니 어쩌니 이러쿵 저러쿵 쑥덕쑥덕. 누구나 다 알법한 이야기를 전자렌지에 3분간 넣고 돌린 뒤 꺼내오는 즉석 기사.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언론 기사의 얄팍함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런 정크 푸드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정보로써 받아들여지고 입 맛이 바뀐 대중들이 스스로 정크 푸드를 원하게 되는 악순환. 좀비가 되는 의식. 정크푸드가 일상이 된 사회는 현상의 이면을 파고드는 끈기가 부족하다. 그러니 근본적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매번 똑같은 지적만 되풀이 된다.  

'왜 한국에는 Apple이 없을까?'

나는 그 이유를 다음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이공계 천시 문화.
한국은 예로부터 '사농공상'을 따져 공과 상을 매우 천박하게 여겼다. 근자에 상업이 일고 이웃나라가 이로써 부국강병을 이루니 역시 세상은 돈이 최고라 '상사공농'이 되었다. 농사야 이제 흔적 조차 사라진 업이니 실상은 '상사공'이요 이 말은 공이야 말로 지고의 천한 일, 관심을 가져서도 손을 대서도 안되는 불가촉지위로 격하됐음을 알리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공계에 뜻을 두고 정진하던 청년들 마저 공돌이를 자칭하며 그 처지를 부끄럽게 여긴다. 이제 이들이 향하는 곳은 Meet, Deet, Leet, Peet로 원래 머리는 좋고 또 무식한 면이 있어 어렵지 않게 성공을 거두니 앞 다투어 공돌이의 인을 벗기고 노트북에 깔아둔 와우와
슷하크래프트를 uninstall 하여 고시촌으로 향한다.

그럼 공돌이로 졸업한 자들은 어떠한가? 남중, 남고, 공대, 군대의 로얄로드 12년을 가까스로 마치고 난 뒤 이제야 비로소 산업 역군이 되어 기술 혁신을 이루고 승천하려는 차에 금융권, 대기업 전산실 따위의 잡일에 마음을 뺏긴다. 엔지니어로 입사해 밤낮 죽도록 고생해봐야 상대적으로 낮은 연봉. 나보다 코딩도 못하고 창의력도 형편 없던 놈들이 좋고 편한 곳에 취업하여 베짱이처럼 띵까띵까 하니 그 상대적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제 세상은 이공계에 진학하려는 학생 자체가 급격히 줄어들었을뿐만 아니라 중도에 포기하는 자가 수십만이요 이공계로 졸업을 했다 하더라도 동일 직군에 투신하는 자는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이것이 한국에 Apple이 없는 첫 번째 이유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Idea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말인데. 이 사람들의 대부분이 Idea가 번개처럼 번쩍 하고 태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물론 가끔 그럴 때가 있긴 하다. 오줌을 싸거나 택시를 타거나 밥을 먹거나 직장 상사한테 혼나고 있거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리저리 등등등 할 때 번쩍하고 머리를 스치는 것들. 

이런걸 영감 혹은 직관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사실 이것은 탈근대가, 근대의 합리성과 이성주의를 비판하면서 창의성과 직관을 천재의 영역에 포섭. 스스로를 근대와 차별화하려는 음모인 것 같다.  

어쨌든 - 아... 어쨌든 이라는 단어에 감사하자 - 내 말은 아이디어, 창의력, 감성 등등이 오늘날에 이르러 지나치게 '신화화'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디어를 획득하는 것을 선천적, 생득적 문제로 치부해 포기해 버리거나, 우연과 영감만의 산물로 간주해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기 위해 길거리로 나가는거다. 하지만 과연 몇 명이나 동전을 주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Idea 발상에 대해 좀 더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 Idea는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재료는 무엇이고 레시피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난 그 재료가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들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들, 아주 평범한 것들, 우리 주변에 당연히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관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난 번 글에도 썼듯 거기서 차이를 찾아 내는 것. 그것이 창의력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광고를 보니 iPad가 사고 싶어졌다. 난 Kindle이 더 마음에 들었었는데 막상 저걸로 영화랑 게임을 할 생각 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사실 책 컨텐츠는 하나도 안 살거 같은데 저걸로 책을 사면 내 서재를 꾸밀 수가 없잖아.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서재에 책을 꼽을 때의 그 쾌감 아, 난 역시 서재 변태인듯. 책 값을 한 10%만 올리고 현물과 함께 Book Contents를 함께 준다면 한번 생각해 보지.  

미쿡에는 오늘 출시 했을 텐데, 과연 또 어떻게 시장을 바꿔줄지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애플이라는 회사를 가지고 난리다. 그들이 좋은 디자인을 할 때는 눈을 내리 깔고 마이너 취급을 하더니 돈을 잘 번다니까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이제 애플은 시멘트 회사 사장에서부터 국가 정당의 우두머리까지 알게 됐는데 이로써 밑에 사람들은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애플을 알고 난 뒤의 우두머리들은 2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본인을 스티브 잡스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고집 부리기를 미덕으로 여기며 사무실에는 독불장군의 신상을 모셔놓고 매일 아침 기도를 올린다. 상품 품평회나 연설을 할 기회가 오면 집요하게 밑에 사람들을 비판하고 행여나 토를 달거나 반항하는 사람들이 보이면 겉으로는 듣는 척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공명첩을 꺼내 그 행동을 각인해 둔다.  

이제 조직에는 침묵이 강림해 무거운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를 잡는데 우두머리는 이 침묵을 본인의 말이 맞다는 증거로 착각하게된다. 하지만 가끔 그 침묵에 자기도 답답해 '도대체 생각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왜 아무 말도 없나!'라며 역정을 내니 이로써 직원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햄릿이 된다.

둘째는 애플을 철저히 부인하는 부류다. 

이 사람들은 교만 부리기를 미덕으로 여기며 사무실에는 바벨의 신상을 모셔놓고 매일 아침 기도를 올린다. 애플과 비교하는 언론을 접하게 되면 분노로 온 몸을 활활 불태우고 행여나 애플을 칭찬하거나 추켜세우는 사람들을 만나면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공명첩을 꺼내 그 행동을 각인해 둔다.  

이제 조직에는 강렬한 적의가 강림해 또아리를 틀고 가지를 뻗치는데 직원들의 세뇌가 씨앗이 되어 올바른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세뇌가 완료되고 시간이 흘러 분노가 뇌를 태워버리면 '과수원' 얘기만 듣고도 게거품을 물고 발광하니 이로써 직원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지키는 좀비가 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결국 죽어나는 건 밑에 사람들 뿐이다. 우두머리들은 눈가리개를 하고 귀를 틀어 막은 채 쇠채찍을 손에 들고 말 위에 올라타 허공에의 질주를 준비한다. 한바탕 질주를 끝내고 난 뒤
'아무래도 소용 없는 일을 한 것 같군'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밑에 사람들 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경마장은 영원히 존재하고 경주는 결코 끝나지 않을텐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묻지 맙시다. 이것은 애플을 본 한국 사회의 비극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얼마전 TV에서 산에 사는 아이에 대해 본 적이 있다. 아이의 집은 시골 마을에서도 꽤 떨어진 산 기슭에 있었다. 아이는 고무신을 신었고 하얀 천에 직접 황토물을 들인 옷을 아래 위로 걸치고 다녔다. 주로 하는 일은 겨울산에 뿌리 내린 풀들을 맛보는 것이었고 나무 줄기를 따라 흐르는 수액의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았는데 학업 성적이 우수했고 상장이 수십장이었다. 특히 표현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평소 즐겨 보지 않는 TV를 끝까지 본 데는 아이답지 않은 기행이 눈길을 끈 탓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대목, '특히 표현력이 대단하다'라고 한데서 눈길이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의 표현력이 대단한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바로 자연이 뿜어내는 색, 향기, 맛, 소리들이 표현의 보고였다. 녹색을 12색 색연필 중에 하나로 알고 있는 나와 탱자 나뭇잎의 녹색, 겨우 살이의 녹색, 쑥풀의 녹색을 경험한 아이가 표현해내는 감수성은 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줄줄이 복사한듯 서 있는 가로수들도 곰곰히 살펴보면 저마다 개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써내려간 '가로수'라는 단어에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생생한 실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나의 언어는 개념이라는 상자에 담긴 기성품일 뿐이었다. 개념의 역할은 차이를 죽이는 것이고 '차이'의 부재는 곧 표현의 부재였다.  

똑같아 보이는 사물 속에서 '다름'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플라타너스가 뿜어내는 향기, 바싹 마른 껍질의 감촉, 떨어진 잎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무성한 가지가 발하는 푸른 잎빛을 앞으로도 결코 전달 할 수 없을 것이다.

몇 자 되지 않는 글을 쓰는데 이리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 죽어 있는 단어에 오랜 시간 볼터치를 하고 아이라인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화장을 한들 살아 있을 적의 생생함이 돌아오겠는가. 


가야할 길이, 더욱 멀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